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은혜
누가복음 3:1~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누가복음 3:2)
찬송가 435장(나의 영원하신 기업)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 앞에 와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였던 세례 요한이 처음 세상에 나타날 때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소년 때부터 빈 들 곧 광야에서 금욕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낙타 털옷을 입고 살았고 메뚜기와 야생 꿀을 먹으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묵상하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아무도 살지 않고 살 수도 없는 곳, 바윗돌만이 사방에 널부러져 있고 야생 뱀이 기어다니고 여우와 늑대들이 밤마다 울부짖는 황량한 광야에서 세례 요한이 거의 15년이나 20년 가까이 지내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던 세례 요한의 나이가 서른 살 때에 마침내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2절 후반절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요한에게 임한지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주전 4백년 전에 활동한 선지자 말라기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서 말라기 선지자가 바벨론에서 돌아온 귀환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였던 후 오랫동안 하나님 백성 공동체에 한번도 들려 주지 않으셨던 하나님의 생생한 말씀이 다시 그의 백성 공동체 가운데 울려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은 그가 기도하던 광야에서 지나가는 자들을 향하여 소리를 높여 외치기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고 말했을 때에, 사람들은 그 순간 마음에 큰 충격을 받고 죄책감에 압도되고 그에게 달려와서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 속에서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매달리곤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동안에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듣지 못한 채 형식적이고 냉랭한 율법주의와 인간의 교훈들을 가지고 종교 생활하던 유대인들과 현실의 무게에 눌려서 신앙의 은혜를 값싸게 팔았던 유대인들 그리고 민족의 곤경을 보면서 절망한 나머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보다는 인간의 칼창과 인간의 세력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유대인들에 크나큰 영적인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살아 있고 힘이 있는 날선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세례 요한의 등장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되고 각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말씀 사역 뒤에 나타나셨을 때에 세례 요한의 사역으로 인하여 각성된 영혼들이 예수님의 영적인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렇듯 유대 사회에 강력한 영적 쇄신을 일으킨 세례 요한의 말씀 사역의 원천은 그의 오랜 광야 생활의 영적 훈련의 열매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세례 요한과 같이 영적인 강력한 영향력을 끼친 하나님의 사람들을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광야에서 영적 훈련을 쌓은 분들이라는 점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애굽의 궁중에서 사십년 동안 화려한 왕실의 교육과 사치스러운 삶을 살았다가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려는 사명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을 돕다가 애굽인을 쳐서 죽였는데 그 일이 발각되어 모세는 나이 40세에 궁중에서 도망쳐나와 미디안 광야로 도피하여 그곳에서 40년 동안 양떼를 치는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애굽 궁중에서의 돋보이는 화려한 육신적인 삶을 다 내려놓고 바람과 햇살을 벗삼고 양떼들의 울음소리를 귓전으로 들으면서 해가 지고 별이 뜨는 광대한 광야의 빈들에서 사십년 동안 자기를 내려놓는 훈련을 했습니다. 자아가 죽고 세상이 죽고 야망도 죽고 자신의 힘을 믿는 모든 생각이 모래알처럼 흩어져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다 낡아지고 삭고 죽고 사라진 뒤 나이 80세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돌만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산 시내산 기슭의 한 떨기나무 위에 불꽃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발에 신을 벗고 애굽에 다시 들어가 이스라엘을 구출해내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만약 그가 광야에서 사십년의 자기 부정의 삶을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는 하나님께 계속하여 막힘없이 쓰임받는 삶을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그가 들풀처럼, 들꽃처럼, 떨기나무처럼 낮아지고 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며 동행하며 동역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광야가 그의 인격과 신앙의 그릇을 차근차근 빚어가심으로써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마음껏 쓰임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도 사역 중반기에 심히 좌절하고 낙심하였을 때에 그를 다시 일으킨 것도 광야였습니다. 자기 힘과 결심과 의지가 아직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에 그만 그의 대적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의 무서운 위협을 당하자 갑자기 의기소침해져서 도망쳤을 때 그 어느 곳도 그를 받아줄 수도 없고 그가 피할 수도 없었으나 광야는 그를 맞아주었습니다. 그가 삼일 동안 얼굴을 숨기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도망치다가 유다를 지나 시내 광야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로뎀 나무 한 그루를 보았습니다. 너무 지친 그는 그 로뎀 나무 아래 누워 하나님께서 지친 마음을 하소연하면서 이르기를
