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김씨 "新羅 三性 淵源譜" 왜곡변조
"新羅 三性 淵源譜" 왜곡변조 사진下:삼성연원보 서문(국립중앙도서관소장 1934년판 원본) 별첨사진:책자발간기록(국립중앙도서관 1934년판 원본)
*국립중앙도서관에 변조된 또다른 신라삼성연원보가 있다. 1.신라삼성연원보 1934년 김경대 편저판 1934년 간행시 1차 씨족역사변조 2.신라삼성연원보 1997년 경주김씨 계보연구회 간행 1997년 간행시 2차 씨족역사 변조완성
신라삼성연원보는 1934년 일제시 평안도에서 저자 김경대란 사람이 발간한 70년된 虛錄의 문서이다.
우리나라 박석김 왕성 최고 족보로 둔갑시켜 자신들의 씨족역사 왜곡 변조를 위한 고문서로 이용하고 있다.
1.본글을 찬한 "경순왕의 44세손 택준"이란 인물을 "경순왕의 "24세손 택준"으로 변조하고
2.편저작자 김경대란 사람을 자신들의 족보에 있는 사람 萬鋌으로 개명했다는 식으로 날조된
3.또 다른 "신라 박석김 삼성연원보"가 "경주김씨 계보연구회"에서 1997년 발간되어 다량이
자신들의 종인들과 일반에게 판매 보급하고 마의태자를 자신들의 시조로 둔갑시켜 계보연구지, 계림지등을 경순왕릉등에서 까지 다량으로 유포되고 있다.
4.또한 변조된 자료는 국립중앙박물관등에 까지 소장자료로 비치하고 있다.
5.신라김씨등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참으로 안타가운 일로 이들의 의도를 주시하며 씨족역사 왜곡를 경계하는 바이다.
6.그렇다면 신라삼성연원보는 언제 누가 왜 발간되었나?
*新羅朴昔金淵源譜緣起 ----辛未孟秋上澣慶順王44世孫澤俊謹稿 신미(서기1931년)가을의 첫 상순 경순왕의 44세손 택준 삼가쓰다. 44세손은 25년/세 으로 계산시 오차감안 경순왕서기882년(헌강왕8년탄생) 1931년으로 명확히 판독됨.
*三姓淵源譜序----新羅建國後1699年壬申陽月旣望兎山李承學謹序 신라건국후1699년(서기1642년 인조20년은 壬午임) 實 임신년과는10년 차이로 년대가 맞지 않음에 의도적 곡필.찬술자 이승학이 사용한 신라건국후 몇년식 年號보다는 干支연호가 더욱 신뢰성있음.신라건국후 1699년 임신년은 서기1932년 임신년.
*은열공의 후 1자,2자 내용중 "全羅南道 長興郡 府西面 譜 準記載" "平安北道 龍川郡 龍川面 栢山洞 습敦係 全羅南道 長興群府南南松岩里 金英贊家譜準記載" 중에서 행정구역을 全羅南道,平安北道 표기는 갑오경장잏 일제시대 행정표시방법이다'
*책자 출판사(光文社印刷所) 著作兼 發行者 金景大 昭和9年5月30日 책자발간책자 발간은 김경대가 소화9년(1934년)에 평안북도 신의주에 있던 劉能進이 경영하는 광문사 인쇄소이다.
*발행후 조선총독부도서관 검인 소화9년 6,25 확인인
*운영자의 종합의견
본삼성연원보는 일제 시대말에 족보가 필요로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평안도 함경도 전라도등 전국각지를 돌아 다니며서 씨족족보를 만들어주는 일을 전문업으로 하는자 들이 있었다.
돈을 주고 받고 적당히 자신들의 계대를 맞추어 위조족보를 만들은 사람들이 족보책자를 만들때 신뢰성을 가하기 위하여 글을 하는 선비를 또한 매수하여 서문을 좋게 쓰게 하고 택준,이승학이 찬글을 보여주고 많은 족보희망 동업자를 구하여 자신들의 족보 제작키 위한 영업 수단으로 본 책자를 제작하게된 동기로 사료된다.
