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추부의 기원 및 변화>
고려시대 : 송나라의 추밀원을 바탕으로 중추원을 만들었으며 중추원의 추신은 중서문하성의 재신과 더불어 ‘재추(宰樞)’ 혹은 ‘양부재상(兩府宰相)’이라 불리었으며, 국가의 중대사를 회의 결정하는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을 운영하였다. 또한 왕명의 전달과 궁궐 수비 등을 맡아 보던 핵심 관청이다.
조선시대 : 고려시대와는 달리 왕명 출납 기능은 승정원으로, 군사 관련 기능은 병조로 분리되어 실질적인 기능은 없었고, 문무당상관으로서 소임이 없는 사람을 대우하는 기관이었다. 한편으론 순장(巡將)으로서 야간에 궁궐이나 도성 내외를 행순(行巡 : 순찰)의 임무를 맡거나 관찰사나 병마절도사로 겸임되는 등 실질적인 기능을 가지기도 하였다. 특히, 판중추부사는 대신급의 고위관원이 체직될 때 잠시 임명되는 자리로 활용되었다.
일제강점기 : 다시 중추원으로 불리며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으로서 실질적인 정책 심의·의결기능은 전무에 가깝다.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친일적 정객, 유력인사에게 중추원의 명예직을 주었고 그 성격상 현재는 일제강점기에 “중추원 부의장, 고문, 참의로 활동한 자”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선조 25년(1592)부터 선조 31년(1598)까지 실록에 기록된 판중추부사로는 황정욱(黃廷彧), 윤근수(尹根壽), 김수(金晬), 유성룡(柳成龍), 최흥원(崔興源), 정곤수(鄭崑壽), 윤두수(尹斗壽), 김응남(金應南) 총 8인이다.
-황정욱(黃廷彧) :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소사(號召使)가 되어 왕자 순화군(順和君)을 배종(陪從)해 관동으로 피신하여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돌렸다. 하지만 국경인(鞠景仁)의 모반으로 순화군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로부터 항복 권유문을 쓰도록 강요받았고 거절했으나, 그의 아들 황혁(黃赫)이 대신 썼다. 항복 권유문을 기초한 문제가 정치의 쟁점이 되면서 길주에 유배되었다. 1597년 선조의 특명으로 석방되었으나, 복관되지 못한 채 죽었다.
-윤근수(尹根壽)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로 기용되었으며, 문안사(問安使)·원접사(遠接使)·주청사 등으로 여러 차례 명나라에 파견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김수(金晬) :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성곽 보수 및 축성을 하였으나 유생을 동원하는 등의 처사로 지탄 받았다.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경상우감사(慶尙右監司)로서 진주를 버리고 거창으로 도망을 갔다. 용인(龍仁)전투에 근왕병 100여명을 이끌고 참가하였으나 패하였고,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곽재우(郭再祐)와 불화가 심해 김성일의 중재로 무마되기도 하였다.
-유성룡(柳成龍) :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국난을 극복해 나간 전시 재상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원균(元均) 등을 추천하였고 이후 평양성 전투에서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 파주까지 진격하였다.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강해(講解)하였다. 전쟁이 종식되어갈 때 화친을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되었으며 이후 선조의 부름이 있었으나 복직하지 않았다.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최흥원(崔興源) :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유성룡(柳成龍)의 파직에 따라 영의정에 기용되었다. 이후 세자를 강계(江界)까지 배종한 뒤 의주(義州)에서 왕을 시종했다. 임진왜란 당시 왕을 의주까지 호종했던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추록(追錄)되었다.
-정곤수(鄭崑壽)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선조를 호종하였고 대사간이 되어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도록 건의했으며, 청병진주사(請兵陳奏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선조를 호종한 호성공신(扈聖功臣) 원훈으로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녹훈되었다.
