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놀과 정수
제24차 정기 답사(안)
경기도 안성 답사
(태평미륵-죽산성지-흔들바위-서일농장-봉업사터-칠장사-청룡사)
![](http://secfile2.hanmail.net/image/osorix/ljhkhs44/1kyung/ansung/img_6150.jpg)
1. 답 사 일 : 2004년
6월 20일 (당일)
2. 답사 장소 : 경기도
안성 일대
3. 답사 일정 :
2004년
6월 20일 (일)
08:00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공영주차장 (3호선 6번출구
민산관광)
09:00 태평미륵
10:00 죽산성지
11:00 흔들바위
12:00 서일농장
13:30 봉업사 오층석탑
14:00 칠장사 - 향토사학자 석암
윤민용선생님 가이드
16:00 청룡사
17:30 논바닥에서 동동주 파티 (두부,도토리 묵)
18:00 안성 출발
20:00 서울 도착예정
문의:
이종원 016-219-6001 / 21c승리
016-322-9429
|
4. 답사코스 : 1.태평미륵→2.죽산
성지→3.서일농장→4.봉업사터→5.칠장사→6.청룡사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afe21.daum.net%2F_c21_%2Fpds_down_hdn%3Fgrpid%3D2mj4%26fldid%3D9KYR%26dataid%3D1210%26grpcode%3Dmonol4%26realfile%3Dansungmap.jpg)
5. 집결지 : 태평미륵
(세부 안내도)
일죽IC에서 38번국도를
따라 안성방면으로 1.7km 가면 제2죽산교를 건너 두
갈래 길로 나뉩니다. 오른쪽 용인 방면으로 난 17번국도를
따라 0.5km 가면 왼쪽에 미륵당 마을회관이 나옵니다.
좌회전 가능. 이곳에 주차를 하면 됩니다.
6. 이번 답사여행의 특징 :
가.
안성은 경기도의 경주라고 할 정도로 볼 것이
많은 동네랍니다. 서울과 가깝다는 이유로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많은
문화유적이 있고 살아 있는 무형문화재가 있는
곳입니다.
나. 몇년전 칠장사에서 놀란만한 분을
만났습니다. 향토사학자
윤민용선생님이십니다. 우리 문화와 안성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진 분입니다. 칠장사
설명을 특별히 부탁드렸습니다.
다. 병인박해 천주교 성지인 죽산성지도 가게
되었습니다. 장미꽃이 만발한 동산이지요.
라. 이번에도 역시 맛집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싸지만 최고 품질을 자랑하는 된장이
서일된장이랍니다. 서일농장 식당에서
된장찌개 맛을 봅니다. 된장 담그는 과정을
전문 가이드가 설명해주실 겁니다.
마. 청룡사앞에서 끝내주는 동동주 맛을 보게
되었습니다. 7가지 귀한 약재가 들어가 있는
술이지요. 논은 휴경을 하는데... 거기다
자리를 깔아 준대요.^^ 논바닥에서 동동주를
즐기게 되었습니다. 안주는 두부와
도토리묵입니다.
바. 모놀답사 퀴즈는 인기가 높지요. 이번에도
퀴즈선물을 준비하겠습니다. 다양한 게임도
준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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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afe21.daum.net%2F_c21_%2Fpds_down_hdn%3Fgrpid%3D2mj4%26fldid%3D4mLS%26dataid%3D321%26grpcode%3Dmonol4%26realfile%3Dhp-jongwon.gif)
느낌이 가득한 답사를
위해 노력 하겠습니다.
카페
"모놀과 정수" (http://cafe.daum.net/monol4)
대장 이종원 (016-219-6001
ljhkhs44@hanmail.net)
참고)
미리 보는 답사 사진... 누르세요.
24차 정기답사 - 미륵동네와
오붓한 절집이 있는 곳-안성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afe21.daum.net%2F_c21_%2Fpds_down_hdn%3Fgrpid%3D2mj4%26fldid%3D_album%26dataid%3D149%26realfile%3Dmonolt_02.jpg)
이번 답사때 단체티로
통일했으면 좋겠습니다.
