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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즌 파리 컬렉션의 알렉산더 맥퀸 쇼장을 찾은 관객들은 깜짝 놀랐다. 맥퀸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온 관객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시키는 드레스와 인간 체스 게임. 그런가 하면, 존 갈리아노 쇼에 선 모델들은 디즈니 월드에 놀러온 신이 난 아이들처럼 동물 모양의 커다란 풍선을 들고 워킹했다(갈리아노 역시 피날레에서 커다란 풍선을 든 채 즐거운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우연의 일치로 보기엔 너무도 절묘한 ‘어린이’에 대한 관심이 지금 패션계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일례는 지난달 뉴욕의 버그도프 굿맨 백화점에서 열린 동화책 <스노맨 인 파라다이스(Snowman in Paradise)>의 론칭 파티. <뉴요커>지의 패션 에디터인 마이클 로버츠가 자신의 첫 번째 동화책을 소개하는 자리였던 이 행사엔 2005년 S/S 시즌의 따끈따끈한 의상들을 선보이는 브랜드의 패션쇼를 제치고 가장 많은 VIP들이 참석했다.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모델 이만과 리야 케베데를 비롯한 많은 모델들과 패션계의 유명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음에도 불구하고, 포토 라인에서 카메라 세례를 받은 건 어른보다 더 멋지게 차려 입은 패셔너블한 꼬마 게스트들이었다는 사실. 한편, 키즈 북 작가인 데어 라이트의 어른을 위한 컬트 동화책 <더 론리 돌(The Lonely Doll)>이 아마존닷컴에서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고 하니, 이쯤 되면 첫 번째 동화책인 <잉글리시 로즈>의 세계적인 성공 이후, 이미 네 번째 동화책 <압디의 모험(The Adventure of Abdi)>까지 출간한 마돈나의 선견지명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번 2005년 S/S 런웨이는 동화의 스토리에서 영감을 얻은 듯한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마크 제이콥스의 체크 무늬 톱과 페티코트 스커트는 일곱 난장이와 뛰어노는 백설 공주를 연상시키고, 디체 카엑의 깜찍한 세일링 룩은 장난기가 넘치는 후크 선장의 여자 친구에게 딱 어울릴 법하다. 물론, 왕자님을 만나러 무도회장에 가는 신데렐라를 위한 루이 비통의 러플 장식 드레스와 모스키노의 빨간 망토도 있다. 좀더 직접적인 방법을 택한 경우도 있다. 어린아이가 그려진 귀여운 일러스트 티셔츠에 짧은 미니 스커트와 줄무늬 양말을 매치한 디올, 낙서 같은 그래피티 티셔츠에 장난감이 달린 모자를 씌운 프랭키 모렐리, 풍선과 아이스크림이 프린트된 원피스를 선보인 헤더레트 등이 그 예. 특히, 캔디 컬러의 풍선과 알록달록한 종이 폭죽 등을 장식한 헤더레트의 런웨이는 어린아이의 생일 파티를 연상시킬 정도로 귀여웠다. 디자이너들의 이런 어린애 같은 호기심은 액세서리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미우 미우의 빨강, 초록, 분홍색 플라스틱 머리띠, 디올의 플라스틱 로고 핀과 사과 모양 모자, 모스키노의 칵테일 모양 백, 그리고 그 많은 라운드 토 슈즈들! 스팽글을 가득 단 마크 제이콥스, 짤막한 삭스와 매치한 알렉산더 맥퀸, 신는 데 5분은 족히 걸릴 스트랩이 달린 비비안 웨스트우드, 도로시의 구두 같은 루엘라 바틀리 등 이번 시즌 디자이너들이 선보인 슈즈는 하나같이 동화에 자주 등장하는 귀엽고 순수한 이미지에 동그란 앞코를 가졌다. 디자이너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이런 동화적인 무드는 그동안 수없이 되풀이되어왔던 ‘키덜트’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키덜트가 어린이가 되고 싶은 어른들에 의해 약간은 유치하게 변질된 동심이라면, 지금 주목받고 있는 차일드후드 신드롬은 순도 100%에 가까운 순수함을 지녔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디자이너들이 동심의 세계로 빠져든 이유는 뭘까? 지난 여름 취재차 만났던 디자이너 안나 수이는 에디터에게 디즈니의 동화책을 선물한 적이 있다. 당시 그녀는 “동화 작가인 메리 블레어의 작품을 모아놓은 동화책이에요. 이 책 덕분에 이번 컬렉션이 탄생했죠. 많은 곳에서 영감을 얻긴 하지만, 동화책만큼이나 풍부한 컬러와 디테일을 선사해주는 오브제는 드물거든요. 