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제주 올레 제17코스를 보면 동한두기에서 제주목관아로 가는 길을 '무근성'이라고 명시했다. 무근성은 '묵은 성'(舊城)에서 나온 말로 역사적 정취가 일어나는 참으로 정겨운 동네 이름이다. 무근성은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제주시 일도1동·삼도2동·건입동 지역으로 육지 사람들에게 편하게 설명하자면 제주목관아 일대를 말한다. 여기서 '묵은 성'이란 옛 탐라국 시절의 성터를 일컫는 말로 조선시대에 들어와 제주가 팽창하면서 제주성을 더 바깥쪽에서 축조하면서 탐라국 성터는 오히려 제주의 중심지가 되고 무근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 ||
![]() | ||
![]() | ||
탐라국의 사정을 말해주는 어떤 기록도 없고 명확한 유적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탐라국의 궁궐도 무근성 어디쯤이었으리라 추정된다. 효종 4년(1653)에 이원진 목사가 편찬한 <탐라지>에서는 제주의 옛 고적을 말하면서 "제주성 내에 돌로 쌓았던 석축의 자취가 있다. 고·량·부 3성이 처음 나와서 탐라를 삼도로 나누어 차지하고 북두칠성 모양을 본떠 대를 만들었기 때문에 칠성대(七星坮)라고 불렀다"고 했다. 이 칠성대란 탐라국의 제단으로 칠성도·칠성단이라고도 하는데 석축으로 쌓은 월대(月臺) 형식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1735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김정의 <노봉집>에는 이 칠성대를 고쳐 쌓은 얘기가 나온다. "월대는 관덕정 뒤에 있다. 칠성대가 성내에 산재해 있다. 돌과 흙으로 축조됐으나 모두 허물어져버렸다. 이제 겨우 그 터만을 아니 이를 수축하도록 하였다." 김정 목사는 이 월대를 고쳐 쌓고는 그 이름을 '선덕대(宣德臺)'라고 명명하였다. 지금 관덕정 뒤에 있는 월대가 바로 선덕대니 탐라국 시절이나 조선시대나 이 일대는 제주의 중심이었다. 따라서 관덕정 일대 무근성은 제주의 오랜 연륜을 지닌 묵은 동네로 서울로 치면 북촌 이상의 무게를 지닌다. 약간 과장해 말하자면 유럽에서 연륜 있는 도시의 뒷길이 지니는 역사적 무게를 지닌다. 지금도 제주에서 무근성에 산다면 일단 알아주니 무근성의 낱낱 건물들은 비록 문화재적 가치가 적다 해도 동네 자체가 지니는 문화유산적 가치는 말할 수 없이 크다. 무근성이라는 이 매력적인 동네 이름에 이끌려 두어 번 돌아본 적이 있다. 거기에는 물론 탐라의 옛 자취는 없다. 그러나 소동파는 이렇게 말했다. "산은 높지 않아도 된다. 선인(仙人)만 있으면 이름난다. 물은 깊지 않아도 된다. 용만 있으면 영험하다." 실제로 무근성에는 사진으로 보는 <제주의 옛 모습>(2009, 제주시)의 잔영이 남아 있었고 역사의 뒤안길을 걷는 듯한 진중함이 느껴졌다. 그런데 얼마 전 제주특별자치도는 '제주시 구도심(무근성 일대) 45만3200㎡를 대상으로 한 도시재생사업 용역'을 착수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것이 어떤 방향에서 추진될지 아는 바 없지만 탐라국 이래 제주인의 체취가 진하게 밴 무근성 골목길의 역사성을 어떤 식으로든 보존하면서 이뤄졌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 ||
![]() | ||
무근성 묵은 동네 길을 걷자면 자연히 탐라의 내력이 떠오른다. 육지 사람들은 우리 역사 속에서 제주도를 지방사의 하나로 인식한다. 그러나 제주 사람 입장에서 보면 탐라가 한반도의 역사 속으로 편입되는 과정을 마음 한쪽에 간직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탐라의 역사를 알지 않고서는 제주를 옳게 답사했다고 할 수 없다. 나는 여기서 탐라사를 얘기할 여유는 없지만 그 대강만은 알려두고자 한다. 탐라(耽羅)란 옛 문헌에 탁라(托羅) 등 여러 가지로 표기되지만 이는 우리말을 한자로 나타냈을 뿐으로 '탐'은 섬, '나'는 신라(新羅)·가라(伽羅)와 마찬가지로 나라를 뜻한다. 즉 탐라는 '섬나라'의 한자 표기다. | ||