그래서 일제시대에 일반 서민도 앞다투어 위보를 만들게된 원인을 제공한 신라 삼성연원보는 많은 씨족변조의 모델책자로 만들어진것이 해방과 더불어 사라졌다가 1995년경 새로 등장하여 일부 사이비학자들이 인용하고 있는것으로 사료된다.
고로 각종 족보등 문헌을 거론시 신라 삼성 연원보를 말하거나 인용하는자는 99% 사이비 얼간이 학자로 분류된다. 자료제공: 울산김씨 홈 www.ulsankim.org)
*신라삼성연원보 정리 서기 1931년(신미년)에 택준이란 후손이쓰고, 서기 1932년(임신년) 토산 이승학이 서문을 찬하여 서기 1934년(소화9년) 김경대가 책자를 간행한것으로 사료됨.
연안김씨 대종회 평가
연안김씨 선계연구(고증문헌을 중심으로)
연안김씨의 선계에 대하여 기해보,을유보,안락당집,선원보감,씨족원류,신라삼성연원보,동국김씨문헌록을 고증자료라 하면서 시조 박사공을“신라신무왕차자영광공후예(新羅神武王次子英光公後裔)”라고 주장하는 일부 종인이 있습니다.
그 주장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기해보, 을유보, 안락당집, 선원보감, 씨족원류 이상 5개의 문헌에는“연안김씨는 신라종성으로 왕에게 직간하다 미움을 받아 연안으로 유배된 분이 있어, 그 후손으로 고려 명종 때 국자감 사문박사이신 휘 섬한을 시조로 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해보(1719년), 을유보(1765년)는 우리 연안김씨의 족보이고, 안락당집은 희락당(안노)공이 그의 아버지 안락당공의 문집을 정리한 것으로 1516년에 간행한 것이며, 선원보감에는 인목대비의 능지문이 실려있습니다.
안락당집의 세계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연안김씨세계록(延安金氏世系錄) 김씨계출신라종성초형제이인재국직간오왕류원지수제적형거북빈경제거시염성인가언고구려시동삼홀지칭시염성후개해고군국자박사휘섬한시기후손유박사공이상세원무적불가고 (金氏系出新羅宗姓初兄弟二人在國直諫오王流遠地遂除籍兄居北濱京弟居시鹽城因家焉高句麗時冬參忽地稱시鹽城後改海皐郡國子博士諱暹漢是其後孫由博士公以上世遠無籍不可考)
원문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김씨는 신라왕족에서 나왔다. 처음에 형제 두 사람이 있어 옳은 말로 왕에게 간하다가 오히려 미움을 받아 먼 곳으로 유배되고 제적되어 형은 북빈경에 살았고, 아우는 시염성에 살면서 한 집안을 이루었다.
시염성은 고구려 때 동음홀 땅으로 후에 해고군으로 고쳐 부르고 서해도에 예속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염주라고 불렀으며 공민왕 때 연안부로 개칭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국자감 사문박사 휘 섬한은 그 후손이며, 박사공 이상의 세계는 아득히 멀고 기록이 없어 상고할 수 없다"
인목왕후 능지문은 왕조실록에 기록된 자료이며, 국가에서 작성한 공식문서로서 중요한 역사적 사료입니다. 인목왕후 능지문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목 왕후의 산릉(山陵)에 흙을 덮는 일이 완성되자, 상이 신 유(維)가 사액(詞掖)의 관장(官長)이라 하여 현궁(玄宮)의 지문(誌文)을 지으라고 명하시기에, 신이 명을 받고 황공 스러웠으나 스스로 직책의 일을 생각해 보건대 감히 글을 못한다고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살펴 보건대 왕후(王后)의 성은 김씨(金氏)로서 선계(先系)는 신라(新羅) 왕족에서 나왔다. 그 뒤에 바른 말로 간(諫)하다 죄(罪)를 입고 시염성(시鹽城)으로 귀양간 이가 있어 자손(子孫)들이 인(因)하여 관향(貫鄕)을 삼았는데 뒤에 연안부(延安府)로 고쳤다.
