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마을과 맥주축제 [성전회]-3
남해 2박3일 여행
일자: 2014년 10월 3~5(금~일)
숙소: 남송마리나피싱리조트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 5-1)
참가자(7명): 김우용 부부, 홍승표
어부인, 채희묵 부부, 친구 부부
^^^^^^^^^^^^^^^^^^
제3일
06:00 조깅
08:00~09:00 아침 식사
09:50~10:40 독일마을
18:30 집에 도착
^^^^^^^^^^^^^^^^^^^^
어제 밤에 독일마을 도이처플라츠(독일광장)에서 벌어진 맥주축제에 가서 독일 맥주도 서서 조금 마셔 분위기에 젖어보았다. 독일 뮌헨에서매년 열리는 옥토버페스트를 벤치마킹한 축제로 올해로 5회째란다.
이는 2001년 삼동면 물건리와 동천리, 봉화리 일대 10만㎡ 터에 조성된 독일마을로 인해 5년 전에 생겨난 것이다.
오늘은 훤한 대낮에 보기 위해 잠깐 휙 둘러보고 서울로 오를 계획이다. 그래서 아침은 콘도 1층 식당에서 먹기로 되어 있다.
눈을 뜨니 6시다. 동녘하늘이 붉은기가 올라오고 있다. 어제 밤만 해도 북쪽 해변으로 가 해맞이를 할까 생각했지만 일찍 서두를 것 같아 물건항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보기로 했다. 러닝팬티와 샤츠만 입고 나갔다.
물건리포구에 들어서 있는 남해군 요트학교. 해상레저 붐을 타고 많은 사람들이 여름에 찾아온다고 한다.
천혜의 항아리 모양 포구
항아리 모양의 포구를 따라 갔더니 크고 작은 배들이 구역을 나눠 정박해 있고 요트학교가 있다. 배워 탈 수 있다는 뜻이다. 남쪽 항아리 끝에 이르니 더 이상 절벽이라 산속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다. 다시 나와 마을로 올라갔다. 도로를 따라 가다 해안가 산속으로 들어가볼 요량이었다.
은점 마을과 바래길
동네 아저씨에 물으니 산에 길이 있는지 없는지 고개를 갸우뚱 한다. 그래서 좀 더 도로를 따라갔다. 은점마을 표지석이 크게 있다. 동네로 들어가 물어보니 산속에 길이 있다고 한다. 포구 입구로 들어섰더니 ‘남해바래길‘이라는 색바랜 리본이 나뭇가지에 걸려있다. 난간도 있고 돌게단도 있지만 사람의 발길이 뜸해 풀이 정강이에 걸리고 얼굴에는 거미줄이 걸린다.
모퉁이를 돌아 동안쪽으로 돌아서니 조망지점이 있는데 해가 구름위로 올라온다. 그러면서 머지막 전망대크가 나오고 끝이다. 해변으로 이어지니 않으니까 바래길 탐방객들에게 인기가 없을 것이고 발길이 적은 것이다. 할 수 없이 돌아나오기 싫은 길로 뒤돌아섰다.
앞에 보이는 게 수우도, 그 뒤에는 사량도... 오른쪽은 마안도
지리망산이 있는 사량도
바래길 마지막 전망데크
바래길에서 되돌아나와
포구로 내려오니 부두 끝에 사람들이 몇이 있다. 다가오는 노인들에게 물어보니 절벽 아래 텐트를 쳤는데 돌이 떨어질 위험이 있어 걷으라고 일러준 거란다. 요즈음 텐트치는게 유행이다 보니 절벽아래다 친 모양이다.
그 할머니 보고 은점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이곳에서 캐낸 은을 거래하던 가게가 있었다 하여 마을이름을 '은점(銀店)'이라 했다. 한번 왔던 피서객들이 그 이듬해 또 온다며 물건리보다 더 좋다고 자랑을 하신다.
은점마을
느티나무에서 자고 있는 고양이
양다래가 주렁주렁
무슨 물건이 많길레 마을 이름이 물건리?
물건리는 동네 이름으로는 생소하다. 삼동리 면사무소에 따르면 물건리(勿巾里) 본 마을은 마을 생김새가 선비들이 바둑을 두며 놀고 있는 형태이기 때문에 여자가 수건을 쓸 수 없다 해서 물건이라 부른다는 말도 있고 마을 뒷산 모양이 만물 "勿"자 형이며 건(巾)은 산을 크게 보면 병풍처럼 둘러싸인 가운데를 내(川)가 흐르고 있어 그 모양이 수건 "巾"자라하여 물건(勿巾)이라 칭하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좀 어설프다.
