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표현>, 2020년 봄호
21세기 참여시의 방향
맹문재
1.
2019년 12월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발병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진자가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면서 팬데믹(pandemic)의 단계에 접어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020년 2월 22일 현재 중국에서 76,000명 이상의 감염자와 2,3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표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 한국, 싱가포르, 홍콩, 태국, 대만, 이탈리아, 이란 등 전 세계 30개국에서 다수의 사망자와 감염자가 발표된 데서 보듯이 코로나19의 상황은 중국의 문제를 넘어섰다. 2003년에 유행했던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나 2012년에 유행했던 메르스(중동호흡기중후군)의 경우보다도 전염 속도가 더욱 빠르고, 중국에 다녀온 적이 없는 사람들이 자국에서 감염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으며,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잠복 기간에도 전염되기 때문에 사람들의 불안감이 높아지고 있다. 코로나19는 주로 호흡기로 전염되는데, 바이러스가 폐에 침범해 고열, 기침, 호흡곤란 등의 증상을 가져오고 심한 경우 폐포가 손상되어 사망에 이른다. 코로나 바이러스(corona virus)는 그 형태가 태양의 표면 바깥쪽 층을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코로나19의 상황에서 여실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세계화이다. 주지하다시피 세계화란 국가와 국가의 관계가 국경을 넘어 단일 체계로 통합되는 현상이다. 교통과 통신 기술의 발달에 따라 국가 간의 교류와 소통이 활발해지고,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기업이 활동 무대를 국내를 넘어 전 세계로 넓히면서 나타나고 있다. 미국과 소련 중심으로 대립하던 냉천 체제가 무너진 정치적 상황도 세계화를 촉진시키고 있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국가보다는 다국적 기업이나 비정부 기구의 역할이 중요시되고 있고, 관광이나 유학 등 인적 교류를 통한 문화나 생활양식의 단일화도 형성되고 있다. 국가 간의 상호 영향력이 높아짐에 따라 약소국가는 강대국에 종속되고 경쟁력이 약한 기업은 세계적인 기업에 도태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세계화의 추세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오늘의 한국 시단에서 참여시를 살펴보고 그 의의를 탐색하고 나아갈 방향을 진단하는 데도 마찬가지이다. 더 이상 1960년대의 순수참여론에서 등장했던 참여시의 개념을 이분법적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그 시대의 국내외 상황이 오늘의 상황과 매우 다르기 때문에 좀 더 열린 사고가 필요한 것이다. 참여시는 4·19혁명을 계기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이루고자 했던 열망이 5·16군사쿠데타에 의해 무너지자 지식인들이 시대정신을 갖고 제기한 것이다. 해방기의 분분한 문학논쟁이 한국전쟁 뒤 독재정권에 우호적인 우익들의 순수문학론으로 귀결됨으로써 한국 문단은 역사성과 역동성을 상실했다. 그렇지만 민중들의 뿌리는 생명력이 강해 4·19혁명을 이루어냈고, 비록 5·16군사정변에 의해 그 기운이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결코 사그라들지 않았다. 참여시의 등장은 곧 민주주의의 회복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2.
김우종은 「문학의 순수성과 이데올로기」(『한국일보』, 1960년 2월 7일), 「도피와 참여의 도착(倒錯)」(『현대문학』, 1961년 6월), 「파산의 순수문학」(『동아일보』, 1963년 8월 7일) 등으로 순수문학이 현실과 민중의 삶을 외면했다고 주장했다. 김병걸도 「순수와의 결별」(『현대문학』, 10월)에서 사르트르의 앙가주망(engagement) 등을 소개하면서 현실 참여를 강조했다. 서정주는 「사회 참여와 순수 개념」(『세대』, 1963년 10월)에서 참여문학의 논리를 카프와 동일시하며 혹평했다. 이형기도 「문학의 기능에 대한 반성: 순수옹호의 노트」(『현대문학』, 1964년 2월)에서 문학의 순수성을 옹호하며 나섰다. 이에 홍사중은 「작가와 현실」(『한양』, 1964년 9월)에서 순수라는 이름 아래 문학의 정치 배제는 있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1967년 김붕구가 세계자유문화회의 한국 본부 주최 원탁토론에서 「작가와 사회」를 통해 앙가주망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이데올로기고 귀착한다고 주장했다. 선우휘도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조선일보』, 1967년 10월 19일)에서 사회참여를 밀고 나가면 프롤레타리아 혁명까지 간다고 주장했다. 이에 임중빈은 「반사회 참여의 모순」(『대한일보』, 1967년 10월 17일)으로 반론을 제기했다. 그뒤 김양수가 참여론을 비판했으며, 임헌영과 최일수가 참여론을 지지했다. 이호철, 이철범, 김현, 최일수, 박태순, 원형갑, 전봉건, 이유식, 김병익 등도 참여했다.