나뿐 아니라 많은 디자이너들이 영감을 얻기 위한 소재로 동화책을 즐겨 봅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현상은 레디 투 웨어 의상들이 점점 수공예적이고 장식적으로 업그레이드되고 있는 흐름과도 무관치 않은 것 같다. 손으로 일일이 장식한 시퀸 스커트, 수십 겹의 러플이 층층이 장식된 드레스, 일일이 리본을 달아 만든 블라우스 등은 현실보다는 판타지에 가까우며, 여자라면 누구나 꿈꿔왔던 판타지가 담긴 옷을 만들어내는 데 동화나 순수한 동심만큼 완벽한 파트너도 없으니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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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고 순수한 영 모델들의 붐도 빼놓을 수 없다. 그 시대를 주름잡는 패션 스타일에 의해 환영받는 모델의 기준이 달라져왔음을 기억해볼 때 동화를 연상시키는 옷과 슈즈, 상상력과 순수함이 드러나는 액세서리들, 크레용으로 장난친 듯한 메이크업(캔디 컬러의 크림 섀도와 립스틱을 아무렇게나 칠한 미우 미우와 마크 바이 마크 제이콥스 쇼를 떠올려볼 것!)이 런웨이를 사로잡은 요즘, 요정 같은 혹은 동화 속 주인공 같은 모델들이 주목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닉네임을 한번 지어볼까? 우유만 마시고 자란 것 같은 알프스 소녀 하이디 젬마 워드, 백설공주 릴리 콜, 빨간머리 앤 신시아 디커, 거기에 최근 미국 <보그>에 의해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는 신데렐라 킴 누다까지 가세했으니, 이만하면 런웨이의 요정들이라 불릴 만하지 않은가. 거기에 루이 비통 같은 럭셔리 하우스마저 ‘인형'을 컨셉트로 한 주얼리 광고 캠페인에 리본을 단 어린 모델들을 등장시킨 것을 보면 당분간 어리고, 순수하고, 동화 같은 것에 대한 애정은 좀처럼 식지 않을 듯 보인다. 패션계에서 감지된 이런 현상은 다른 분야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조니 뎁과 케이트 윈슬렛이 주연한 피터팬 영화 <네버랜드를 찾아서>가 미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며 천문학적인 예산이 투입된 <알렉산더>를 제치고 강력한 오스카상 후보로 떠올랐으며, 초콜릿 공장에서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모험을 다룬 책 <찰리와 초콜릿 공장> 역시 팀 버튼의 감독 아래 영화화될 예정이다. 존 갈리아노와 파코 라반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했던 오스카 마르퀘즈가 만드는 구체 관절 인형이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일본의 동화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한 이 인형은 독특한 디자인과 아방가르드한 의상이 특징으로, 키덜트족의 바비 인형보다 시크한 뭔가를 찾고 있던 인형 마니아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으며 www. studiowhitebox.com에서 판매 중이다. 마돈나의 동화책으로 유명해진 제프리 풀비마리가 자신의 일러스트를 가미한 패션, 액세서리 브랜드인 바비핀을 론칭하고, 마크 제이콥스가 무라카미와 다시 손잡고 장난감처럼 깜찍한 일러스트 백들을 선보인 것, 마리오 테스티노가 어린이들의 모습을 담은 <Kids>라는 사진집을 펴낸 것 역시 지금의 트렌드와 일맥상통하는 얘기. 한 패션 에디터는 일에 치이고 마음이 각박해질 때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다시 읽는다고 한다. 순간적으로 마음이 차분해지고 순수해지는 일종의 테라피와도 같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 자, 과즙이 뚝뚝 흐를 것 같은 농익은 과일 프린트보다는 루엘라의 풋풋한 사과 프린트 가방에 더 끌리고, 값비싸 보이는 보석이나 골드 주얼리보다는 조카의 플라스틱 액세서리에 눈길이 가는 자신을 탓하지 마라. 그것이 지금의 메인 스트림이고 그 물결에 자연스럽게 합류하고 있는 것뿐이니까. 만약, 아직도 차일드후드 신드롬에 관한 모든 게 유치하고 어리게만 보인다면, <어린 왕자>를 다시 한번 읽어보는 건 어떨까? 덜 자란 어른들의 유치한 꿈이 담긴 키덜트와 이성적으로 성숙한 이들이 되찾고자 하는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구분할 수 있는 심안을 갖게 될 테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