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믹스커피와 나' (2019.5)를 다듬어서 다시 게시합니다. 이전 아이디가 영구소멸되어서 해당 아이디로 접속해서 수정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근 20년을 함께 한 아이디인데... 조만간 인터넷 아이디에 대한 글도 써보려 합니다.
원문보기 https://cafe.daum.net/AFFECTION/SmQh/195
나는 짜고 달고 맵고 신(쓴맛 제외), 여러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사람이다. 혀를 제대로 길들이지 못해서 말도 거칠고 미각도 거칠다. 건강 식단과는 일찌감치 거리를 두고 살아왔다.
어릴 때 워낙 부모님이 잘 먹여주셔서 그때 만들어진 강한 뼈를 우려먹으며 살았다. 허나 좋은 것들을 빼먹기만 하고 채워주질 않자 40대 초반부터 좋지 않은 신호들이 몸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성령님께서 건강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신호를 주신다 생각한 나는 다양한 운동을 하기 시작했고, 식습관을 고치기 위해 저녁금식과 함께 식단을 바꿨다.
그런데 여전히 바꾸기 힘든 것 하나가 믹스커피다. 지인들은 두 봉지씩 타서 마시는 나를 보고 놀란다. 원두커피를 마시게 된 지도 얼마되지 않는다. 40대 초반에서야 겨우 믹스커피를 끊어보려고 노력해서 원두커피를 마시게 됐지만 지금도 하루에 한번은 믹스 두 봉지를 넣어 걸죽하게 한잔 마셔야 원기가 회복되는 기분이다.
습관. 마음의 문제일까, 육체의 문제일까. 둘을 분리할 이유도 없지만 대개 습관은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세째시누도 나처럼 믹스커피 매니아인데 언젠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지금도 나는 이 향을 맡아야 심신이 안정이 되네. 내가 요만할 적에 여수로 시집을 안갔는가. 친구도 가족도 없이 남편 하나 믿고 그 먼데로 갔응게 마음이 얼마나 외로웠겄는가. 그때 믹스커피 한잔 타서 마시면 요것이 친구같고 위로가 되더라고. 남편하고 말다툼도 허고, 시댁에서 힘든 일이 있고 할 때도 울면서 요것을 한두잔 타서 마시면서 나 혼자 마음 달래고 그랬네.'
시누가 원두커피보다 믹스커피에 입맛이 들어버린 것은 아마도 경제 문화적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가장 싸고 쉽게 구할 수 있었던 믹스커피. 시누는 타향살이 시집살이에 믹스커피를 친구삼아 힐링했던 것이다.
나도 그랬다.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갑자기 남편 따라 전라도 전주로 이사를 갔다. 거기서 난생처음 이방인의 기분이 무엇인지 알았다. 주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됐다. 그리고 그 때 믹스커피가 외롭고 스산한 내 마음을 만져주는 친구가 됐다.
25년이나 지났지만 믹스커피 향과 맛은 어린 새댁 주검보의 친구라고 속삭인다. 칼로리, 카페인 수치 따위는 머리에서만 움직인다. 심리적으로 나를 한번 사로잡은 무엇은 마음에 안착된다. 거듭 받아들이고 의지하게 되면 뿌리를 내려 더는 쉽게 밀어내지 못한다.
술이나 담배, 특정 인물과 사상에 집착하고 의지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다. 위로, 신선한 발견, 강렬한 충격을 준 첫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 첫만남을 해부해서 성숙한 비평을 가하고 자신을 설득하는 내면적 작업을 하지 않는 한, 사람과 사상, 습관의 중독에서 헤어나기 어렵다.
커피를 마시면서 대문 앞에 나와 앉아있으면, "지비는 고향이 어디여? 말씨가 서울인디." 하던 동네 치킨집 사장 아줌마가 생각난다. 자신의 당뇨병 증상을 털어놓으며 어제 저녁에는 동네 누가 와서 화장실에 구토를 해놨네, 누가 술버릇이 더럽네, 누가 바람이 났네, 누가 싸워서 경찰서를 갔네 하는 얘기를 들려주곤 했다. 나는 그런 아줌마의 말을 열심히 들으면서 얼른 믹스커피 한잔을 내왔고, 아줌마는 홀짝홀짝 불어 마시며, 손짓 발짓 신나게 동네 돌아가는 얘기를 해주었다. 믹스커피는 외로웠던 내가 사람을 사귀고 관계를 맺는데 필요한 매개체였다.
원두커피 강세에 믹스커피는 미아리 다방 커피라는 조롱을 들으며 변두리 서민들의 문화로 밀려나고 있지만 믹스커피와 함께 자라나던 어린 새댁처럼 나는 아직도 믹스커피를 못 떼고 있다.
2019. 5. 22. 주의검을보내사
첫댓글 향수와 추억 어린 믹스커피를 끊으면 안되지라.
하루에 한 두 잔은 그냥 마시세요.
건강에 관해 경고를 쎄게 얻어맞아버린 저는 이제 조심해서 건강 챙기는 중입니다.
정말 정말 오랜만에 왔는데 마침 재업하신 글이 전에 제가 읽었던 글이네요. 다시 읽어도 재밌어요. 어떤 것에 중독된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구요.
믹스커피가 건강에 해롭지않다는 반대정보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