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HK)
날 짜 : 97/6/9
제목: [창간특집/홍콩영화] 상업적 전통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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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영화는 철저히 상업적인 면에 충실한 전통으로 생존 근거를
이어왔다. 유난히 홍콩 영화에 열광했던 우리나라 영화팬들이
예술적인 면에서 이들의 영화를 자신있게 추천하지 못해도, 묘한
쾌감을 느끼며 강한 끌림을 가지는 것은 이들 영화가 채택했던
대중적인 전략이 충실히 먹혀든 결과였다.
[관객이 좋아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만들 각오가 돼 있다]는
골든 하베스트사 간부의 말처럼, 관객의 취향에 맞춰 유일하게
끊임없이 고유한 장르를 개발하고, 외지의 자본을 끌여들여 투자에
대한 부담을 줄이고, 상업 영화 시스템에 필요한 전문인력 등을
키워나갔다. 그 결과 홍콩은 한해 1억5,000만 달러에 가까운
영화 수출액을 기록할 정도로 동남아를 대표하고, 미국시장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거대 영화 산업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런 상업 영화의 전통은 58년 동남아 최대의 극장주였던 사이오푸
형제가 58년 쇼브러더스사를 창립한 것이 계기가 됐다. 홍콩
영화의 선구자인 호금전([협녀] [용문의 결투])과 [외팔이
시리즈]의 왕우를 낳은 장철 감독 등이 이곳에서 배출된 스타
감독이다.
70년대는 불세출의 스타 이소룡이 세계를 매혹쉼「?세계인의 가슴속에 아로새겼다.
골든 하베스트가 33세로 요절한 이소룡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등장시킨 두번째 스타가 79년 [취권]의 성룡이다. 서울 개봉관에서만
89만명에 이르는 관객을 끌여들였던 그의 영화는 이소룡의 무협적
전통에다 코믹한 감각을 결합시켜 10년 가까이 위력을 떨치며
홍금보, 원표 등의 아류 스타들까지 이끈다.
무협 전통의 80년대 중반 변형은 홍콩 느와르라는, 가장 홍콩적인
새 장르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앞의 액션 영화들이 대륙과 유교의
전통에 기반하고 있다면, 홍콩 느와르는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본주의의
세례를 받은 홍콩인이 자신의 모습을 담아낸 진짜 홍콩 영화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영웅과 적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
폭력이 아름다워보일 수 있는 미학적 배치 등 새로운 시도들은
주윤발 같은 스타 배우를 탄생시킨데 이어 오우삼([영웅본색]
[첩혈 쌍웅])등 스타 감독들을 만들어 내 할리우드로 하여금
눈독을 들이게 만들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서극의 [촉산]등이 무협영화에 SFX를 결합하는
방식으로 홍콩 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격상시킨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80년대 후반의 가장 중요한 움직임은 왕가위
관금붕 허안화 라탁요 등을 중심으로 한 뉴웨이브 감독의 등장이다.
홍콩에도 싸구려 영화만이 아닌, 예술영화가 존재함을 알린 이들은
멜로드라마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장르를 도입했으며 스타일과
주제 모두에서 혁신을 가져오며 유럽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다.
60년대 홍콩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이들과 활발한 합작도 별였으나
지금은 세계 시장에서 훨씬 뒤쳐저 버린 우리 영화와 비교해
보면, 홍콩 영화의 성공의 비결을 알 수 있다. 즉 상업영화의
성공을 위해서는 고유한 장르가 있어야 하며 이를 시대에 맞춰
자유롭게 변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또 체계적인 시스템을
도입해 영화를 제작하는 노하우들을 하나 둘씩 쌓아가야 한다는
것 등이다. 할리우드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스스로 만든 장르영화가
있는 나라, 그것이 홍콩 영화의 강점인 것이다.
그러나 상업 영화로서의 홍콩 영화의 성공에도 한계는 있다.
