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미학의 시학적 변용
- 언불진의言不盡意 입상진의立象盡意 -
문학은 쉬워야 한다?
시나 수필을 쉽게 써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나?
에이브럼즈의 거울과 등불
권대근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I. 로그인
우선 문학이 되어야 한다. 경수필이니 중수필이니 하는 구분이나, 참여니 순수니 하는 변별은 그 다음의 문제다. 동시에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이므로 좋고 싫음의 판단이 있을 뿐 우열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시인이 시학을 무시하고 목청만 잔뜩 높이게 되면 그것은 한때 대학가에 요란스레 나붙었던 대자보나 근엄한 목회자의 설교와 다를 바 없다. 웅변이나 설교를 시의 형식을 빌어 듣고 싶은 독자는 없을 것이다. 시는 결코 관념의 퇴적장이어서는 안 된다. 또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몽환적 어휘의 나열이나 이미지의 배합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그것은 혹세무민의 연금술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옛말에 시는 소리 있는 그림이요, 그림은 소리 없는 시라 하였다. 수필시학을 <한시미학>에서 가져와보는 것은 어떨까? 특히 한시는 경물의 묘사를 통한 정의의 포착을 중시하는데, 이는 마치 화가가 화폭 위에 경물을 그리면서 그 속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표현하는 것과 같다. 경물을 통해 ‘뜻을 묘사하고 정신을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시도 수필도 마찬가지다. 시는 객관적 상관물로, 수필은 제재를 통해 주제를 말하는 법이다. 그 구체적 방법은 입상진의이니, 상세한 설명 대신 형상을 세워 이를 통해 뜻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림과 시의 관계를 통해 시창작의 과제, 어제의 시가 아닌 오늘의 시를 창작하는 방법, 시학을 찾아보자.
II. 클릭
이근배는 수필은 시의 대지라 하였고, 이길원은 수필도 시를 쓰듯 써야 한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서정의 기법으로 쉽게 쓰고, 화룡점정의 시학으로 이끌어야 한다.
■ 송나라 휘종황제 –화제
‘어지러운 산, 옛 절을 감추었네‘
■ 유성의 <형설총설>
‘꽃 밟으며 돌아가니 말발굽에 향내나네’
■ 진선의 <문슬신어>
‘여린 초록 가지 끝에 붉은 한 점, 셀레이는 봄빛은 많다고 좋은 것 아닐세.’
■ 등춘의 <화계>
‘들 물엔 건너는 사람이 없어, 외로운 배 하루 종일 가로 걸렸네.’
■ 고종의 <허소치>
‘춘화도 한 장“
이상 살펴본 여러 예화는 모두 같은 원리를 전달한다. 즉 그리려는 대상을 직접 보여주는 대신, 물 길러 나온 중, 말을 쫓아가는 나비, 난간에 기댄 소녀, 피리 부는 뱃사공, 남녀의 신발 한 켤레로 대신 전달하고 있다. 문학의 원리는 바로 ‘이것’을 ‘저것’으로 치환하는 데 있다. 문학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창조가 아니라 ‘이것’에서 ‘저것’을 만들어내는 생성이다. 이때 시인이 표층 즉 이것에서 묘사하고 있는 외물은 시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의 표피에 불과하다. 그 안에는 깊고 유원한 사변의 세계가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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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던 개미는 구멍찾기 어렵겠고
돌아오던 새는 둥지 찾기 쉽겟구나
복도에 가득해도 스님네는 싫어 않고
하나로도 속객은 많다고 싫어하네
작가의 정신<인식, 거울과 등불, 앙가쥬망과 네오필리아>이 들어가 있지 않는 어떤 그림도 이발소 그림, 목욕탕 벽화, 룸살롱 액자에 지나지 않는다. 사진과 똑 같이 그려진 영화관의 간판은 결코 우리를 감동시키지 못한다. 가끔 그 기교가 우리를 감탄케 할 뿐이다. 시나 수필에서는 ‘저항성’에 ‘고백성’이 더해지면, 금상첨화다. 시너지효과가 생겨난다. 모순 속에 내재한 삶의 진실을 찾아 이제 공광규 시인의 시로 떠나보자.
