發刊辭
동양대학교한국선비연구원은 관학협력을 기반으로 한 융복합시스템 구축을 통해 영주시를 비롯한 경북권역의 새로운성장 동력을 창출하여 지역 발전을 선도하겠다는 목적으로 설립한 연구기관입니다. 그 첫 번째 사업으로 영주지역의 문중에서 소장해온 문집을 국역하여 출판하고 이를 연구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선현들의 문집을 발굴하여 국역하여 국역하는 과정은 현재 영주시의
적극적인 지원에 의해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토대로 한국선비 연구에 대한 정통성과 독자성을 확보 함으로써 영주시와 동양대학교를 한국 선비연구의메카로 육성하고, 더 나아가 선비를 응용한 다양한 프로그램과 콘텐츠의 원형을 개발하여 한국선비연구원을 국내 최고의 선비연구원을 국내 최고의 선비연구기관으로 도약시키겠다는 원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정 시첩(柳亭詩帖)」은 유정(柳亭)김계문(金季文)선생의 한시(漢詩)와 유정 선생을 홍모해온 여러 현인(賢人)의 차운시(次韻詩)를 엮은 책입니다. 유정 선생께서는 단종(端宗)에대한 충절(忠節)을 지키신 분으로, 순홍에서 금성대군(錦城大君)및 여러 의사(義士)들과 합심해 유배(流配)중이신 단종 (端宗)의 복위(復位)운동을 도모하셨습니다. 유정 선생께서는 정축지변(丁丑之變)당시에 참화
(慘禍)를 입으셔서 시신을 수습하지 못해 묘소마저 없으시니, 일찍이 후손들이비석을 세워 추모의정을 되새겨왔습니다.
다행한 것은 선생의 한시가 이 「유정시첩(柳亭詩帖)을 통해 전해진다는 점입니다.
이를 통해 유정 선생의 선비 정신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 뿐인 목숨보다 변치 않는 지조를 더 소중히 여기신 유정 선생의 올곧
은 선비 정신은 가치관의 혼란으로 삶의 중심을 잃은 현대인의 인성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사료됩니다.
「유정시첩시첩(柳亭詩帖)」을 통해 원대한 선비의 꿈과 목표를 확인하시기 바라며,향후 우리나라 후손들이 이러한 선현(先賢)의
고귀한 선비 정신을 잘 배워서 훌륭한 인재로 성장할 수 있기를 염원합니다.
「국역 유정시첩」을 발간할 수 있도록 예산을 지원해주신 영주시와 지금까지 문집을소중하게 보존해 오신 유정선생문중에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아울러 한국선비연구원의 김장한 원장,강구율 교수,이정화 교수,김재기 계장의 노고에 고마움을 표합니다.
壬寅年 冬至
동양대학교 총장 李河運
祝 刊 辭
우리 함창(咸昌) 김(金)은 여섯 가야 (伽倻)가운데 두 번째인 고녕(古寧)가야에 뿌 리를두고 있다. 시조이신 고로왕(古露王,諱 白珍)께서는 지금의 함창에 수도를 정하셔서 김씨 가문의 본관 또한 함창이 되었다. 현재 상주시 함창읍 증촌리에 고녕가야 태조대왕릉
과 왕비릉이 자리해 있으며, 경상복도 기념물 제 26 호로 등록되어 있다.
왕족 가문인 함창 김씨는명문사족 ( 名門士族 ) 으로 맥을 이어오고 있다. 영주파 ( 榮州派 ) 의 파조 (派祖) 이신 휘 중서(重瑞 )께서
는 고려 왕조에 절의(節義)를 지키기 위해 낙남 하신 분이시다. 그 동기(同氣)이신 휘 중보(重實)께서는 순흥에 터전을 잡으셨으니, 녹사공파(錄事公派)의 파조(派祖)이시다. 휘 중보(重寶)의 맏자제가 휘 취용(就用)이시며, 휘 취용(就用)의 손자가 휘 존(存)이시다.
휘 존 (存)께서는 곤양군수 (昆陽郡守, 현재 경상남도 사천 )를 역임하셨으므로 곤양공(昆陽公) 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신데, 배위는 숙인(淑人)이신창원황씨 부인이시다.
곤양공의 셋째 자제가 바로 유정 (柳亭) 선조 (先祖 )이신 휘 계문 (季文) 이시다. 유정 선조께서는 세종조(世宗朝 )에 건공장군 (建功將軍)이 되셨으나. 단종 (端宗)의 폐위와 세조 (世祖)의 등극으로 인한 급격한 정세 변화를 지켜 보시면서 도의 ( 道義 )와 절의( 節義)
를 몸소 실천하시기 위해 벼슬을 버리신 채. 순흥의 도지리에 은거하셨다. 손수 버드나무를 심으시고 자연을 벗 삼아 마음을 닦으시던 와중에 금성대군(錦城大君)께서 순흥으로 유배를 당하시게 되었다.
이때에 순홍에 계신 유정 선조께서는 단종(端宗)복위(復位) 운동에 동참하셨다. 단종 (端宗 ) 복위 (復位) 운동은 사전에 발각되어
순홍 고을을 페허로 만들었으니, 이 때문에 가솔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유정 선조의 시신조차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오백 수십여년 전에 유정 선조께서 지으신 한시가 아직까지 남아있다는것은 매우 소중한 보물이 아닐 수 없다.
