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 자는 원직. 유비가 처음으로 얻은 정식(?) 지략가이자 후에 유비를 떠나면서 제갈량을 유비에게 추천해준 인물이다. 아마 서서가 없었다면 유비도 제갈량을 얻지 못했을 것이고, 혹은 그 일이 있기 전에 이미 유비가 다른 세력에 먹혔을 수도 있었을만큼 서서는 유비에게 제갈량만큼이나 아주 중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서서는 아주 짧은 시간동안 유비를 섬기고 자신의 노모를 위하여 조조에게로 떠나게 된다. 그 후로는 거의 모든 사서에서 기록을 감추며 위략에 따르면 후에 어사중승에 위임되었다가 몇 년뒤에 병으로 죽었다고 짤막하게 기록되어있다.
유비에게 있어서 제갈량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제갈량보다 더욱 중요했던 서서. 하지만 조조의 계략(?)에 넘어가 유비를 길게 섬기지 못하여 연의에서 빛을 못보고, 조조에게 간뒤로는 조조를 진심으로 섬기기를 거부해서 정사에서조차 빛을 보지 못한 비운의 인물. 그를 재발견해보자.
정사에 따른 서서:
"제갈량은 신장이 8척이었으며, 항상 자신을 관중(管仲), 악의(樂毅)에 비유했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받아 들이는 자가 없었다. 오직 박릉군(博陵郡)의 최주평(崔州平), 영천군(潁川郡)의 서서(徐庶)만이 제갈량과 친교를 맺었으며, 확실히 이와 같다고 말했다."
- 촉서 제갈량전
이 문구에서 보면 알겠지만 제갈량은 유비를 섬기기전 그다지 인정받지 못한 인재였다. 한마디로 '지 혼자 잘난' 사람이었다. 하지만 서서는 제갈량과 가까이 지내며 확실히 "이와 같다"(제갈량이 관중, 악의에 비할만하다)라고 했다니 서서의 인재 보는 눈이 상당했음은 분명하다.
연의에서와는 다르게 제갈량과 서서는 잠시동안 유비를 같이 섬긴다(연의에서는 서서가 유비를 떠나며 제갈량을 천거). 하지만 삼고초려 이후 조조에게 자신의 모친을 빼앗긴다(??!).
"유비는 번성에서 이 소식을 듣고 그의 부대를 인솔하여 남쪽으로 갔으며, 제갈양과 서서가 함께 그를 따랐지만, 조조의 추격을 받아 패하고 서서의 어머니가 조조의 포로가 되었다. 서서는 유비에게 이별을 알리고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본래 장군과 함께 왕업, 패업을 도모하려고 했던 것은 이 일촌 사방의 장소에서였습니다. 지금 벌써 노모를 잃어 마음은 혼란스럽습니다. 당신의 사업에 이익이 없습니다. 이로부터 헤어지기를 청합니다." "
- 촉서 제갈량전
이리하여 서서는 유비를 떠나 조조에게로 가게 된다. 위에 번역본은 파성에서 퍼온것인데.. 파란색으로 표시한 부분의 번역이 조금 이상하다. 해서 조금 주제에서 벗어나지만 번역을 다시 해보자. 윗글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俄而表卒,琮聞曹公來征,遣使請降。先主在樊聞之,率其眾南行,亮與徐庶並從,為曹公所追破,獲庶母。庶辭先主而指其心曰:「本欲與將軍共圖王霸之業者,以此方寸之地也。今已失老母,方寸亂矣,無益於事,請從此別。」遂詣曹公。
본문에서 파란색으로 표시한 부분이 번역본과 일치하는 부분인데, "사업에 이익이 없다"라기 보다는 "업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 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다. 즉, "노모를 잃어(마음이 심란하니) (나는)유비의 업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해석되어야 한다. 또 보라색으로 밑줄쳐진 부분도 번역이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다. 본문을 보면 方寸이 두번 나오는 것을 볼수 있다. 그리고 두번째 나타나는 곳에선 方寸亂矣(방촌이 어지럽다) 라고 나온다. 맨 앞 문장이 "본래 장군과 함께 왕업, 패업을 도모하려고 했떤 것은 이 방촌(方寸))의 땅이었습니다". 즉 여기서 方寸之地也이란 것은 지역을 뜻한다기 보다는 서서 "자신의 마음"을 뜻한다고 봐야 한다. 해서 제대로 된 해석은
"제가 본래 장군과 함께 왕업, 패업을 도모하려던 것이 제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노모를 잃고 마음이 심란하니 (장군의) 업에 이득이 되지 않을 겁니다. 허니 작별을 고합니다"
라고 해석되어야 겠다. 여하튼 이렇게 노모를 잃고 조조에게로 떠나간 서서는 정사에서 모습을 감춘다.