| ||
'섬나라' 탐라국이 과연 국가체제를 갖추었는지는 아직 확실히 말할 수 없지만 왕국(王國·kingdom)은 아니어도 최소한 족장국가(族長國家·chiefdom)로 육지와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성격을 지닌 독자적인 문화가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는 애월읍 곽지리와 고내리의 독특한 질그릇 문화에 잘 나타난다. 그러나 탐라국은 본격적인 왕국으로 발전할 만한 물적·인적 토대가 약했다. 육지에서 삼국이 고대국가로 발전하고 고대국가 생리상 영토의 확장사업이 이루어질 때 탐라국이 찾은 독자적 생존방식은 조공외교였다. 조공은 결코 복속을 의미하지 않는다. 강대국 주변 약소국의 한 생존방식이었다. 그것은 백제와 신라가 거대한 제국인 중국에 외교 국방상으로 취한 조치와 같은 맥락이다. <삼국사기> 백제 문주왕 2년(476)조를 보면 "탐라국에서 방물(方物)을 바치니 왕은 기뻐하며 사자에게 은솔(恩率)이라는 벼슬을 내렸다"고 했다. 탐라는 백제 멸망 때까지 조공을 지속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비호를 받은 탐라는 신라로부터는 완전히 독립되어 있었다. 그래서 신라 선덕여왕이 황룡사9층탑을 세우고 각층에 신라가 물리칠 외적을 상징할 때 제4층이 탐라였다. 그러나 백제 멸망 이후에는 통일신라와 조공관계를 맺는다. <삼국사기>를 보면 "660년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자 백제에 신속하던 탐라 국주(耽羅國主) 도동음률이 신라에 내항(來抗)하였다"고 했다. | ||
| ||
그러나 탐라는 아직 고려의 여느 군(郡)과는 다른 독자성을 지녔다. 더욱이 대원 간섭기에 들어서면 제주는 또 다른 위치에 놓인다. 1273년(원종 14)에 원나라는 제주를 근거지로 항쟁을 벌였던 삼별초군(三別抄軍)을 토벌한 직후 탐라국초토사(耽羅國招討司)를 설치했고 곧바로 '탐라국 군민 도다루가치 총관부[耽羅國 軍民 都達魯花赤 摠管府]' 라고 명칭을 바꾸고서 다루가치를 파견하여 직접 관할했다. 다루가치(達魯花赤·Darughachi)의 'daru'는 '진압하다'라는 뜻의 몽골어에 'gha'와 'chi'를 붙여 그것에 종사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점령지 통치관이라는 의미다. 칭기즈칸이 이를 설치했을 때는 관인(官印)을 갖는 군대의 사령관으로 관할행정 전반의 결정권을 가졌고 원칙적으로 몽골인만이 임명되었다. 육지의 고려와 달리 탐라는 원나라가 직접 관할했다는 말인데 이는 탐라를 목마장(牧馬場)으로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탐라는 원나라 전체에 있던 14개의 국영목장 중 하나로 3만 필의 말을 사육하였다. 그러다 1295년(충렬왕 21년)에 고려는 탐라를 돌려받아 한때 제주목을 설치하여 목사(牧使)를 파견하게 되었지만, 5년 만인 충렬왕 26년(1300)에 원나라는 다시 탐라군민총관부를 설치하고 여전히 목마장으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제주도는 근 100년간 몽골에 예속돼 식민지 지배를 받는 쓰라린 역사를 겪었다. 원나라 말기에 공민왕은 반원정책으로 원나라에 빼앗겼던 쌍성총관부를 회복하면서 원의 세력을 몰아내고 영토 회복을 꾀했다. 이때 탐라군민총관부에도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말을 키우던 몽골인인 목호(牧胡)들의 저항에 부딪쳤다. 고려 조정에서 파견한 도순 무사가 목호들에게 살해되었고 1366년에 100척의 군선을 파견했지만 목호에게 밀려 퇴각했다. 이에 고려의 조정에서는 1374년(공민왕 23) 최영 장군에게 군선 300여 척, 정예병 2만5000명을 주어 대대적으로 제주도를 토벌케 함으로써 목호의 반란은 진압되었다. 이리하여 탐라는 다시 고려왕조의 제주목으로 환원되었다. | ||
| ||