-윤두수(尹斗壽) : 임진왜란 이전 건저 문제로 파직되었으나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다시 기용되었고, 이조판서 이원익(李元翼),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등과 함께 평양성을 지켰으나 패하였다.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가 되어 육군과 수군의 합동작전을 지휘했으나 3도의 병력을 총동원하고도 위엄만 손상케 했다는 이유로 양사의 탄핵을 받아서 체찰사의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판중추부사로 중전(中殿)을 모시고 해주에 다녀왔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난국을 수습하였다.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에 올랐으나, 대간의 계속되는 탄핵으로 사직하였고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봉해졌다.
-김응남(金應南) : 1591년 성절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병조판서 겸 부체찰사가 되어 선조를 호종하였다. 1593년 이조판서로서 왕을 따라 환도, 이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어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임진왜란 후의 혼란한 정국을 안정시켰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안무사로서 영남 지방에 내려갔다가, 풍기(豊基)에서 병이 위독해져서 귀경 후 사직하고 이듬해 사망하였다.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추봉되었다.
첫댓글'판중추부사'라는 관직명이 이순신과 관련하여 우리 눈에 익은 것은 이순신이 사형의 위기에 처했을 때 당시 판중추부사였던 정탁이 구명을 하여 목숨을 구하게 했다는 이순신개설서의 한 대목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 당시 정탁은 지중추부사였다. 그런데 선생 한분이 '국조인물고'라는 책자를 인용하여 당시 정탁의 관직을 판중추부사라고 언급하였다. 이것이 이순신연구 초기 개설서들에 그대로 반영되어 전해져 왔다. 이번 닉숙제를 통해 정확하게 조사하여 올려주셨네요. 숙제를 잘하신 240번째 회원으로 우수회원에 등업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판중추부사조선왕조실록에는 이순신을 변호할 당시 지중추부사직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죠. 그런데 조선후기 문집들이나 관찬사료 등에는 판중추부사라고 기록되어 있죠. 예컨대 신경의 제조번방지, 윤휴의 백호전서, 김육의 잠곡유고, 숙종대 이단하등이 보완한 국조보감 등이 그렇죠.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이 사료로서 가장 가치가 크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따르는 것이 정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순신 관련 개설서를 쓴 분들이 이 부문에 대해 실록을 참고하지 않고 다른 자료들을 참고하여 작성하는 바람에 정탁이 당시 판중추부사라고 알고 있죠.
닉연구내용중 아래와같은 부분이 있던데 "임진왜란이 일어난 선조 25년(1592)부터 선조 31년(1598)까지 실록에 기록된 판중추부사로는 황정욱(黃廷彧), 윤근수(尹根壽), 김수(金晬), 유성룡(柳成龍), 최흥원(崔興源), 정곤수(鄭崑壽), 윤두수(尹斗壽), 김응남(金應南) 총 8인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제가 요즘 징비록을 정독중인데 장군을 의금부에 하옥한뒤 선조가 대신들과 죄를 논할때 판중추부사인 정탁만 홀로 죽여서는 안되고 용서를 구함으로써 백의종군할수있게 하는 중요한 인물로 나옵니다.
첫댓글 '판중추부사'라는 관직명이 이순신과 관련하여 우리 눈에 익은 것은 이순신이 사형의 위기에 처했을 때 당시 판중추부사였던 정탁이 구명을 하여 목숨을 구하게 했다는 이순신개설서의 한 대목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 당시 정탁은 지중추부사였다. 그런데 선생 한분이 '국조인물고'라는 책자를 인용하여 당시 정탁의 관직을 판중추부사라고 언급하였다. 이것이 이순신연구 초기 개설서들에 그대로 반영되어 전해져 왔다. 이번 닉숙제를 통해 정확하게 조사하여 올려주셨네요. 숙제를 잘하신 240번째 회원으로 우수회원에 등업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약포 정탁 선생께서 판중추부사였다고 알고 있었는데 지중추부사셨더군요.. 실제로 약포 선생께서는 전쟁이 끝난 이후 판중추부사를 지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더 배워가겠습니다
@판중추부사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순신을 변호할 당시 지중추부사직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죠. 그런데 조선후기 문집들이나 관찬사료 등에는 판중추부사라고 기록되어 있죠. 예컨대 신경의 제조번방지, 윤휴의 백호전서, 김육의 잠곡유고, 숙종대 이단하등이 보완한 국조보감 등이 그렇죠.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이 사료로서 가장 가치가 크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따르는 것이 정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순신 관련 개설서를 쓴 분들이 이 부문에 대해 실록을 참고하지 않고 다른 자료들을 참고하여 작성하는 바람에 정탁이 당시 판중추부사라고 알고 있죠.