시조(始祖)는 김섬한(金暹漢)인데 고려의 사문박사(四門博士)이며, 4대를 지나 도(濤)에 이르러서는 문장과 절행이 있어 황조(皇朝)의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동창부(東昌府) 안구현승(安丘縣丞)에 제수되었고, 동쪽으로 돌아와서는 벼슬이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이르렀으며, 또 4대가 지나 충정공(忠貞公) 김전(金詮)에 이르러서는 영의정 벼슬을 하여 청백(淸白)으로써 소문났는데, 왕후에게 고조(高祖)가 된다"
씨족원류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씨족원류(氏族源流)는 1665년경에 조종운( 趙從耘)이 540여 성(姓)에 관한 자료(資料)를 포집하여 필사(筆寫)했던 책을 후손인 조용진(趙鏞珍)교수가 수장(收藏)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1991년에 보경문화사에서 영인(影印)출판한 것이다. 이 책에 延安金氏의 기록을 보면 김섬한(金暹漢) 국자사문박사(國子四門博士) 신라시유왕자형제이직간오주의적원지(新羅時有王子兄弟以直諫?主意謫遠地) 형거북빈경금강릉지제거시염성인이위향(兄居北濱京今江陵地弟居?鹽城因以爲鄕) 후손섬한등제위박사훈회후학불권(後孫暹漢登第爲博士訓誨後學不倦)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김섬한은 국자사문박사이며 신라시대에 왕자형제가 있었는데 왕에게 직간하다가 오히려 미움을 받아 먼 곳으로 유배되었는데, 형은 북빈경 지금의 강릉땅에, 동생은 시염성에 살면서 관향을 삼았다.
그 후손으로 섬한이라는 분이 과거에 급제하여 박사가 되었고 후학들을 가르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연안김씨의 연원에 대하여 확실하게 밝히고 있는 기록들입니다.
박사공 이상의 선계는 신라왕자라는 사실 외는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적고 있습니다. 시조 박사공이 신무왕이나 영광의 후손이라는 말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고증문헌은 신라삼성연원보, 동국김씨문헌록 뿐입니다. 그 분들은 신라삼성연원보, 동국김씨문헌록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姓淵源譜)는 인조 때인 1642년에 처음 발행된 것으로 소와(昭化)9년(1934년) 5월30일 김경대(金景大)라는 사람이 그 이후의 내용을 첨가하여 저작발행 하였다라고 하면서 이 책 111페이지에 "신라왕자영광후손섬한고려사문박사입대명등과형제이직간오주지적원지형거북빈경금강릉제거염성금연안자손인이위향박사훈회후학(新羅王子英光後孫暹漢高麗四門博士入大明登科兄弟以直諫?主旨謫遠地兄居北濱京今江陵弟居鹽城今延安子孫因以爲鄕博士訓誨後學)"라는 내용을 고증자료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동국김씨문헌록(東國金氏文獻錄)은 대보공탄강이천유여년기사입춘성균진사월성김한식근식(大輔公誕降二千有餘年己巳立春成均進士月城金漢植謹識), 통정대부비서원승원임규장각직각은진송규헌(政大夫秘書院丞原任奎章閣直閣恩津宋奎憲) 서문(序文)으로 1637년 정축척화신등재이후출간(丁丑斥和臣登載以後出刊)하였다고 하면서 그 책 2페이지에"연안김씨선조섬한신라왕자후야고려명종조사문박사입대명등제(延安金氏先祖暹漢新羅王子后也高麗明宗朝四門博士八大明登第) 신라왕자영광후섬한제야형제이직간오주지적원지형거북빈경금강릉제거시염성금연안자손이위향박사훈회후학(新羅王子英光后暹漢弟也兄弟以直諫오主旨謫遠地兄居北濱京今江陵弟居시鹽城今延安子孫以爲鄕博士訓誨後學)"이라는 내용을 고증자료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라삼성연원보, 동국김씨문헌록은 1930년대에 간행된 것으로, 이미 신라삼성연원보에 대한 허구성이나 오류에 대하여는 많은 지적이 있었습니다.