1960년대의 순수참여 논쟁은 이어령과 김수영에 이르러 정점을 이룬다. 이어령이 「「에비」가 지배하는 문화」(『조선일보』, 1967년 12월 28일)에서 작가의 소심증이 창조적 능력을 가져오지 못한다고 제시하자, 김수영은 「지식인의 사회 참여」(『사상계』, 1968년 1월)에서 창조적 자유가 억압되는 원인은 문화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권력의 작용이라고 비판했다. 이어령이 다시 「누가 그 조종을 울리는가?」(『조선일보』, 1968년 2월 20일), 「서랍 속에 든 「불온시」를 분석한다」(『사상계』, 1968년 3월)에서 참여시는 영원성이 없고 불온시는 미적 가치가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김수영은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조선일보』, 1968년 2월 27일)에서 모든 전위문학은 불온한 것이고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두 사람 간의 논쟁은 이어령의 「문학은 권력이나 정치이념의 시녀가 아니다」(『조선일보』, 1968년 3월 10일), 이어령·김수영의 「「자유」 대 「불온」 논쟁」(『조선일보』, 1968년 3월 2일일)으로 마무리되었다. 신동엽은 「선우휘 씨의 홍두께」(『월간문학』, 1969년 4월호)에서 좌우익으로 세계를 분리하는 데 맞서 시인은 영원한 자유주의자이고 부정주의자라며 김수영의 참여시를 옹호했다.
초가을, 머리에 손가락 빗질하며
남산에 올랐다
팔각정에서 장안을 굽어보다가
갑자기 보리씨가 뿌리고 싶어졌다.
저 고층 건물들을 갈아엎고 그 광활한 땅에
보리를 심으면 그 이랑이랑마다 얼마나 싱싱한
곡식들이 사시사철 물결칠 것이랴
서울 사람들은
벼락이 무서워
피뢰탑을 높이 올리고 산다.
내일이라도 한강 다리만 끊어 놓으면
열흘도 못 가 굶어죽을
특별시민들은
과연 맹목기능자이어선가
도열병약(稻熱病藥) 광고며, 비료 광고를
신문에 내놓고 점잖다.
그날이 오기까지는 끝이 없을 것이다.
숭례문 대신에 김포의 공항
화창한 반도의 가을 하늘
월남으로 떠나는 북소리
아랫도리서 목구멍까지 열어놓고
섬나라에 굽실거리는 은행 소리
조국아 그것은 우리가 아니었다.
우리는 여기 천연히 밭갈고 있지 아니한가.
서울아, 너는 조국이 아니었다.
오백년 전부터도,
떼내버리고 싶었던 맹장
그러나 나는 서울을 사랑한다
지금쯤 어디에선가, 고향을 잃은
누군가의 누나가, 19세기적인 사랑을 생각하면서
그 포도송이 같은 눈동자로, 고무신 공장에
다니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관수동 뒷거리
휴지 줍는 똘만이들의 부은 눈길이
빛나오면, 서울을 사랑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날이 오기까지는.
― 신동엽, 「서울」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도시적인 삶에 함몰되어 자연의 생명력을 망각한 서울 사람들을 비판하고 있다. 아울러 “월남으로 떠나는 북소리”며 “아랫도리서 목구멍까지 열어놓고/섬나라에 굽실거리는 은행 소리” 등으로 그 상황이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화자는 “오백년 전부터도,/떼내버리고 싶었던 맹장”이었을 뿐 “서울아, 너는 조국이 아니었다”고 비판한다.
화자는 “나는 서울을 사랑한다”고 바꾸어 말하기도 한다. “지금쯤 어디에선가, 고향을 잃은/누군가의 누나가, 19세기적인 사랑을 생각하면서/그 포도송이 같은 눈동자로, 고무신 공장에/다니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나 하층민 등 민중을 서울의 주체로 여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는 “그날이 오기까지는” 서울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한다. 대지를 파괴하고 세운 도시이면서 “섬나라에 굽실거리는 은행 소리”로 넘치고 있기에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울을 농촌과 대비되는 도시 차원을 넘어 거대한 자본주의에 종속된 식민지로 인식하는 것이다.
