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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결혼을 한 고구려 신여성, 평강공주
[월간 조선] 2018년 9월호 역사 속의 여인들 〈3〉
자유결혼을 한 고구려 신여성, 평강공주
글 : 엄광용 소설가
⊙ ‘얼굴이 파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온달은 귀화한 소그드인일 가능성 높아
⊙ 무예시합에서 출중한 기량 보인 온달에게 평강공주가 반한 것일 수도
⊙ 평강공주가 ‘바보 온달’을 키운 것으로 기록된 것은 평민에게 공주가 시집간 고구려 왕실의 자존심 세우기일 수 있어
엄광용
1954년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한국사 전공) 수료 / 1990년 《한국문학》에 중편소설 당선 문단 데뷔. 창작집 《전우치는 살아 있다》외 다수. 2015년 장편역사소설 《사라진 금오신화》로 제11회 류주현문학상 수상
온달(溫達)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本紀)에는 보이지 않고 열전(列傳) 제5권에 나온다. 김부식(金富軾)이 온달을 본기가 아닌 열전에서 다룬 것은, 이야기 자체가 설화적으로 처리되어 있기 때문에 본격적인 역사에서 제외시킨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25대 평원왕 때 장군인 온달은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이라는 설화로 유명하다. 《삼국사기》 열전에서는 평원왕(平原王)을 ‘평강왕(平岡王)’으로 쓰고 있어 그 딸을 ‘평강공주’라고 불렀다.
《삼국사기》 열전 5권 온달편에 나오는 평강공주 이야기의 대략은 이러하다.
평강과 온달
평강공주가 어렸던 시절, 대왕은 울기를 잘하는 딸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 사대부의 아내가 될 수는 없겠고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겠다.”
그러나 공주의 나이 이팔(二八), 즉 16세가 되었을 때 왕은 상부(上部·東部) 고씨(高氏)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했다. 그러자 공주가 말했다.
“폐하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된다 하셨는데 지금 무슨 까닭으로 저를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려 하십니까? 필부(匹夫)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하거늘 하물며 지존께서 그러하시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왕자(王者)는 희롱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금 폐하의 명은 잘못된 것이오니 소녀는 감히 받들지 못하겠나이다.”
이에 평강왕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네가 나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정말 내 딸이 될 수 없다. 어찌 함께 있을 수 있으랴? 이제부터 너는 갈 데로 가는 것이 좋겠다.”
평강왕은 공주를 궁궐에서 내쫓았다.
이때 공주는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뚝에 차고 궁궐을 나와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 온달의 집을 찾아갔다. 온달의 집에는 눈이 먼 그의 노모가 있었는데, 공주는 가까이 가서 절을 하고 아들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노모가 대답했다.
“우리 아들은 가난하고 추하여 귀인(貴人)이 가까이할 인물이 못 되오. 지금 그대의 몸에서는 그윽한 향기가 나고, 손을 만지니 부드럽기가 풀솜 같은즉, 천하의 귀인임에 틀림이 없소. 누구의 속임수로 여기까지 찾아온 거요?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산에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간 지 오래인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공주는 그 집에서 나와 산 밑에 가서 온달을 기다렸다.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것을 보고 공주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그러자 온달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이는 어린 여자가 행동할 바가 아니다. 반드시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이다. 내 곁으로 가까이 오지 말라.”
온달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가 버렸다.
공주는 온달의 집 사립문 아래서 하룻밤을 지새우고, 이튿날 다시 모자에게 자신이 찾아오게 된 사연을 간곡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온달은 우물쭈물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때 온달의 어머니가 말했다.
“내 자식은 지극히 추하여 귀인의 배필이 될 수 없고, 내 집은 지극히 가난하여 귀인의 거처할 곳이 못 되오.”
공주가 그 말을 듣고 대답했다.
“옛사람의 말에, 한 말 곡식도 방아를 찧을 수 있고, 한 자 베도 꿰맬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마음만 같다면 어찌 반드시 부귀한 후에라야 함께 지낼 수 있겠습니까?”
공주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공주와 온달은 결혼했다. 그리고 공주는 자신이 궁궐에서 가져온 금팔찌를 팔아 밭을 사고 주택과 노비와 우마와 기물 등을 사서 온달과 함께 살았다.
‘얼굴이 파리하다’
이것은 궁궐에서 나온 평강공주가 온달과 결혼하기까지의 이야기다.
