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 19. 요셉의 번뇌 마 1: 20. 지시
마 1: 19. 요셉의 번뇌 -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하여 )
1]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요셉은 정혼식에 의한 남편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려 했다.
'의로운'(*, 디카이오스)이란 '곧은', '공정한'이란 뜻으로 청렴결백하여 불의에 굴하거나 흔들림이 없는 상태를 지칭한다.
그는 공의롭고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율법에 따른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살고자 했다. 그는 여자가 부정했을 경우 돌로 쳐 죽여야 한다는 모세의 율법을 한번쯤 떠올렸을 것이다.
* 신 22: 20-24 – 20 그 일이 참되어 그 처녀에게 처녀의 표적이 없거든 21 그 처녀를 그의 아버지 집 문에서 끌어내고 그 성읍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는 그가 그의 아버지 집에서 창기의 행동을 하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행하였음이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서 악을 제할지니라. 22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23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24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안에 있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이러한 내면적 갈등은 정혼한 마리아와 파혼하려 마음먹은 데서 발견된다.
그는 마리아를 혹독하게 다루어 자신이 참 유대인임을 증명할 수도 있었다. (Mc Neile). 그러나 율법의 칼날을 휘두르지 않고 대신 율법의 핵심인 사랑과 용서의 미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 롬 13: 8-10 –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가 율법의 마침이자 완성이신 그리스도의 법적 부친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법과 사랑을 겸비한 '의로운 사람'이란 사실을 충분히 입증하고 있다.
* 마 5: 17 -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 롬 10: 4 -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2]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구절에 대한 중요한 견해들은 다음과 같다.
Ⓐ 요셉은 마리아의 기적적인 처녀 잉태를 알았으나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공개하려 하지 않았으며 결혼을 파기하고자 했다. (Gundry, McHugh).
이 견해는 마리아가 요셉에게 자신의 임신 비밀을 얘기했다는 가정 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요셉에게 결혼 계획을 취소하지 말라고 계시한 주(主)의 사자의 말 속에서(20절) 요셉이 마리아의 처녀 잉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마리아가 공개적으로 모욕당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조용히 파혼하고자 했다. (Lenski).
Ⓒ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기에 부정한다고 생각되는 마리아와 양심상 결혼할 수 없었다. (Calvin, M. Henry).
두, 세 번째 견해를 조화롭게 취합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본문의 '아니하고'(*, 메델론)가 적극적인 마음의 성향을 뜻하는 말로서 요셉이 마리아를 모세 율법이 정하는 징벌에 처하지 않을 것을 확고히 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끊고자 하여'(*, 에불레데)란 아직 행동하지 않은 미미한 마음의 결단을 의미하는 말로서 정혼한 그녀와 정식 결혼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 두 단어를 통해 볼 때 그 당시 요셉은 법적으로 허락되는 한도 내에서 은밀하게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을 방법을 모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마리아에게 큰 피해가 돌아가지 않는 사소한 문제를 빌미로 두 사람의 증인 앞에서 그녀의 손에 이혼 증서를 '가만히' 줌으로써 이 일을 조용히 묻어버리려 하였다.
요셉은 이렇게 함으로써 의로움과 율법을 무난하게 조화시키려 했다.
3] 의로운 요셉
본문은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요셉에게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것은 그의 사랑하는 약혼녀가 동거하기 전에 임신한 사실 때문이었다. 어떻게 해서 그에게 알려졌는지는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 않아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요셉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마리아에 대한 배신감으로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자신을 맡기지도 않았다. 그는 매우 냉정하며 차분하게 행동했다.
(1) 불의를 드러내지 않았다. -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① 마리아를 끝까지 사랑하였으며 그녀의 입장에 서기를 원했다.
마리아가 요셉을 배반했다는 것이 확실시 되는 상황에서도 마리아에 대한 요셉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마리아의 입장에서 그녀의 실수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아니하였다.
이처럼 상황이 변하여도 진실한 사랑은 변치 않는 것이며 나의 입장보다는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랑은 모든 문제 해결의 근원이다.
② 사람은 누구든지 실수할 수 있으며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쉽게 분노하고 쉽게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이유는 사람은 누구든지 실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요셉은 이를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여기에서 제외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도 그는 마리아에게 돌을 들 수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대방의 티를 보고 끄집어내려 하기 전에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발견하는 겸허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③ 자비와 긍휼이 없는 공의는 폭력과 증오만을 낳을 뿐이다.
요셉이 마리아의 불의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궁극적으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비록 하나님의 공의와 그에 따르는 심판이 절대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자비와 긍휼을 전제하지 않는 것이라면 오직 폭력과 증오함을 의미할 뿐이란 사실이다.