![]() | ||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대개 30개월 임기로 부임해오는 목사와 판관 등 행정관리들 때문에 제주의 삶은 점점 육지처럼 변해갔다. 을사늑약이 이루어지는 1905년까지 총 287명의 목사가 제주에 부임해왔다. 여기에다 제주가 유배지로 지목되면서 200여 명의 귀양객이 제주로 들어왔다. 유배객 중에는 특히 정치적 사건으로 귀양 온 문신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이 또한 제주의 문명을 교화하는 데 한몫하였다. 이제 우리의 답사는 제주의 문명을 말해주는 또 다른 뿌리인 오현단(五賢壇, 제주시 이도1동 1421-3)으로 향한다. 제주목관아에서 오현단까지는 약 1.1km의 아주 가까운 거리다. 묵은 동네(삼도2동) 길을 느긋이 걸어 남문로터리까지 가는 데는 10여 분밖에 안 걸리고 여기서 큰길을 건너가면 바로 오현단이 나오니 걸어서 10여 분 거리다. | ||
| ||
그리하여 몇 해 전, 버스 한 대를 빌려 친구들과 즐겁게 제주에서 이틀을 보낸 적이 있다. 이후 이런 모임을 나는 두어 차례 더 했다. 그때마다 놀라곤 했다. 제주 자체를 보러 오지 않고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먹는 듯한 사람들의 지독한 편식성 때문이었다. 지난 이삼십 년간 수십 번 제주에 왔다면서 관덕정을 처음 와봤다는 친구도 있었으니 말 다한 것 아닌가. 관덕정 돌하르방을 본 다음 "이제 오현단으로 갑니다. 걸어서 15분쯤 걸립니다"라고 하자 언제나 그랬듯이 모두 내 뒤를 따라왔다. 얼마쯤 걸었을 때 정식이가 다가와 "야, 오현단에 간다면 오현단이 무언지는 말해주어야지"라고 했다. 약간 놀랐다. 친구들이 오현단을 모르리라고는 생각지 않고 그저 그 유명한 오현단에 간다는 식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되물었다. "아니, 오현단을 모른단 말야?" "모르지. 너처럼 돌아다니는 애나 알지 우리가 어떻게 아냐?" "그러면 너 오현고등학교는 아냐?" "알지, 우리 과에 있던 아무개가 오현고등학교 나왔잖아. 그 오현이 오현단에서 나온 거니?" 오현고등학교는 알면서 오현단은 모른단다. 오늘날 오현중·고등학교는 국립제주박물관이 있는 화북 별도봉 기슭으로 이전했지만 1972년까지는 이곳 오현단 가까이에 있었다. 믿기지 않는 얘기 같지만 일제강점기까지 제주도에는 인문계 고등학교가 없었다. 그래서 제주 출신 중에는 광주제일고를 나온 분이 많다. 광복 후 1946년에 오현중학교가 개교하면서 제주의 인재들이 여기로 모여들어 그 명성이 육지에까지 자자해졌다. 오현단은 문화재 안내판에 쓰여 있듯이 "조선시대에 제주도에 유배되거나 목사 등 관리로 와 제주 문화와 교학 발전에 공이 있는 다섯 분의 현인(賢人)을 기리기 위해 세운 단"으로 알려져 있다. 제주도를 다룬 모든 책에 이렇게 설명돼 있다. 굳이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정확한 해설도 아니다. 이분들은 '제주의 교화'에 공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들의 '충절과 학문'을 후대인이 크게 존숭했기 때문에 오현단에 모셔졌다. 오현은 다음 다섯 분의 유현(儒賢)을 말한다. | ||
| ||
실제로 오현의 한 분인 규암 송인수는 제주목사로 부임했으나 불과 몇 달 만에 육지로 돌아갔고, 우암 송시열은 83세 되던 해 3월에 귀양지인 제주에 들어와 5월에 국문을 받으러 육지로 떠나 6월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으니 제주에 머문 기간은 3개월도 안 된다. | ||
![]() | ||
오현단에 모셔진 다섯 분은 원래 이곳에 있던 귤림서원(橘林書院)에 배향된 다섯 분이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오현단은 중종 15년(1520)에 제주에 유배된 충암 김정을 기리기 위해 선조 11년(1578)에 가락천(嘉樂川) 동쪽에 충암묘를 지은 것이 그 시초다. 16세기 중엽, 소수서원을 시작으로 전국에 서원이 우후죽순으로 건립되면서 지방사학의 시대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후 100년이 지나도록 제주에는 서원이 세워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인문계 고등학교 하나 없었듯이 제주에 문명이 미치기까지는 항시 이렇게 늦었다. 