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은 1900년대초 미국 웨슬리안 대학교 유학시절 성경을 들고 있는 김하란사의 모습(김하란사의 친정 조카손자 김용택 제공). ©브레이크뉴스 |
일제강점기에 국권회복(國權回復)을 위하여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였는데 그중에는 여성 독립운동가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랜 세월 독립운동가 발굴하는 활동에 심혈을 기울였던 필자도 뒤돌아 보니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연구하지 못하였다.
흔히 여성 독립운동가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인물이 1919년 4월 1일 천안 아우내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결국 서대문 형무소에서 장렬히 순국(殉國)한 유관순 열사(烈士)가 최우선적으로 떠오르나 사실 그이외의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하여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본 칼럼에서 일제강점기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의친왕과 미국 웨슬리안 대학교 동문이라는 특별한 위상이 있었던 김하란사의 생애(生涯)를 재조명한다.
그동안의 김하란사 관련 자료를 살펴보면 자료마다 기록의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평소 사실에 입각한 칼럼을 중시하는 필자도 김하란사와 관련하여 잘못 파악한 점이 있었으니, 그러한 점을 반성하면서 이번 기회에 김하란사에 대한 정확한 사실을 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점을 밝혀둔다.
김하란사는 대부분의 자료에 하란사로 소개되었는데 최근에 친정 조카손자와의 인터뷰를 통하여 김하란사라는 새로운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김하란사의 본관(本貫)이 그동안 김해(金海)로 알려졌으나 이번에 친정 조카손자를 통하여 전주(全州)라는 사실을 확인한 점을 뜻깊게 생각한다.
김하란사는 1875년(고종 12) 평양에서 김병훈과 이씨 부인사이에 1남 1녀중 장녀로 탄생하였으며, 어린 시절은 서울 평동(平洞)에서 거주(居住)하다가 다시 인천으로 이주(移住)하였다.
인천에서 감리(監理)로 활동하고 있던 하상기와 혼인하였는데 김하란사는 개화기의 신여성으로서 학구열(學究熱)이 대단하여 당시 기혼자는 입학할 수 없는 이화학당(梨花學堂)에 직접 찾아가서 프라이 학당장을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입학하였는데 그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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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당시 이화학당(梨花學堂) 학당장으로 있던 프라이를 밤중에 찾아가 가지고 있던 등불을 입으로 불어 끄고는 “우리가 캄캄하기를 이 등불 꺼진 것 같으니 우리에게 학문의 밝은 빛을 줄 수 없겠습니까?”라며 간절한 마음으로 호소하여 결국 입학을 허락받았다는 것인데 생각할수록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김하란사에게 존경의 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1894년(고종 31) 이화학당(梨花學堂)에 입학하여 1년간의 과정을 마치고 그 이듬해인 1895년(고종 32) 3월 일본유학의 길에 오르는데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 김하란사가 당시 한국여성으로서는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라는 점이다.
김하란사는 처음에 자비(自費)로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공부하였는데 5월에 100여명의 관비유학생들이 파견된 사실을 알게되어 학부대신 이완용에게 자신도 관비유학생들과 같은 감독을 받기를 원한다고 청원하였다.
이러한 김하란사의 청원에 대하여 이완용은 수용하였으며, 그 이후 외부대신 김윤식에게 이러한 청원내용을 알렸으며, 이를 다시 일본공사에게 전달하여 결국 김하란사가 관비유학생들에 준하는 대우를 받게 되었으니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김하란사가 얼마나 적극적인 여성이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김하란사는 게이오의숙(慶應義淑)에서 1년간의 과정을 마치고 1896년(건양 1)에 귀국하였다가 1897년(광무 1)에 미국유학의 길에 오르는데 처음에 워싱턴 D.C에 위치한 하워드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그 이후 워싱턴에 있는 데코네스 학원에서도 수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0년(광무 4) 오하이오주에 위치한 웨슬리안 대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6년의 과정을 이수하고 1906년(광무 10)년에 대망(大望)의 졸업을 하면서 문학사 학위를 수여받았는데, 이는 한국여성으로서는 최초의 문학사 학위를 수여받은 것이니 배움의 열망에 대한 구체적인 결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웨슬리안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있던 의친왕을 만나게 되며, 이러한 인연이 고종황제가 파리강화회의에 의친왕과 함께 김하란사를 밀사(密使)로 파견하기로 결정한 배경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1906년(광무 10) 마침내 10여년의 미국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김하란사는 상동교회에서 스크랜튼 대부인이 설립한 영어학교의 교사가 되었는데 이 학교는 불우한 형편의 여성들,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했던 기혼여성들을 위한 학교였다.