기존에 구입하신 분들은 꼭 입고 오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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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당 5천원입니다. SIZE: 90/95/100/105/110 |
안성 개관
경기도
최남단에 자리잡은 안성은 경기도와 충청남북도의
접경이기도 하다. 읍내를 정점으로 덕성산, 서운산,
칠현산 같은 차령산맥 줄기에 둘러 싸인 넓은
평지를 이루어 곡창지대가 형성되었다. 전형적인
비산비야의 군세로 지금의 안성은 안성공단,
중앙대 안성캠퍼스 등이 자리잡았을 뿐더러 인접한
용인군과 더불어 골프장이 들어서서 산을 깎아낸
흉물스런 모습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안성은 고구려와 백제의 옛땅이었다. 남진정책을
감행한 고구려의 최남단 전선은 당성군(경기도
남양), 부산현(경기도 진위), 사벌홀(안성군 양성면)
정도였다.즉 장수왕조에 남하정책을 추진한 이래로
고구려의 영역에 속하면서 영향을 받다가
한강유역을 상실하면서 다시 백제땅이 되었고
이후에 신라로 복속되었다.
|
경기도 최대의
미륵불, 태평미륵
문화적으로는
접경지대에 자리잡은 셈인데 어쩐 일인지
안성땅에는 미륵이 유난히 많다. 아마 전국을
통털어서 안성만한 넓이에 미륵불이 집중적으로
모인 곳도 드물 것이다. 먼저 태평미륵(太平彌勒)부터
찾아 나섰다. 중부고속도로 일죽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안성읍내 쪽으로 향하다보면 이내
죽산천을 건너게되며,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매산리의 죽주산성(竹州山城)이
나온다. 태평미륵은 바로 죽주산성을 등지고
죽산천을 바라보며 서있는 형국이다. 여기에
경기도 최대의 미륵불인 태평미륵이 전해진다.
파주군 광탄면에 거대한 마애미륵불이 있다면 이
곳에는 석불형식으로는 제일 큰 미륵이 모셔진다.
매산리는 삼거리를 끼고 길게 형성된 마을이다.
죽주산성이라고 불리는 고려시대 산성이 매산리의
비봉산정을 따라 길게 축성된 밑으로 마을이 있다.
이 마을 중간쯤에는 제법 격식을 갖춘 2층 높이의
누각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름하여 미륵당이다.
비교적 넓은 마당에는 잔디가 심어져 있고 높이
솟은 누각 밑으로 미륵불이 보인다.
태평미륵이 세워지게된 배경에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고려시대 기원설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시대 기원설이다. 고려시대 기원설은
몽고침입과 관련이 깊다. 원래 죽주산성 자체가
싸움터였다. <고려사> 권103 박서(朴犀) 송문주(宋文胄)전을
보면 큰 싸움이 이곳에서 전개된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고종 13년에 송문주가 죽주방호별감(竹州防護別監)이
되었는데, 몽고가 죽주성에 이르러 항복을
권유하므로, 성중의 사졸이 나가 쳐서 쫓았다. 다시
포를 가지고 마주 공격하자, 몽고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다. 몽고는 또 사람의 기름을 준비하여
짚에 부어 불을 놓아 공격하므로, 성중의 사졸이
일시에 문을 열고 돌격하니, 몽고군의 죽은 자가
헤아릴 수가 없었다. 몽고는 여러 방법으로
공격하였으나 마침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조정에서는 몽고와 강화에 급급하면서 일신의
안전만을 도모할 당시에 모처럼 승전고를 울려준
곳이다. 송문주가 잘 물리친 것은 몽고 제1차
침입시에 귀주성 공방전에서 박서와 함께 혁혁한
공을 끼쳐 이미 몽고군의 전술을 훤히 익혔기
때문이다. 박서도 같은 죽주 출신으로 몽고의
살례탑을 무찌른 귀주대첩(龜州大捷)의 명장이었다.
오늘날 죽주산성에는 송문주의 사당이 전해지고
있어 사실로 확인된다. 죽산산성에 전해지는 "오뉘
힘내기" 전설에서도 "송재장군"이란
이름으로 송장군이 등장하니,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전설의 전승력이란 무서운 것이다([한국구비문학대계]1-6권).