다시 동네를 나와 오는 길에 해안의 두 산 고개로 난 길이 있어 올라가 보았다. 밭도 있는데 넘어서 정작 해변으로 난 길은 없어 보인다. 부대가 들어서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얀 건물이 우리가묵은 7층짜리 콘도
물건방조어부림(勿巾防潮魚付林)
다시 산에서 돌아내려와 물건리 포구 방조림으로 들어섰다. 방조림 가운데 데크를 놓아 여름에 그늘 속에서 시원하게 걷게 돼 있다.
이 숲은 천연기념물 제150호인 물건방조어부림(勿巾防潮魚付林)이다. 물고기가 살기에 알맞은 환경을 만들어 물고기 떼를 유인하는 어부림의 구실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숲에는 높이 10∼15m인 팽나무·푸조나무·참느릅나무·말채나무·상수리나무·느티나무·이팝나무·무환자나무 등의 키큰 낙엽활엽수와 상록수인 후박나무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 밖에 소태나무, 때죽나무, 가마귀베개, 구지뽕나무, 모감주나무, 생강나무, 검양옻나무, 초피나무, 윤노리나무, 갈매나무, 쥐똥나무, 붉나무, 누리장나무, 보리수나무, 예덕나무, 병꽃나무, 두릅나무, 화살나무 등의 키작은 낙엽활엽수, 청미래덩굴, 배풍등, 청가시덩굴, 댕댕이덩굴, 멀꿀, 복분자딸기, 계요등, 노박덩굴, 개머루, 송악, 마삭줄 등의 덩굴식물류가 자라고 있다. 무려 170여종이란다.
수령이 300여년에 달하는 10,000여수의 수림이 1.5km를 넘는 해안을 감싸듯 반월형을 그려 대경관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이 나무들은 1,600여년경 본 마을 주민이 해안일대의 방풍방조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나무를 심고 철저한 보호단속 관리하에 있다고 한다. 물고기가 살기에 알맞은 환경을 만들어 물고기 떼를 유인하는 어부림의 구실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축조된 콘크리트 방조제로 인해 물건방조어부림의 역할이 이제는 박제된 숲이 되었으나 힐링의 숲으로 다시 살아나 전국의 탐방객들을 불러모으고 있다고 한다. 시대와 세월 따라 그렇게 역할이 바뀐다. 나 스스로도 그렇게 변신을 해야만 사는 보람을 찾을 수 있을 것 아닌가 한다.
방조어부림 가운데로 만들어놓은 산책 나무데크
효진 아빠가 카메라를 들고 포구를 한바퀴 돌고 역시 방조림 산책데크를 따라 지나온다.
우리는 8시가 다 되어 식당으로 모여 식사를 했다. 북어국이 시원해서 좋다. 그릇이 커 양이 적은 듯 한데다 배가 고픈 참이라 더더욱 적어보인다.
우리는 체크아웃을 하고 독일 마을로 차를 몰았다.
포구의 방조어부림 시작점
왼쪽에 물건방조어부림(勿巾防潮魚付林)
독일마을 지붕이 콘도가 서 있는 곳까지 물들여 놓아
2005년 3월19일 개관했다는 삼송리조트 표지석. 살구나무가 해안으로 내려가는 길 양쪽으로 서 있어
시 쓰는 것을 좋아하는지 콘도 주인이자 회장인 이기평씨 시가 콘도 내 벽 곳곳에 액자에 걸려있다.
독일 마을로
독일 마을은 '60~'70년대의 어려운 시기에 조국 근대화를 위해 독일로 광부, 간호사로 파견되어 경제발전에 헌신한 독일 거주 교포들을 위해 고국으로 돌아와 정착해 살면서 조국의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도록 2000년부터 2006년까지 7년에 걸쳐 남해군이 조성한 마을이다.
지난 6월 28일 독일광장 한 귀퉁이에 파독전시관을 열어 관련 광부, 간호사들의 젊은 날 독일생활을 보여주는 물건들을 비치하여 현지 생활상을 볼 수 있게 해 놓음으로써 하드웨어에 이은 소프트웨어가지 갖추게 되었다.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와 봉화리 일대 약 90,000여평방미터의부지에 걸쳐 조성되어 있는 독일 마을은 독일교포들이 분양받은 대지에 직접 독일에서 건축자재를 가져와 전통적인 독일양식의 주택으로 건립한 것이란다.
이 주택들은 독일 교포들의 안락한 노후생활을 위한 주거지이지만 독일문화를 체험하고자 하는 관광객을 위한 민박으로 운영되기도 한다.