문학의 현실 참여를 제기한 1960년대의 참여론은 순수문학이 지배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의의가 크다. 문학 정신을 일깨워 1970년대의 민중문학, 1980년대의 노동문학을 등장시키는 역할까지 했다. 따라서 오늘의 참여시에서 1960년대의 참여론은 충분히 수용할 만한 가치를 갖는다. 그렇지만 한계점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기존의 참여론으로는 자본주의가 심화 및 확대되어 있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를 제대로 반영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진단은 참여론 자체의 이론적인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론의 개념을 좀 더 유연하게 적용하자는 것이다. 어느덧 한국 사회는 1960년대의 참여론이 열망했던 민주주의를 이루었고 사회 구성원들도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자본주의의 심화로 인해 이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들이 대두되고 있다. 따라서 오늘의 참여시는 이분법적인 논리를 넘어서는 열린 인식이 필요한 것이다.
3.
참여시의 추구는 곧 사회학적 상상력의 추구라고 볼 수 있다. 밀즈(Charles Wright Mills)가 『사회학적 상상력』에서 개인의 문제와 사회의 구조가 상호관계가 있다고 보았듯이 개인의 문제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구조나 구성원은 어떻고 특성은 무엇이고 다른 시대와 어떻게 다른지 등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개인의 상황을 독립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는 사회학적 상상력은 “가장 개인과 관계가 없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생된 변화로부터 인간 자신의 가장 개인적인 특징까지의 범위 및 서로간의 관계들을 살펴볼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학적 상상력은 자신의 존재가 사회적인 상황 속에서 어떤 관계가 있는지,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리고 이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등을 탐색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현재 상황이 사회 구조 및 환경과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식이나 정보 차원으로는 인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삶의 실제에서는 인식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매우 복잡하고 전문화되어 있고 급변하기 때문에 한 개인이 이해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를 간파할 만큼 지식을 갖추고 정보를 획득하고 시간적인 여유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사회학적 상상력은 이와 같은 상황을 극복하고자 개인과 사회 및 역사의 관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오토바이가게 앞을 지나가는데
다리를 걷어붙인 청년 하나가 빨간약을 바르고 있다
스패너를 든 가게 사장이
다 고치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고 말하자, 청년 왈
배달이 밀려 큰일이라며 성화를 부린다
나는 오지랖 넓게 가던 길을 멈추고
“배달이 뭔 대수냐? 빨리 병원부터 가시라”고 말하려는데
청년의 휴대폰이 울린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곧 도착합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휴대폰에 대고 쩔쩔매는 청년의 정강이로
빨간약 서너 줄이 길게 흘러내리고
수시로 회사를 때려치운다는 내 입이 부끄러워
나오려던 말을 삼키고 가든 길을 재촉한다
오토바이 한 대 내 옆을 휙 지나간다
― 황주경, 「퀵서비스」 전문
어느덧 한국인들의 삶에서 “퀵서비스”(quick service)는 제외시킬 수 없는 일상이다. 작은 생활필수품에서부터 부피가 큰 물건까지 아주 빠르게 전달받는 배달 방식은 요금이 부담되고 배송 과정에서 오류가 생기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이용도가 높다. 전화, 문자메시지, 어플리케이션 등을 이용한 주문 및 배송 방식 또한 나날이 향상되고 있다. 그렇지만 “퀵서비스” 노동자들의 근무조건은 열악한 편이다. 노동자들이 원하는 시간만큼만 일하면 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사업주의 작업 요구를 거절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의 상황에 놓여 있고, 근로계약을 제대로 맺지 않는 경우가 많아 근로기준법에 규정된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위의 작품에서 오토바이 사고로 “다리를 걷어붙인 청년 하나가 빨간약을 바르고 있”는 것이 그 모습이다. 청년은 “스패너를 든 가게 사장이/다 고치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고 말하자” “배달이 밀려 큰일이라며” 걱정하고 있다. “배달이 뭔 대수냐? 빨리 병원부터 가”야 하는 데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휴대폰이 울”리자 “죄송합니다. 사모님, 곧 도착합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라고 “쩔쩔”맨다. 자본주의 체제에 종속된 한 노동자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병원 갈 날이 되어
동네 앞 버스정류장에서
십오 분 뒤에 올 버스를 기다리는
중 늙은 사내
문득,
십오 분의 기다림이
맞춤하다는 생각이
우두커니 앉아 있어도 좋을
십오 분
가을햇살이 조금 따가웠음으로
은행나무가 만들어 놓은
그늘 속으로
들어가 있어도 좋을
십오 분
버스가 올 때까지
내게 남은
십오 분을 어떻게 쓰지?
