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것을 그리워하는 이유
이광조
‘신호 과속 단속’이라는 단속 장치가 길거리마다 즐비하다. 자동차가 대중화되면서 생겨난 질서 유지 방식이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 공중에 버젓이 걸려 있는 셈이다. 사소한 실수나 오차도 없이 위반자를 가려내는 탁월한 성능을 자랑하지만, 차가운 쇳덩어리가 주는 냉정함은 옛것에 대한 그리움을 한층 더 깊게 한다.
교통질서 얘기가 나오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교통법규 위반 스티커다. 규정 속도를 초과하거나 신호를 위반하면 이를 발견한 경찰이 운전자에게 범칙금을 부과하던 방식이다. 마음이 급하다 보니 황색신호를 보고 그대로 밟았는데 통과하다 보면 적색 신호로 바뀐다. 그렇거나 말거나 무사히 건넜다고 안도하는 순간, 먹이를 포착한 맹수처럼 경찰이 다가와 ”신호 위반입니다. 면허증 좀 봅시다.“로 시작하여 스티커를 발부하곤 했다.
88올림픽 준비로 부산하던 해, 같은 교무실에서 근무하던 소피 마르소를 닮은 여선생이 처음 차를 사서 몰고 다녔다. 아직 “초보운전” 표시를 떼지 못하고 지내던 그녀가 어느 날 앞만 보고 가다 보니 미처 신호 바뀐 걸 보지 못했고 경찰이 다가오더란다. 문을 내리고 면허증을 제시하라고 하는데 너무 무서워 덜덜 떨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났던 모양이다. 눈물을 닦으면서 핸드백을 더듬어 면허증을 찾는데 우는 것을 알아차린 경찰이 “왜 우세요? ”라고 놀라면서 물었고, 그 소리에 더 무서워서 자신도 모르게 흐느끼자, 당황한 경찰이 “아이고, 울지 마세요. 괜찮아요. 면허증 필요 없으니 진정하세요.”라고 하더니, 다시 달래더란다. “이런 상태로 바로 가다 보면 사고 날 수 있으니 여기 좀 있다가 가세요. 울지 마시고요.”라고 하고는 허둥지둥 달아나더라고 이야기를 맺었다. 듣던 좌중이 폭소를 터뜨리며, 울어서 몇만 원 건졌다고 농담하는데, 나이가 지긋한 한 선생이 나섰다.
“학생들 앞에서는 하늘 같은 선생이, 몇 살 먹지도 않은 전경 애들 앞에서 눈물이나 짜고. 쯧쯧 채신 있게 좀 놀아.!“라고 나무라자, 소피 마르소 왈,
“경찰 하고 일대일로 맞닥뜨린 게 난생처음이라서 그런지, 부들부들 떨리면서 눈물부터 나는 걸 어떡해요.”라고 맞받았다.
그러자 그 선생은 선배 운전자답게 한 수 가르쳐 줬다. 평소 면허증과 같이 5천 원짜리 한 장을 접어 넣고 다니다가 경찰이 면허증을 보자고 하면 면허증 밑에다 그 5천 원짜리를 접어서 은근한 미소를 보이며 건네주라는 것이었다.
그 일이 있은 지 달포쯤 지난 뒤에 다시 난롯가에 둘러앉았는데, 소피 마르소 선생이 한 수 지도해준 선생 앞에서 말문을 열었다.
”선생님, 전에 가르쳐 주신 수법 써먹어 봤어요.“
”잘 받지? 그냥 보내주지? “라고 반색을 하며 그가 묻자.
”또 망신당했어요. 뭐라는지 아세요?“
시킨 대로 면허증 밑에다 5천 원짜리를 접어서 건네자,
“아이구,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이런 것도 알아요? 하하하, 세상 참 재미있네. 라고 하더니 실실 웃으면서 놀리던데요.”
미인과 대화를 나눈 대가였는지, 하여튼 그 경찰관은 조심하라고 경고만 하고 그냥 보내주었다고 한다.
K 선생은 고령과 대구 사이를 출퇴근하는 장거리 통근자였는데, 퇴근 시간이면 의례 나와 동료들을 태워주곤 했다. 퇴근 시간은 항상 마음이 급했고 과속하다 경찰과 맞닥뜨리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단속받은 횟수가 잦다 보니 저절로 안면이 생길 만도 했다. 어느 날 스피드 건에 찍혀서 차를 멈추고 보니 아는 경찰이었다. 차에서 내린 다음 뒤쪽으로 가서 지갑을 뒤지니 만 원짜리밖에 없었다. 당시 표준 요금이 5천 원인데, 그냥 스티커를 받자니 너무 과하고 만원을 다 건네주자니 너무 아깝더라고.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면허증과 함께 세종대왕을 내민 다음 한 마디 덧붙였다.