미륵은 송장군과 처인성에서 살례탑을 사살한
김윤후(金允候)의 우국충정을 추모하고 명복을
빌기 위하여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처인성은
오늘날의 용인이니 안성 바로 윗쪽이다. 안성
동쪽방향인 충추성을 비롯하여 인근일대가 모두
몽고군과의 격전지였으니 백성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승전을 거둔 두 장군에
의탁하여 거대 미륵불을 세우고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태평미륵이란 이름이 붙었는
지도 모른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조선후기 영조때에 최태평(崔太平)이라는
사람이 세운 미륵이라하여 태평미륵이란 별칭이
붙었다고 한다. 최태평이 인생의 무상을 깨닫고
무학수덕(無學修德)의 극락도(極樂道)를 열고자
건립한 것이라고도 한다. 아마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 후기에 미륵신앙이 다시 조망되면서 최씨
성을 가진 어떤 도인이 이곳에 나타난 것으로
해석되지만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죽주산성을
논하면서 태평원(太平院) 북쪽에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미 그 당시에 태평이란 말이 등장하는
것이다.
태평원이 있었다는 말도 재해석을 해야 한다.
안성의 죽산땅은 예나 지금이나 교통의 요지라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목이었다. 따라서 원이
있었음은 일종의 숙박시설을 의미한다.
미륵원이라는 곳은 고려시기문헌에 무수히
등장한다. 황해도 봉산땅 자비령(慈悲領)의
미륵원은 고려 고종7년에 세워졌고, 향을 피우고
옷을 베풀어주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나온다. 이로써 원의 기능이 단순 사찰만이 아니라
자비를 베풀어 지나가는 나그네를 쉬게 하는
숙박시설같은 곳이었음을 알게 한다. 중원의
미륵대원, 노령고개의 미륵원 같이 원에 거대
미륵을 세운 경우가 많았기에 태평미륵의 위치도
원과 결부하여 생각하여 보아도 무리가 아닐 것
같다. 사람이 빈번하게 나다니는 교통의 요지에
거대미륵을 국가적으로 세웠을 가능성이 높다.
거대불이다. 미륵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침에는 햇살이 온몸에 퍼져 그윽한 인상을
던져준다. 높이가 6미터이고 둘레만도 3.17미터다.
정방형의 머리덮개가 무려 1.5미터에 달하는
육척장신의 거구다. 원만한 얼굴, 긴 눈과 낮은 코,
작게 조각된 입, 그리고 귀는 볼에 납작하게 붙어
목부분까지 늘어져 있다. 체격에 비하여 좁은
어깨는 약간 처진 편이며 우측 팔은 구부려 올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했고 왼팔도 앞으로 모으고
있다. 몸통에 별다른 변화를 주지 않아 원통대의
형식으로 매우 투박하게 조형된 미륵이라 솜씨가
없다는 평가를 받기 마련이다. 두 다리의 가랑이도
정확하게 홈을 파서 만든 탓으로 조형성이
뒤떨어질 뿐더러 크기에 비하여 몸체 비례가 잘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름 그대로 태평스런
느낌을 던져준다.
문제는 왜 이렇게 조형했는가 하는 것이다.
고려시대에 지방양식으로 널리 유행된 육척의
거대한 미륵불 조성이 안성에서도 반복된 대표적인
사례로 이 태평미륵을 주목할 수 있다. 안성사람들
역시 이같은 거대 미륵불을 통하여 미륵세계의
구원을 서원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태평미륵은 지역 문화재로 지정되었을 뿐더러
보존도 잘 되고 있는 형편이다. 3미터가 넘는
돌기둥 6개를 세우고 장목을 얹어 만든 누각자체가
거대할 뿐 아니라 비바람으로부터 완벽하게 미륵을
보존해 주는 탓으로 조형이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마당에는 오층석탑도 가져다 놓아 흡사 절터같은
인상도 준다. 그 오층탑은 고려시대탑으로 각
부재가 정연하고 짜임새있게 결구되어 있으나
규모는 작은 편이다.
예전에는 담장도 없이 동네 복판에 미륵만 덜렁 서
있었다고 한다. 옆집 민가에 보살 하나가 살면서
돌보다가 근년에 이곳을 떠났다고 전한다. 현재
옆집에 살고 있는 조희재(39)씨 말에 의하면 지금도
해마다 정월과 칠월 칠석날에는 인근 일대에서
떡을 해 가지고 치성을 드리러 온다고 한다.