그런 물음을 던지며
성서 속의 예수가 그랬듯이
돌 던질 만 한 거리까지
걸어갔다가 와도
좋을
십오 분
― 안준철, 「십오 분」 전문
증기기관이 발명된 이후 자본주의는 자기 이익의 확대를 위해 속도를 지속적으로 높여왔다. 토지나 가축이나 하인을 소유하던 이전 시대의 신분계급을 대체한 자본가 계급은 공장과 기술과 정보와 문화를 소유하면서 구성원들에게 속도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가 계급에 종속된 사람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체제로부터 밀려나지 않기 위해 적극적으로 따른다. 시간의 개념을 손익 차원에서 계산하고 손해 보지 않으려고 온몸으로 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십오 분의 기다림이/맞춤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위의 작품 화자는 주목된다. 자본주의가 무한하게 요구하는 속도에 맞서 주체성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자본주의 체제에 종속되지 않는 인간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 모습으로 오늘의 참여시가 지향해야 할 방향인 것이다.
4.
참여시를 지향하는 것은 결국 정치적인 관심을 표명하는 것이다. 정치는 통치자가 사회 구성원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해서 국가의 정책을 실현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개인이나 집단이 가치를 획득하기 위해 활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자본주의 사회에 함몰되지 않는 인간 가치를 추구하는 정치시는 곧 참여시의 확대이자 심화라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세월호 참사를 비롯해 예술가에 대한 블랙리스트 시행, 통합진보당의 강제 해산, 비정규직 노동자의 증가, 반개혁적인 검찰, 왜곡을 일삼는 언론, 친일문학상 옹호하는 언론사와 문학단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사회의 개혁은 지난하다. 민중들이 피를 흘리며 이룩한 민주주의가 역사 발전으로 나아가기가 참으로 힘든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이기에 정치시가 필요한 것이다.
국제정치학을 배우면서부터
시 쓰는 일도
남의 시 보는 일도 시시해졌다
아는 선배와 문학관을 구경하고
질마재 넘어오다 뺨을 맞을 뻔했다
나라야 망하든 말든 시인이
시만 잘 쓰면 된다는 말에
대꾸한 것이 화근이었다
전쟁 한번 해보지 않고도
나라를 통째로 빼앗겨버린
전환기의 역사를 모르는 것 아니지만
패망의 국제정치학은 그렇더라도
피로 물든 권력의 수괴에까지
단군 이래 두 번째로 잘생긴 미남자라고
입술에 침을 발랐던
질마재의 사유는 헤아려지지 않았다.
― 주영국, 「국제정치학의 시」
위의 작품의 화자는 “질마재”를 통해 서정주 시인의 친일 행적과 독재정권에 결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서정주 시인은 자신의 고향인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로 가는 질마재란 고갯길을 제재로 삼아 1975년 시집 『질마재 신화』(일지사)를 간행한 적이 있다. 작품의 화자는 서정주의 친일 행적을 “나라야 망하든 말든 시인이/시만 잘 쓰면 된다는 말”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광주 시민을 비롯해 민중들을 짓밟고 권력을 잡은 전두환 정권에 빌붙은 상황을 “피로 물든 권력의 수괴에까지/단군 이래 두 번째로 잘생긴 미남자라고/입술에 침을 발랐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서정주 시인은 친일 문제와 그를 기리는 친일문학상 문제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친일문학상의 시행이 폐지되지 않고 있다. 폐지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약해서라기보다는 반역사적이고 반민족적인 기득권 세력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다. 친일문학상을 시행하는 언론사나 출판사나 문단 및 학계의 권력이 강하기 때문에 심사자나 수상자는 보호를 받고 있는 반면에 폐지를 주장하는 문인들은 배척당하고 있다. 다행히 2016년 11월부터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중심이 된 친일문학상 폐지 운동이 현재는 상당한 성과를 이루었고 또 전망이 보인다. 친일 문인들의 작품 전시, 작품 낭독, 기자회견,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서명 운동, 친일문학상 시상식 항의 집회, 학술 세미나 개최 등을 지속적이고 조직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뒤 나치 협력자들을 엄격하게 처단한 유럽의 역사를 보면 우리의 친일문학상 폐지 운동은 정당성을 얻는다. 프랑스의 최고재판소는 나치 협력자 18명에게 사형을, 일반법원은 6,763명에게 사형을, 지방법원은 4,783명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을 비롯해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 등도 나치 협력자들을 엄격하게 처벌했다.