”다음에 한 번 더 있데이. 알제?“
경찰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면서,
“알았어. 한 번 더.”
교사 L은 유들유들하고 배짱 하나는 알아주는 사람이다. 크고 당당한 체구에 얼굴도 커서 한번 슬쩍 건너다보면 아이들이 꼼짝 못 하는 위엄이 있었다. 거친 학부모가 교무실에 찾아와 고성을 지르거나, 학교 주변 주민이 주차 시비를 할 때면 천천히 다가서서 음성을 깔면서 표정으로 제압해서 돌려보낸 일도 몇 번 있었다.
어느 날 교통법규 위반 딱지 받은 이야기가 나와서 왁자지껄 저마다 경험담을 늘어놓는데, 조용히 듣고 있던 그가 자기 얘기를 끄집어냈다. 본인이 운전하고 부인과 초등학생 아들, 그리고 제수씨를 태우고 가다 신호 위반으로 잡혔다고 한다. 어린 아들과 제수씨가 보는 앞에서 새파란 의경에게 사정하기도 싫고, 그렇다고 찍소리 못하고 스티커를 발부받는 것도 마뜩잖았다. 경찰의 만류를 뿌리치고 차에서 내려 문을 닫은 다음 경찰관에게 바짝 붙어 서서 나직한 목소리로 사정했단다.
“아이고, 아제 수고가 많네. 내가 평소 같으면 담뱃값이라도 건네는데, 오늘은 어린 아들하고 제수씨가 내다보고 있어서 그것도 곤란하니, 아제가 통 크게 한번 봐주면 좋겠는데. 사나이 대 사나이로 부탁 한번 하자. 입장 바꿔 놓고 한 번 생각해 봐. 아들 보는 데서 애비가 스티커나 받으면 내 체면이 우에 되겠노. 안 그래?”
경찰이 잠시 생각하더니, 알았으니 그냥 가라고 하더란다. 그 말을 들으니 다시 욕심이 나더라고. “보래, 아제, 기왕 봐주는 거 아들놈 보는 데서 애비 각오 빨 한 번 세워 주면 안 되겠나? 내가 출발할 때 폼나게 경례 붙이면서 인사 한번 해달라는 말이지.”
경찰이 어이가 없어서 빤히 쳐다보더니,
“봐달라는 사람은 많이 봤지만, 아저씨같이 희한한 사람은 없어요. 이 양반 진짜 웃기시네.”
“아제도 나중에 아 낳아서 키워보면 내 맘 알게 될끼다.”
라고 하면서 눈을 찡긋하자,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경찰이 등을 슬쩍 밀며 차에 태우더라고.
그렇게 수작을 벌인 다음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운전석 창문을 내리면서 경찰을 향해 윙크했더니, 도량 넓은 그 아제가 “충성!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목청껏 소리를 질렀고, L은 느긋하게 여유를 보이며, “어이, 수고!”라고 한 손을 들어 저으면서 유유히 떠났다고 한다.
듣던 좌중마저 어이가 없어 하며 누군가 물었다. “차 안에 있던 가족들이 궁금해하지 않던가요?”
“당연히 궁금해하지. 아들놈이 아빠가 뭐라고 해서 경찰이 벌금도 안 매기고 저렇게 경례까지 하느냐고 묻더라고. 그래서 앞으로 내가 누군지 몰라보고 이렇게 함부로 차를 세우면 그냥 두지 않겠다고 혼을 냈지.라고 하니 애가 존경스럽게 쳐다보던데. 하하하.”
딱지 한 장 받으면 몇 시간 기분 나쁘고 경찰이 미웠다. 경험이 쌓이면서 생긴 요령이 그걸 받으면 바로 은행으로 달려가 처리하고는 최대한 빨리 머리에서 지우려고 애를 썼다. 그때는 야속했던 단속 경찰이 푸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기계가 찍은 숫자 앞에서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지갑을 털려야 하는 삭막한 오늘의 세태가 사람 냄새 물씬 풍기던 옛날 경찰의 인정을 새삼 고마워하게 한다. 지나간 것은 그리워한다는 시구가 진실임을 또 한 번 확인하는 일이다. (2024. 2. 26. 19.1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