폭설/ 공광규
술집과 노래방을 거친/ 늦은 귀가길
나는 불경하게도/ 이웃집 여자가 보고 싶다
그래도 이런 나를/ 하나님은 사랑하시는지
내 발자국을 따라오시며/ 자꾸 자꾸 폭설로 지워주신다
아내/ 공광규
아내를 들어올리는데/ 마른 풀단처럼 가볍다
수컷인 내가/ 여기저기 사냥터로 끌고 다녔고
새끼 두 마리가 몸을 찢고 나와/ 꿰맨 적이 있다
먹이를 구하다가 지치고 병든/ 컹컹 우는 암사자를 업고/ 병원으로 뛰는데
누가 속을 파먹었는지/ 헌 가죽부대처럼 가볍다
얼굴반찬/ 공광규
옛날 밥상머리에는/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잇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잇었다
어떤 대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잇기조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 밭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반찬이 가즉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과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 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별국/ 공광규
밥상머리에 얼굴반찬이 없으니/ 안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가난한 어머니는 / 항상 멀덕국을 끓이셨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 손님처럼 마루에 앉히시고
흰 사기그릇이 앉아있는 밥상을 / 조심조심 받들고 부엌에서 나오셨다
국물 속에 떠 있던 별들 / 어떤 때는 숟가락에 달이 건져 올라와 / 배가 불렀다
숟가락과 별이 부딪히는 / 맑은 국그릇 소리가 가슴을 울렸는지 / 어머니의 눈에서
별빛 사리가 쏟아졌다
시인의 집 /이용철
풍성하던 털 빠져나간 곳/ 다친 달팽이가 들어왔다.
독수리 매 잠자리/ 개구리 두더지 애벌레/ 눈이 되었다.
탱자나무 가시가 찔렀던/ 가슴에 죽은 사람 돌아온 듯/ 찔레꽃이 피었다.
그물거리는 허름한 내장/ 램프 불이 켜졌다.
아무렇게 버려진 발바닥/ 굳은살에 사막의 별 밝았다.
마침내 언어가 타버렸고/ 시는 사리로 남았다.
예술적 표현에서 입상을 포기할 수는 없다. 직설적 언어의 나열보다 전달면에서 더욱 훌륭한 효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는 결코 독해할 수 없는 상형문자이거나 암호문일 수는 없다.
노자 ->상용
‘고향을 지나거든 수레를 내리거라.’
‘높은 나무 아래를 지나거든 종종걸음으로 거거라.’
‘내 혀가 있느냐?’ ‘없습니다.’ ‘내 이가 있느냐?’ ‘없습니다.’
‘알겠느냐?’
III. 로그아웃
문학언어란 본시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다의적이고 다층적이다. 시나 수필이나 자아와 세계와의 동일성을 추구한다. 그래서 ‘세계의 자아화’, ‘내면화’란 말을 쓴다. 외부세계의 충격에 대한 유기체의 반응이 인간의 존재 양식이라고 할 때, 시인이나 수필가는 그 세계를 능동적으로 변용시키면서 극히 주관적으로 만난다. 문학은 굳이 억지로 어떻게든 전달하려고 할 것은 아니다. 큰 가르침은 사람마다 일깨워 가르칠 수 없다. 본래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알아듣고, 모를 사람에게는 아무리 친절하게 설명해준댔자 더 혼란스럽기만 할 것이다.
시에서 입상진의를 귀히 여기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막상 시인이 말하고자 한 것을 일상의 언어로 풀어놓고 보면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몇 줄의 교훈이거나, 아니면 무어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미묘하고 추상적인 느낌의 단편뿐이다. 마치 멀리서 본 산이 아름답지만 막상 올라서서 보면 바윗돌 몇 개, 나무 몇 그루뿐인 것과 같다. 그렇다고 멀리서 바라보는 산의 아름다움을 거짓이라고 거부할 일은 아니다. 어부사시사에서 “강촌의 온갖 꽃이 먼빛치 더욱 됴타.”고 노래할 줄 알았던 고산 윤선도는 시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았던 사람이다. 소월이 말한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도 그 뜻이다. 양파의 껍질은 아무리 벗겨도 알맹이가 나오지 않는다. 시를 낱낱이 해부하여 찢어발기고 나면, 남는 것은 언어의 시체뿐이다. 멀리서 바라보이던 은은하고 아름다운 산의 모습은 간곳없게 된다.
‘티끌세상’ ‘모습놀이’ 끝내고 천상으로 복귀할 때까지, 뱃속의 먹물이 다 마르도록 시인은 ‘보이지 않는다’의 눈으로 다만 깨어 노래해야 하리라. 소설은 쇼설이다. 수필은 수박이다. 그렇다면 시는 씨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