촌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태평미륵의 돌을
갉아먹으면 누구나 아들을 출산할 수 있다는
속신이 전해진다고 한다. 후대에 기자신앙이
첨가된 것으로 보여진다. 실제로 미륵의 몸체에는
여러 곳에 작은 상처가 나있다.
미륵신앙의 개요
미륵
신앙이란 지난날 석가모니불이 그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미륵에게 장차 성불하여 제1인자가 될
것이라고 수기한 것을 근거로 삼고, 이를 부연하여
편찬한 미륵삼부경을 토대로 하여 발생한 신앙이다.
이 삼부경은 각각 상생과 하생과 성불의 세 가지
사실을 다루고 있다. 미륵보살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부지런히 덕을 닦고 노력하면, 이 세상을 떠날
때 도솔천에 태어나서 미륵보살을 만날 뿐 아니라,
미래의 세상에 미륵이 성불할 때 그를 좇아
염부제로 내려와서 제일 먼저 미륵불의 용화법회에
참석하여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 미륵상의 중심은 미륵(Maitreya)이다. 원래 "친우"를
뜻하는 미트라(Mitra)로부터 파생된 마이트레야는
자비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한자
문화권에서는 미륵보살을 자씨보살이라고도
불러왔다. 관세음보살을 대비보살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좋은 대조가 되고 있다. 미래불 미륵은
석가모니불이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대승적 자비 사상에 근거하여
출현하였고, 자씨보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것이다.
<미륵하생경>에 의하면 미륵보살은 인도
바라나시국의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의
교화를 받으면서 수도하다가,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은 뒤 도솔천에 올라갔고, 지금은
천인들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석가모니불이 입멸하여 56억 7천만년이 지난 뒤,
인간의 수명이 차츰 늘어 8만세가 될 때에 이 사바
세계에 다시 태어나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며, 3회의
설법으로 교화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도솔천의
미륵보살이 다시 태어날 때까지의 기간동안 중생
구제를 위한 자비심을 품고 먼 미래를 생각하며
명상하는 자세가 곧 반가사유상으로 묘사되었다.
또한, 미륵보살을 믿고 받드는 사람이 오랜 세월을
기다릴 수 없을 때에는 현재 보살이 있는 도솔천에
태어나고자, 또는 보살이 보다 빨리 지상에
강림하기를 염원하며 수행하는 신행법이 인도,
중국, 티벳, 한국, 일본 등에서 널리 유행하였다.
미륵불에 대한 신앙은 통속적인 예언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구원론적인 구세주의 현현을
의미하기도 한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품게 되는 이념으로서, 지나치게 이론적인
종교라고 비판을 받고 있는 불교가 가질 수 있는
구체적인 신앙 형태가 곧 미륵 신앙이다. 미래사에
대한 유토피아적 이념이 표출된 희망의 신앙이라는
면에서 우리의 불교사 속에서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미륵 신앙의 역사
삼국
시대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의
미륵신앙은 면면히 이어오면서 많은 영향을
끼쳐오고 있다. 우리나라 지명이나 산이름, 절이름
등에 미륵, 용화, 도솔 등이 자주 쓰였던 것도, 각
절에 미륵불을 봉안한 미륵전이 흔히 있는 것도,
상당수의 미륵불상이 전하여지고 있는 것도,
미륵신앙에 얽힌 설화가 민간에 널리 퍼진 것도
모두 미륵신앙의 영향이었다. 신라시대의 화랑과
미륵신앙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었던 것은 분명
미륵신앙이 신라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한
특징이었다. 미륵신앙의 이상 세계를 신라사회에
구체적으로 역사화 시키고자 하였던 의도가
엿보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미래의 미륵이
출현하는 유토피아적 이상세계를 제시하고 있는
미륵신앙은 주로 하층민의 희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1. 삼국시대
우리나라에서의 미륵 신앙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그 초창기에 관한 문헌 기록이
없기 때문에 잘 알 수 없으나 고구려의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순도를 파견하였던 전진의 왕
부견이 서역으로 사신을 보내서 간절한 마음으로
미륵불상을 구하여 왔던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불교가 전래된 초기부터 미륵 신앙이 전개
되었으리라 잠작된다. 또한 평양에서 발견된
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 광배 뒷면에 있는 명문을
통하여 미륵신앙의 전개를 살필 수 있다. 여기에는
죽은 스승과 어버이가 용화삼회에 참석할 수
있기를 발원하여 미륵상을 조성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백제에서는 6세기 이후 부터 미륵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다. 634년(선덕여왕 34년)에 낙성된 미륵사는
왕이 익산 지방에 별도를 경영함에 따라 세운 삼국
제1의 규모를 가진 대 가람이었다. 창건 연기
설화가 말해 주고 있듯이 이 절은 왕과 왕비의
원찰이었고, 백제 미륵신앙의 중심사원이었다.
