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 사는 올케가 화상을 입고 입원했다고 한다.
괜한 염려 끼친다고 오빠는 쉬쉬했는데 같은 대구에 사는 막내동생이 전해 주었다.
문병도 하고 대구시내도 둘러보자며 울산 사는 동생과 동대구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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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역에서 출발하는 아침 8시10분 무궁화호를 타기 위해 플랫홈에 섰다.
소실점으로 사라지는 기차선로는 언제 봐도 여수가 몰려오는데,
역사 밖에 내 놓은 화분이 정겹다.
기차 창밖으로 흐르는 낙동강 보다가 밀양,청도 경산 등 낯 익은 지명에 눈도장 찍고
이어서 "우리 기차 지금 대구역에 도착했습니다."
하는 코레일 특유의 안내방송을 들으며 대구역에 내렸다.
기억속 대구역 대신 대형쇼핑센터 겸비한 스펙타클한 현대건물 양식으로 변모한
역대합실로 나오니 먼저 도착한 동생이 반가운 목소리로 불렀다.
20대 한 때를 이 도시에서 보낸 우리는 감회와 설렘으로 두리번거리며 건물 밖으로 나와
옛자취를 찾아 대구역 주변과 지척인 동성로쪽을 눈과 기억으로 더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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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등 잠시 볼 일만 보고 돌아갔을 뿐 제대로 대구에 오기는 근 30년 만.
올케가 입원한 화상병원으로 가자며 택시를 타고서
"아, 시민회관이다. 저쪽 길은 서문시장 가는 길인데......"
창밖 내다보며 탄성이니 택시기사가 호의와 친절을 발휘한다.
"여기가 북비산 로터리입니다."
"아, 저기 막내 드에 난 종기 수술했던 외과병원이 그대로네. 아저씨 오스카극장도 있나요?"
"오스카극장은 벌써 없어지고 그 자리에 모텔 생겼습니다."
"만경관은요?"(극장이름)
"만경관은 아직 있습니다."
빛 차단한 화상병원 특유의 어둑한 병실에서 두 다리와 얼굴에 화상 입은 올케 언니와
얼마간 시간을 보내다가 병원을 나왔다.
다시 택시를 타고 내린 곳은 북비산로터리.
고모집 근처의 이곳에서 처음 자취생활을 했는데 좁은 이면도로가 넓어졌고,
'아름다운 날뫼, 다시 오는 인동촌' 두 장승이 웃으며 반겼다.
이 길따라 걸어가면 달성공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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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거인 문지기가 있었던 대구 도심에 있는 달성공원.
택시 기사 말마따나 동대구역, 수성구 쪽은 아파트 들어서고 많이 변했다는데,
인동촌 시장 거쳐 달성공원까지 걷는 동안 옛날에 비해 말쑥하게 단장되었을 뿐
그닥 변치 않은 골목과 낮은 건물이 반갑고 정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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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흡, 심호흡 한 번 하고 달성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흘러간 세월만큼 수령 더 해진 나무들로 공원과 숲이 한층 깊어진 느낌일 뿐 낯설지 않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더러 혼자 거닐고, 더러 청바지에 장발인 남편과 데이트 한 달성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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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속 30년전 달성공원의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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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들머리서 감회에 젖어 탄성 질러대고 있으니 직원이 웃는 얼굴로 다가와 말을 건다.
"좋지요?"
"네에. 예전엔 거인 문지기가 있었는데."
"맞아요."
옆에 있던 파란티셔츠 할아버지가 국수 한 그릇 줄테니 따라오라며 앞장서길래,
웬 국수? 하며 친절한 할아버지 뒤를 따라갔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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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대형마트에서 노인들께 국수 제공 봉사중이다.
웃으며 멀찍이서 사진 찍고 있으니 국수 한 그릇 들고 우리에게 다가온 인상 좋은 할배왈,
"왜 안 받아요?"
뒤에 오시는 분 몫 없어지면 안된다며 기쁘게 사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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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으로 올라가 나뭇가지 사이로 성밖 도시 내려다 보며 원형의 성을 걸었다.
눈 앞엔 다람쥐가 알짱거리고, 사자, 코끼리 우리와 물밖에 나와 털 고르는 물개가 내려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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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과 취학전 유아들과 노인들이 구성원인 달성공원.
도시 한 가운데에 허파같은 공원이 있어서 존재의 을인 그들에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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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갈 때의 그 직원이 나오는 우리에게 다가와 웃으며 찍어 준 기념사진.
"그냥 찍으면 심심하니 함께, 오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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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공원을 나와 서문시장에 잠시 들렀다가 점심은 시내서 먹자며 동성로로 갔다.
"뭐 먹지?"
고민하는 우리에게 택시기사는 정말 맛있는 육개장집이 있다며 어찌나 권하던지...
내려서 한 동생의 말에 웃었다.
"하이구야, 자기 좋아하는 음식을 한사코 권하네. 부인이 하는 식당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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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만의 음식집은 찾지도 못하고 디저트로 팥빙수 먹을 요량으로
빙수가게 아래층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메뉴는 쌈밥과 냉면 두가지.
디저트를 팥빙수로 정해놓아 냉면 먹을 수 없어 쌈밥을 먹었다.
치즈와 다진 햄 얹은 풍성한 계란찜은 요리팁, 집에 가서 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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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복장의 아가씨 등 외국인 늘어선 대구백화점 옆 양념오뎅집
동성로의 한일극장, 아카데미극장, 대구백화점 등 시간을 견디고 건재한 상호들이 무척 반가웠다
예전 그대로의 좁은 길에 세련되고 디테일한 건물과 보도, 설치미술 등이
연륜과 품격을 더해 매력적인 대구의 다운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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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과 팥빙수 먹고 지척의 약령시로 가는데 반월당쪽 골목길 등
세갈래 골목길도 그대로여서 반가웠다.