이를 통해 유정 선조께서 지키신 선비 정신을 확인할 수 있는데, 특히 유정 선조의 선비 정신을 존모(尊慕)하여 흔쾌히 차운시
(次韻詩)를 헌정(獻呈) 하신 여러 현인 (賢人)들의 시첩이함께 남아 있다는 사실은가문의크나큰 영광이다.
영주시의 지원을 받은 동양대학교 한국선비연구원에서 「유정시칩 (柳亭詩帖 )」을 2022년도 국역 사업에 선정해 주셔서 감회가
적지 않다.
「유정시첩 (柳亭詩帖 ) 」을 국역하는 일에 힘쓴 동양대학교 이정화 교수의 노고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영주의 태성(泰成 ),
성호 (成鎬)종친과 상주의 귀현 ( 貴顯), 상수 (尚洙 ) 종친을 위시한 모든 종친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끝으로, 영주시와 동앙대학교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
2022 년 12 월 31 일
咸昌 金氏 柳亭 先祖 十四世孫
保相
ー.序
유징(柳亭)이라고 알려진 정자는 유정(柳亭)김게문(金李文 ) 선생에 의해 그 역사가 시작된 것이며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유정 선생이 직접 정자를 세운것이 아니라, 선생이 심고 기른 버드나무가 수백 년 동안 그늘을 이루니 사람들에게 휴식의
공간으로 자리했던 것이다.
유정 선생은 이 버드나무를 매우 애호하여 자신의 호(號)로삼을 정도였다. 또한 '유정(柳亭)을 시제(詩題)로 한7언(七言)
절구(絶句)의 한시도 지은 바 있다.이러한 정황은 중국의 시인인 도연명 (陶淵明)1) 선생의 시정신을 계승한 것인데, 도연명
선생은 버드니무 다섯 그루를 애호한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도연명 선생이 추구한 고결한 정신은 자신이 쓴<오류선생전
(五柳先生傳>을 통해 알 수 있다.
선생께서는 어디 분인지 알 수없으며 그 성명과 자(字) 역시자세하지 않다. 집 주변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있었으니,
그것으로 호를 삼으셨다. 한적하고 고요하여 말씀이 적으셨으며 명예나 실리를 바라지 않으셨다. 책읽기를 좋아하셨으나 깊이
이해하려 하지 않으셨다. 매번 뜻이 맞는 글이 있으시면 즐거워하시며 진지 드시는것도 잊으시곤 하셨다. 타고난 성품이 술을
좋아하시지만 집이 가난하여 항상 즐기 시지는 못하셨다.
벗들이 이같은 처지를 알고는 간혹 술을 준 비해 선생을 초대해서 마시는 상황에 이르시면 늘 다 마셔 버리셔서 반드시 취하신 뒤에야 멈추셨다. 취하신 뒤에는 물러나는데 인색하시지 않으셔서 가고 머무름에 미련을 두지 않으셨다. 방은 좁아 쓸쓸하고 조용하였으며 바람과 햇빛도가리지 못하였다.
짧은 베옷을 기워 입으시고 밥그릇이 자주비어도 태연하셨다. 항상 문장을 지으시며 자족(自足)하시며 자못 당신의 뜻을 나타내셨다. 득실(得失)에 대한 생각을 버리셔서 그러한 상태로 일생을 마치려 하셨다. 논평하기를, 검루의 말씀에 의하면, 가난하고 천함을 근심하지 않으며 부하고 귀한것 애쓰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 말씀을 잘 새겨보면 이분 검루는 오류선생 (五柳先生)과같은 부류일 것이다. 술을 즐기며 시를 지어 그 뜻을 즐기셨으니 무회씨의 백성이신가. 갈천씨의 백성이신가.2)
위의<오류선생전 ( 五柳先生傳 > 을 보면, 버드나무 아래에서 부귀영화를 초월한 채 고요한 마음으로 유유자적한 삶을 지향한 유정 선생의 삶은 도연명 선생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연명 선생은자신이 견지해온 신념과 웅대한 포부가 있었다.
그런데 29 세 때 좨주(祭酒) 참군 (參軍) 으로 관직을 시작한 이후 13 년간 지방 관직을 지냈다고 전해지는데, 도연명 선생은 팽택령에 재직 할 당시에 삶에 대해 깊이 관조하게 된다.
그가 5 두미 ( 五斗米, 다섯 말) 의 녹봉(봉급)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의 소인에게 절을 해야 하는가"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밥벌이를 위해 얽매인 생활을 하는 자신이 구차하다고 생각하여 80 일간의 팽택령 업무를 끝으로 더 이상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본격적인 은거 (隱居) 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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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도연명(陶淵明, 365 - 427 ): 도잠 ( 陶潛 ). 호가 오류선생 ( 五柳先生 ) 이며, 자는연명 (淵明) 이다. 동진(東晉)말엽부터 남조(南朝)의 송(宋, 劉宋)초기때 시인이다. 강주(江州) 심양군(尋陽郡, 現 江西省 九江) 시상현 ( 柴桑縣, 現 星子縣)에서태어났다. 평생 동경했던 증조부 도간(陶侃, 259 - 334)은 동진(東晉)초엽애 벼슬이 장사군공(長沙郡公)에서 대사마(大司馬 ) 에 이르렀으며, 조부 도무
(陶戊)는 벼슬이 무창 ( 武昌 ) 태수 ( 太守 )였다.