특히 용화산 아래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당시의 미륵신앙은
주로 하생신앙이었음을 살필 수 있다.
신라에서 미륵신앙이 넓게 퍼져 있었음은 {삼국유사}에
전하는 기사와 불상 등을 통하여 쉽게 알 수 있다.
신라 최초의 절이었던 흥륜사의 주불은
미륵불이었다. 진평왕때 흥륜사의 승려 진자스님은
항상 미륵불상앞에서 대승이 화랑으로 화신하여
세상에 출현하여 줄 것을 발원하였다. 또한,
진평왕때 화랑으로 활동하였던 김유신은 그의
낭도들을 용화향도라고 불렀다. 용화란 미륵보살이
장차 성불할 용화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미륵하생신앙과 관련이 있다. 이처럼 화랑과
미륵신앙과의 관련은 귀족층의 목적 의도와 민중의
구원론적인 이상이 합일된 데서 나타날 수 있었다.
화랑이 꽃같이 용모 단정한 미소년들이었다는 것은
미륵보살의 용모에 견준 것이다.
2. 통일 신라 시대
통일 신라 시대에 접어들면 전반적인 불교학의
발달과 함께 미륵사상에 대한 학문적 논리 체계를
세우게 된다. 즉 원효와 의상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경덕왕때의 승려이자 낭도였던 월명사는
도솔가를 지어 꽃을 통하여 미륵을 친히 모셔줄
것을 기원함으로써 미륵 왕생의 이상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역시 경덕왕때의 충담사는 해마다 3월 3일과
9월 9일이면 경주 남산 삼화령 미륵불상에게
차공양을 올렸다. 이 삼화령의 미륵불상은 일찍이
선덕여왕때의 승려 생의가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파내어 모셔 둔 것이었고, 현재까지 국립 경주
박물관에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자칭 미륵불은
후고구려의 궁예이다. 금관을 쓰고 가사를 입은
궁예는 맏아들을 청광보살, 둘째 아들을
신광보살이라 하여 협시보살로 삼았으며 스스로
불경 20여 권을 만들고 미륵관심법을 행한다는 등
허무맹랑한 소리로 무고한 대중을 괴롭혔다. 그에
따르면 지나간 세상에 미륵이 석가와 함께 도를
닦았는데 먼저 도를 이루는 자가 세상에 나아가
교를 펴고 다스리기로 하였다 한다. 즉 한 방에
같이 자면서 무릎 위에 먼저 모란꽃이 피는 자가
이기는 것으로 내기의 원칙을 삼았던 것이다.
그날밤 석가가 거짓으로 잠든 체 하고 미륵을
바라보니 무릎에서 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에
석가는 도둑의 마음으로 그 꽃을 꺽어 자기 무릎에
꽃았는데 미륵은 그것을 알고 석가에게 더럽다고
욕하면서 먼저 세상을 다스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석가 시대에는 사람들이 도둑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으며, 지금이야말로 미륵인
궁예시대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전륜성왕도 미륵불도 아니었다. 새로운 시대가
오기를 바라는 민중들의 호감을 사려 하였던
정치적인 계산조차도 맞아들지 못했던 것이다.
3. 고려 시대
신라
시대 이후 올바른 미륵 신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오늘날까지 미타신앙, 관음신앙과 함께
하나의 전통으로서 여전히 대중들 사이에 살아
남아있다. 다만 고려 초기 이후 특별히 미륵신앙에
관심을 가진 승려가 많지 않았고 미륵신앙을
중요시하는 법상종이 선종이나 교종의 화엄종
세력에 밀려 났으므로 신라 시대와 같이 열렬함과
독특함을 함께 갖춘 미륵신앙은 다시 꽃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특수 사찰을 중심으로하여 미륵
신앙은 왕실 및 민중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갔다.