독일마을 창시자인 정동양씨 집으로
우리는 꽤 눈에 띄는 집으로 들어가 보았다. 마침 독일마을 창시자인 정동양('49) 충주 한국교원대학원대학 명예교수의 집이다. 그는 자연스럽게 우리를 보더니 이 마을 창설 동기와 주택시공기술을 설명해 주었다. 맥주페스티벌 기간 중 11시부터 1시간마다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해설해주고있는데 좀 일찍 간 우리에게도 친절하게 해 주는 것이다.
독일에서 건설공부를 했는데 독일의 잘 사는 모습을 보고 귀국해 건설쪽에 기여를 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지금 이곳에 있는 주황색의 뾰족한 기와지붕이 독일의 전형적인 시골마을 풍경과 비슷하단다.
독일 냄새가 흠뻑 나는 1층 사무실, 전시실 등 다용도실
정동양씨
설명을 열심히 듣고있는 성전회 회원들
비운의 덕혜옹주(德惠翁主)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년 5월 25일 ~ 1989년 4월 21일)는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과 귀인 양씨의 황녀이다. 덕혜라는 호를 하사받기 전까지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고, 1962년에 ‘이덕혜’로 대한민국의 국적을 취득하였다.
일제강점기 조선 경성부 덕수궁에서 태어나 경성일출심상소학교에 재학중에 일본의 요구에 따라 유학을 명분으로 도쿄로 보내져 여자학습원에서 수학하였다. 1931년에 당시에 일본 정권에 반항적이던 공주를 배우자가 일본 황족과 조선귀족 중에서 선택될 것이라는 혼약설이 있었지만 1930년 10월에 소 다케유키(宗武志)와의 결혼이 결정되었다.
소 다케유키는 옛 쓰시마 번주 소 요시아키라(宗義達)의 양자로 들어가 백작의 지위를 계승한 화족으로 혼인이 결정될 무렵 도쿄 제국대학 영문과 3학년에 재학중이었으나 강제로 정략 결혼을 하여 1932년에 딸 소 마사에를 낳았다. 1930년에 정신분열증 증세를 처음 보였으며 결혼 이후 병세가 악화되었다. 1946년부터 마쓰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였고, 1955년에 이혼하였다. 1989년 4월21일 창덕궁에서 별세했다.
대마도로 잡혀간 덕혜옹주의 초상화에 대해 설명해주는 정씨. 슬픈 기운이 감도는 이 그림은 김용진 화백이 전시하는 인물화 중 하나.
자동차 운전하는 모습
그는 이 집의 밖에 있는 뜰의 모형을 설명해 준다. 운전하는 분들은 잘 이해가 될 거라며, 주목 나무 두 그루가 심어져 있다. 이게 승용차 바퀴 둘을 의미한단다. 그리고 눈, 머리, 팔 등 운전대 옆에서 보면 자동차 운전하는 모습이란다.
나선으로 시야를 따라가 보면 까만데로 이르게 된단다. 우주여행에서 이게 블랙홀로 꽃들은 수많은 별들을 의미하며 이쪽으로 빨려들어가는 형국이란다. 그리고 입구에 있는 큰 바위는 건강 장수를 의미하는 거북이 앉아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복바위
그러면서 그는 이 집을 짓게 된 에피소드를 얘기해준다. 그는 꿈에서 어릴 때 소먹이며 본 뱀들과 마주쳤다는것이다. 구렁이, 능구렁이, 독사 등 온갖 뱀들이 가득 있는데 자신이 그 가운데 있어 물려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래서 이 바위에 뛰어 올랐는데 구들장이 하나 있어 무심코 들어보니 작은 구멍이 하나 보이더란다. 구멍이 보이는 순간 뱀들이 블랙홀처럼 다 빨려들어가기에 딱 덮어버리고 났더니 한 마리도 없어 물려죽지 않았단다. 그러면서 꿈에서 개어난 것이다.
그런 꿈을 꾸고 그 다음 날 독일에서 왔는데 이 집을 짓기 위해 돈이 필요한 참이었다는 것이다. 공항에 내리자 마자 안사람에게 전화를 했더니 1년여 동안 내놓았던 청주에 있는 땅이 내내 누구 하나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는데 바로 어제 팔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바위가 문제를 해결해주고 복을 주는 복바위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단다.
그런 얘기해 해주었더니 어떤 할머니들은 이 바위에 머리를 대고 기도하기도 한단다. 그런데 오가는 풍수가들이 이 마을에서 이 집이 풍수지리적으로 가장 좋은 자리에 들어서 있다고들 하더란다. 한 사람은 “말의 기가 바다로 내려가다 돌에 맺혔고 바다에서 올라오는 기가 또한 여기 이 돌에 맺혔다”고 하더란다. 그래서 역시 복바위.