부친은 성명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모당은 정서대장군 ( 征西大將軍 )환온(桓溫)의 장사(長史, 막료 장)였던 맹가(孟嘉)의 넷째 따님이다. 도연명은 41세 때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은거에 접어 들었으며, 은거한 지 3 년 후 화재로 자택이 전소되어 남촌 (南村,南里라고도 함)으로 이사해 그곳에서 만년을 보냈다. 그는 강주의 장관 왕홍 (王弘)을비롯 해서 은경인 ( 殷景仁 )· 안연지 (顔延之)등 명사 ( 名土 ) 들과 교유하였다. 그가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후에 왕홍과 안연지가 그의 벗이었기 때문이다.
2)先生不知何許人 亦不詳其姓字 宅邊有五柳樹 因以爲號焉 閑靖少言 不慕榮利 好讀書 不求甚解 每有意會 便欣然忘食 性嗜酒 家貧 不能常得 親舊知其如此 或置酒而招之 造飲輒盡 期在必醉 旣醉而退 曾不吝情去留 環堵蕭然 不蔽風日 短褐穿結 筆瓢屢空 晏如也 常著文章自娛 頗示己志 忘懷得失 以此自終 贊日 黔婁有言 不戚戚於貧賤 不汲汲於富貴 極其言 兹若人之儔乎 酣觴賦詩 以樂其志 無懷氏之民歟 葛天氏之民歟
二 、 柳亭 의 淵原
유정 선생 역시 관직을 버리고 스스로 은거를 택했다는 점에서 도연명 선생과 그 정신이 일치하고 있다. 특히 유정 선생의 시대는
정축지변 (丁丑之變)이라 일컬어질 만큼 거센 풍파(風波) 가 몰아친 때였다. 타고난 성정 (性情) 이 맑고 곧으신 유정 선생은 이러한 역사의 한복판에 자리하셨던 분이라 그 당시에 숙부가 임금이 되기 위해 평소 자신을 존모해 따르던 조카를 물리치는상황을 목도
하며 가치관의 대혼란 까지도 겪으셨음은 너무나도명약관화( 明若觀火 ) 한 것이다.
큰 선비이신 유정 선생은 부귀영화를 아랑곳하지 않으신 채 오로지 올곧은 선비의 마음을 실천하며 사셨던 것이다. 명리 ( 名利 ) 보다는 산수자연 속에서 본성 ( 本性 ) 을 체득하는 인생 을 선택한 점 역시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 )> 에 나타나 있는 도연명 선생의 삶과 고결한 정신과 일치하고 있다.
유정 선생은 현대인에게 매우 부족한 사람됨의 가치를일깨워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자손만대에 걸쳐 추구해야 할 것은 역시 참다운 인간의 길이라는 점을 꼭 집어 말씀하셨다고 사료된다.
나는 약관의 나이에 강주 ( 現 영주) 를 왕래하면서 얻어 들었 는데 유정 김공은 명황제 경태 연간에 한 벼슬아치로써 관(冠) 을 걸어 놓고 남쪽으로 돌아와서 도촌에 은거하였다. 고상한 풍모와 곧은 질개가 족히 일세 ( 一世 )를 높이 흔들어 항상 마음으로 외우고
있었다. 하루는 나의 벗 기행보 ( 基行甫)가 소매에 서첩 하나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이면서 이것은 나의 11세조 유정의 시화 라고
하기에 기뻐서 손을 씻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읽어보니 공의 시는 다만 7언 절구 1편뿐인데도 깊고도 맑으며 아담하 고도 옛스러움이 훌륭한 공인 ( 工人)의 익숙한 솜씨가 아니면 맛과 오채 ( 五彩 ) 를 가릴 수 있다고 하니 어찌 꼭 많아야만 하겠는가. 무릇 주 선생께서 미리 화답하고 원근의 모든 선배들이 차례로 이어서 시로써 서문으로써 옳고 영탄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펴고서 펼친 것이 쌓여서 책을 이루었다.
모든 것이 하늘 같은 글이며 옥 같은 소리이니 어찌 한 가문의 보배로만 여겨 감추고 말 것인가. 기행보 ( 基行甫 ) 가 다시 옷깃을 여미면서 추연하게 말하기를 가세가 영락하고 침체되어 이 문서가 먼지 속에 이미 4 백 년이나 오래 되었으며 또한 비천한 이 몸의 나 이가 이미 서산에 닿았다. 지금 후세에 전할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면 잃어버리게 되어 구천에서 눈을 감기가 어려운 사람이
될 것이다.
