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의 재산 / 열왕기상 10:14-29
약 100여년 전 미국 네바다 주에 살던 헨리 콤스톸이라는 사람이, 버지니아 주에 큰 산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겨우 11,000달러를 받고 팔아버렸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이 산에서 미국 최대 규모의 금과 은이 발견되었고, 그 매장량은 그 당시 평가로 5억불 이상이 되었습니다. 콤스톡 씨는 너무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 1달 동안 고민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습니다. 5억불의 가치가 되는 땅을, 만 불 정도에 팔아 그는 실수를 범했고, 가장 소중한 생명을 돈 때문에 억울함에 못 이겨 버린 것은, 더 큰 실수를 범하고 만 것이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그랬습니다. 주님을 은 30냥을 받고 판 것이 그의 첫 번째 잘못이라면, 자살로 끝을 맺은 잘못은 두 번째 실수였습니다. 세상에는 실패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건강에 실패하고 후회하는 사람, 사랑에 실패하고 좌절한 사람, 물질에 실패하고 주저앉은 사람, 인간관계에 실패하고 힘들어하는 사람, 이렇게 뭔가 없어지거나 부족해짐으로 실패한 사람들이 다양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너무 많아서 실패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시간이 많아서 실패한 사람도 있습니다. 건강이 좋아서 실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 꾀가 많아서 실패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야곱을 보면서, 그는 꾀가 많아서 타향에서 고생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솔로몬 역시 많아서 실패하는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은혜로 큰복을 받습니다. 지혜가 많다고 하던 스바 여왕까지 와서 솔로몬의 지혜를 칭찬하고 돌아갈 정도입니다. 오늘 본문 24-2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그 지혜를 듣고, 그 얼굴을 보기 원해서 엄청난 예물을 가지고 옵니다. 우리가 이 열왕기상 10장을 읽어 내려가면, 솔로몬의 부는 다만 부요함을 넘어서, 사치에 가까운 인상을 받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지혜를 주셨고, 그 지혜뿐만 아니라 부와 귀까지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그 하나님이 주신 복 때문에 실패한 사람입니다. 이 말이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복을 잘못 주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제대로 활용할 줄을 몰랐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 자체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복 때문에 실패하는 솔로몬이 잘못입니다.
우리나라 말 중에 일장춘몽이란 말이 있습니다. 인생의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어느순간 끝나면,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솔로몬의 영광을, 들에핀 백합화를 비교하면서, 마태 6;29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지순례 중에 사막의 메마른 돌밭사이에 핀 백합화는, 빨간 색상으로 아름답게 향기 날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 같이, 솔로몬의 영화와 호화로웠던 생활은 일장춘몽으로 끝났지만, 백합화는 오늘도 내년에도 계속해서 꽃피어 향기 날리고 있습니다. 예전에 어떤 광고에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부자 되라는 이 말은 누구도 싫어하지 않는 말일 것이고, 또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희망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람들의 이러한 희망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합니다. 딤전 6:9절의 말씀처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고, 또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도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십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부자 되는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결국 성경을 진리라고 하면서도, 성경을 무시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말씀들이 매일 하늘에 글씨로 나타난다거나, 음성으로 들린다면, 아마 크게 놀라면서, 부자 되고자 하는 자기 마음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들이, 다만 활자로 인쇄되어 있는 것 때문에, 쉽게 잊어버리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자 되는 것이 무엇이기에, 성경은 그토록 강하게 경고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부자 되고 싶어 하는 마음과, 천국을 소망하는 마음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두 마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부자 되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산다면, 결국 부자만 된다면, 천국을 포기해도 좋다는 식이 될 수밖에 없고, 천국을 소망하는 마음이라면, 부자가 아니어도 좋다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천국은 부자 되고자 하는 마음은, 절대 허락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은 부자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는 의미도 됩니다. ‘아니 부자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왜 예수를 믿을 수 없는가?’라고 항변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끝까지 부자 되고 싶은 마음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자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면, 부자 되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고, 예수님을 믿는 자로 살고 싶다는 소원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는 성도의 자연스런 모습인데, 그토록 우리는 ‘부자’라는 것에 미련을 버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왜 부자 되고자 하는 마음을 허용하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부자 되고 싶어 하는 것은, 하고 싶은 것을 원 없이 하면서 살아가는, 즐거움의 세계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것, 더 좋은 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고, 세상이 알아주는 영광의 세계를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세계를 절대 좋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부자 되고자 하는 마음을 허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자 되고자 하는 마음에는, 부자들이 부러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도 저 사람들처럼 살아봤으면’ 하고, 지금의 자신의 처지를 싫어하게 됩니다. 이런 마음으로 고난 받고 죽으신, 예수님의 세계가 마음에 들어오겠습니까? 그 세계를 바라보려고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 역시 부자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본다면, 단지 솔로몬이 누렸던 부와 영광이 마음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부가 부러움의 대상으로,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할 것입니다. 솔로몬이 누렸던 부는 한마디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14절을 보면 “솔로몬의 세입금의 무게가 금 육백육십육 달란트요”라고 말하는데, 금 육백육십육 달란트가 대략 1조7천4백억 원에 해당되는 액수임을 생각한다면, 솔로몬은 매년 엄청난 액수를 세금으로 거둬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무역하는 상인들과, 주변 나라들이 바치는 조공까지 계산한다면, 솔로몬의 재물은 상상할 수도 없었을 정도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8절을 보면 보좌를 상아로 만들고, 정금으로 입혔다고 합니다. 또한 마시는 그릇도 금으로 만들었으며, 천하가 솔로몬에게 가져온 금과 은 등의 예물로 인해, 은은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니, 솔로몬의 재물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말 그대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재물을 소유한 것을 두고,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16-17절 “솔로몬 왕이 쳐서 늘인 금으로, 큰 방패 이백 개를 만들었으니, 매 방패에 든 금이 육백 세겔이며, 또 쳐서 늘인 금으로, 작은 방패 삼백 개를 만들었으니, 매 방패에 든 금이 삼 마네라. 왕이 이것들을 레바논 나무 궁에 두었더라.” 