특별한 장르가 히트하면 수많은 아류작들을 일괄 생산라인에서
찍어내는 공산품처럼 만들어온 홍콩 영화계는, 자신들이 처해있는
상황에 대한 진지한 역사의식이나 사회의식을 담아낼 여지를
키우지 못하고 적당히 서구와 유교의 전통을 혼합한데 머무르고
말았다는 평가도 받는다. 이윤정기자
한국일보(HK)
날 짜 : 97/6/9
제목: [창간특집/홍콩영화] 불안과 설렘의 '오버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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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1. 왕가위는자신의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해피 투게더]를
6월1일 홍콩에서 개봉한데 이어 최신작 [북경지하]를 6월말까지
서둘러 완성하려고 마음먹고 있다. 그를 시간과의 경주로 내모는
것은 7월1일. 그날 이후 왕가위는 자신의 영화가 중국정부의
검열을 통과할 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2. 성룡. [너무 폭력적인 영화는 중국 관리들이 싫어한다.
그들은 너무 야한 영화, 정치나 정부의 전복, 파업에 대한 영화들도
싫어 한다. 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만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장국영.[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만드는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현재 중국의 영화 검열은 매우 경직돼 있다.
위대한 작품이 많이 상영되지 못했다. 갑자기 감시당할 것을
생각하면 두렵다]
신#3. 지난 4월 마지막으로 열린 홍콩국제영화제에서 관객들의
눈을 끈 것은 홍콩영화 50년의 대표작 45편을 선정 상영한 [전기
그림자의 50년(Fifty Years Of Electric Shadows)]과 함께 [나는
검열관과 데이트를 했다]로 그동안 자체 검열 때문에 상영되지
못했던 영화들을 상영한 것이었다. 허안화감독의 [투분 노해],
구로자와 아키라의 [데르수 우잘라] 등 상영작들은 홍콩에서
자신들의 정책에 위배되는 영화가 상영될 때마다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던 중국 정부에 대한 홍콩 영화인들의 소리없는 반항으로
비쳐졌다.
신#4. 홍콩 반환 이후에 대한 중국의 한 고위층의 말. [말은
계속 달리게 할 것이며 무용수는 계속 춤추게 할 것이다(마조포
, 무조도)]
신#5. 중국 감독 사진은 홍콩의 중국 반환에 앞선 거대한 예술적
과업이라는 목표 아래 중국 대만 홍콩과 영국의 스탭들이 총동원된
영화 [아편 전쟁]을 최근 완성했다.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웨인왕
감독, 영국 배우 제레미 아이언스, 중국 배우 궁리, 홍콩 배우
장만옥 주연의 영화 차이니즈 박스 속에서 96년 12월 31일부터
97년 7월1일까지 6개월간의 홍콩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차이니스
박스를 찍었다. ?
한때 [홍콩 무비]라고 불렸던 것들의 7월1일을 맞는 다양한
스펙트럼. 그들은 한편으론 두려워하며 한편으론 기대감으로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자신들이 남겼던 영화들을 더듬어 보며,
자신의 모습을 기념사진 찍듯 영화속에 담아가면서.
7월1일 이후, 홍콩 영화의 미래는 어떤 모습을 띨 것인가. 인도,
미국에 이은 세계 3위의 영화 생산국, 동방의 할리우드였던 홍콩은
이전과 같은 영화를 대륙의 한 자치구 샹캉(향항)에서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 좁고 답답하고 후덥지근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사람들의 유일한 대안이었던 홍콩영화는 계속해서
이 곳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안식처로서의 역할을
계속할 것인가.
자본주의가 낳은 동양속의 쓰레기 문화였든 어쨌든, 영국정부의
느슨한 통제아래서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어 왔던 이들에게 사회주의
국가로의 변화는 불안감을 가져다 주는 커다란 요인인 것은 사실이다.
홍콩의 모든 사람들은 89년 천안문 사태를 잊지 못한다.