'판중추부사'
벼슬이 넘 높아서..겁이 나서 아무도 닉으로 선택하지 않았나봅니다..ㅎㅎ
우수회원 승차하심에 감축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이렇게 높은 관직일 줄은 몰랐습니다..ㅎㅎㅎ
먼저 우수회원 되심을 축하합니다
득분에 판충추부사라는 관직 에대하여 공부 를 잘헸습니다,
감사한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더 정진하도록 하겠습니다
격군님의 특별한 대우와 잘 정리된 숙제를 보아 대단하신 분 인것 같습니다.
아마도 한음선생 이상으로 초고속 승진하여 우수회원이 되셨군요.
그 열정 오래오래 유지하시어 타 회원들의 모범이 되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특별이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꾸준히 조금씩 많이 배워 이배사의 당당한 일원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덕분에
중추부의 판사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9인이 임란시기에 짧게 또는 길게 역임했을것 같네요.
아주 젊은 벗이 저희 카페에 오셔서 이렇게 봄바람을
날려주니 고맙습니다.
같이 배우고 함께 소통하게요~
우수회원~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노력하여 좋은 모습 보여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관직을 닉네임으로하여 숙제를 하는것이 쉽지않았을텐데, 근대까지 정리를 해주셔서 덕분에 공부했습니다.
우수회원이 된것을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닉네임 과제를 통해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판증추부사 닉네임 숙제 보고 갑니다. 고생 많으셨습네요.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댓글로 만나뵈니 좋습니다ㅎㅎㅎ!!
안녕하세요. 판중추부사님
제가 신입이라 판부사 나으리가 어떤분인지 잘 몰라 닉연구방에 들어와봤습니다.^^
닉연구내용중
아래와같은 부분이 있던데
"임진왜란이 일어난 선조 25년(1592)부터 선조 31년(1598)까지 실록에 기록된 판중추부사로는 황정욱(黃廷彧), 윤근수(尹根壽), 김수(金晬), 유성룡(柳成龍), 최흥원(崔興源), 정곤수(鄭崑壽), 윤두수(尹斗壽), 김응남(金應南) 총 8인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제가 요즘 징비록을 정독중인데 장군을 의금부에 하옥한뒤 선조가 대신들과 죄를 논할때 판중추부사인 정탁만 홀로 죽여서는 안되고 용서를 구함으로써 백의종군할수있게 하는 중요한 인물로 나옵니다.
정탁은 왜 빠졌는지 추가 연구부탁드려도 될까요?^^
끝으로 답사에 대한 열정과 후기가 최고시네요.
대단하십니다.^^
넵. 달밤님 덕분에 저도 징비록 보았는데 징비록에는 판중추부사로 나오네요.. 위 댓글들 중 격군님께서 말씀해주신 답변을 봐주시면 됩니다.!
@판중추부사 아 그렇군요ㅋ
그런데 격군님 글을보면 징비록 언급은 없으시고
대신 후대의 자료를 바탕으로 일부 연구자들이 판중추부사라고 해서 오해가 생긴거라고 하셨는데?????
징비록에 서애선생께서 언급한 것들이라~좀???
물론 징비록의 내용들중 서애선생이 관직들을 혼동해서 잘못된게 있다는것을 본것같기는 하지만~~~
제가 조선왕조실록을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달밤(月明夜) 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충무공께서 한성으로 송환되던 시기를 전후로 정탁 선생의 관직은 지중추부사로 확인됩니다. 서애 선생께서 쓰신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무언가 말을 하기는 조심스럽습니당..
@판중추부사 그렇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