방패는 전쟁을 위한 무기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방패를 금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전쟁을 대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전쟁 무기를 금으로 만들겠습니까? 따라서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는 과시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위대함과 강함과 부함을, 금으로 만든 방패를 진열해 놓음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한 26절에서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병거가 천사백 대요, 마병이 만이천 명이라. 병거성에도 두고, 예루살렘 왕에게도 두었으며”라고 말하는 것을 보더라도, 솔로몬은 병거와 마병으로 무장하여, 이스라엘의 강력한 힘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 17:16-17절을 보면 “그(왕된 자)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28-29절 말씀처럼, 솔로몬이 병거와 말들을 애굽에서 구입하였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솔로몬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은 잊어버린 상태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부자 되고 싶은 이유가, 솔로몬처럼 살고 싶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초라한 삶이 아니라 남들이 누리지 못한 것을 누리면서, 화려한 삶을 살고 싶은 욕망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마시는 그릇 조차도 금으로 만들어서, 자신을 과시하고 보여주고 싶은 그 마음이, 과연 십자가에 피 흘리고 죽으신,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을 허락하겠습니까? 그러니 부해지고자 하는 그 마음을, 천국이 어떻게 허용을 하겠습니까?
11:6절을 보면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따름 같이 따르지 아니하고”라고 말하고, 9절에서는 마음을 돌려 여호와 하나님을 떠났다고 말합니다. 솔로몬이 악을 행한 것은 무엇이고, 다윗처럼 여호와를 온전히 따르지 않은 것은 무엇입니까?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따랐다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은 완벽히 지켰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고 의지하였음을 뜻합니다.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온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온전함입니다. 돈은 사람에게 감추어져 있는 죄를, 지적해 내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돈으로 천국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굳이 돈에 국한하여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부자라는 것은 남보다 많이 가진 것을 뜻합니다. 곧 돈에 부자가 아니라, 지식에 있어서 부자도 있을 수 있고, 외모에 있어서도 부자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부자들은 남보다 낫다는 자세를 취하기 십상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가짐으로는, 자신의 죄를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에, 결국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가난하면 되는 것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 신세에 대해 불만을 가지면서, 역시 더 나아질 것을 꿈꿉니다. 소유는 없다고 해도, 그 마음은 모든 것을 갖고자 하는, 소유욕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기에, 그런 마음으로는 자신의 죄를 볼 수가 없으며, 따라서 천국과 상관없는 마음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죄를 보게 되면, 자신은 천국 갈 자격이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마음이라면, 자신은 부자로 살아야 할 권리도, 자격도 없음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보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좋은 것을 누리며 살아갈 이유도, 권리도 자격도 자신에게 없음을 알 때, 부해지고자 하는 자신의 마음이, 곧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생각하지 않은, 악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이 허용하는 마음입니다. 부자 되고 싶다는 것은, 자신은 부자로 살 자격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마음이라면, 부자가 아닌 지금의 처지를 부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은 뻔한 것이고, 그것은 죄인으로 태어난 자신의 실상을 보지 않는다는 뜻이고, 가난하든 부하든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도, 외면해 버린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마음인 것입니다.
빌 4:11-1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말합니다. 사도의 이 말은 가난하든 부하든, 그 마음은 변함없이 예수님을 향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우리의 문제는 부자 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예수님을 향하지 않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세상이 부러워 할 만한 부와 영광을 누렸고, 지혜도 있었지만, 정작 그 모든 것으로도 자신의 죄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상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긍휼과 자비를 보지 않으니, 모든 신이 같게 보인 것입니다.
성도가 영생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날마다 자신의 죄에 대해 지적을 받고,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심판의 대상인 자신의 실상을 보게 되는 것이고,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이라고 해도, 죄인인 나에게는 과분할 뿐이라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에서 ‘모든 것이 주의 은혜’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모든 재물로도, 영광으로도, 이러한 고백의 마음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오심으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라면 부해지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모든 것을 주님의 은혜로 고백할 수 있는 마음으로 달라지는 것을, 소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천국이 어떤 마음을 허용하는가를 안다면 말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이 보지 못하고 있는, 죽음의 실체를 드러내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인간에게 주어진 저주와 죽음의 실체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참된 생명에 소망을 두게 하기 위함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부자 되게 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부자 된 것으로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수많은 재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잊었습니다. 재물로 자신의 강함을 과시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사도의 말처럼 풍부에 처할 줄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살아감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솔로몬의 악입니다. 생명은 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있습니다. 사람을 생명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돈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재물로 살아가는 인생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로 살아가는 인생이 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게서 솔로몬에게 엄청난 복을 주셨건만, 교만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화를 자초했습니다. 우리에게 오늘 어떤 복이 주어져 있습니까? 건강, 재물, 시간, 등 어떤 복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복을 잘 관리하는 복이 있게 하옵소서. 복을 화로 바꾸지 않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또한 어떤 어려움, 어떤 고통의 문제가 있습니까? 그 고통과 어려움의 문제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오히려 큰 복으로 바꾸는 은총이 있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주신 복을 화로 바꾸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오히려 우리는 반대로 좋지 못한 것 같은 악조건에서도, 복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