위략에 따른 서서:
정사에 따른 내용은 우리가 연의에서 아는 내용과 크게 다르진 않다. 정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위략에서도 서서와 관련된 내용은 짤막하게 다뤄질 뿐이다. 하지만 정사와는 달리 조금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어 짚고 넘어가보도록 하자.
庶先名福,本單家子,少好任俠擊劍。
"서서의 先名(어릴 적 이름 혹은 본명)은 복(福)으로 본디 단가(單家, 세력이 없는 집. 어떻게 보면 단순히 세력이 없는 집이 아니라 "가난한 집"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 의 아들이었다. 어릴때 임협(任俠)과 격검(擊劍)을 좋아하였다."
- 위략
이것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우리가 알고있는 서서의 이미지는 흔히 모범생 혹은 선비 아니였던가? 가난한(혹은 세력이 없는) 집에서 태어났다는거야 그렇다쳐도 무술을 좋아하였다니? 그렇다면 서서는 본디 지략가가 아닌 무술인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그의 무술담(?)은 위략에 조금더 나타난다.
中平末,嘗為人報讎,白堊突面,被髮而走,為吏所得,問其姓字,閉口不言。[吏乃於車上立柱維磔之,擊鼓以令於市○,莫敢識者,而其黨伍共篡解之,得脫]。於是感激,棄其刀戟,更疏巾單衣,折節學問。始詣精舍,諸生聞其前作賊,不肯與共止。福乃卑躬早起,常獨掃除,動靜先意,聽習經業,義理精熟。遂與同郡石韜相親愛。
"중평말 남의 원수를 갚고 흰 석회(白堊)를 얼굴에 칠하고 머리를 푼채로 도주하다 관리에게 잡혀 관리가 이름을 물었으나 이에 대답하지 않았다. [보라색 부분 중략.. 해석하기 귀찮군요. 그냥 남들의 도움으로 도망쳤다는 이야기] 이에 [서서는] 감격하여 칼과 극(刀戟)을 버리고(棄) 두건(疏巾)과 헤진 옷(單衣)을 입고 학문을 닦았다. 처음 정사(精舍, 학문을 가르치는 곳)에서 유생들(諸生)이 그[서서]가 일전에 사악한 사람(賊)이었음을 알고 같이 하려 하지 않았다. [나머지 두 문장은 알아서!]"
- 위략
정확히 무슨 원수를 갚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문장에 따르면 서서는 본디 꽤나 성격이 포악(?)한 싸움꾼이었던 듯 하다. 정사(위에 나와있다시피 학문을 가르치는 곳으로 아마 사마휘의 정사를 뜻하는듯 하다.)에서 유생들이 그를 賊이었음을 알아 같이 하려 하지 않았다라고 하는데 賊이라면 좋게는 양아치 나쁘게는 도적이라고까지 해석될 수 있다. 어느 부분에 있었던간에 서서가 무예를 좋아하며 힘자랑을 조금 하고 다녔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물론 이 소문이 원수를 갚았을때 나온 소문일 수도 있겠다)
여하튼 이렇게 우리의 선입견(?)을 깨뜨리고 불량한 어린시절을 보여줬던 위략내 서서의 기록은 이곳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정사 내에서 조조에게 가는 장면(?)에서 기록이 다시 시작된다. 헌데 이 기록이 잘 보면 아주 흥미롭다.
及荊州內附,孔明與劉備相隨去,福與韜俱來北。至黃初中,韜仕歷郡守、典農校尉,福至右中郎將、御史中丞。
"형주(荊州)가 [조조에게] 내부(內附, 투항, 항복, 혹은 종속)하자 공명(孔明, 제갈량)은 유비(劉備)를 따라갔고 복(福, 서서)은 도(韜, 석도)를 따라 북으로 갔다. 황초(黃初) 중간(中)즈음에 도(韜, 석도)는 군수(郡守), 전농교위(典農校尉)를 임하였고 복(福, 서서)은 우중랑장(右中郎將), 어사중승(御史中丞)에 이르렀다(至). "
- 위략
일단 먼저 눈이 가는것은 서서의 행적이다. 정사와는 달리 위략에서의 서서는 자신의 친구인 석도를 따라 북으로 간것이지 조조가 서서의 노모를 포로로 삼는 일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즉, 위략에 따르면 서서는 자신의 친구와 자발적(?)으로 북쪽으로 이동한다.