한국 문단은 친일문학상 폐지 운동을 좀 더 역사적인 차원에서 추구할 필요가 있다. 친일 문학상을 옹호하는 측은 해당 문인의 업적이 흠결보다 크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렇지만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문인들의 흠결이 결코 작지 않으므로 친일 문학상의 제정은 인정될 수 없다. 문학상은 작가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 이상으로 문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더욱이 친일 문인들은 민족 앞에 진정한 사죄를 하지 않았고 사회적으로도 용서되지 않았다. 따라서 친일문학상을 반대하는 일은 과거의 역사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사회 모순을 극복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지 오웰은 글을 쓰는 동기를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 등 네 가지라고 보았다. 순전한 이기심이란 똑똑해 보이고 싶고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고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등의 욕구를 말한다. 돈에는 관심이 적어도 허영심이 많고 자기중심적인 작가들의 경우이다. 미학적 열정이란 외부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또는 낱말과 그것의 적절한 배열이 갖는 묘미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역사적 충동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에 보존해두려는 욕구를 말한다. 정치적 목적은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고,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욕구를 말한다. 문학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1960년대의 순수문학론 같은 자세야말로 정치적인 태도이다. 어떤 문학이든 정치적인 면과 관계가 있으며 정치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 따라서 인간 가치가 실현되는 세상을 이루려고 하는 정치시야말로 참여시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내 눈에는 가만히 있으나
내 마음에는 가늘게 움직이고 있다
그 작고 여리기만 하던 것이
굵고 단단해져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긴 탯줄 배꼽에 달고
땅바닥이나 높다란 담장 위에서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더 여물어야 한다며
뿌리는 쉬지 않고 젖을 흘려보내고
바람과 빛은 넘실거리며 입술을 비벼댄다
숙의 민주주의가
민주주의 씨앗 위에서
성숙해나가는 것처럼 호박이,
가만한 것 같지만
가만하지 않는 소리를
저 깊은 곳에서 내밀히
둥 둥 북소리처럼 울려대고 있다
― 김광렬, 「호박」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호박”이 “가늘게 움직이”는 것을 발견하고 있다. “작고 여리기만 하던 것이/굵고 단단해져가는 것”을 대견하게 여기며 그 의의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화자가 “호박”이 여물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희망하는 것은 “숙의 민주주의”이다. “숙의 민주주의가/민주주의 씨앗 위에서/성숙해나가는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숙의 민주주의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평등한 조건에서 자유롭게 토론해 만들어낸 결과를 국가의 정책 결정에 반영하는 제도이다. 정책 결정의 결과보다도 과정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으로 참여 민주주의 제도라고 볼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민주주의는 투표를 통한 다수결 원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과정보다는 이미지와 여론과 이념 등을 부각시키고 있다. 따라서 정책 결정의 반영이 투표로 나타나는 선호도가 아니라 실제적인 숙의를 통한 여론을 주요하게 여기는 숙의 민주주의는 주목된다.
자본주의는 공동의 이익보다 개인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평등의 가치를 폐기하고 있다. 또한 자본주의는 상호 경쟁을 통해 영위되고 있기에 열악한 조건에 있는 구성원들은 적응하기 힘들고, 그 결과 소득 격차가 더욱 벌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시인의 사회 참여는 중요하다. 점점 세계화가 확장되고 있듯이 자본주의의 종말을 함부로 전망할 수 없고, 그것만이 인간 가치를 실현하는 대안이라고 말할 수도 없기에, 이분법적인 세계인식을 극복하고 연대의식을 지향하는 참여시가 필요한 것이다.
맹문재
시론 및 평론집으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패스카드 시대의 휴머니즘 시』『지식인 시의 대상애』『현대시의 성숙과 지향』『시학의 변주』『만인보의 시학』『여성시의 대문자』『여성성의 시론』 『시와 정치』 등이 있다. 현재 안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