장차 간행할 수 있도록 처리해 다가 올 세상에도 오래 전해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지금 세상의 군자들이 쓴 좋은 작품을 얻
어서 서로 이 역할을 하려 하니 그대 또한 한 마디라도 아끼지 말며 베풀어 달라고 하였다. 나는 깜짝 놀라서 사양 하였으나 감히 당할 수 없게 되었는데 그대가 책임을 깊이청하는일이거듭되었다.
이에 다시 말 하기를 나는 이 문서에 마음에 느낌이 있는 것이 세 가지 있다. 첫째, 공의 풍유와 영향을 그때에 가까이 접하는 것 같다. 둘째, 외선조 송은 김선생께서 책의 머리를 어루만지는 듯하여 거듭 읽을수록 말씀을 받드는 듯하다. 셋째, 나의벗이 먼 조상을 추모하여 10대가 지나는 동안 묻혀있던 자취를 천백세 걸쳐 빛내주려 하는데 모든 것이 선조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것임을 알았으니 밝고도 착하다 이르지 않겠는가. 이에 늙고 졸렬한 것으로 사양하지도 못하고 이에 감히 간략하게 두어 줄을 펴서 덕을 사모하는 정
성에 붙이고, 또한 부지련히 책임을 다하려는 뜻에부응하고
자 한다.
3 ) 위의 글을 통해 함창 (咸昌 ) 김문 (金門)에서 유정 선생의 고결한 유업 (遺業 ) 을 자손들이 잊지 않고 계승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三.文集의심의 特徵
「유정시첩(柳亭詩帖)」은 유정선생의 후손 김기행 (金基行)에 의해 출간된 책으로,유정 선생의 시편을 원운시에 운자를맞추어 수많은 선비들이 쓴 화답시와 서문이 수록되어 있다. 화답시는 153 편이며 서문은 23 편으로 후손들이 7 ~ 8대를이어져 내려오면서 지켜온선조(先祖)에 대한 추숭(追崇)이 담겨 있어서 함창 김문(金門)의효심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1694 년에 총생하여 1760년에 별세한 정 옥 (鄭 玉 )선생의 경우. 103인의 수창인들 가운데 가장 나중에 출생한 분이다.
이에 비해 유정 선생의 외숙(外叔) 황 전 (黄 躔) 선생의 경우,1391년에 총생하여 1459년에별세하여 시기으로 보면 가장 윗대의 어른이다. 따라서 시첩에 입록된 조선시대 선비들이 생몰 연도를 파악한 결과, 황 전 선생과 정 옥 선생의 연대 차이가300년을 상회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유정 선생의 덕망과 인품은 당대인에게만 알려진 것이 아니라,조선전기에서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광범위하게 알려져서 유림의존숭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결과는 자손들의혁혁한 공로가 수반된 것임은자명하며 특히 지극한 효성으로 인해 하늘이 감동해서 함창 김 문에 크나큰 선물을 내린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수창시를 지은 선비들은지극한효자여서 당시에 인품이훌륭하였으며 성학(聖學)을 독실히 실천하였던 분들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게 된다. 송은(松隱)김광수(金光粹)선생과 신재(愼齋)주세붕(周世鵬)선생 같은 대학자들의 효행(孝行)은 어린 시절부터 이미 또래의 다른 아이들에서 찾아 볼 수없는 어른의 자새가 몸에 배어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서애(西厓)류성룡(柳成龍4)선생의 외조부 ( 外祖父 )인 송은 선생의 글을 통해 유정 선생 가문의 고결한 정신을 읽을 수 있다.
어느 날 김평지(金平之)가 구성(龜城)에서 와서 인사를 마치고소매 속에서 넣어둔 절구(絶句)약간 수를 나에게 보이고 서문을 청하며 말하기를, "우리 집 문밖에는 예부터 버드나무정자가 있어서 녹음(綠陰)이 앙상한데 푸른 산과 흐르는 물이 언덕을 끼고 있어 흥을 움켜질만하니 저의 부친께서 매번 영절(令節)이면 바둑을 두시며 빈객을머무르게 하시거나 과녁을쏘며날을 보내시거나 또한 절구를 벽에 써 놓으시니 이어 화답하신 분들이 여러 분 계셨습니다.
지으신 시구 (時句) 가 비록 공교롭지 않아도 한때의 촌로들이 그 뜻하신 바룰 말씀하신것이니,어찌 가히 교묘함과졸(拙)함을 생각하겠습니까. 다만 한스러운 것은 가군(家君)께서 일찍 별세하시고 버드나무 또한늙음을 재촉하여 세월이 여러 번 바뀌어 풍경이 쓸쓸하니 남의 자식 된 사람의 마음이 어찌슬프지 않겠습니까 저는 무인(武人)이므로 문묵(文墨)을 즐기지 아니해서 마음에 쌓인 바를
드러내지 못하니, 말씀드린다 해도 무슨 이로움이 있겠습니까.
