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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2> 한벽교
디카 황 추천 0 조회 40 19.01.13 14: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초록으로 물든 거리를 걷노라면 전주천의 맑은 공기와 파란 하늘이 서로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대도시의 한 가운데를 통과하는 시냇물 중 가운데 전주천 만큼 맑은 물빛을 간직한 곳이 또 어디 있을라구. 계절이 바뀌는 창변(窓邊)에서 문득, 전주천변의 오모가리탕집 평상 위로 당신을 기꺼이 초대하고 싶다.

 

승암산 기슭의 절벽을 깎아 세운, 전주 옥류동고개 옆 한벽당(寒碧堂,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호)은 일찍이 유생들이 풍류를 즐기고, 각시바우, 서방바우에서는 아이들이 고기잡고 멱감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여름철 집중 호우때면 갑자기 불어나는 물로 아찔했던 기억도 있겠다.

 

그래서인가, 아주 오래 전에는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이곳을 찾았으며, 그들이 제영(題詠)한 시가 많이 전해오고 있다. ‘호남읍지(湖南邑誌)’ 등에는 이경전, 이경여, 이기발 등 20 여명의 저명한 인사들이 한벽당에서 지었다는 시문이 지금도 게첨돼 있는 등 그 시절의 풍류를 엿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애시당초엔 여기를 최담(1404년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집현전직제학 등을 지냄)의 호인 월당(月塘)을 따서 월당루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한벽당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벽옥한류(碧玉寒流)’라는 글귀에서 ‘한벽(寒碧)’이라는 어구를 따서 후세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 아닌가 추정될 뿐. 그러나 ‘한벽청연(寒碧晴烟)’으로 완산팔경의 하나였던 이곳이 흰 도포자락을 휘날리는 고고한 선비의 이미지와 겹쳐지는 오늘에서는.

 

 슬치에서 시작된 상관 계곡의 물은 좁은목을 지나 이곳 한벽당 바윗돌에 부딪쳐 흰 옥처럼 부서지면서 한옥마을 앞으로 우회하게 된다. ‘벽옥한류(碧玉寒流)’라는 이름을 붙은 연유다. 예전에는 동고산성 자락과 남고산성 자락이 이어져 한벽당에서 보면 마치 폭포가 떨어지는 것 같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아무튼 한벽당 앞에서 피어오른 물안개가 서서히 사라져 가는 모습을 가히 절경이라 했으며, 전주향교가 가까운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까닭에 전주의 선비들이 이곳에서 전주천을 바라보며 시조를 읊었을 터이다. 양귀자씨의 단편소설 ‘원미동 사람들’에도 그 일부의 모습이 소개된다.

 

‘여류소설가인 나는 어느 날 25년전, 고향 전주의 철길 옆동네에 살던 찝빵집 딸 박은자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그녀는 부천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으며 다음 주면 신사동에 카페를 개업하게 되니 이번 주에 꼭 자신을 찾아왔으면 한다. 그러나 소설의 주인공 나는 옛 추억을 떠올리며 네 명의 오빠와 자신을 늠름하게 키워낸 큰오빠를 기억한다. 은자의 전화 통화 이후 어머니로부터 큰오빠의 상태가 좋지 않다며 매일을 술로 지샌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큰오빠는 고생 끝에 얻은 성공 뒤의 허망함을 느끼는 것이리라. 결국 소설 속의 나는 은자를 찾아가고 싶었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하략)’

 

 남원, 구례, 곡성, 순천, 진주 등으로 가는 나그네들은 오룡교(남천교)를 건너면서 한벽당의 풍광을 감상했으며, 낚시꾼들은 한벽당의 아름다운 경관을 배경으로 이 일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풍류삼매에 젖었다고.

하지만 그렇게 사랑을 받아온 한벽당도 시대가 변하면서 아픔을 겪어야 했다. 등 뒤로 전라선이 지나며 굴이 뚫렸는가 하면, 허리 옆으로는 17번 국도가 생기면서 예전의 풍취는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한벽교는 총연장 103.6미터, 교폭 22.5미터로, 1982년 12월 22일부터 공사에 들어가 1986년 9월 30일까지 착공, 전주와 남원을 연결하는 교량이다. 당시 시행청은 이리지방국토관리청, 시공자는 주식회사 금강으로 돼 있다.

 

한벽교 바로 위 옥류동엔 최담유허비(1828년 송치규가 짓고 전면을, 세손 최설이 후면을 씀)가 있으며, 바로 건너편엔 월당선생찬시비, 한벽당(돌계단의 편액은 작가 미상으로 보기도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최담선생의 글씨라고도 함, 큰 길에서 보이는 편액은 송성룡선생이 예서로 씀), 요월대(편액은 황욱선생이 행초서로 씀), 그리고 조선 후기 3대 명필로 꼽히는 창암 이삼만(1770-1847), 전주 최학자(금재 최병심,1874~1957)의 흔적과 함께 지금은 전라선 터널이 다니지 않는 한벽굴까지 컨텐츠가 무궁무진하게 많다.

