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존명사 하나 때문에
강인한
오늘 아침에 집어든 계간 시지에서입니다. 신달자 시 두 편을 읽습니다. 「기념 수건」을 읽다가 전에 이성복이 쓴 그런 내용인가 싶다가 그게 아니라서 마음 놓입니다. 읽으면서 역시 우리 연배 시인 중 신달자 시인의 시는 긴장이 살아 있다고 느끼며 반가워합니다. 시와 수필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는 아슬아슬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이만큼 쓰는 우리 또래 시인도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맨 마지막 두 행으로 아주 간단히 기분을 잡쳐버립니다.
두 편 중에 또 한 편, 「겨울 구곡폭포」를 읽습니다. 제목에서부터 슬슬 오세영이나 조정권이 떴다 가라앉았다 합니다. 하지만 그런 선입견은 바로 깨끗이 지워져버립니다. 이걸 오늘 고른 ‘좋은 시 읽기’로 점찍어 놓고, 내 카페 ‘작업실’에 들여놔야겠다고 마음을 딱 굳힙니다.
추억이 시려 등 굽고
심장 얼어 터져 눈 내리는 날
더 더 추운 기억을 찾아가네
가평군 대성리 구곡폭포
뼛골 흰 전라(全裸)로
훌렁 벗은 채 멈춘 저 오욕
언제였는지
그대가 등을 돌렸나 주변 겨울의 언 옷자락까지 붙들고
처절하게 튀어 나온 근육이 날카롭다
말문은 아예 닫아 버렸다
지난 세월을 뒤적뒤적
바람이 한 번 더 난장으로 불고
저 처형의 백색 소리 속에서
그대를 찾는다
나뭇가지 걸려 찢긴 비닐조각도 뒤적인다
다시 눈발 독수리 날개처럼 덮어오고
정금 같은 불호령으로 뼛골 휜
푸른 인광 날빛으로 천 개의 입을 닫은 체
번뜩이는데
그대가 남긴 말이 이것인가
치솟는 울화도 두 손 놓고 멈춰서는
숨죽인 절명의 순간
너의 말은 바람 속에 섞이고
나는 널 만나지 못한 체
더 깊은 얼음의 침묵 속으로 발을 옮기고.
⸻신달자, 「겨울 구곡폭포」 전문
지난날 그의 시 「침묵피정」에서 내가 받은 느낌과 통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단호히 얼어 무겁다’ ‘말과 소리를 벗어놓고’ ‘지독한 맹세’ 등의 의지적인 시어가 여기서도 강렬한 인상을 줍니다. 뼛골, 백색, 처절, 근육, 처형, 독수리, 인광, 절명 등.
그런데 “푸른 인광 날빛으로 천 개의 입을 닫은 체”와 “나는 널 만나지 못한 체”에서 보듯 두 군데에 똑같은 ‘체’라는 의존명사를 쓰고 있습니다. 처음엔 실수인가 싶었는데 두 군데나 쓰는 걸로 보아 실수가 아니라 시인이 의존명사 ‘체’를 ‘채’와 같은 것으로 혼동하고 있다고 판단됩니다.
체[의존명사] : 용언의 관형사형 어미 ‘-은, 는’ 뒤에서 흔히 ‘하다’와 함께 쓰여, 거짓으로 그럴듯하게 꾸미는 태도를 나타내는 말. 예> 알고도 전혀 모르는 체한다.
채[의존명사] : 행위나 동작을 모두 끝내지 못함을 이르는 말. 예> 만나지 못한 채 돌아왔다.
스스로 확실하게 아는 용법이 아닐 때에는 반드시 국어사전을 펼쳐 정확하게 점검할 일입니다. 저 의존명사 ‘체’ 하나가 아름다운 시의 거침없는 보행에 돌부리처럼 탁 걸려서 나는 이 시의 선택을 주저 없이 폐기하기로 마음먹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