또한 저는 먼 인척이시라는 점에 의지해 간담(肝膽)을쏟으며 서로 상봉한 지도 오래입니다.청하오니 형님께서는 일필휘지(一筆揮之)하셔서 글 쓰시는 노고를 아끼지 마시옵고 책 끝에 서문을 쓰셔서 간절한 마음을 풀어 주신다면 저만 흡족히감동해 절하며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후대 자손들이 고당 (高堂)께서 쓰신 이 글을보면 기침소리를 듣는 것 같아 오래될수록 더욱 우러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형님께서 오늘 주신글이 어찌 중차대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며대답하기를."옛날에 도연명(陶淵明) 은 진 (晋)나라 처사가 되어 심양(潯陽)에 집을 얻고서 버드나무를 좋아하며 길이길이 취하여 날마다 시와 술로 즐겼다. 당(唐)나라 이덕유(李德裕)는 평천(平泉)에 집을 짓고 화초와 소나무•대나무를 심어 후대 자손에게 경계하였다. 따라서 옛날과 지금이 다르다고 해도 그 의미는 하나라고 할 것이다. 김평지(金平之)는 도연명(陶淵明)과 이덕유(李德裕)두 분의 꽃다운 발자취를 취해더 하였으니 그 부모님의 은혜를 두텁게 생각한다고 이를만 하다.
이에 내가 그 뜻을 가상히 여겨졸렬(拙劣)한 재주를 잊고 붓을적셔 말하려는 바를 대략 서문에 쓰고 이로인해 화운(和韻)하여 내 지기(知己)와 뜻을 함께한다.5)
산수자연에 은거 한다고 하여 무조건 인생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아닐 것이다.위의 글에서는 유정 선생의 자제가 자신의 작고한
부친의 유업(遺業)을 잘 보전하기 위해 명유(名儒)인 송은 선생을 찾아가서 화운시 제작에 대한 부탁을 드리는 장면이 상세히 서술
되어 있다. 유정(柳亭) 에 대한 사연을 들은 송은 선생은 유정 선생이 별세는 하였으나 삶의 의미는 오래 사는 것에 있지 않고 스스로 자손에게 모범이 되는 훌륭한 아버지로 그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도연명 선생이 추구한 자족(自足)의 정신을 유정 선생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다른 선비임을 입증한 것이다.
고녕 가야계 시조 김고로 (金古露)대왕은 김해 (金海)의 구지 봉 (龜旨峰)에서 수로왕 ( 首露王 ) 과 함께 금합 (金盒) 에서 태어난 6명중 1명으로 고녕 가야의 태조 대왕이 되었다.
금합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로 하였으며, 고녕 가야가 지금의 함창 이다. 고녕 가야의 도읍지 함창은 험준한 조령(鳥嶺)으로 인해 백제와 경계를 이루고 낙동강의 장원 (長源)으로가야 제국과 통하는 길목에 있다. 이러한 요충은 명승 (名勝) 과도 상통해 양택 (陽宅)과 음택(陰宅)이 한데 모인 곳에 왕도(王都)가 정해진 것이다. 따라서 함창은 낙동강 중류에서 남해에 이르는 가야의 권역 중 최북단에 위치한 고녕 가야 6 )의 수도로 자리해 있었다.
고녕 가야는 함창 을 중심으로 한 주변 지역에서 건국된 가야 제국 중의 한 나라 로 보는 것이 학계의 지배적인 의견이다. 함창 김문의 인물 가운데서도 유정 선생의 경우는 학식과 무예가 모두 출중하여 문무를 겸전한 선비로 추앙받고 있다. 유정선생 이후에도 이가문에서는 물암 (勿巖)김 융(金隆)7)선생을 위시해 선비의 학문이 크게 흥성하였다.
물암 선생은 퇴계학맥의 인물로 학문에통달한 학자의 전통이 이어졌다. 함창 김문은 애초부터 문무 (文武)를 두루 갖춘 인재들로
형성된 가문이어서 계승해야 할 뿌리 깊은 전통이 이어졌다. 특히 유정 선생의 시를 보면, 세속을 초월한 선비의 감성이 잘 응축되어 있으므로 문사적( 文士的 )기질을 겸전한 무인(武人) 바로 유정 선생임을 알 수 있다.
豁若開襟柳亭
靑風瀟灑掃塵情
良朋日日閒來往
却恨談餘主客醒
옷깃을 활짝 열고 버드나무 정자에 앉으니
맑은 바람이 세속의 생각을 정리하다 깨끗이 쓸어버리네.