먼저 제작년대에 대한 의문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정황과 내용으로 볼 때 신라삼성연원보가 1934년에 제작된 책이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신라삼성연원보록기(新羅朴昔金淵源譜緣起)에 신미맹추상한경순왕44세손택준근고(辛未孟秋上澣慶順王44世孫澤俊謹稿) 즉 "신미년 가을의 첫 상순 경순왕의 44세손 택준 삼가쓰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통 25년을 1세(世)로 계산할 때 경순왕이 탄생하신 서기882년부터 44대 후손의 신미년은 1931년으로 추정됩니다.
삼성연원보서(三姓淵源譜序)에 신라건국후(新羅建國後) 1699년 임신양월기망토산이승학근서(壬申陽月旣望兎山李承學謹序)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라건국 후1699년인 서기1642년 인조20년은 壬午年 입니다.
실제 임신년과는10년 차이로 년대가 맞지 않음에도 의도적 곡필한 것으로, 찬술자 이승학이 사용한 신라건국 후 몇년식 년호(年號)보다는 간지(干支)연호가 더욱 신뢰성이 있음으로 신라건국 후 1699년 임신년은 서기1932년 임신년을 의도적으로 곡필한 으로 추정됩니다.
은열공의 1자,2자 내용 중 "平安北道 龍川郡","全羅南道 長興郡 府南面 松岩里 金英贊家譜準記載"중에서 행정구역을 全羅南道, 平安北道로의 표기는 일제시대 행정구역 표시방법입니다.
책자의 저작겸(著作兼) 발행자(發行者)는 김경대(金景大)이며, 소화9년(1934년) 5月30日에 평안북도 신의주에 있던 유능진(劉能進)이 경영하는 광문사인쇄소에서 발간한 책입니다. 발행 후 조선총독부도서관 검인 "소화9년 6.25"이라고 확인인이 찍혀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신라삼성연원보는 서기 1931년(신미년)에 택준이란 후손이쓰고, 서기 1932년(임신년) 토산 이승학이 서문을 찬하여, 서기 1934년(소화9년) 김경대가 책자를 간행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본문중 우리 연안김씨편에 대제학재찬손유연문우상(大提學載鑽孫有淵文右相)이라는 내용으로 볼 때 1900년대 자료가 확실합니다.
1642년에 저술한 책을 300년후인 1934년에 김경대라는 사람이 추가기록하여 간행하였다 라고 하는데 그 근거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고문을 가필하고 보충하여 다시 펴낼 때는 책이름 앞에 증보(增補), 신(新) 등을 붙이는 것이 통례입니다. 그리고 개명(改名)했다는 김경대와 300년 후에 복간한 김경대는 같은 사람인지 다른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경주김씨 종보 제350호(2004.7.31)에 "신라삼성연원보"는 그 내용이 근거도 없는 것이고 또 신빙성이 없는 것들로 채워져 있으며 이 책의 허구성에 대하여는 이미 1999년 12월 31일 "경주김씨 종보 제295호"에 그 오류를 지적한바 있다는 내용의 경주김씨 중앙종친회 안내문을 게재하고 있습니다.
삼성연원보에는 연안김씨에 대하여 “延安金氏殷烈公十四世孫暹后一云暹漢后高麗明宗朝四門博士入大明登科 新羅王子英光后暹漢兄弟以直諫?主旨謫遠地兄居北濱京今江陵弟居?鹽城今延安子孫以爲鄕博士訓誨後學” (연안김씨은열공십사세손섬후일운섬한후고려명종조사문박사입대명등과 신라왕자영광후섬한형제이직간오주지적원지형거북빈경금강릉제거시염성금연안자손이위향박사훈회후학)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연안김씨 시조 박사공을 경순왕의 아들 은열의 14세손이라고 했다가, 뒤에 가서는 신무왕의 아들 영광의 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12세기 인물인 시조 박사공이 14세기에 개국한 명나라 과거에 급제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왜곡되고 잘못된 기록들은 무시하고, 그 분들의 주장에 필요한 부분만을 발췌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동국김씨문헌록의 서문을 쓰신 분이 통정대부 비서원승 은진(恩津) 송규헌(宋奎憲)이라 하는 바 "비서원승"은 갑오경장이후 "승정원승지"를 개칭한 관직이므로 제작 년대는 1900년대가 확실합니다.