당시 평강공주는 궁궐에서 추방당한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스스로 걸어 나온 것이다. 평강왕이 공주와 결혼시키려고 한 상부의 고씨는 당시 고구려의 최고 관료 집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공주가 왕의 명을 어기고 온달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하자 왕은 화가 나서 호통을 쳤던 것이다.
이때 이미 공주는 온달을 흠모하고 있었으며, 중매혼이 아닌 자유혼을 원한 개방적인 여성이었다. 아버지 평강왕의 호통에도 굴하지 않고, 공주는 자신이 평소 마음속으로 흠모하던 사람을 찾아가서 당당하게 사랑을 고백하고 온달의 아내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열전 온달편에서는 공주가 평강왕의 말을 듣지 않아 궁궐에서 쫓겨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설화는 평강왕과 공주의 갈등을 감추기 위해 똑똑한 온달을 ‘바보’로 만들어 버리기까지 했다.
《삼국사기》 열전 기록은 이야기 초입 부분에서 온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온달은 얼굴이 파리(龍鐘)하여 우습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쾌활했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다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떨어진 옷과 해어진 신으로 시정간(市井間)에 왕래하니, 그때 사람들이 지목하기를 바보 온달이라 하였다.〉
이 기록으로만 볼 때 온달은 바보다. 그러나 《삼국사기》 열전 기록 어디를 봐도 온달의 행동에서 바보 같은 구석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의 행동이나 언행을 볼 때 보통 사람 이상으로 너무 똑똑하여 의문이 갈 정도다. 얼굴이 파리하여 우습게 생기고, 집이 가난하여 밥을 빌어다 먹었다는 것은 외형이나 행동에 대한 묘사이지 ‘바보’라서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더구나 마음씨가 착하고 어머니를 봉양했다는 것은 ‘효자’의 행동이지 바보가 하기 매우 어려운 일이다.
과연 평강공주가 사랑한 온달은 바보였을까. 《삼국사기》 열전 기록에 보면 온달의 용모에 대해 ‘얼굴이 파리(龍鐘)하여 우습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쾌활했다’고 나온다. 한자로 ‘용종(龍鐘)’의 의미는 ‘늙고 병든 모양’을 뜻한다. 얼굴이 하얗고 주름이 많은 병자를 ‘파리하다’고 표현하는데, 한창 젊은 사람이 그런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다. 이는 온달이 당시 고구려 사람의 모습과 다르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고대 역사 기록에 나온 온씨(溫氏)는 온달이 처음이다. 그 이후 고구려 보장왕 때의 장수 온사문(溫沙門), 신라 진덕여왕 때 김춘추가 당나라 사신으로 갔다 귀국할 때 종사관이었던 온군해(溫君解)란 인물이 역사 기록에 보인다. 온군해는 김춘추가 당나라에서 만난 서역의 소그드인으로 종사관이 되었다. 신라로 입국할 때 해상에서 고구려군의 추격을 받게 되자, 온군해는 김춘추의 옷으로 갈아입고 적을 따돌리다가 끝내 붙잡혀 죽은 충신이었다.
‘온달’은 소그드에서 온 귀화인?
원성왕릉으로 알려진 경주 괘릉의 무인상. 눈이 깊고 코가 우뚝한 소그드인의 모습이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온씨는 소그드인일 가능성이 크다. 소그드인 중에는 당나라 현종 때 난을 일으킨 안녹산(安祿山)의 조상인 안씨(安氏), 소그드 왕족 출신인 온씨(溫氏)가 대표적인 성씨다. 당시 소그드인들이 살던 곳은 지금의 사마르칸트다.
바로 고구려의 평강공주가 사랑한 온달은 사마르칸트에서 온 소그드인일 가능성이 크다. 소그드인은 심목고비형(深目高鼻形), 즉 눈이 깊고 코가 우뚝한 전형적인 서양인 모습이다. 고구려 각저총(角塚)의 벽화에는 바로 심목고비형 소그드인과 고구려인의 씨름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실크로드 전문학자이자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인 정수일은 경주 괘릉(掛陵·원성왕릉으로 추정)의 무인석상(武人石像)이나 처용(處容)의 탈 등 심목고비형 인물들의 형상을 소그드인의 전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 평강왕 때의 온달은 소그드에서 온 귀화인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고구려 시대에는 외형이 다르다는 것만 보고도 토착인들의 배타적인 성향이 강해 천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온달은 귀화인이라 말조차 더듬거리니 주위에서 ‘바보’ 소리를 듣기에 딱 알맞았던 것이다.