현종은 모후의 원찰로 개성 현화사를 창건한 뒤
법상종 승려들을 주지로 임명함으로써, 현화사를
근거로 법상종은 미륵을 신봉하는 고려 중기의
대표적 교단의 하나가 되었다. 이 절에서는 현종의
발원에 의하여 매년 미륵보살회와 아미타불회가
열렸다. 특히 매년 4월 초파일부터 3일동안
개최되던 미륵 보살회는 국가의 번영과 사직의
안녕을 축원하기 위함이었다. 현화사 금당의
주불은 미륵불이었고 특히 승려 혜덕은
미륵보살상을 모시고 매년 승려를 모아 귀의하게
하였으며, 입적하는 순간까지도 미륵의 명호를
염송하였을 정도로 미륵신앙에 독실하였다. 이상은
주로 왕실 주변에 있었던 미륵신앙의 사례이다.
민간에서도 이 미륵신앙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미륵불을 주불로 모신 사찰로는 금산사나 현화사
외에도 관촉사, 도솔사 등이 있었다. 광종때 승려
혜명에 의하여 창건된 충남 논산 관촉사에는 목종 9년(1006년)에
완성된 미륵 석불상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이 미륵
불살에 얽힌 영험 설화는 당시 사회의 미륵신앙의
폭넓은 유포를 알게 해준다. 백운 이규보의 문집에
의하면 전라북도 옥구에서 장사로 가는 길가에
도솔사가 있었고, 그곳에 미륵석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지금 현재의 전북 고창 선운사의
도솔암을 지칭하는 것일 것이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불안하던 고려 후기의 민간에는 미륵
신앙이 상당히 성행하고 있었던 것 같다. 미륵불이
하생하여 교화하는 용화삼회에 참여하여
미륵불에게 향을 공양할 수 있기를 발원하며
향목을 해변에 묻어두는 풍속이 행하여 지고
있었음은 곧 미륵하생신앙의 유행을 말하여 주기
때문이다. 이같은 미륵하생신앙은 고성
삼일포매향비와 경남 사천매향비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우왕 13년(1387년)에 세워진 사천매향비에
의하면 1000인이 계를 모아 발원하였고 1309년에
세워진 삼일포매향비에 의하면 지방관 10여명을
비롯한 그 비속들이 함께 발원하고 있다. 특히
삼일포매향비의 경우는 동해안의 아홉 곳에 향목
1500조를 묻었던 것이다.
고려 말에도 또 한차례 자칭 미륵불이 나타났다. 곧
우왕때의 니금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땅을 깊이
파고 마른 콩 수십섬을 쌓은 뒤, 그 위에 미륵불을
안치하여 흙으로 덮고는 땅에서 미륵불이
솟아나리라 선언하였다. 그가 땅에 닿아 계속해서
물을 붓자 콩이 불어나면서 돌미륵이 땅위로
솟아올랐으므로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를 믿고
존경하였다고 한다. 심지어는 나무에서 곡식이
열리게 할 것이라는 말까지 신봉하고 따랐을
정도이다. 그러나 니금도 역시 고통받는 민중을
구제할 미륵불은 아니었고 민중들을 우롱하다
처형당한 사이비에 지나지 않았다.
4. 조선 시대
조선
시대에도 여전히 하층민을 중심으로 미륵신앙은
이어졌겠지만 그것을 알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
다만,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숙종14년(1688년)에
요승 여환이 일으킨 역모만이 뚜렷히 부각되고
있다. 여환은 아내 원향과 무녀인 계화, 아전이었던
정원태, 황회 등을 규합하여 석가불이 다하고
미륵불이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라는 미륵
신앙을 경기도 양주군 청송면을 중심으로 널리
퍼뜨렸다. 그들은 조정을 뒤엎을 역모까지
계획하고 있다가 결국 발각되어 여환 등 주모자
여러 사람이 처형됨으로써 이들의 허망한 꿈은
무너졌다. 여환 등은 미륵 신앙과 민간 신앙인
용신앙을 교묘하게 관련지었고 또한 무녀들이 이에
적극 협력하였던 것이다. 이상은 조선 왕조 숙종
실록에 보이는 기사인데 이를 테마로 소설가
황석영은 그의 대표작 「장길산」을 저술한 것이다.