그러던 차 효종 9년(1658)에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괴는 향교 옆에 초가집 여섯 칸을 짓고 학생 중 뛰어난 자 20명을 선발하여 관비로 가르치는 교육사업에 뜻을 보였다. 이괴 목사는 임기가 만료되는 현종 원년(1660)에 제주인 김진용의 건의를 받아들여 세종 때 판윤을 지낸 고득종의 집터에 12칸짜리 학사를 짓고 장수당(藏修堂)이라 이름하였다. 항시 학생 20~30명을 가르칠 토대를 마련해준 셈이다. 그로부터 5년 뒤인 현종 6년(1665)에 제주 판관으로 부임한 최진남은 1667년 봄 궁벽진 곳에 있는 충암묘를 장수당 곁으로 옮기고 귤림서원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이리하여 제주에 처음으로 사(祠·충암묘)와 재(齋·장수당)를 갖춘 번듯한 서원이 세워졌다. 이괴 목사는 귤림서원은 정말로 유생을 가르치기 알맞은 밝은 명당이라고 좋아했다. 이처럼 귤림서원은 육지의 서원처럼 지방의 유림이 세운 사학이 아니라 관에서 세운 일종의 관설 서원이었다. 육지의 서원에서 사당은 각기 그 지방의 존경받는 인물을 모셨다. 도산서원의 퇴계 이황, 도동서원의 한훤당 김굉필, 병산서원의 서애 유성룡 등이 그런 예다. 서원에서 모시는 인물은 충절과 학문으로 내남이 모두 인정하는 분이어야 했고 비록 사약을 받고 죽음을 당했어도 훗날 복권되어 시호(諡號)를 받은 공(公)이 아니면 안 되었다. 그리고 원칙적으로 국가(예조)로부터 공인받아야 했다. 그런데<조선왕조실록> 숙종 원년(1675) 9월 25일자에는 부호군 이선(李選)이 제주도를 순무하고 돌아와 임금에게 보고한 40가지 잘못의 하나로 귤림서원의 배향 문제가 나온다. 내용인즉 귤림서원이 충암 김정,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을 배향함은 마땅하나 이인 목사가 유림과 상의 없이 자신의 조부 이약동을 3현 위에 모셔 3현을 욕되게 하니 이를 철회하고 귤림서원에는 사액을 내려줘야 옳다는 지적이었다. 이에 비국(備局)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여 이약동의 위패는 철거하고 사액을 내리는 것은 신중히 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왕은 이 건의를 받아들였다. 7년 뒤 다시 사액서원 건의가 일어났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8년(1682) 6월 23일자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제주 유생이 올리기를 충암 김정, 동계 정온은 제주에 유배된 적이 있고, 규암 송인수는 제주목사를 지냈고, 청음 김상헌은 순무사로 제주에 온 바 있어 네 분을 모시는 서원을 세우고자 하니 사액을 내려주시옵사는 요청이 있었다." 임금은 해당 부처(예조)에서 논의를 붙인바 이분들은 이미 다른 서원에 모두 배향된 분이기 때문에 겹치는 바가 된다며 불가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우의정 김석주(金錫胄)가 "네 분은 모두 학문과 충절이 있었기 때문에 바다 밖 사람들이 존경하고 사모할 줄 아는 것이므로 육지에서 부산스럽게 중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의견을 내었다. 숙종은 김석주의 의견을 받아들여 예조정랑 안건지를 제주도에 파견하여 사액 현판을 세우게 하였다. 이리하여 귤림서원은 마침내 사액서원이 됐다. 그리고 숙종 21년(1695)에는 제주 유생들이 귤림서원에 우암 송시열도 함께 배향하게 해달라고 상소하여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이리하여 귤림서원은 오현을 모시게 됐다. | ||
| ||