날마다 어진 벗들이 편안히
오가는데 이야기 끝에 주인과
빈객이 술에서 깨어남을 매우
한스러워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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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不佞在弱管來往干剛州 獲聞柳亭金公 當皇明景泰年間 以一郞僚 掛冠南歸隱於興州之陶村 高風直節 足以聳動乎 一世心常誦者久矣 日吾基行甫 袖一帖 而來示佘曰 比吾十一世祖 柳亭詩橋也 喜爲之盥手跪讀 公之詩 只七絶 一篇 而冲澹雅古 有非雕繪逞工之習 出於性情之正 一臠片羽 可以知全鼎而 卞五彩矣 何必多乎哉 武陵周先生首和之繼 而遠近諸先輩 次第焉 以詩以序 無不詠歎 而鋪鈙之積成卷軸 皆雲漢之章瓊瑰之聲也 奚但爲一家之珍藏而己哉 基行甫腹歛衿楸然曰 家世零替 斯帖之埋 於塵蠹 己至四百年之久 且賤齒 己追楡景 若復失今不圖其傳 終爲九泉難瞑之人 將付剞劂氏俾壽諸來世而欲得 當世君子之信筆 以相斯役子 亦無惜一言之惠 余瞿然 避席辭 不敢當 而至責之深 而請之重 乃作而復曰 余於斯帖有感干中者三一則公之風猷影響 若接當詩 二則外先人松隱金先生弁干卷摩挲誦復 如奉音旨 三則吾友追慕遠祖 使歷十世沈晦之蹟 將輝映乎 千百世儘乎 知祖先之美 而傳之也 惡可不謂之 明且仁者乎 比不可以老拙拒之玆敢略敍數行 以寓景 仰之忱 且副勤責之意云爾 (柳駿榮 作)
4)류성룡(柳成龍.1542-1607 ): 자는 이견(而見)이고 호는 서애 (西厓) 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분관은 풍산(豊山)이며, 의성 외가에서 태어났다. 간성군수 (杆城郡守)류공작(柳公綽)의 손자이며, 황해도(黃海道)관찰사(觀察使)입암(立巖) 류중영(柳仲郢)의 차남이다. 퇴계(退溪)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월천(月川) 조목(趙穆)•학봉(鶴峯) 김성일( 金城一 ) 과 동문수학하였으며 성리학( 性理學)에 정통하였다.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울 천거하여 선조(宣祖)임금으로 하여금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 임명하도록 하였으며이순신으로 하여금 임진왜란 당시 열세였던 조선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영의정 (領議政)에 제수되어 전쟁으로매우 어려운 조정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겪은일에서 후세인에게 교훈을 일께운 <懲毖錄>을 저술하였다. 청백리(淸白吏)이면서 조선의 5대 명재상(名宰相)으로 존경을 받는다. 호성공신(扈聖功臣)2등에 책록 되었으며,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호계서원(虎溪書院).병산서원(屛山書院).남계서원(南溪書院).삼강서원(三江書院).도남서원(道南書院).빙계서원(氷溪書院)-에 배향되었다.
5) 一日金平之來自龜城 敍寒喧了 袖出絶句若干首示余 而請序曰 吾家門外古有 柳亭 綠陰婆娑 靑山流水 控帶一塢 其興可掬
吾先君每於令節 或博奕留賓 或射帿送日 又書絶句 留諸壁繼而和之者 數人焉 其所著詩句 雖不工也 亦一時村老 各言其所志爾 豈可以工與拙爲之慮乎 獨恨家君逝柳亦老嶊 星霜屢換風景 蕭條其於人子之情 寧不爲之慨然耶 僕武人不喜墨未能發揮 其所溫言之何益 且曰 托僕葭莩之親 而輸肝膽相從者久矣 請吾兄 母惜一揮翰之勞序引卷 端以副所懇 則不獨僕之欣感拜受而己 後之若子若孫目比 於高堂之素璧 而如聞聲效之音 愈久而愈仰 則吾兄今日之賜 豈不重且大也 余笑而答曰 昔淵明為晉處士 結盧潯陽
愛柳長醉 日以詩酒自娛 唐之德裕卜 築平泉 植花草松竹 而戒後世子孫 古今雖異意味一也 以比觀之平之 可謂揖二公之芳躅
而益思其親厚矣 是以余嘉其意 忘其拙 濡筆略 敍所言 因步韻和之 以爲知己者共之 (金光粹 作)
6 ) 상주시 함창읍 증촌리에는 고녕가야국 태조 왕릉이라고 전해오는 무덤이 있다. 1592년고녕국태조가야왕릉 古寧國太祖伽倻
王陵 )' 을 음각 (陰刻 )한 비가 발견되어 당시의 관찰사 김수 (金睟)와 함창현감 이국필 (李國弻)등에 의하여 확인된 뒤 함창 김문
(金門)의 자손들이 10월 1일과 3월15일에향사 를 지내오고 있다. 1712 년 왕명에 의하여 묘비 (墓碑) 와 석물 (石物)을 다시 건립하
였고, 그 뒤 수차례 비를 다시 세워 지금에 이르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 )의 함창현 편 능묘조 (陵墓條)와 함창현지 (咸昌懸 誌)에는 " 가야왕릉이 현의 남쪽2리에 있는데 오랜 세월동안 전해왔으며 함창현의 김씨문중이왕의 후예이므로 왕릉에비석을세우고 왕릉을 수호하며봄가을로 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고 기록되어 있다.
四. 結
유정 선생은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그것을 정자 삼아 삶을 영위하였다는 점에서 도연명 선생의 시정신 과 그 맥락이 닿
아 있다. 유정 선생의 몰년(沒年)은 단종 복위운동 직후로 추정하고 있다. 그의 관직이 건공장군에 이르렸으나 스스로버슬
을 버리고 순홍에 낙남하여 단종에 대한 총절(忠節)을 몸소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유정 선생의 현실적 상황은 도연명 선생의 그것보다 더 치열 하였으므로, 버드나무를 의지 삼아 총절(忠節)의 뜻을 함께 하는 선비들과 굳은 결의로 다짐하였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부귀영화를 위해 출세가도를 달린다거나 자신만의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다는점이다. 따라서 그의 내면에는 선비의 아취 (雕趣) 로 충만할 수 있었다.