실제로 동국김씨문헌록은 신라삼성연원보와 내용이 비슷하고 제작 년대가 비슷합니다.
시조 박사공이 명나라 과거에 급제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삼성연원보와 똑같이 우리 연안김씨편에 대제학재찬손유연문우상(大提學載鑽孫有淵文右相)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런 책이 병자호란, 척화론과 결부시켜 1637년에 간행된 문헌으로 둔갑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자료가 우리 연안김씨에 대한 선계를 밝힐 수 있는 고증자료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우리 연안김씨의 연원에 대하여 주옥같은 고문서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데 1900년대에 제작된 책들에 근거없이 써놓은 것을 고증자료라 하여 선계를 왜곡시킬 수 있는지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간 수백년간에 걸쳐 선조들께서 박사공 이상의 선계를 밝히고자하였으나 불가능하였습니다. 세월이 오래되고 아무런 기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재까지는 박사공 이상의 선계는 불가고(不可考)로 하고 있습니다.
1900년대부터 쏟아져 나온 씨족사에 관한 기록들, 신라삼성연원보를 위시하여 다른 김씨들의 족보나 소위 선원계보라는 곳에 우리 연안김씨의 연원에 대한 왜곡된 기록들이 더러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아무런 검증도 없이 그런 기록을 사실인양 인정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연구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2006년 3월 10일 연안김씨대종회(延安金氏大宗會) 현창연구위원회顯彰硏究委員會)는 연안김씨 선계(先系)에 대하여, 이와 같이 혼란스럽고 고증(考證)도 없는 다른 집안 족보류(族譜類)의 기록을 일축하고 안락당집(顔樂堂集)에 근거하여 우리 연안김씨의 선계(先系)를“박사공이상의 선계는 불가고”임을 재확인하였다. 대종회에서 이에 그치지 말고 다른 김씨 등의 족보에 우리 선계에 대하여 왜곡하여 서술하고 있는 사실들에 대하여 바로 잡을 수 있는 조치를 서둘러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역사 연구가의 평가
안녕하십니까
저의 블로그를 방문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1642년에 간행된 삼성연원보가 있다기에 내용에 큰 기대를 갖고 국립중앙도서관에 보존되고 있는 2종의 연원보를 복사 의뢰하여 흝어 보았으나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심도있게 분석해 보지는 않았지만 몇가지 의문(모순)점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신라삼성연원보는 소화9년(1934년) 5월30일 김경대가 저작겸 발행한 동일판본으로 어느 것이 원본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부 변조된 책이었습니다.
즉 소화9년(1934년) 발행본과 소화9년(1934년) 발행본을 1997년 경주김씨 계보연구회에서 영인본으로 간행한 것으로 이 두 책자를 단순비교 해 보니 다른점은
○ 서문 중 新羅朴昔金淵源譜緣起에 1934년 발행본에는 “辛未孟秋上澣 敬順王44世孫澤俊 謹稿”로, 1997년 계보연구회 영인본에는 “辛未孟秋上澣 敬順王24世孫澤俊 謹稿”로
이 책을 撰한 澤俊이 경순왕 44세손과 24세손으로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음.
○ 본문을 보면 책의 판심제(版心題)가 1934년 발행본에는 석씨부분 일부(2p 중 1p)는 <월성석씨연원보>, 김씨부분은 <계림김씨연원보>라 되어 있으며, 1997년 경주김씨 계보연구회에서 간행한 영인본에는 모두 <신라삼성연원보>라 되어 있음. 그리고 계림김씨 연원보중 영분공 종(鐘 ; 휘 殷鐘 또는 鳴鍾)의 직계후손 계보가 아래와 같이 서로 다름을 발견하였음.
☞ 1934년本 ⇒ 종(鐘) - 호(浩) - 억종(嶷宗) - 계옹(季邕) - 남두(南斗) - 예겸(禮謙)
☞ 계보연구회 영인본 ⇒ 종(鐘) - 풍웅(豊雄) - 운영(雲苓) - 예겸(禮謙)
이 두 책의 의문(모순)점은
○ 서문을 보면 “三姓淵源譜序----新羅建國後1699年壬申陽月旣望兎山李承學謹序”로
신라건국후 1699년(서기1642년 인조20년, *干支는 壬午임) 壬申 음력10월16일 토산 이승학이 서문을 찬술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간지가 10년 차이로 년대가 맞지 않음.