당시 고구려에서는 매년 3월 3일 산에 가서 사냥대회를 열고, 그날 잡은 산돼지·사슴 등으로 하늘과 산천신(山川神)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날은 왕까지 친히 사냥에 나섰으며, 여러 신하들과 5부의 병사들이 모두 참여하였다. 그리고 5부의 수장들은 권력을 가진 귀족들이다.
《삼국사기》 열전 기록에는 온달도 그 사냥대회에 참여했다고 나온다. 이 기록으로 볼 때 어쩌면 온달은 5부 소속의 병사였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이 사냥대회에서 말을 잘 타고 사냥감을 많이 포획하여 누구보다 눈에 띄었다. 사냥대회가 끝나고 나서 ‘왕이 친히 불러 이름을 물어보고 놀라며 또 이상히 여겼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이때 분명 평강공주도 왕 옆에 있었다면, 그 용맹스런 모습의 온달을 보고 첫눈에 반했을 것이다.
신화 해석은 앞뒤를 잘 구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시 힘 있는 인물의 입장을 생각하다 보니 사실이 왜곡되어 서술되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앞뒤가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열전 기록에서는 평강공주가 궁궐에서 나와 온달과 살면서, 금팔찌를 팔아 말을 사 오게 했다고 한다. 그때 공주는 온달에게 시장 사람이 파는 말을 사지 말고 꼭 국마(國馬)를 고르되 병들고 파리해서 내다파는 것을 사 오라고 일렀다. 그리고 공주는 이 말을 잘 길러 살을 찌우고 건강하게 키운 후 온달에게 주었다. 온달은 그 말을 타고 나가 사냥대회에서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先後를 바꾸어 보면…
여기서 잠시 이야기의 앞뒤를 바꾸어 보면, 온달이 사냥대회에 나가기 전까지 평강공주는 그를 만난 적이 없었다. 온달은 5부 소속의 하찮은 병사였는데, 남달리 무술이 뛰어나 장군들보다 더 많은 사냥감을 포획하여 왕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때 평강공주가 왕 곁에서 지켜보고 온달을 은근히 사모하기 시작했다. 사냥대회에서 대왕은 온달을 보고 이상히 여겼다고 했는데, 아마도 그의 심목고비형 얼굴과 어눌한 말투를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때부터 대왕은 온달을 ‘바보’로 인식하고 딸이 울 때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놀려댔을 것이다.
그리고 딸이 컸을 때 평강왕은 공주를 상부(上部)의 고씨(高氏)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다. 상부는 5부의 하나로, 고씨는 당시 세도가 있는 고관의 자제였을 것이다. 고구려의 왕들이 건국 초기부터 5부 출신의 왕후를 택하였던 것은 왕권과 신권이 결탁한 정략결혼이었다. 이처럼 왕실 결혼은 대부분 정략결혼이어서, 공주의 배우자 역시 세도 있는 고관의 자제들 가운데서 택할 수밖에 없었다. 왕권이 약할 때는 권력을 쥔 고관들의 압력에 못 이겨 억지로 그의 자제와 공주를 결혼시킬 때도 있었다. 왕의 사위에게는 부마도위(駙馬都尉)의 벼슬이 내려지므로 그만큼 그 집안의 권위가 올라가는 일이다.
아무튼 평강왕이 공주를 상부의 고씨에게 시집보내려고 한 것도 그러한 맥락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때 공주가 반대를 하고 나서며 당당하게도 자신은 온달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이다. 진노한 평강왕은 공주를 궁궐에서 내쫓았고, 그 길로 그녀는 자신이 평소 남달리 흠모하던 온달을 찾아가 사랑을 고백하고 같이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왜 신화에서는 ‘온달’을 바보로 만들었을까? 그것은 왕실의 자존심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공주가 평민과 결혼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평강공주는 그녀 스스로 평민 남편인 ‘온달’을 택했다. 어쩌면 평강왕이 공주를 궁궐에서 쫓아낸 것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 궁궐을 나와 ‘사랑하는 남자’ 온달을 찾아간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공주가 궁궐에서 도망쳐 평민과 결혼했다 하더라도, 당시 평강왕으로서는 딸을 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평강공주가 바보 온달을 키워 장군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로 둔갑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반드시 온달이 ‘바보’여야만 평강공주의 지혜로운 선택이 돋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고구려 왕실의 자존심이었던 것이다.