거북모양의 복바위에서 한 컷. 어부인들 복많이 받으세요
복바위 정면에서 다시 한 컷
주인 아주머니와 딸... 정씨는 27세 때 독일에서 21살의 간호사를 강제로 낚아챘다고... 어느 누구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명당자리
독일마을 원조 정씨는 이 집을 짓는데 흙을 덤프트럭 120대나 실어와 바위 벽을 쌓고 마당을 만들었다고 토로한다. 그는 “노력해야지요”라며 이 집을 8년 째 짓고 있는 중이고 지붕은 3년을 지었다고 애기해 준다.
층간소음 없애는 시공
그는 층간소음으로 아파트 위아래집이 종종 싸우는 기사가 난다며 층간 소음을 줄이기 위해 그는 지붕 슬라브를 조금 두툼하게 했으며 바닥은 땅과 골조에 닿으면 안된단다. 그리고 그 사이 스트로폼을 넣어 층간 소음을 없애줄뿐 아니라 단열을 해준다고 설명한다.
지붕의 급경사
지붕 경사에 대해서는 경사가 급하고 높으면 기와가 당연히 밀려내려오게 된단다. 그래서 지붕 경사가 높은 독일에서는 못을 써 기와걸이를 만들어 안 미끄러지게 고정시켜놓기 때문이란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에서는 목조건물에 못을 쓰지 않고 여름 빼면 비가 많이 내리지 않기 때문에 경사가 가파를 이유가 없단다.
기와는 100년이 가고 물받침은 어르신 뛰지 않아도 걸어서 갈 수 있는 구조로 8~90년 가는 단단함. 기와는 두껍고 납과 아연의 합금으로 도금이 잘 되어 100년을 가고 물받침도 어른이 뛰지 않고 가면 걸어갈 수 있는 구조로 8~90년은 가게 되어있단다. 물론 기와나 30cm 두께의 벽돌 모두 독일에서 가져온 거란다.
현재 김용진화백이 인물화 전시회를 하고 있다. 우연히 놀러와 친해졌다며 그간 그려놓은 인물화들이 벽에 걸려있었다. 김 씨는 일본 우에노 회화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보쟈르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한 화가로, 린든 존슨 대통령, 헤미급 챔피언 무하마드알리, 정주영 형대그룹 회장,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 등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기와 일은 가파르다고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아 독일에서 목수를 데려다 했다고 한다.
이 집은 300-400년 전 서의지주나 권력자들이 살던 저택 영식을 축소해 일반 사람들의집으로 만든 것이란다. 그래서 앞에서 보나 뒤에서 보나 옆에서 보나 대칭을 이룬단다. 굴뚝도 지하실에서 위로 올라간단다.
물건리포구가내려다 보인다
구들은 한국과 로마에만 있어
정씨는 난방에 대해 한마디 한다. 이 바닥은 집사람하고 둘이서 깔았단다. 배관은 온수파이프로 한단다.
세계에서 바닥 난방을 하는 나라는 서양에서 이탈리아, 동양에서는 한국 뿐이란다. 우리 구들이 최고란다. 비슷한게 로마인 들의 집 난방이란다. 우리는 구들 돌을 자연석 그대로 했는데 로마인들은 둥글둥글하게 다듬어서 한 것이 차이란다. 목욕을 즐겼던 로마인들은 풀장이나 욕실을 주로 했다고 한다.
구들이 현대에 와서는 온수파이프로 개량된 것이다. 현재 최고의 난방효율을 내는 것으로 돼있다고 설명해준다. 구들은 엄청 뜨거워야 하는데 온수파이프는 미지근해도 된단다.
측면에서 지붕을 보니.... 대칭을 이루는 지붕
창선-삼천포 대교릴 자나 귀경길에
그렇게 한시간 가량 듣고 사진 찍고 나서 귀경길에 올랐다. 창선대교 ( 150 m ), 늑도교 ( 340 m ), 초양대교 (200 m ), 삼천포대교 (436 m ) 등 2003 년 개통된 창선-삼천포대교 지나 남해를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타고 올라왔다. 평택에서 조금 밀렸을 뿐 일요일인데도 정체가 별로 없어 오후 6시 30분에 집에까지 올 수가 있었다.
콘도는 방 두 개에 이틀을 묵었는데 풍광좋은 물건리 포구와 독일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곳이어서 그런지 총 콘도 비용이 412,000원이나 되었는데도 아깝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묵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