한약방 늘어선 약령시 거리는 한약냄새 가득하고 길가 꽃나무 발치에도 한약찌꺼기가 덮혀있었다.
한약냄새 자욱한 거리에 진출한 커피점이 '한 판 붙어보자'는 듯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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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한다는 대구 중구는 5개의 코스별 '골목투어'관광상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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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령시한의박물관, 제일교회.이상화 서상돈고택,계산성당, 3.1만세운동길은 골목투어 제2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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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옛날'이라는 타이틀의 이상화 서상돈 고택으로 들어가는 골목길.
나는 오래된 길 죄다 없애고 골목의 풍경 지우고 넓고 반듯한 직선 도로 일색인
도시거리계획 저급하게 여기고 마뜩찮아 하는데 대구 도심에 보존된 골목은 감동이었다.
옛것 고집하고 지키는 걸 보수적이라 매도하고, 쉬이 밀어 없애고 새로운 것 만드는 걸
발전이라 하는지 모르지만, 오래된 길에 새겨진 기억과 역사와 사람들 이야기에 대한 가치를
아는 대구의 행정과 시민들의 인식이 미덥고 호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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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골목 초입엔 바보주막이 있었고,
저기 한적한 골목에 놓인 나무 의자에 한 사람이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다.
정말이지 가까운 옛날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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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저항시인 이상화고택.
일제강점기 비탄에 빠진 우리정서를 시적언어로 끌어올림으로써 한국현대시의 이정표를 세운
이상화는 이곳에서 말년을 보냈다.
마지막 작품 '서러운 해조'가 탄생한 이곳은 이상화의 숨결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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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고등학교 국어책에서 이 시를 처음 만났을 때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미치도록 좋았는데,
지금도 이 시를 소리내 낭송하면 나라 잃은 시인이 푸른 보리 넘실대는 들판을 걸어가면서
토해내는 땅에 대한 애정과 망국의 울분에 동화된다.
특히 마지막 부분,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금방 마음에 물이랑이 일어나고 눈동자가 뜨듯해지는 절창!
감동 사그라들지 않을 불멸의 웅혼한 시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고통스러워한 시인의 정신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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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제자를 맞던 사랑방, 울적한 마음 달래던 감나무, 마당, 상화가 숨진 안방 등
시인의 삶을 고스란히 담은 역사적 장소인 아담한 이 집 마당엔 세 개의 시비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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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고택 맞은 편엔 국채보상 운동의 거장 서상돈의 고택이 있다.
국채보상운동은 대구를 중심으로 일어난 일제로부터 국권을 찾고 나라빚을 갚자는 모금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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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마당을 굽어보는 주변의 고층건물을 보니 '가까운 옛날'이 맞다.
근대로 골목에선 정기적으로 연극공연도 있다고 안내문에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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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 서상돈 고택 골목을 나오니 서양중세교회 같은 계산성당이다.
슬쩍 들여다보다 창에 비친 빛과 엄숙한 분위기에 끌려 손 모으고 묵상하고 나왔다는 것.
성당 옆의 건물은 대구매일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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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백화점, 대구백화점 등 서른 해가 지나도록 그 자리에 있는 백화점과 극장의 존재를 보면서
새삼 태화, 세원, 부산백화점 같은 부산의 향토백화점 명운이 안타까웠다.
외지의 거대자본 들어와 지역경제를 흔들어도 걍 크고 새로운 시설에 혹해 향토기업 도산하는 것
내몰라라 한 의식의 차이는 아닐까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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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백화점 근처 쥬얼리타운 골목에는 고양이들이 많아 고양이 좋아하는 자매의 호감도 폭발.
잠시 지켜봤는데 어묵 파는 포장마차나 야외 탁자에서 차마시는 사람 등
수염난 이 친구에게 모두 우호적이더라는 것.
천국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지만 사람과 동물이 공존하는 곳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저녀석 젖을 보니 현재 해산에미라는 증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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햐, 포스 보니 배짱 있어 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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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백화점 지나 중앙공원으로 걸어가는데 서른해 전 개업백화점이던 대보백화점이
낡은 얼굴로 우릴 맞았다. 지금은 백화점 대신 잡다한 여러 가게가 들어선 이 건물에
엄앵란 신성일 부부가 운영하는 '나드리에'라는 경양식점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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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름 :중앙공원. 현재이름:경상감영공원
저녁해가 이울무렵인 시내 한복판의 이 공원에도 노인들이 많았다.
담이 없고 가운데 커다란 연못이 있는게 예전과 달랐다.
밥생각 없다는 동생에게 국수라도 한 그릇 먹자며 공원 앞 식당에서 콩국수 한그릇 먹고
동대구역으로 가는데 어둑어둑해지는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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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에서 내려 조심해서 잘 가라 작별하고 나는 동대구역으로
동생은 아랫쪽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오빠와 남동생에게서 함께 시간 못 보내 아쉽고 미안타는 전화와 문자가 연신 왔다.
돌아오는 기차에서 답문을 보냈다.
'사람들 친절하고, 음식값 싸고, 오빠와 막내가 있고, 청보리밭 같은 한 시절이 새겨진
정겨운 대구여행이었어요.'
첫댓글 병 문안도 하고 대구를 한 바퀴 쭉 둘러 보셨네요~~
이상화 고택이 거기 있군요.
만날 일만 보고 내려 왔는데, 구석구석 대구 구경 잘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