“死生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돌아갑시다”
충북 단양의 온달산성. 온달이 산성을 쌓고 신라군과 싸운 곳이라고 전해진다. 사진=조선일보DB
무술에 뛰어났던 온달이지만, 평강공주와 결혼하고도 그는 한동안 대왕의 사위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그의 신분이 미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군사를 보내 고구려 변방인 요동을 쳤다. 이때 평강왕(평원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원정을 나가 배산(拜山) 앞 들판에서 적군을 맞아 싸웠는데, 온달이 선봉장으로 출전했다.
평강왕이 온달을 선봉장으로 내보낸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온달의 무술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안 대왕은 남들도 다 알아줄 정도로 큰 공을 세워 떳떳하게 사위로 인정해 주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요컨대 다른 고위 관료들에게 내세울 수 있는 명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때 온달은 선봉장으로 나가 적군 수십 명을 눈 깜짝할 사이에 베어 넘겼으며, 그 기세를 타고 그가 거느린 고구려 선봉 부대가 적의 예봉을 꺾어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완전히 적군을 무찌르고 나서 공을 논할 때, 장수들이 모두 온달을 극찬해 마지않았다. 이때 평강왕은 기쁜 나머지 온달을 불러 장수들 앞에 세우고 말하였다.
“이 사람이 나의 사위다!”
이것은 평강왕이 온달을 사위로 받아들이는 공식 선언이었다.
이때 평강왕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위 온달에게 작위를 주어 대형(大兄)으로 삼았다. ‘대형’은 5품쯤 되는 벼슬로, 온달은 이때부터 대왕의 총애를 받았다.
평강왕이 죽고 양강왕(陽岡王)이 즉위하였다. 《삼국사기》 열전편에는 ‘양강왕’이라고 나오는데, 평강왕이 곧 ‘평원왕’이므로, 양강왕은 평원왕의 아들 영양왕(陽王)을 가리키는 것이다.
고구려 제26대 영양왕이 즉위하자, 온달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신라가 우리 한북(漢北)의 땅을 빼앗아 군현(郡縣)을 삼았으니, 백성들이 원통하여 일찍이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어리석은 신을 불초하다 여기지 마시고, 만약 군사를 주시면 한번 가서 반드시 우리 땅을 되찾아 오겠습니다.”
영양왕은 이를 허락하고 온달에게 군사를 주었다. 온달은 군사를 정비해 신라를 치러 갈 때 다시 대왕에게 말했다.
“계립현(谿立峴)과 죽령(竹嶺) 서쪽 땅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신은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온달이 말한 계립현은 조령(鳥嶺), 즉 지금의 ‘새재’를 이르는 말이다. 이때 온달은 단양 인근에 산성을 쌓아 신라군과 대적했던 것으로 보인다. 단양의 ‘온달산성’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비장한 각오를 하고 출정한 온달은 신라 군사들과 아단성(阿旦城)에서 맞서 싸우다 적의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아단성’은 지금의 아차산성을 이르는 말이다. 이설이 많지만, 아단성에서 전사했다면 계립현에서 신라군에게 밀려 후퇴를 하던 중 지금의 아차산성에서 전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서 《삼국사기》는 다시 신화를 하나 만들어 냈다. 온달이 죽어 장사를 지내려고 하는데 관이 움직이지를 않자, 평강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사생(死生)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아, 돌아갑시다.”
그러자 온달의 시체가 들어 있는 관이 땅에서 떨어져 운구하여 마침내 장사를 치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온달은 ‘바보’가 아닌 불세출의 ‘명장’
한데 일제 강점기에 한학자 김종한(金宗漢)이 저술한 한문 역사서 《조선사략(朝鮮史略)》에 보면 평강공주가 남편 온달의 관을 붙들고 울다 기절했는데, 결국 깨어나지 못하고 죽어 온달의 묘 옆에 장사 지냈다고 나온다. 《삼국사기》에 비하면 저술 연대가 너무 후대(後代)여서 신빙성이 덜하긴 하지만, 그래서일까 더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다만 평강공주가 온달과 같이 죽었다는 대목은 극적 효과를 노리기 위해 지어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무튼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 이야기는 신화로 남아 있다. 그러나 엄연히 온달은 현존했던 인물이고, 고구려의 훌륭한 장수였다. 신화적인 요소만 제거하고 나면 곧바로 역사로 편입시킬 수 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따라서 온달을 역사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신화로 만들 때 그에게 붙여준 ‘바보’라는 오명을 벗겨 주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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