이러한 증오는 더욱 큰 증오만을 초래하여 결국 사회에 미움과 분열만을 조장시킬 수 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를 외치고 이를 이 땅 위에 이루고자 할 때는 반드시 자비와 긍휼을 전제로 해야 한다.
(2) 가만히 끊고자 하였다.
① 그는 마리아에 대한 사랑과 정에 연연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외면하지 않았다.
요셉은 사랑과 정으로 모든 것을 덮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털어버릴지라도 그것이 일시적인 모면은 될 수 있어도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영원히 닫아 둘 수는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어떠한 사랑과 긍휼을 베풀더라도 하나님의 공의를 반드시 시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으려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도 얄팍한 정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를 저버리고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②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의 굳센 의지가 없이는 실행될 수 없다.
'가만히 끊고자 하는' 요셉의 모습에서 온유하기는 하나 불의에 대해서는 매우 단호히 대처하는 그의 성품을 발견할 수 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공의는 어떠한 아픔을 감수하더라도 반드시 시행되어야 한다는 의지가 있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의지하에서 우리 주위와 교회로부터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셉과 같이 온유한 마음을 잃지 않으면서 불의에 대해서는 강력히 대처하는 단호하고도 굳센 의지가 있어야 한다.
③ 건설적인 고민은 성도에게 있어야 하는 필연적이다.
본문은 전반적으로 요셉이 고민할 수 밖에 없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는 아니다. 그렇기에 그는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어야 했으며 그로 인한 서로의 아픔을 극소화해야 했다. 여기에 그의 고민이 있었다.
이러한 고민을 성경은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좋은 결과를 낳기 위해 애쓰고 고민해야 한다고 성경은 교훈이다.
* 시 126: 5-6 –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왜냐하면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수고하고 애쓴 흔적이 없는 자에게는 결코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없다.
* 갈 6: 7 -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그러므로 선한 일을 위하여 늘 애쓰며 수고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마 1: 20. 지시 -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
1] 이 일을 생각할 때
'생각하다'라는 원어 '엔뒤메덴토스'(*)는 수동태 제1과거형 분사로서 생각이 그의 속에 들어오고 있었을 상황을 암시한다.
이러한 정황(situation)적 상태를 중요시 여긴 낙스(Knox)는 본 구절을 '하지만 그 같은 생각이 그의 뇌리에 스치기가 무섭게'라고 표현함으로써 요셉의 심각한 내적 갈등의 일면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요셉은 난감한 사실에 직면하여 최선의 해결책을 찾고자 극심한 고민에 빠졌다. 당시 요셉은 자기 조상 다윗에게 말씀하신, 메시야 탄생에 대한 약속이 자신과 아내 마리아에게서 성취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 삼하 7: 12-16 –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4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2]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개역 성경에 빠진 '보라'를 뜻하는 감탄사 이두(*)는 경악할 만한 사건이나 행동을 예시(indication)하는 도입부로 사용하기도 하고(Schalatter), 독자들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역할도 한다. (Hendriksen).
이 말은 하나님의 메신저(messenger)의 출현이라는 놀라운 사건을 소개하는 데 도움이 된다. (본서에 61회, 마가복음 8회, 누가복음 56회, 요한복음 4회 사용)
사 7: 14의 동정녀 탄생 예언에도 동일한 용법으로 기록되어 있다.
* 사 7: 14 -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주의 사자'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전달하는 사명을 맡은 메신저를 가리킬 때 사용하였다.
* 창 16: 7-14 – 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4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사이에 있더라.
* 창 22: 11-18 –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 출 3: 2 – 4: 17 -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다.
'사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현으로 많은 경우에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주의 사자'는 마리아에게 잉태의 소식을 고지(announcement)해준 천사 가브리엘로 짐작하는 학자들이 있다.
* 눅 1: 26 –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본문은 사자의 실체를 밝히는 것보다는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하늘의 계시가 재개된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역사에 관여하고자 하시는 계획을 당신의 메신저를 통해 요셉에게 밝히 드러냈다(Bonard).
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방법으로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에 간혹 사용되었다.
* 창 20: 6 -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 삿 7: 13 - 기드온이 그 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위쪽으로 엎으니 그 장막이 쓰러지더라.
* 삼상 28: 6 -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요셉이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것처럼 여기에서도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다.
* 창 37: 5, 9, 19 – 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19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 도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누가는 마리아가 꿈이 아닌 실제에 의해 수태고지를 받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 눅 1: 26-27 – 2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3] 다윗의 자손 요셉아
요셉이 다윗의 혈통이 감당해야 할 역할, 즉 메시아 탄생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
이 말은 예수의 족보(2-17절)와 성령 잉태(18-25절)를 완벽하게 연결해 주고 있다.