[예스마담]의 양자경은 [아무도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믿지 않았다. 모두들 절망하고 공포에 질렸다]라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다른 배우들 역시 [그 일 이후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들에게도
그런 일이 벌어질까봐 홍콩을 떠나길 원했다. 자신의 공개적인
의견표현 때문에 정부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 있다면 그건 매우
공포스러운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두려움의 발로라고만은 볼 수 없지만 성룡, 주윤발등 배우와
오우삼, 서극 임영동 등 감독들은 90년대 들어 앞다투어 할리우드로
진출했다. 이런 움직임과 함께 홍콩 영상산업이 93년 이후 급격한
쇠퇴일로를 걷고 있는 상황을 종합한다면 홍콩영화의 자생력이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지에 대해서는 불투명한 전망이 있을 수
밖에 없다. 80년대 이후 홍콩에 예술 영화의 새바람을 불러 일으킨
일단의 감독들-왕가위 관금붕 허안화 등에게는 장이무 천카이거
등의 영화를 상영금지시켰던 중국의 서슬퍼런 검열이 무엇보다도
자신의 창의력을 옭아맬 수도 있다는 것이 가장 두려울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만은 아니다.
그들은 새로운 상황에 큰 희망을 걸고 있기도 하다. 인구 12억의
거대한 중국이라는 시장은 600만이 사는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영화를 수출하는 것으로 생존 전략을 삼았던 자신들에게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홍콩안에서 막대한 돈과 인기를 벌어들인
성룡은 중국시장에 대해 큰 기대를 공공연히 표현하고 있다.
93년 이후 할리우드로 진출하는 스타들도 [단지 우리는 좀더
좋은 환경에서 영화를 만들고 싶기 때문]이라며, 그들 스스로가
내가 돌아 올 곳은 바로 이곳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미래에의
기대감 때문이다.
중국 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워낙 실용주의적이고 세태에 유연한
중국 정부의 정책은 반환 이후에도 홍콩 영화에 대해 큰 변화를
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낳고 있다. 중국정부가
덩굴째 굴러들어온 호박덩어리같은 거대한 홍콩의 영화시장을
섣불리 훼손시켜 커다란 소득원을 잃고 국제적 명성까지 먹칠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30년대 동아시아 시장을 점령했던 유서깊은 영화제작의 중심지인
상하이(상해)는 홍콩 현지의 상황과는 반대로, 투자가 밀려들고
있다. 상하이는 그날 이후 홍콩을 아우르는 대륙의 새로운 영화
중심지로서의 희망을 키우고 있다. 홍콩 최고의 영화사 골든
하베스트사 역시 지난해 상하이에 지사를 세우고 대륙의 스탭과
교류하며 이들이 함께 참여한 영화들을 찍고 있다. 왕가위의
촬영감독으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도일은 [상하이는 우리의 미래다.
상당수의 영화제작 기반 시설이 이곳으로 이동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영상 산업의 개발을 매우 강력히 뒷받침하고 있다. 상하이는
홍콩에 이어 동양의 할리우드가 될 것이다]라고 전망한다. 쉽게
말해, 600만의 홍콩 사람보다 12억 인구의 중국사람이 더 많은
재능이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문제는 희망적으로
변한다.
홍콩의 영화인들에게 몇년전부터 쏟아지는 질문 [그날 이후
당신의 영화제작 환경이 어떻게 바뀔 것인가]에 대해, 그들은
아무런 대답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모두[생각하기 싫다]
[두고 봐야 알지 않겠냐]는 것 뿐이다.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해도 그들은 어쩔 수 없다.
홍콩무비가 샹캉 디안잉(전영)이 되더라도, 그곳을 떠난 사람이건
남아있는 사람이건, 홍콩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은 그곳을
완전히 벗어나서 영화를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왕가위의 말처럼,
그들에게 홍콩은 [내게 영원히 영화의 영감을 주는 곳]으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윤정기자
날 짜 : 97/1/16
제목: '홍콩 느와르논' 현대의 고독한 영웅 창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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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복합식 아파트, 많은 인구, 불안한 미래. 홍콩에서 극장은 이런 후텁
지근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공간이다. 인도와 대만인
들이 영화를 많이 보는 것도 같은 이유다. 서구인들에게 영화가 레저의 대
용물이라면 홍콩인들에게 영화는 생활 혹은 희망이다.
