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너머 흰
1.
마을을 에워싼 나지막한 산, 오솔길은 포근했다. 아버지를 뒤따라 오랜만에 걷는 그 길이 낯설지 않았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방학 때마다 할머니 집에 내려갔지만, 고등학생이 되고부터는 자주 가지 못했다. 하기야 먼 남쪽 바다에 떠 있는 금당도(金塘島)는 너무 멀었다. 교통이 편리한 오늘날에도 서울에서 하루 만에 할머니 집을 가는 것은 힘든 여정이다.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키 작은 떡갈나무들이 반갑게 넓은 잎을 살랑거렸다. 맹감나무의 넝쿨이 다리를 휘어 감았다. 어린 고모와 함께 소꿉놀이하던 아기호랑이굴을 지나치지 말라고 귀띔하는 듯했다. 성긴 숲속으로 햇빛이 송송 내려앉았다. 은은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찔레꽃이 하얗게 웃었다. 할머니의 웃는 모습이었다. 풍화되었던 시간의 숲이 풋풋하게 되살아났다.
추수를 끝낸 농촌의 겨울은 한가하다지만 바다가 삶의 터전인 섬은 그렇지 않다. 김 생산으로 한 해를 살아가는 금당도의 겨울은 새벽부터 밤늦도록 눈코 뜰 새 없다. 매섭고 혹독한 겨울, 거친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는다. 그러나 바닷바람이 아무리 몰아쳐도 섬 사람의 소박하고 순전한 마음을 앗아가지는 못한다.
겨울방학이 되어 할머니 집에 내려가면 나는 늦잠공주가 되었다. 방문이 환하게 밝아서야 일어나면 식구들이 김발을 보러 나가고 나만 남았다. 방 윗목에 밥상이 있었다. 상보를 걷었다. 옹기종기 놓여 있는 반찬들 가운데서 까만 김이 눈에 띄었다. 이불 속에서 밥그릇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하얀 쌀밥에서 윤기가 흘렀다. 어린 나이에도 일본으로 수출하는 윤기 도는 검은 김과 하얀 쌀밥이 이곳에서는 귀한 음식임을 알았다. 할머니는 어린 공주를 뒷바라지하느라 힘이 더 드셨을 텐데 늘 소리 없이 웃으셨다.
산마루에 올랐다. 툭 트인 바다 위로 햇살 따라 내려앉은 하얀 별꽃들이 눈부셨다. 언덕 아래 따순기미라고 불렀던 양지바른 터에 할머니 산소가 있다. 들꽃 만발한, 할머니가 밭일을 하실 때 내가 곁에서 노래를 불렀던 곳이다. 한달음에 달려갔다. 아버지가 할머니 무덤 앞에 앉아있었다. 아버지는 무덤 옆 작은 밭에서 탐스럽게 봉우리를 터뜨린 하얀 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의 수필 〈마음의 꽃〉을 읊고 있었던 것일까?
“철없던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꽃 중에서 어느 꽃이 가장 예뻐요? 하고 물으면 항상 똑같은 대답이었다. ‘그야 명꽃(면화, 棉花)이 제일이지. 너 입고 있는 옷이 그 꽃이야.’”
2.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의 숨결을 느꼈다. 사람들이 깰까 살며시 일어나 세석산장의 문을 밀치니 이게 웬일인가. 세상이 온통 하얗다. 누적되었던 시간이 사라지고 무형의 얼굴이 신의 후광처럼 환했다. 태초의 밤이 빛을 내뿜었다. 별들의 하늘과 인간의 땅이 교합하여 천지가 눈부시게 빛났다. 지리산의 산맥들은 눈에 덮였고, 세석평전(細石坪田)을 붉게 물들였던 철쭉들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 되었다. 바람마저도 겨울의 요람 속에서 꿈에 잠겨있었다. 오직 침묵만이 순백의 축제를 펼쳤다. 아, 누가 이 축제 마당에서 무량한 춤사위를 펼칠 것인가?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인간 존재의 숙명을 노래한 시인 백석(白石)의 〈흰 바람벽이 있어〉가 떠올랐다. 환부에 바를 흰 연고, 거기 덮을 흰 거즈 같은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며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얼음, 달, 쌀, 파도, 흰 새, 백발, 수의를 적어나간 《흰》의 작가, 한강의 눈자위가 서늘했다.