여기에서 영어와 성경을 가르친 김하란사는 여성문제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는 김하란사가 민족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1907년(광무 11)부터 이화학당(梨花學堂)의 총교사(현재의 교감에 해당됨) 및 기숙사 사감으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을 엄격히 지도하였으며, 동년(同年) 이화학당(梨花學堂) 교사였던 이성회가 조직한 이문회(以文會)라는 학생단체를 지도하면서 민족의 현실과 세계정세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1909년(광무 13) 경희궁에서 대한부인회,자혜부인회,한일부인회,서울시내 각 여학교가 연합하여 외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김하란사, 박에스더, 윤정원을 위한 성대한 환영회를 개최하었으며, 각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고종황제로부터 은장을 수여받았다.
1910년 9월 이화학당(梨花學堂)안에 대학과가 신설되면서 여성을 위한 고등교육이 실시되었을때 김하란사는 한국인으로서 유일하게 교수로 참여하였으며, 4년동안 교수로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와 더불어 부인성서강습,교회활동,어머니 육아교실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앨버슨과 함께 학생들을 지도하여 거리와 농촌으로 나가 전도하는 활동도 열심히 하였다.
1916년 미국 뉴욕 주 사라토가에서 열린 세계 감리교 총회에서 신흥우 박사와 함께 참석하였으며 1개월간의 회의가 끝난 이후에도 홀로 남아서 순회강연을 열어 해외 교포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켰으며, 순회강연에서 모금한 돈과 하와이 교포들의 주선으로 1918년 파이프 오르간을 구입하여 정동교회에 설치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같은 평안남도 출신으로서 20여년동안 친분관계를 맺어왔던 도산 안창호의 도움이 있었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1917년 9월 19일자 일본시카고 영사가 본국 외무대신에게 보낸 기밀문서에 김하란사가 1917년 9월 20일 의친왕의 처남 김춘기를 비롯하여 조선인청년 수명(數名)을 인솔하고 귀국길에 오를 예정이라고 보고하였다는 점이다.
덧붙이면 조선민족대동단 사건에 연루되었던 김춘기의 경무총감부(警務摠監部) 경찰서(警察署) 신문조서(訊問調書) 제1회에 나와 있는 내용 일부를 인용한다.
"21세때 美國에 건너가 네브라스카주 오마하로 가 聯合太平洋鐵道會社에서 서기로 근무하였으며, 1년동안 하다가 캘리포니아주 포클리市 캘리포니아官立大學校 商科에 입학하여 1년간 수학하였고 大正6년 10월 13일 京城으로 돌아와 原籍地로 돌아갔다. "
이와 관련하여 김춘기는 의친왕의 최측근으로서 2년후에 추진하는 의친왕 망명 미수(亡命 未遂) 사건에도 깊이 관련되었던 인물인데 김하란사가 귀국길에 김춘기와 함께 동행하였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김하란사는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국권회복(國權回復)을 위하여 독립운동가들과 긴밀한 연락관계를 유지하였으며, 능통한 영어실력으로 여러 선교사들과 특별한 친분관계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궁궐에 자주 입궐하면서 고종황제의 통역도 하였으며, 더불어 엄귀비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김하란사는 엄귀비에게 대한제국(大韓帝國)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멀리하고 미국과 친분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특히 여성교육을 위하여 근대적인 학교를 많이 세워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여 엄귀비가 진명(進明),숙명(淑明)여학교(女學校)를 설립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종황제는 1918년 6월 미국유학시절 의친왕과 긴밀한 교제를 나누었던 김하란사를 의친왕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극비리에 밀사(密使)로 파견하여 민족의 독립의지를 표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정동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하였던 손정도 목사를 비롯하여 현순 목사와 최창식에게 두 밀사(密使)를 파리까지 안전하게 안내하라는 밀명(密命)을 내렸으나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뜻밖에 붕어(崩御)하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이러한 계획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김하란사는 국권회복(國權回復)을 위한 투철한 사명감(使命感)을 가지고 손정도 목사를 만나러 베이징(北京)행을 단행(斷行)하기로 결심하고 기회를 엿보던 중, 1919년 1월말에 국경을 넘어 2월에 베이징(北京)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김하란사를 만나러 상해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온 손정도 목사가 건강이 악화되어 합달문내(哈達門內)에 감리교회에서 운영하는 가영병원에 입원하였기 때문에 김하란사를 결국 만나지 못하게 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였으며, 김하란사가 동포들이 마련해준 환영 만찬회에서 먹은 음식으로 인하여 1919년 4월 10일 베이징(北京) 협화의원(協和醫院)에서 향년(享年) 45세를 일기(一期)로 서거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김하란사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던 미국 성공회 책임자 베커가 그 시신(屍身)이 검게 변해 있었다고 증언한 점을 주목한다.
비운의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특히 의친왕과 함께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추진하였던 김하란사가 광복50주년이 되는 1995년에 독립유공자로 추서 받은 일은 뒤늦게나마 뜻깊은 일로 생각하나, 베이징(北京)에서 의문의 서거를 하게 된 점에 생각할수록 비통한 심정 금할 길이 없으며, 본 칼럼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현재 여러 가지 설(說)이 있는 김하란사의 서거와 관련된 진실이 명확하게 밝혀지기를 충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pgu77@naver.com
*필자/문암 박관우.역사작가.칼럼니스트.<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