4]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무서워하다'라는 뜻을 지닌 '포베데스'(*)는 2인칭 단수 제1과거형 수동태로서 단순히 '두려워했다'라는 뜻 외에 '그가 주저했다'라는 의미도 있다.
하나님께서 사자를 통해 요셉에게 관여하셨을 때, 그는 마리아를 데려오고자 하는 마음을 굳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본 절을 '마리아 데려오기를 주저하고 망설이지 말라'고 할 수 있다.
5]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이 말은 천사가 요셉에게 이미 시작한 혼인(정혼)을 완성(신부를 집으로 데려오기)할 것을 지시한 것이며, 그로 인해 받게 될 죄책이나 비난을 개의(介意)치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왜냐하면 마리아의 잉태는 음행으로 인한 '불결한 잉태'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거룩한 잉태'였기 때문이다(18절).
이 말을 요셉이 완전히 이해할 수 없겠지만 평범한 유대 신앙인이었던 요셉에게 '성령'에의 언급은 그로 하여금 예수의 출생 비밀을 이해하고 인간적인 고민과 갈등, 두려움과 의심에서 벗어나게 했을 것이다.
6] 하나님의 위로
이 세상은 우리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간에 여러 종류의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 슬픔은 우리가 비록 선한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생애에 그치지 않고 찾아든다. 이 세상에는 이처럼 순식간에 닥쳐오는 슬픔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모든 사람은 이러한 슬픔에 대하여 다른 사람으로부터 위로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위로가 우리에게 참된 평안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된 평안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1)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선하게 해결하고자 할 때 위로해 주신다.
① 문제를 선하게 해결하려면 반드시 여유 있게 생각해야 한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원리원칙만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왕도가 되지 않는다. 만일 요셉이 원칙대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면 약속대로 메시야는 이 땅에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요셉은 모든 것을 원칙보다는 선하게 해결하려 하였고 그로 인하여 시간을 두고 고민할 때 하나님의 위로와 큰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할 때 원칙에 앞서 선하게 해결하려는 의지와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위로와 축복을 주실 것이다.
② 모든 것을 자비롭게 해결하려는 사람은 자비의 은총을 받게 된다.
요셉이 마리아의 사건을 법대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자비롭게 해결하려 했을 때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자비의 위로와 축복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실수하였을 때 상대방에게 은총을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도 상대방의 실수에 대하여 항상 자비로워야 한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 마 5: 7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2) 기쁨의 천사를 보내 주신다.
'주의 천사가 현몽하여'. 사람들이 고민하며 잠들 때는 꿈속에서조차 악몽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깊은 고뇌를 안고 잠이 들었지만, 하나님은 위로와 함께 기쁨을 전해주는 천사를 보내 주셨다. 오늘날에도 모든 문제를 선히 해결하려고 노력한다면 모든 고민을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축복을 내려 주신다.
(3) 축복을 일깨워 주신다.
마귀의 궤계에 의하여 우리는 종종 우리의 축복을 잊을 때가 있다. 성도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아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인식하며 살아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고민하며 두려워한다.
본문에서 천사가 현몽하여 '다윗의 자손 요셉아!'라고 부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천사는 무엇보다도 그가 메시야가 나실 다윗의 자손임을 깨우쳐 주길 원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 자신이 축복받은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인식하기만 하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의뢰하여 해결 받을 수 있으며 항상 평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참된 축복은 무엇인가를 새롭게 부여받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축복된 위치를 일깨워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4) 괴로움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신다.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천사가 그의 꿈속에 나타남으로 마리아의 임신이 취소된 것이 아니다. 천사의 소식은 마리아의 임신이 성령에 의해 한 것이란 설명을 통해 괴로움이 기쁨으로 바뀌었다.
하나님의 위로는 이처럼 우리의 축복된 위치를 재인식시킬 뿐만 아니라 변화되지 않은 우리의 괴로운 상황에서도 그것을 놀라운 기쁨으로 변화시키는 위로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라도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대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
우리가 본문에서 깨닫는 것은 비록 성령께서 놀라운 은혜 가운데 우리를 이끄신다고 할지라도 마귀의 궤계는 능히 그것을 우리로 하여금 슬픔으로 인식하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에도 불구하고 어리석게도 비탄과 슬픔 속에서 생활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탓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을 깨닫게 해 주신다. 참된 위로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자기의 모든 문제를 선히 해결하려고 노력하면서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의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