가위질 운전
일자로 뚫린 고속도로입니다
이 정도는 껌입니다 단번에 초록 10cm로 점선을 따라 달려서
싹둑! 색종이를 반으로 나눠 버립니다
사각형도 쉽습니다 코너에서 꺾을 때만 주의하면
창문도 되고 편지도 되고 보물 상자도 되는 곳으로 돌아옵니다
이번에는 동그라미 코스입니다
커브를 돌 때는 천천히 모난 데 없이 돌면서
아이 볼처럼 부드럽게
운전을 해야 합니다
엄지와 검지 근육에 힘을 적당히 주는 기술과
눈빛이 중요합니다, ♡코스를 돌 때도
낙엽 코스나 구름 코스에서도 주의하셔야 해요
옆에서 방해하시면 안 됩니다
제일 어려운 코스는 사람 코스입니다
머리카락 선부터 콧등 선 손가락 사이사이
발가락 사이사이
고비고비 굽이굽이 잘 꺾어야 하고
선을 넘지 않아야 되고
속도를 줄여야 하는 곳이 참 많습니다
한 사람을 온전하게 완성하는 게 제일 힘든 일입니다
땀이 맺힙니다 손이 저립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천천히 가위를 몰아 도착하니
종이 속 그림 같았던 한 사람이 드디어 해방됩니다
가위가 입을 완전히 다뭅니다
이제 시동을 끕니다
별 그림
엄마가 별 그리는 법을 가르쳐 줄게
엄마가 다섯 개의 직선을
이리저리 오가며 만든 것은
불가사리였다
엄마 이건 불가사리야
사람들은 크리스마스트리 위에도 불가사리를 매달고
틀린 문제에도 불가사리를 그려 넣고
밤하늘을 그릴 때는 온통 불가사리만 붙어있는 바다를 그렸다
별은 이거야
나는 까만 밤하늘을 위에 흰 크레파스로 점 하나를 찍었다
이건 안 보이잖니?
엄마, 별은 원래 그래, 별도 잘 안 보이잖아
엄마에게 별을 가르쳐 주었다
씨
사람은 어른한테만 씨를 붙이는데
열매랑 꽃은 어릴 때만 씨를 붙여 줘요
이불을 덮어 주는 것처럼 흙을 덮어 주고는
그만 까먹어 버린
장미씨
봉숭아씨
수박씨
자두씨
이름 뒤에 씨를 붙이면
누가 겨드랑이를 간질이는 것처럼 간지러워서
꿈틀꿈틀 긴 몸부림 끝에
떡잎 두 장을 날개처럼 펴고는
나 여기 있다고
나 좀 보라고
아무도 봐 주지 않아도
조금씩
조금씩
자라고 있다고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어른이 되고 있다고
영남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2013 <서울신문> 신춘문예(시), 2015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동시), 2020 <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평론)으로 등단.
저서로는 <자막과 입을 맞추는 영혼>, <흰 글씨로 쓰는 것>, 동시집 <토마토 기준>,
<나는 법>, 청소년시집 <세상이 연해질 때까지 비가 왔으면 좋겠어>가 있다.
첫댓글 발상이 새롭네요.
멋진 동시 잘 보았습니다.
시를 잘 쓰는 분이라 그런지 동시도 참 맛깔나게 씁니다.
좋은 동시가 많이 가려 뽑는데 힘이 들었답니다.
역시 동시는 귀엽네요^^
귀엽지요^^
빙그레 미소가 지어지는 동시들입니다.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별그림 시를 보면서 내 문제가 뭔지 알 것만 같아요. 엄마에게 별을 가르쳐주는 아이. 뭉클하네요
김준현 시인 동시가 참 좋아요. 재미도 있고요. 그런데 가위질운전, 동시 맞나요? 표현 방식은 동시 같은데
내용은 다소 어렵다는 생각을 했어요.
요즘 동시 경향이 성인시풍이 더러 보이긴합니다.
김준현 시인은 성인시를 쓰는 분이라 더 그럴 수도 있겠어요.
그런데 저는 굉장히 인상적으로 읽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이들이 읽기엔 좀 어려울 수 있겠네요.
소재와 관점의 신선함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