○ 경주김씨 계보연구회에서 1997년 11월 영인본을 발간하면서 “本 三姓淵源譜는 于今 355년전 新羅建國後 1699년 壬午歲(인조20년)의 刊行族譜이나 序文上 干支表示壬申은 壬午의 錯誤이고 전라남도 장흥군 서면 남송암리 金永贊家譜準記載라 하여 探訪索出을 企圖하였으나 發掘未及은 實로 哀惜之事이다.
後記刊行文에 昭和9年度에 印刷刊行記事는 日政當時 朝鮮總督府圖書館 檢印年度表示에 不過하다. 故로 元來 木版本이 金屬活字本으로 重刊된 것으로 看做된다.” 라고 하였음.
따라서 중간(重刊)이라 함은 이미 펴낸 책을 거듭 간행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통상적으로 원문에 중간(重刊)의 취지를 알리는 서문, 발문을 추가하여 발간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위의 표현대로 1642년 간행된 목판본을 금속활자본으로 중간(重刊)하였다면 수록 내용이 1642년 이전의 사건만 수록되어야 하나 다음과 같이 이후의 사건이 다수 수록된 것으로 보아 1642년 목판본을 그대로 금속활자본으로 인쇄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됨.
예) 신라시조왕 묘비명:영조32년(1759년), 숭혜전 연혁:高宗丁亥(1887년) 8월30일, 대덕선생비문:康熙48년(1709,己丑,숙종35)10월10일, 수군절도사 金公 應秋 行略과 병조참판 金公 慶福行略:숙종2년(1672), 儒賢系 인물 중 박태보(朴泰輔, 1654~1689), 권상하(權尙夏, 1641~1721) 등 1642년 이후의 인물이 수록되어 있음.
또 孫錄 중 행적 기록내용을 보면 平安北道, 全羅南道 등 1896년 이후의 행정구역 명칭을 표기한 것을 볼 수 있음.
이외에도 심도있게 살펴보면 모순점이 많이 있으리라고 봅니다.
따라서 이상내용을 종합해 볼때 본인의 판단으로는 이 신라삼성연원보는 서기 1931년(辛未) 7월 상순에 경순왕의 후손 김택준이 쓰고, 서기 1932년(壬申) 음력10월16일 토산 이승학이 서문을 찬하여 서기 1934년(소화9년) 5월에 김경대가 평안북도 신의주에 있던 유능진(劉能進)이 경영하는 광문사인쇄소에서 간행한 책이라 사료됩니다.
※ 이상 나열된 내용은 제 사견(私見)임을 밝혀둡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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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 부령(부안)김씨 대종회와 신라김씨연합대종원 각 이사님들의 문중에서도 삼성연원보는 잡보로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태자파가 아무리 발악을 해도 김일(마의태자)의 유적지가 많은데 그 중에서 항려운동의 근원지에 있는 대왕각에서 매년 추향대제를 모시는 역사적인 문화재에는 근접도 못하는 것이 바로 삼성연원보로 급조한 사이비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이 삼성연원보를 근거로 족보를 만든 사이비 파들은 설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성균관대 중심의 모든 역사학자들이 고증을 연구하여 부령(부안)김씨가 경순대왕 첫째 김일 왕자의 후예라고 결정한 역사를 존중한다.
삼성연원보를 근거로 가짜 족보를 만들기는 돈으로 하니까 가능한데 김일(마의태자)의 후예라면 흔적이 되는 역사의 문화재나 어떤 형태의 사당이라도 영정을 모시는 제례를 갖춘 근거나 의무는 저버리고, 막무가내로 삼성연원보 가짜 족보만을 내세우면서 태자파가 김일(마의태자) 후손이라 하면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입니다.
우리 부령(부안)김씨는 오는 음력 9월 9일 추향대제일 이전에 문화재청 관계자와 협의하여 대왕각 단청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뿌리가 없는 가짜들이 돈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의연하게 우리 부령(부안)김씨 대종회에서 시행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