“나를 러시아 사람이라지만 내 몸속에는 동양인의 피가 흘러 달려왔다.”고 말한 바실리 칸딘스키는 하얀 캔버스에 세석평전에서 펼쳐진 침묵의 향연을 그렸다. 점, 선, 면이 없는 무(無)의 형상들이 사각의 틀 너머로 확장되고 있었다. 눈 덮인 세석평전의 자연, 더는 흰색이 아니었다. 흰색의 태고는 무채색이다. 현재는 공기와 산소가 혼합된 낡고 녹슨, 무수한 색들의 총화이다.
옛날 이전은 물성이나 모든 색깔이 사라진, 어떤 언어로도 대항할 수 없는 무 無 의 세계. 그곳은 우리의 눈과 귀로 보고 들을 수 없는 침묵의 세계이지만 결코 죽은 것이 아니라 순수한 기쁨과 때 묻지 않은 순결함이 터져 나오는 생명의 바탕이다. 의식이 무거운 시간에 눌려 나태하면 하얀 침묵 속으로 들어설 수 없으리라. 덧칠된 세상을 움켜쥔 두 손을 펴고 텅 빈 손바닥에 ‘왜 눈은 하얗게 내리는가?’라는 질문을 새겨 그 답을 마음의 사전에서 찾아야만 침묵은 내밀한 문을 열 것이다. 침묵은 말의 포기가 아니라 말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고 했던가. 제 안에서 스스로 용해되어 침묵하는 눈의 노래는 태초의 코러스. 그 하얀 노랫소리가 나의 내면으로 스며든다.
흰색 위에서는 모든 색들이 분해되어 어떤 특성이라도 흔적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흰색은 다른 색들과 어울리면 자신을 낮춰 빨강, 노랑, 파랑 등의 색깔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도록 한다. 모든 색들이 저만의 오만함이나 무능함에 빠져있으면 흰색은 조용히 배어들어 다 함께 조화로운 세계를 이뤄낸다. 흰색은 인간 심층에 있는 근원의 색이다. 칸딘스키가 “흰색은 모든 가능성으로 차 있는 침묵이다. 그것은 젊음을 지닌 무(無)로서 시작하기 전의 무, 태어나기 전의 무”라고 했던 것은 그의 심오한 정신적 붓질에서 터져 나온 말이다.
눈(雪) 덮인 세석평전은 눈(目)으로 볼 수 있는 태고의 침묵. 눈송이 들이 허공에서 서로 만나 가뭇없이 나를 덮는다.
3.