저서를 남겼다. 동계 정온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복하자 자결을 시도했으나 이루지 못하자 세상을 버리고 덕유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만 먹고 지내다 순절한 분이다. 동계는 한때 제주 대정에 10년간 유배된 적이 있었다. 규암 송인수는 중종 29년(1534) 3월에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가 6월에 병에 걸려 고향에 돌아갔는데, 정적인 김안로 무리들이 후임이 없는데 자리를 이탈하였다고 고해바쳐 사천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복권되어 대사헌으로 바른말을 잘했다. 명종 2년(1547)에 "여자가 임금 위에 올라앉아 간신들과 농락하니 나라가 망하는 것은 서서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다"라는 글을 양재역 벽에 붙인 이른바 양재역 벽서(壁書)사건으로 사약을 받은 분이다. 그리고 우암 송시열은 노론의 영수로 비록 사약을 받았지만 사후 노론의 시대로 들어서면서 당연히 추앙받았다. 이들은 모두 충절로 숭앙받을 만한 분임이 틀림없지만 당색이 모두 서인과 노론으로 이어진다. 충암은 당파 이전 인물이지만 조광조와 같은 노선이었고, 동계는 북인에서 갈라선 분이며, 청음·규암·우암은 서인과 노론의 골수였다. 귤림서원의 사액을 건의한 김석주는 당시 노론의 실세였다. | ||
![]() | ||
사실 제주 출신으로 높은 벼슬에 올라 존경받을 만한 문인으로는 세종 때 고득종이 있다. 그는 부친을 따라 10세 때 상경하여 제주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그는 제주 목마장에 관한 임금의 자문에 응하면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황희에게는 제주 말을 줄 정도로 친분이 있었으며<몽유도원도>에 찬시(讚詩)를 쓸 정도로 안평대군과 가까웠다. 그는 한성판윤 등을 지냈고 기록상 제주에 3번 다녀간 제주의 출향인사였다. 귤림서원은 바로 고득종의 집터였다. 훗날 이원조 목사는 헌종 9년(1843)에 제주의 뛰어난 인물인 고득종을 모신 사당을 세워주니 그것이 바로 오현단 곁에 있는 향현사(鄕賢祠)다. 또 제주 문명의 교화에 공이 있자면 산천단을 세우고 돌아갈 때 말채찍 하나 가져가지 않은 이약동 목사가 훨씬 크다. 더욱이 그는 청백리(淸白吏)에 오른 분이다. 그의 손자는 이런 할아버지가 제주의 서원에 모셔져야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귤림서원에 배향되도록 했는데 유림과 상의 없이 사사로이 한 일이라고 철훼된 셈이다. 그로부터 20여 년 뒤 이익태 목사는 숙종 21년(1695)에 귤림서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영혜사(永惠祠)라는 사당을 짓고 그 위패를 모셨다. 영혜사는 귤림서원의 별사(別祠)다. 이처럼 고득종과 이약동은 비록 오현에 들지는 못했지만 제주인들의 기림을 그렇게 받게 됐다. 그러나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귤림서원이 헐리게 된다. 이에 조천 사람 김희정(金羲正)이 주축이 되어 고종 29년(1892)에 귤림서원 옛터에 제단을 만들고 오현을 기리니 그것이 바로 오늘의 오현단이다. | ||
![]() | ||
이런 유서 깊은 내력이 있는 오현단이지만 막상 오현단에 오면 사람들은 대부분 크게 실망하고 만다. 우선 오현단 입구의 오현단이라고 쓰여진 제주 현무암부터 유적지의 품위라고는 없다. 게다가 안으로 들어서면 콘크리트 2층 건물로 된 노인회관인 제주시 향로당(鄕老堂)이 가로막아 그 앞으로 겨우 난 샛길을 통해야만 오현단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하고많은 땅 중에 여기에다 노인회관을 지은 이유가 무엇인지 안타까운 생각이 절로 일어난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서면 웬 비가 그렇게 많은지 눈이 어지러울 정도다. 다 세어보지 않았지만 10여 개의 비가 난립해 있다. 그중 충암 김정 적거(謫居) 유허비(철종 3년, 1852), 우암 송시열의 영조 18년(1722)비와 순조 원년(1801)비, 귤림서원 묘정비(廟庭碑·철종 원년, 1850) 등 4개는 오현단이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고 향천사 유허비(고종 30년, 1893)도 있을 자리에 있을 만하다. 