“족하오니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더 낫지 못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엘리야를 보시고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천사를 보내어 구운 떡과 물을 먹고 마시게 해주고 어루만지며 편히 잠을 자게 만들었습니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너무 근심에 찬 나머지 엘리야는 더 이상 정상적인 생각을 할 수 없는 공황장애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자니까 다시금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져 주시고 일으켜 먹고 마시게 해주면서 이르기를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고 하였습니다. 이 여호와의 천사는 아마도 우리 주님을 이르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자기 종 엘리야를 보면서 그를 다시 회복시키고자 그처럼 자상하게 품고 일으켜주시고 그의 남은 바 사명의 길을 마저 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먹이고 마신 후에 본격적으로 완전히 회복하게 하시려고 그를 호렙산으로 인도하여 거기서 만나주시고 말씀해주시어 그의 사역의 후반부 사역 청사진을 주시어 그 일을 다 성취하고 나중에 불말과 불병거를 타고 하늘나라로 오르게 하셨습니다. 사명 감당하다가 지치고 넘어진 엘리야를 다시금 일으키고 살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전되어 남은 사역의 후반부를 온전히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다윗도, 바울도, 심지어 우리 주님께서도 광야에 들어가셔서 이렇듯 영적 훈련을 통하여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께 집중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지는 내적 충전의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주님 승천 후에 교회가 번창해가던 3세기, 4세기의 로마 치하에서 교회가 번성해가는 가운데 신앙의 순수함을 지켜가야 할 영적 필요성이 강력히 요청되었는데, 그 요청을 응답해주었던 하나님의 종들이 있었으니 곧 안토니우스나 파코미우스 등 사막 교부라고 일컫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와 북부 아프리카와 시리아 등지의 산이나 동굴 등에서 수도하면서 절제하며 금식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들의 영혼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동굴이나 산에서 수도하기도 하고, 사막 깊은 곳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훈련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물욕과 세상 명예와 정욕의 시험들을 이기면서 순결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자기를 단장하면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영적 자양분을 공급하는 영적인 수원지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부패해가는 위기를 이분들의 영적 고상함과 강건함과 영적 지혜와 깊은 영적 사랑으로 인하여 세상을 이기며 세상을 바꾸는 힘을 갖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처럼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고, 성도로 성도답게 회복하게 하여 세상을 이기고 성숙하게 해주는 영적 원천이 광야인 것입니다.
광야는 삶의 복잡성을 벗어나 삶을 단순하게 만드는 훈련장입니다. 광야는 사람들이 삶을 살아갈 때 필요한 수많은 자원과 재화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무소유를 훈련하는 훈련장이기도 합니다. 광야에서 집을 짓는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요 떡과 맛있는 반찬을 준비한다고 바삐 뛰어다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화려한 옷을 살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단순하고 최소화된 것들만 있으면 족합니다. 많은 돈이 있어도 아무 필요가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고 칭송해주는 세상 명예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리고 광야에서는 무엇인가 세상적인 성취를 위하여 땀 흘려 일하는 노동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밤에는 별을 쳐다보며, 낮에는 햇살로 이글거리는 끝없이 펼쳐진 황무한 광야의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인생의 짧음과 영원한 세상이 눈짓하며 걸어오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영혼의 시간이 펼쳐집니다. 그래서 이처럼 광야는 이 세상의 분주한 일상에서는 찾기 힘든 단순성, 무소유성, 무노동성, 내세 지향성 등이 자연스럽게 일상이 되는 전혀 다른 환경을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그리하여 광야는 우리가 분주한 삶을 살아가면서 완전히 잊고 살아가기 쉬운 내 안의 더 깊은 나의 내적 존재인 영혼의 존재를 의식하게 만들어줍니다. 또한 광야는 우리를 지으시고 세상 만물을 기르시며 우리의 인생을 운행하시며 우리의 육체가 세상을 떠나고 돌아가야 하는 더 본질적인 영원한 세상의 임금이 되신 영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리하여 광야는 우리 영혼이 생명을 얻는 장소입니다. 광야는 잠시 있다 사라질 썩어질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분주하게 일하는 우리 육신이 오히려 잠시라도 참된 쉼을 얻게 해줍니다. 또한 광야는 우리 삶을 지배하며 이리 저리 끌고 다니던 죄의 속박이 약해지고 풀려지고 근본부터 뽑혀나가는 해방시켜 줍니다. 그리하여 잃었던 삶의 방향을 깨닫고 놓쳤던 사명을 되찾아 바른 방향으로 힘을 얻어 전진해갈 수 있는 장소인 것입니다. 