 

‘어느 날 조선 후기 명필로 유명했던 창암 이삼만선생이 한벽당에 오르자 부채 장사가 태연히 잠을 자고 있었다. 창암은 부채 장사가 잠들어 있는 동안 모든 부채에 일필휘지로 글을 써 놓았다. 부채 장사가 잠에서 깨 화를 내자 창암이 흐뭇하게 미소를 띠고 당장 남문거리에 가서 부채를 팔아보라고 했다. 부채 장사는 창암의 말대로 남문거리로 나갔고, 부채는 불티나게 팔렸다. 부채 장사가 다시 한벽당에 돌아와 사례를 하려 하자 창암은 한벽당에 머문 바람을 모두 가졌으니 부질없다며 거절했다’

 

또,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제주도로 유배가는 길에 일부러 창암을 한벽당에서 만나 운필로 서로 화답하는 가운데 “과연 소문대로 명필이시군요(名不虛傳)”라고 감탄했다. 추사가 제주도 유배가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는 도중에 다시 한번 그를 보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고인이 되었으므로 창암의 묘비와 비문을 지어 주어 현재 완주군 구이면 잣골의 묘비에 흔적이 남아 있다.

 

실제로, 한벽당 인근은 조선 후기 3대 명필로 꼽히는 창암 이삼만선생이 태어난 곳. 한벽당 바로 옆 공터(옥류동고개 오르는 초입)엔 창암이 이곳 출생이라는 푯말은 없지만 바위에 ‘취리한중 건곤일월(醉裏閑中, 乾坤日月)’, ‘백화담(白華潭)’이란 글귀를 볼 수 있으며, 글자 미상의 전서도 모습을 드러내지만 ‘옥류암(玉流巖)’과 ‘연비어약(鳶飛魚躍)’이란 글씨는 보이지 않는다.

 

한벽당을 ‘한벽루(寒碧樓)’로 부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호남삼한(湖南三寒)은 전주 한벽루(寒碧樓)와 남원 광한루(廣寒樓), 무주 한풍루(寒風樓)를 일컫는 말로, 모두 빼어난 경치로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던 곳들이다.

 

 바로 아래, 옛 기차길 터널 ‘한벽굴’은 일본이 일제강점기를 틈타 한벽당의 정기를 자르고 철길을 만들었는데 전라선 터널이었다. 과거 옥류동과 한벽당 일대는 누대에 걸쳐 월당 최담의 후손들이 자리잡고 살았다. 하지만 조선말 전라도 지역의 대학자요, 항일투사로 존경받던 금재 최병심선생이 종대를 지키고 있던 시기에 한일합방이 되고, 이곳에 전라선 철도가 개설된다. 금재가 여러 방면으로 저항했지만 결국 500여년전 전통을 지켜온 최씨종대 터에 철도가 놓여지게 되고 명문가의 흔적이 사라지고 말았다.

 

 1931년 10월 전주-남원간 철도가 개통됐다. 당시 전라선 철길은 이리역에서 삼례, 덕진을 거쳐 현재의 전주시청에 있던 전주역을 지나 오목대~이목대~한벽굴을 거쳐 중바위 서쪽 아래를 타고 색장동을 통과서 남원을 향했다. 한벽굴은 나들이 장소로 유명한 한벽루, 그리고 전주천 빨래터와 더불어 전주시민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곳이라고.

 

김규남 전북언어문화연구소장은 ‘백 년 전으로 떠나는 전주의 지명여행’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왜인들이 파괴를 일삼으면서도 명분은 개발이었던 것처럼 이곳 역시 철로 개설이라는 명분으로 이목대에서 오목대로 이어지는 발리산의 정기를 잘라냈다. 조용한 산자락에서 둘러 앉아 낭랑하게 글을 읽던 향교 뒤로 또 전주천을 바라보며 시를 읊던 한벽루를 떨거지로 남겨 초라하게 만든 채 일제의 철로는 조선의 자존심을 짓밟으며 지나다녔을 것이다.”

 

전주시는 ‘천년전주 혈맥잇기 사업’을 통해 오목대와 이목대의 문화적환경적 가치에 대한 종합적인 조사와 분석을 실시, 이를 토대로 옛 능선을 복원할 계획이란다.

 

 지금, 한벽교 아래 터널은 시민들의 아늑한 휴식공간으로 탈바꿈 됐다. 도시미관 향상은 물론 시민들에게 아늑한 친수공간을 제공하고 한벽당과 인근의 전통문화센터 및 한옥마을 이미지와 잘 어울리도록 터널 경관을 개선했기 때문이다.

 

 터널 내부 전체를 핸디코드로 도색하고, 은은한 조명설치와 편히 앉아 전주천을 관망할 수 있도록 의자를 설치했음은 물론 한벽당에서 전주천 산책로로 내려가는 돌계단에 난간을 설치, 추락 등으로 인한 안전사고를 방지토록 하는 등 천년고도 전주시 홍보에도 한 몫을 거들고 있다. 새전북신문 문화교육부장 이종근

 

‘구름다리 오목교’

 

 승암산에서 오목대로 이어지는 혈맥이 1931년경 전라선 철도가 생기면서 단절됐다. 당시 남원에서 전주로 들어오는 기차가 이곳만 지나면 속도가 느려져 기차에서 뛰어내린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던 중 전주 유림들의 혈맥잇기 의견으로 오목대와 이목대를 잇는 구름다리 오목교가 생겼는데, 그후로부터 기차 속도가 빨라졌다고 한다.

 현재 오목교는 1980년경 전라선 철길이 아중리로 이전되면서 기린로 확장 공사와 더불어 1987년말 다시 설치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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