즉 유정 선생은 세속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일찍부터 산수자연을 사랑하는마음으로 살아갔으리라 사료된다.이는 곧 유정 선생의 천성(天性 ) 이라 하겠다.
李貞和 拜手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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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김융 ( 金隆, 1549-1594 ): 본관은 함창(咸昌). 자는 도성 ( 道盛 ), 호는 (勿巖 ) 이다. 부친은 참봉 김응린(金應麟), 모당은 현풍 곽씨 부인으로 곽자보(郭子保)의 따님이다. 18 세 때 퇴계(退溪)이황(李滉)의 문하에서 「 소학(小學)」•「 가례 ( 家禮 )」 . 「 태극도설 ( 太極圖說 )」 . 「 통서 ( 通書 )」 등을 수 학 였으며,「 중용 ( 中庸 )」 과 「 대학 ( 大學 )」 에 전념하였다. 산법 ( 算法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1592 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지어 여러 고을에 돌려기병(起兵)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듬해 학행 (學行)으로 참봉에 천거되었다.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영천(榮川, 現 영주) 의 삼봉서원( 三峯書院 )에 제향되었다.저술로는 「 삼서강록 ( 三書講錄 )」 •「 중학전집석의 ( 中學前集釋義 ) 勿巖集 )」 등이 있다.
一.柳亭寺帖序
金世洛 序文
記曰 先祖有美而不知 是不明也 知而不得 是不仁也 夫子孫之於祖先 雖有一言一事之美 必欲表章而揚顯之 況數百年 名賢達士之詩文 讚述輝映於一編之中 而塵編斷簡 機就湮沒 則爲後承8) 可不楊然思 所以壽其傳也哉 故處士咸昌金公 當景泰世以一郞銜9)
隱居干興州之道村 不求名利 高尙其志 漁樵與伴 猿鶴爲友 所居旁手植一株柳 枝葉蕃茂蒼翠可愛 築土其下 名之曰 柳亭 日杖屨逍遙其下 詩與意內親朋 觴酒賦詩 以樂其志 蓋有取於陶靖節宅邊柳之意也 公賦詩一絶曰 豁若開襟坐柳亭 淸風瀟灑掃塵情 良朋日 日閒來往 却恨談餘主客醒 當詩諸賢 多和之者 愼薺周先生 追次其韻 金松隱 高翠屛 郭丹谷 諸公倂詩而序之 吾先祖鶴沙先生 又作續錄序以遺其後孫 蓋是柳也歷年三百 延世六七 而枝葉不衰 蒼翠依舊 大有異於几樹 故為前後儒賢之 所歎賞而稱美 焉載在郡志 或曰 造化陰相 或曰 維德之符 宏文雅韻 積成卷軸 而仍孫連世 不振存者亦移寓他所 柳樹漸就凋喪 詩卷沒於塵蠹 識者之嗟惜者久矣 酒者 10 ) 公之十一世孫基行 甫 11 ) 携断爆12) 餘簡來示世洛曰 比吾家柳亭詩帖也 近始搜得於 古篋休紙中 將謀繡梓 願君訂其豕亥 13 ) 序次其先後 俾成完篇 余乃作而曰 偉躍之晦而顯亦有數存焉耳是篇湮沒殆數百年 而君能收拾 於十餘世之後 謀所以表題之其 赤仁者之事也 與諸族世 相洛榮等合 謀敦事印布 而壽其傳 則不但爲一家之幸 抑亦爲斯 文之幸 願君亟圖之 君曰諾 因請以卷首一言
此固非耄獎所敢當 而編内既有先祖詩序 又有七世祖蘆峯公詩 若序追慕之感 有倍於餘人 義不敢終辭 謹序次其顧末以遺諸孫云爾 赤兎 肇夏 下浣 豊山 後人 金世格 謹序
옛 글에 이르기를, "선조 ( 先祖 ) 에게 미덕 ( 美德 ) 이 있는데 모르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것이며 알면서도 전하지 않는 것은 불인(不仁) 한 것이다. "라開하였다. 무릇 자손의 조상들께서 비록 하마디 말씀과 한 가지 일의 훌륭한 분보기만 있으셔도 반드시 드러내 글로 남기고 이를 널리 나타내 밝히려고 한다.
하물며 수백 이어지는 이름난 현자(賢者)와 도 (道) 의 경지 에 이른 선비들 시문 (詩文)의 경우라면 찬슬 (撰述) 하여 한 편의 책안에서도 그분들의 업적이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다. 조상의 대를 있는 자식이 된 사람은 조상의 글이 오래 전해지는 소이(所以)를 생각하면 가히 척연해진다.
옛날 처사(處士)함창(함창)김공(金公)께서는 경태 (景泰) 연호 (年號)의 시기를 만나 세상에서 한번의 침론불우 (沈淪不遇)를 겪으셨으므로 흥주(興州 )의 도촌에 은거하시며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않으시니 그 마음이 고상하셨다. 어부와 나무꾼과 짝이 되고 원송이와 학으로 벗을 삼으셨다.