그야말로 광야는 우리를 살게 만들고 새롭게 만들고 썩지 않게 만드는 생명의 장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는 때에 시험하는 자 마귀를 상대하시려고 광야에 가신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신 후에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그리고 공적 생애를 사시는 동안에도 매일 시간 되는 대로 자주 한적한 곳 곧 성읍 가까운 곳에 펼쳐진 한적한 곳 곧 광야로 나가서 기도하시곤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더 많이 몰려들어올수록 예수님은 더욱 광야로 물러가셔서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와 깊은 독대의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누가복음 5:15,16 말씀에 이르기를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고 하신 말씀이 그러한 예수님의 계속된 습관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에 바쁠수록, 사역의 짐이 더 힘이 들수록, 사명의 길, 십자가의 죽음의 사역이 더욱 무겁게 자신의 마음을 압박할수록, 예수님은 이처럼 더 한적한 곳 광야에 가서, 높은 산에 올라가서 뜨겁게 간절히 기도하시곤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광야로 물러가는 거룩한 영적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살리는 길이요 내적 힘을 얻는 길이요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이 우리를 붙들고 문제를 기이하게 하나님께서 해결하게 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즐겨 찾아야 하는 광야는 꼭 기도원에 올라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입산 금지 된 높은 산에 짐을 싸짊어지고 올라가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일상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고개를 돌려 조용히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님을 바로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면 그곳이 곧 광야입니다. 집의 조용한 골방이면 족합니다. 안 쓰는 물건들을 쌓아놓는 뒷방이거나 옷들을 정리해놓은 옷방이라도 좋습니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이나 학원이나 학교나 친구집에 놀러간 시간이어도 좋습니다. 하루 일과를 다 마치고 식구들이 티브이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웃으며 보낼 때도 좋습니다. 그럴 때 조용히 한 방에 들어가 문을 잠시 잠그고 성경 시편을 조용히 읽어나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내면을 향하여 말을 걸어올 때에 그 부름에 응답하여 조용히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내 진실한 언어로 조용히 기도를 올리면 그 장소가 곧 광야인 것입니다. 그 광야에서 우리의 영혼이 깨어나고 우리는 잃어버린 영혼의 언어를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에 멀을 걸어오시는 하나님께 우리 혀가 열리고 우리 귀가 열리며 우리 마음이 열리며 우리의 전존재가 다시 살아나는 생명의 맥박이 다시 뛰게 될 것입니다.
때로 예상치 않은 큰 질병을 걸릴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큰 인생의 실패를 만나 일상적인 삶의 기초까지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을 떠나고 절친한 친구의 배신을 당하고 마치 무인도 섬에 고립된 것과 같은 인간관계의 고립의 시간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과거에 모세와 다윗과 엘리야와 세례 요한과 사막 교부들에게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려고,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려고, 우리를 살리고 새롭게 빚어주시려고 우리를 광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손짓입니다.
이 부르심을 따라 우리는 기꺼이 하나님을 만나려고 광야에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소란스런 곳으로 들어가지 말고, 친구들과 커피 잔을 나누면서 공허한 담화로 더 마음을 힘들게 하지 말고,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소란스러운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기다리시는 광야로 한 발 한 발 차분히 더 깊이 들어가면서 내면의 귀를 열고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에 차분히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집에서 성경을 펴서 읽으면서 주님이 말씀하신 바를 조용히 기다리십시오. 자기의 삶을 돌아보면서 그 동안 헛되고 무익한 일에 분요했던 것들을 내려놓고 진지한 회개의 마음을 고백하십시오.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통하여 권면하는 말씀을 조용히 마음에 담아 두십시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항상 다른 경건한 사람들이 했던 말을 조용히 묵상하는 좋은 습관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다른 형제 자매들을 통하여 내게 들려오는 말 중에서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지 조용히 음미하십시오.
그리할 때에 분명히 광야에서 머물던 하나님의 사람들처럼 우리도 어느 때인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늘에서 주시는 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올 것입니다. 모세에게 시내산 떨기나무에서 그러했듯이,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와 호렙산 동굴에서 그러했듯이, 사도 바울이 아라비아 사막에서 그러했듯이, 사막 교부들이 이집트나 시리아의 산과 동굴에서 그러했듯이, 지금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것입니다. 우리 영혼을 살리고 치유하고 위로해주며 용기를 주며 앞으로 감당해야할 사명을 일러주는 말씀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할 때 그 한 말씀이 우리를 붙들어 줄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고 풍요롭고 강하게 해줄 것입니다. 그 말씀이 남은 인생의 방향을 정해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자기의 하루 속에 매일의 광야를 조용히 찾아 갑시다. 엘리야가 광야의 입구에 서 있는 로뎀 나무에서 은혜를 입고 위로의 말씀을 들었지만, 사십주 사십야를 걸어 호렙산 광야 깊은 동굴까지 들어갔을 때 영광의 주님을 만나고 직접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고 그의 남은 후반기 사역이 확실히 열린 것처럼, 광야의 깊은 곳까지도 들어갑시다. 매일 매일 광야를 자기 삶 속에서 마련하십시오. 분명 그 광야에 머무름은 우리의 생애 전체를 하늘의 생기로 덮게 해줄 것이요 세상에 지친 우리의 심령이 치유되고 세워질 것입니다. 앞서 광야에서 훈련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처럼 우리도 이 시대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복스러운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