그러나 느닷없이 오현단과 아무런 인연이 없는 노봉 김정 흥학비(蘆峰 金政 興學碑)가 있어 당황스럽게 만든다. 이는 본래 삼천(三泉)서당에 있던 김정 목사 공덕비인데 서당이 헐리면서 고종 30년(1893)에 여기로 옮겼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이해할 만하다. 제주 향로당 건축비, 제주 향로당 재건공로비, 높직한 5각형 기둥에 오현의 이름을 큰 글씨로 새긴 오현단 비는 정말로 봐주기 힘들다. 또 충암 김정의 유허비를 왜 새로 세웠는지는 이해하기조차 힘들다. 게다가 여기저기에 오현의 시 한 수씩을 새겨놓은 시비가 널려 있으니 그 어지러움은 심해도 보통 심하지 않다. 내가 가자고 해서 반강제로 끌려온 나의 친구들이 투정 어린 말투로 한마디씩 내뱉는다. "도대체 어느 게 오현단이냐?" "이게 그 유서 깊다는 오현단이란 말이야?" "네 설명 듣지 않고 왔으면 오현단 아니라 십현단이라도 벌써 나갔겠다." "문화재청은 이런 걸 놔두고 뭘 하는 거냐?" 이런 지적에 나는 할 말이 없다. 문화재청장 시절에 나는 이 오현단의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오현단은 국가문화재가 아니라 제주시 지방기념물이기 때문에 문화재청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국가사적으로 승격시킬 사안도 아니었기 때문에 제주시에 정비해달라고 요청하는 게 고작이었다. 제주시는 문제점은 알지만 오현의 다섯 문중과도 연관된 일이라 정비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조상을 위하는 길일까? | ||
| ||
제주의 수많은 제단에서 감동받은 까닭은 바로 이런 검소하고 소박한 제주만의 표정이었다. 삼성혈의 혈단, 산천단의 제단, 시사석의 돌집, 각 마을 신당의 제단들, 그리고 오현단의 다섯 조두석 등은 제주인의 심성과 제주의 자연, 제주의 민속과 더없이 잘 어울리는 제주의 자랑으로 삼을 만하다. 그런데 이 모든 곳에 요즘 사람들이 원래의 제단보다 열 배는 더 큰 새 제단을 바로 곁에 세워놓았으니 안타깝기 그지 없다. 제주의 건축가 김석윤(제주대 건축학부 겸임교수)은 이렇게 말했다. "(육지에서 서원의 복원은) 원래의 전각 형식을 따랐으나 (제주의 귤림서원 복원은) 전혀 색다르게 간결한 시원적 제단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주변에서 흔한 돌을 다듬어 제단을 쌓고 토막돌로 위패를 세우고 담을 둘러 정제된 장소를 만들었다. 이 절제와 검약은 성리학의 기본정신이고 또한 제주의 심성에 닿아 있는 것이다. 형태는 삼성혈의 혈단과 도내 곳곳에서 만나는 신당의 원형과 통하고 있다. 형식에 앞서 정신세계를 우선하였던 문화재 복원의 전범이 오현단이다. 올곧은 건축이란 바로 이런 것 아닌가? 후대들의 어리석음으로 이 주변이 몹시 난잡하고 어지러워 있는 것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토막돌 다섯 개가 줄 지어 있는 오현단 바로 뒤에는 누가 심었는지 아니면 홀씨가 날아와 자랐는지 일찍부터 멀구슬나무 하나가 자리 잡아 이 제단의 연륜과 기품을 살려주었다. 그래서 오현단을 사진으로 찍을 때면 나머지 어지러운 비석들은 다 빼버리고 다섯 개의 토막돌에 멀구슬나무 한 그루를 담아간다. 오현단에서 그래도 품위 있는 유적으로는 단 바로 곁 자연석에 새겨진 우암 송시열 '증주벽립(曾朱壁立)'이라는 글씨다. "증자와 주자가 이 벽에 서 있도다"라는 뜻의 이 글씨는 서울 성균관 북쪽 벼랑에 있는 글씨를 탁본하여 철종 7년(1856)에 제주 판관 홍경섭이 새겨놓았다. 오현 중에서도 우암의 파워는 이렇게 강했다. 제주시는 귤림서원 복원 계획이 있단다. 장수당은 이미 2004년에 복원되었고 이 터의 옛 주인이던 고득종을 모신 향현사는 2007년에 복원되었다. 중요한 것은 서원의 복원보다 향로당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난립한 비석들만 정비하여 오현단이 지닌 진정성이 살아나게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 ||