중국 전국시대의 철학자 공손룡(公孫龍, BC.320?~BC.250?)은 백마(白馬)는 말 (馬)이 아니라고 했다. 백은 색깔을 가리키고, 말은 형체를 가리키므로 두 개념은 하나가 아니라고 한다. 말에는 백마뿐 아니라 흑마(黑馬), 황마(黃馬) 등도 있지만 백마에는 흑마와 황마는 해당되지 않으므로 백마는 백마이지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백마란 무엇일까? 우리는 상반되는 두 견해의 이런 질문 하나씩을 가슴에 안고 길을 떠도는 방랑자가 아닐까.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흘러든다. 우리의 삶도 근원으로 빨려간다. 어머니의 하얀 젖가슴에 이끌리듯이 나도 모르게 강물을 따라 길을 걸었다. 남쪽 고향의 바닷가에 멈춰 섰다. 바다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멀리 수평선만이 가물거렸다. 경계 없는 허구의 선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바다가 정오의 흰빛을 가득 머금어 입을 열지 못하고 가슴으로 나를 끌어안았다. 두 눈이 스르르 감겼다. 아득한 곳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타고 내 의식은 바다 밑으로 잠수한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깊이 들어갈 수는 없다. 심해에도 지층처럼 깊이에 따라 인식의 색깔이 다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성직자이자 고생물학자인 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hard de Chardin, 1881~1955)은 누스페어(noosphère)1) 를 인류 집단적 사고이자 꿈과 상상력의 총체라고 했다. 그 누스페어는 바다의 심연에 있을 것이다. 나는 누스페어에서 언어 이전의 소리를 듣고 싶다. 꿈의 신 모르페우스의 날개를 타고 바다 깊숙이 내려간다. 체온이 떨어지고 맥박이 느려진다. 바다의 온갖 푸른색이 사라진 꿈의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기다리고 있었어.” 나를 꼭 닮은 백발의 내가 말을 건넨다. 언어란 습득된 가공어로서 세상 너머를 표현하지 못하는 한계성 때문에 늙은 나는 침묵으로 소통한다.
‘이곳이 어디일까?’ 나는 당황하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나, 아니 너의 무의식 세계야.”
“뭐!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를 만나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왔다고?”
“무의식 세계의 시간은 직선이 아닌 원형이라 미래뿐만 아니라 과거도 함께 있어.”
미래의 내가 속삭인다. 고개를 돌리자 과거의 내가 어두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앉아있다. 어머니의 탯줄에서 분리되면서 느꼈던 단절의 두려움이 그림자에 각인되었다. 초등학생 시절에 무릎을 크게 기운 바지를 입고 전교생 앞에서 상을 받았을 때의 창피했던 마음이 새겨졌다. 나만의 방을 다른 사람과 함께 지내면서 불편했던 감정. 사랑했던 사람이 안겨준 배신의 아픔 등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이별, 창피함, 원망, 분노가 나의 무의식 속에 선명하게 살아있다. 이렇게 얼룩진 단어들을 무의식에 담아두고서 발화되기 이전의 언어로 글을 쓸 수 있을까.
나의 내면에서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은 영원토록 시작이지만, 나의 에고는 모든 사랑을 종말로 파기했다. 나는 자신마저도 사랑한 적이 없다. 오직 뻗어나가는 시간의 강물에 과거의 무의식을 싣고 제자리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만, 무의식의 바다에 잠긴 악취 나는 삶의 찌꺼기들을 소각하고 싶다. 나라고 인식했던 나의 이름마저도 허망한 꽃잎처럼 느껴진다. 이제 바람 따라 흩어지는 과거와 미래의 꽃잎을 수렴하고 다비하여 무(無)의 꽃을 피우고 싶다. 그러면 무의 심연에서 꽃 한 송이가 새롭게 피어날지도 모른다. 비록 작고 소박한 꽃일지라도.
백마는 말이었다. 하얀 색깔이 무화(無化)된 백마의 본질은 모든 말들과 다르지 않았다. 존재의 근원에서는 삼라만상의 언어가 흰말(白言)이다.
언어의 기표 (signifiant)와 기의(signifié)가 들어설 수 없는 알파와 오메가의 솟구침. 그냥 신음소리만 터져 나온다. 그것이 성적 황홀경의 소리인지 죽음의 단발마인지 구분되지 않는 언어 너머의 소리. 나는 심연의 하얀 문 앞에 서 있다. 저 문을 열면 언어 밖에서 솟구치는 소리로 빨려들리라. 그러면 입안에서 맴돌던 말이 터져 나오리라.
▼ 누스페어noosphère는 테야르 드 샤르댕이 최초로 말한 정신(noo)과 공간(sphere)의 합성어로서 인류가 집적해 온 집단의식이다. 오늘날에는 이 집단 지성과 능력을 바탕으로 사이버 공간에서 인류통합의 세계를 이루어 가는 사회철학 용어로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