불안하고 어두운 사회에서 흉년과 질병등으로
시달리는 민중들에게 이상 사회의 실현을 약속하는
미륵하생신앙은 그들의 소박하고 막연한 기대감을
자극할 수 있었던 것이다.
5. 근대
불교계에서 분파된 신흥 종교 중에는 전통적인
불교의 미륵신앙을 그들의 교리속에 절충하여 가진
경우가 있다. 주로 증산교와 용화교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증산 강일순은 평소 제자들에게 금산사의
미륵불로 강림할 것이라고 말해 왔다고 한다. 한편
서백일이 세운 용화교는 금산사를 본거지로 삼아
한때 그 교세를 떨치기도 하였다. 1966년 교주
서백일이 피살된 뒤 그 교세는 쇠퇴하였지만
금산사 주변의 용화동을 중심으로 용화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이처럼 김제의
금산사 미륵전을 중심으로 찾아들었던 대부분의
미륵 신자들은 증산교 계통의 신흥종교의
신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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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성지
죽산마을은
조선시대에는 도호부로, 뒷산 비봉산 동북쪽에는
고려 때 몽고군과 임란 때 왜적을 물리친
죽주산성이 있다. 이 죽산마을에서, 천주교의 4대
박해의 하나인 병인박해(1866년) 때에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주님을 증거하며 생명을 바쳤다. 현재
「치명일기」와 「증언록」에 그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만 하여도 25분이나 된다. 이외에도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주님을 증거하며 피를 흘리면서
현 "죽산순교성지"인 사형장으로 끌려가
승리의 깃발을 올렸다. 그러면 과연 죽산순교
성지에서는 어떠한 분들이 어떻게 순교하였으며,
죽산순교성지란 어떤 곳인가?
수많은 무명의 순교자는 물론, 이름이 밝혀진 25분의
순교자에 대해 일일이 다 말씀드릴 수는 없다.
하지만 그중에서 순교자 "김도미니꼬", "여기중",
"여정문"의 이야기가 참으로 애절하기에
그분들의 순교에 관해 말하고자 한다.
순교자 "김도미니꼬"는 박해를 피해 깊은 산
속에 숨어 평온히 주님께 의존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천주교 신자인 것을 안 마을 사람 10여명이
찾아와 열일곱살 난 그의 딸을 겁탈하려고 딸을
내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힘이 센
김도미니꼬의 둘째 아들이 누이동생을 데리고
산으로 피하며 따라오는 사람은 돌로 쳐죽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순교자 김도미니꼬에게 딸을 내놓지
않으면 포졸을 데리고 와서 너희 가족을
몰살하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그래서 순교자
김도미니꼬는 여러 가족을 생각하여 할 수 없이
피눈물을 흘리면서 딸을 그들 앞에 내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갖은 모욕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고수하다가
마침내는 순교의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또한
순교자 여기중은 한 가족 3대가 한 자리에서,
순교자 여정문은 아내와 어린 아들과 함께 한날 한
자리에서 순교하기도 하였다. 당시 국법으로도
부자를 한 날 한 시에 한 장소에서 처형되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하지만 죽산순교성지에서는 부자가,
부부가 한 날 한 장소에서 처절하게 처형되었다. 이
분들이 죽산 관아에서 심문을 받고 끌려가 처형된
장소가 죽산순교성지다.
지금은 평평한 땅이지만 당시에는 노송이 우거지고
길에서 사람이 보이지 않는 후미진 골짜기였다. 이
골짜기는 고려 때 몽고군이 쳐들어와 송문주
장군이 지키고 있는 죽주산성을 공략하기 위해
진을 친 장소이기도 한다. 그래서 오랑캐가 진을 친
곳이라 하여 "이진터"라고 불렀다. "이진터"에
진을 친 몽고군은 송문주 장군에게 패하여 "사리티
고개"쪽으로 패주해 달아났다. 이러한 유래를
지닌 "이진터"가 병인박해 때,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 하여 "잊은터"란
이름으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교우들 사이에서는
순교의 처절함이 서린 "잊은터"로 가슴에
아로 새겨진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천주교성지를
되돌아보면, 순교의 사형장으로서의 성지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 중에는 두둘겨 때려 반쯤
죽인 상태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순교성지는 죽산순교성지가 유일한 곳이다.