![]() | ||
오현단이 아무리 어지러워도 답사객을 여기로 안내하는 이유는 오현단의 소박한 제단 형식이 주는 진정성과 오현단에 서린 인문정신을 새기기 위함도 있지만 여기서 내려다보는 제주 풍광의 아름다움과 제주성의 잔편이 있기 때문이다. 오현단 뒷벽이 바로 제주성이다. 제주 시내를 빙 둘러 축조했던 제주성을 언제 처음 쌓았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종 11년(1411) 정월에 제주성을 정비토록 명하였으니 그전부터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성곽의 둘레가 4394척(약 1424m), 높이 11척(약 3.3m)으로 동·서·남문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는 지금의 산지천과 병문천 사이에 축성된 규모를 말했다고 보이며 나중 성곽의 기초가 된 듯하다. 제주성은 명종 20년(1565)에 제주목사 곽흘이 1555년에 일어난 을묘왜변(倭變)의 고통을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성곽의 규모를 동쪽으로 확대하여 가락쿳물과 산짓물을 성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격대와 타첩을 갖추었다고 한다. 또 선조 32년(1599)에는 성밑굽을 5척(약 1.5m) 늘리고 성벽의 높이를 13척(4m)으로 높이면서 성의 모습을 일신하였다. 그리고 정조 4년(1780)에는 산지천이 범람하여 민가의 피해가 많자 이를 대비하여 간성(間城)을 축조하였다. 이런 식으로 제주성은 지속적인 정비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제주성은 처참하게 파괴된다. 그들은 제주성을 역사 유적으로 보존하지 않고 1925 년부터 1928년까지 제주항을 개발할 때 성벽을 허물어 바다를 매립하는 골재로 사용하였다. 결국 바닷가에서 약간 멀리 떨어진 오현단 부근의 격대 3곳과 높이 약 4m, 길이 약 160m만이 남았다. 간신히 살아남은 이 성벽의 잔편을 보면 제주성은 제주 현무암을 이용하여 빈 틈새가 거의 없이 견고히 쌓았으며 성곽에 계단이 남아 있어 안쪽과 바깥쪽을 구분했음도 확인된다. | ||
| ||
그리고 5년 뒤 최진남 판관은 이 장수당에 귤림서원을 지으면서 그 자리가 명당임을 이렇게 말했다. "여러 유생과 장수당에 갔는데 뒷기슭에 올라가니 한라산의 정맥이 춤을 추듯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며 뻗어내려와 이곳에서 어우러져 하나의 언덕을 이루었는데 아래로는 바다에 임해 있고 옆에는 맑은 시내가 흐르고 있었다. 바람에 불리어 울리는 대나무 소리는 퉁소 소리처럼 상쾌하고 귤림이 무성하여 더없이 고요하였으며 닭 우는 소리나 개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였다. 맑고 시원하면서도 훤하게 트인 맛이란 성(城) 중의 별천지였다. …이에 귤림이 많음에서 취하여 귤림서원이라 이름하였다." 제주성 잔편이 남아 있는 오현단 자리는 이런 명당이었다. 그래서 오현고등학교의 명성이 육지에까지 자자했는지도 모른다. 이 천하의 명당 자리가 그동안 이렇게 방치되었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얼마 전 다시 제주성터와 오현단에 가보니 지금 제주시에서는 제주시기념물 제3호인 이 제주성터를 복원하여 역사공원으로 정비하는 작업을 진행한다는 거대한 복원 계획도가 세워져 있었다. 머지않아 답사객과 올레꾼들의 사랑을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했다. 반가운 마음이 일어나면서 혹여 이것이 오현단의 어지러운 비석 같은 일로 반복되면 어쩔 것인가라는 걱정도 함께 일어나면서 부디 귤림서원 시절의 그 분위기가 복원되기를 축수하듯 빌어보았다. | ||
![]() | ||
<출처: 월간중앙>
|
|
출처: 아름다운 추억여행으로 원문보기 글쓴이: 박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