또한 정사에 따르면 형주가 조조에게 투항한 시기는 208년이다. 헌데 황초는 220~226년이므로 황초중이라면 223~4년즈음으로 볼 수 있으므로 서서가 북으로 이동해서 어사중승이 되기까지 약 15년 가량의 시간이 걸렸음을 알수 있다. 어사중승이란 어느정도의 직위일까? 어사에서의 최고직은 삼공중 하나인 어사대부이며 그 바로 밑이 어사중승이다. 어사(御史)라 함은 지금의 감사원정도인데, 서서가 감사원 2번째 직위였으니 당시 서서의 권력이 절대 약했다고 보긴 어렵다. 녹봉으로만 봐도 어사중승의 녹봉은 2천석이었으니 입이 떡 벌어진다. 특히나 아무 이름 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서서가 어사중승까지 역임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여기서 우리의 질문은 간단하다. 과연 서서는 자기가 자발적으로 벼슬자리에 나선것일까? 아니면 조조가 그를 단순히 사랑하여 어사중승에 올린것일까? 정사나 연의를 따른다면 후자가 맞겠지만 아무리 조조가 서서를 사랑했다지만서도 감사원 2번째 자리는 내어줬다는 것은 크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물론 연의는 물론이고 정사에서도 조조는 한번 반하면(?) 미친듯이 그 인물을 밀어주는 성격이긴 하다만 감사원의 두번째 자리(말이 좋아 두번째지 어사대부는 삼공에 속하므로 어사중승은 실질적으로 현재의 감사원장급이라고 봐도 무방하다)에 자기를 돕기를 거절하는 인물을 둘만큼 우둔하지는 않다고 본다. 즉, 위략에 따르면 서서가 정사나 연의에서처럼 조조를 마지못해 따랐다고 보긴 어려울뿐만 아니라 딱히 내세울만한 출신도 없는 서서가 15년만에 어사중승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조조 아래에서 상당한 공을 세웠거나 적어도 일처리만큼은 똑부러지게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또한 이 뒤에 이어지는 제갈량의 말 한마디가 우리에 의심을 돋구아준다.
諸葛亮出隴右,聞元直、廣元仕財如此,歎曰:「魏殊多士邪? 何彼二人不見用乎?」
"제갈량이 농우(隴右)로 출전하였을때 원직(聞元, 서서)와 광원(廣元, 석도)의 벼슬과 재산(仕財)이 이와 같음을 알았을때 탄식했다: "위에는 뛰어난 선비(士)들이 많은가 보구나? 어찌 그 두사람이 중용되지 아니한가?" "
- 위략
전농교위를 역임하던 석도야 그렇다쳐도 어사중승이란 직위를 보고 서서가 중용되지 않았다하니 제갈량이 서서의 능력을 굉장히 높게 쳐줬음을 알수 있다(서서는 삼공 혹은 승상급이라는 소리이므로). 하지만 만약 정사나 연의에서처럼 서서가 마지못해 유비를 떠나 조조에게로 간것이라면 제갈량이 이런 탄식을 한 이유가 있을까? 물론 조조의 인물 보는 눈이 없음을 비꼬는 탄식일 수도 있겠으나 설사 그렇다하더라도 노모를 위해 마지못해 조조에게로 간 자신의 친구를 대상으로 이런 탄식을 내뱉었다는 것은 다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후로 서서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끝이난다.
庶後數年病卒,有碑在彭城,今猶存焉。
"서(庶, 서서)는 몇년후 병들어 죽어 비(碑)가 팽성(彭城)에 있는데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 위략
위략에서도 어사중승이란 직위에 어울리지 않게 끝은 다소 허무하게 끝나는 서서.. 정사에서나 위략에서나 연의에서나 서서는 제갈량에 비견되도 무방할만큼 뛰어난 인물로 나오지만(게다가 위략에 의하면 무술도 꽤나 했다.) 그에 비해 그의 관한 기록은 터무니 없이 부족하다. 이에 관한 설명은 확실히 서서가 나서기를 싫어하였으며 최소한의 임무만을 소화해냈다가 되겠지만, 위략에 따르면 어사중승까지 지냈던 서서.. 최소한의 임무만을 소화해내면서 어사중승까지 지냈을 정도였다면 서서의 진가는 어찌보면 제갈량을 능가하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서서는 유비와 제갈량은 물론이고 거의 모든 사람을 속여가며 몸과 마음을 받쳐 조조를 섬긴 삼국시대의 카이저 소재가 아니었을까..
위략 본문 출처: http://big5.china.com/gate/big5/culture.china.com/zh_cn/info/wenxue/11073577/20100604/15965486_1.html
첫댓글 잘봤습니다 모바일이라 몇번 더 봐야겠어용ㅋ
잘봤습니다^^
방통처럼 군략가었을듯합니다
조조는병략가를 매우이뻐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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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서서는 처음에 살인자였다고하니 이미지와 너무 안어울려서 당황스러웠습니다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