거쳐하신 곳 곁에 손수 버드나무 한 그루를 심으셨다. 버드나무 가지와 잎사귀가 무성하니 싱그럽고 푸른 자태가 가히 사랑할만하였다. 그 아래에 땅을 고르게 북돋아버드나무 정자를 삼으셔서 '유정(柳亭)이라고 이름을 지으셨다. 날마다 지팡이 짚고 짚신 신고
버드나무 아래를 거닐다가때때로 마음으로 친하게 지내는 벗과 더불어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지으셨다.
버드나무 아래에서 이렇게 지내시는 그 뜻을 좋아하셨으니이는 대개 도연명(陶淵明) 선생께서 자택 곁에 버드나무를 심고 우유자적(悠悠自適)하신 뜻을 취하신 것이다. 공(公)께서 시 한절구를 지어 읊으신 것을 말하자면, " 옷깃을 활짝 열고 버드나무 정자에 앉으니, 맑은 바람이 세속의 생각을 깨끗이 쓸어버리네,날마다 어진 벗들이 편안히 오고가는데,이야기 끝에주인과 빈객이 술에서 깨어남
을 매우 한스러워하네. "가 있다 당시의 여러 현자 (賢者)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그 시에 화답 하셨는데, 신재 (愼齋) 주 (周) 선생께서는 공 (公)께서 지으신원운(元韻)에 차운해 공의 시정신 (詩精神)을 기리셨다.
송은(松隱)김선생과 취병(翠屏 ) 고 선생과 단곡 (丹谷)곽 선생 같은 여러 공들께서 시와 서문을 아울러 지으셨다. 우리 선조 이신학사(鶴沙) 김 선생께서도 또한 이를 계승하여 서문을 지으셔서 그 후손께 남기셨다. 대체로 이 버드나무는 삼백년이 지났으며, 공의 자손들은6대7대가 이어졌는데 가지와 잎이 쇠하지 않고 푸른 자태가 예전과 다름이 없어 대체로 범상(凡常)한 나무와는 다름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후(前後) 유현 (儒賢)들의 칭송과 감탄의 대상이 되어 아름다운 자태가 칭송되었다.
어찌 군지에만 실려 있겠는가. 혹자는 말하기를, "신의 조화가
음덕으로 도우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웅장한 문장과 고상한 시편이 모아져서 시축(詩軸을 완성하였다. 후손들은 선조(先祖)의 터전에서 삶을 이어가기가 어려워 또한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기니 버드나무는 점차말라서 죽어갔다.시권(詩卷)도 좀벌래에 의해 갉
아 럾어지니 학식과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것이 오래되었다.
공의 11세손 기행보(基行甫)가 여러 조각으로 찢어진 채 남아있는 책을 들고 와서 나(世洛)에게 보이며 말하기를,"이것은 우리 가
문의 「유정시첩(柳亭詩帖)」입니다. 근자에 비로소 옛 상자속 못쓰게 된 종이 가운데 찾을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책으로 출산하기를도모하러 하니 그 오사(誤寫)를 바로잡아 주시기를 원합니다.
책의 서차를 정하여 완전한 책으로 만들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이어 말하기를. " 위대한 자취가 드러나지 않거나 밝혀지는 것은 또한 운수에 달려있는 것일 뿐입니다.이 책이 인멸됨이 수백 년에 가까운데 그대가 능히 이책을 수습하여 십 여대가 지난 뒤임에도 책의 존재가 벍혀질 수 있도록 도모하였으니 또한 어진 사람의 일입니다.
친족인 세상(世相)•낙영(洛榮)등과 합심하여 인쇄하고 반포하고 일을 돈독하게 도모하면책의 세전(世傳)은 장구 할 것 입니다.
이는 비단(非但)한 가문의 행운이 아니라 사문(斯文)전체의 행운입니다. 그대가 속히일을 도모하기를 원하여 수락의 뜻을 비추고 권두에 한.10쪽 마디 말을 남기기를 부탁하였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늙은이가 감히 당해낼 수있는 바가 아니지만 책 안에 이미 선조의 시와 서문이 있으또한 7세조인 노봉공(蘆峯公)의해 시가 있으니, 서문에 추모의 감개를 씀에 다른 사람보다 그 느낌이 배가(倍加)될 듯도 합니다.
의리상 감히 끝내 사양하지 놋한다면 여러 자손에게 그 전말을 남겨주려고 삼가 (序次)할 정도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정묘년(丁卯年)초여름 하순에 풍산 후인 김세락(金世洛)이삼가 서문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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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후승 ( 後承 ): 후사 ( 後嗣 ). 대를 잇는 자식.
9 )낭함(郞銜):낭잠(郎潛)과 같다. 한 (漢 나라)의 안사(顔駟) 가 낭관(郎官)으로있으면서 등
용되지 않았던 데서 침륜불우 ( 沈淪不遇 ) 를 뜻하게 되었다.
10)내자(迺者):근자(近者).요즘.
11)보(甫):평교간이나 손아랫사람을 부를 때 성이나 이름 뒤에 붙여지다 쓰던 말 이다.
12 )단란(斷爛):여러 조각으로 찢어지다.
13)시해(豕亥):오사(誤寫) 를 바로잡다.
<다음에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