7월1일 중국에의 반환을 앞둔 홍콩인들에게 영화는 그들의 역사이기도 하
다. 늘 떠날 준비가 돼 있는 홍콩인들에게 잊지 말아야 할 하나의 족보다
. 이소룡의 [정무문], 서극의 [촉산] [천녀유혼], 성룡의 코미디 영
화, 관금붕의 예술영화와 왕가위의 스타일 영화. 더불어 그 족보에는 [홍
콩 느와르]가 빠지지 않을 일이다.
홍콩 느와르의 어원은 확실치 않다. [영웅본색]을 배급한 일본의 영화
사가 광고카피에 처음 이 말을 사용했다는 설과 우리나라 영화 저널리스트
들이 처음 쓰기 시작했다는 주장이 있다. 명확한 사실은 이 말의 국적이
홍콩이 아니며 [우먼 느와르] [한국적 느와르]등 다양한 변종을 낳았
다는 것이다.
홍콩 느와르라는 단어의 뿌리는 물론 2차대전 후 프랑스에서 만들어졌던
영화 장르 [느와르](Noir, [검다]는 뜻). 프랑스의 느와르는 도시 범
죄집단의 정글 속에서 표류하는 전후 젊은이들의 패배주의와 우울을 나타
냈다. 반면 홍콩의 느와르는 이와 맥락이 비슷하지만 홍콩의 불안한 미래
와 홍콩영화의 특성을 배합함으로써 프랑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여기서 홍콩적 특성이란 호금전의 [용문의 결투], 장철 감독의 [외팔
이] 시리즈, 배우 이소룡의 [당산대형] [용쟁호투]로 대별되는 무술
영화에서 무술을 빼고 남는 그 무엇이다. 영웅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과
시련, 그리고 그들의 끈적한 우정 등이다.
홍콩 느와르의 요체인 우울한 영웅, 영웅의 우울함을 그리는 방식은 지극
히 홍콩적이다. 때로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황야의 무법자], 브라이언
드 팔마의 [언터처블스]같은 할리우드 영화의 문법이 들어있다. [잡종
(하이브리드)문화]라고 할까. 광동어와 영어가 혼재하는 공간, 유교적 전
통과 자본주의적 화려함이 깃든 홍콩의 정서와도 흡사하다.
이소룡의 쌍절곤 대신 영웅은 기관총을 쏘아댄다. 대신 일합을 겨루는 강
호들처럼 총싸움의 시간도 현실감 없으리만치 길다. 이런 설정은 할리우드
영화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히트]에서의 길고 긴 시가지 총격전은
홍콩 느와르에서 빌어온 것이다.
우울한 영웅의 이미지는 정교하게 창출됐다. 모두 라이터를 쓰는 시대에
성냥을 질겅질겅 씹어대고, 머리칼은 무스를 발라 정갈하게 뒤로 넘기고,
검은 색 코트와 정장을 입는다. 독특한 버릇을 가졌지만 늘 절도를 잃지
않는 무사를 닮았다.
[영웅본색]으로 시작해 [첩혈쌍웅]으로 절정을 맞았던 한국에서의 홍
콩 느와르는 주윤발로 시작해 주윤발로 마감됐다. 또 유덕화, 장국영, 이
수현, 양가휘 등 1, 2세대 느와르 배우들은 한국에서는 신화가 됐다.
이들의 상업적 성공은 곧바로 홍콩 영화에 대한 평가절상으로 이어지고,
96년 한국 영화계를 뒤흔든 왕가위 예술영화 신드롬으로 발화된다. 홍콩
영화가 전세계적으로 예술성을 추인받는 계기였다.
자칫 깡패 영화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는 일련의 홍콩 영화들에 [난민
정서]라는 사회문화적 가치를 개입시켰고, 그래서 영화를 [홍콩 느와르
]라는 장르로 만든 이들은 아시아의 평론가들이었다. 하지만 그에 열광한
것은 전세계였다. 박은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