또한
죽산순교성지 주변에는 "두둘기"라는 곳이
있다. 행정구역상 명칭으로는 삼죽면 덕산리인데,
죽산읍내에서 15리쯤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지금은
삼죽면 면소재지로 80여호가 사는 큰 마을입니다만,
옛날에는 3,4호밖에 안되는 작은 주막거리였다.
두둘기는 지형이 조금 두둑하다하여 두둘기라
불렸다고도 하며, 이곳이 진흙땅이어서 신바닥에
진흙이 떨어지지 않아 두둘겨 털었다하여
두둘기라고 불렸다. 그러나 두둘기는 병인박해(1866년)때,
교우들의 애절한 사연이 서린 한 많은 땅으로
변하였다. 용인, 안성, 원삼, 가칠암이 등에서
숨어살던 교우들을 포졸들이 잡아 가지고
돌아오다가 이곳에 오면 술을 마시고 쉬어갔다.
그러니까 이곳은 포졸이나 포졸 수하들의
집결지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모여든 포졸들이
이곳에 당도하면, 잡혀온 교우들에게 "돈을
내라",
"이제 너희들은 저 달거리 잔등만 넘으면
죽는다. 돈을 내면 풀어주마" 하며 두둘겨
때렸던 것입니다. 또한 뒤쫓아온 가족들은 잡혀온
교우들이 두둘겨 맞는 것을 보고 땅을 두드리며
원통해 하였다. 그리하여 두둘기는 이래 저래
두들겨 맞던 곳으로, 교우들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따라서 죽산순교성지가 순교를 항한 "두둘기"와
"잊은터"로 알려짐은 순교자들의 주님을
향한 아픈 사랑을 잘 알려주는 곳이다. 이처럼
주님의 아픈 사랑의 형장인 죽산순교성지는 오늘을
사는 우리 교우들에게 주님을 향한 어리석음의
십자가의 교훈을 주며, 앞으로의 후손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리라
믿는다.
병인박해
이
사건의 원인(遠因)은 당시 시베리아를 건너온
러시아의 남하(南下)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1864년(고종
1) 러시아인이 함경도 경흥부(慶興府)에 와서
통상하기를 요구하였을 때 대원군 이하
정부요인들의 놀람과 당황은 대단하였으나 이에
대한 대책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조선에 와 있던
몇몇 가톨릭교도들은 대원군에게 건의하기를 한·불·영
3국동맹을 체결하게 되면 나폴레옹 3세의 위력으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다 하여,
대원군으로부터 프랑스 선교사를 만나게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 시기를 놓치고 말았으니 당시
지방에서 포교하고 있던 다블뤼 주교와 베르뇌
주교가 서울에 돌아왔을 때는 조정에서 이미
러시아인의 월경과 통상요구가 시일이 경과하여
한낱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을
때였다. 그리하여 3국동맹이 체결되면 포교의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선교사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오히려 그들은 지둔(遲鈍)과
무책임한 주선(周旋)의 발설로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톨릭교를 서학(西學)·사학(邪學)이라
하여 배척하던 당시, "운현궁(雲峴宮)에도
천주학(天主學)쟁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졌고, 조대비(趙大妃) 이하 정부 대관들이 가톨릭
교도의 책동을 비난하자 대원군은 이들 가톨릭
교도롤 탄압하기로 결심하였다.
1866년 가톨릭교 탄압의 교령(敎令)이 포고되자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학살당한 것을 필두로
불과 수개월 사이에 국내 신도 8,000여 명이
학살되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아직도 체포되지
않은 3명의 프랑스 신부의 행방을 찾고 있었고, 이
사건으로 산속에 피신하여 좇겨 다니다가 병으로
죽고 굶주려 죽는 부녀자와 어린이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이때 탈출에 성공한 리델
신부가 톈진[天津]에 있는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십자가의 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형 선고를 받으신 뒤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산을 오르셨다. 당시 십자가형은
중죄인을 처형하던 형벌이었다. 그나마 너무
잔혹하다 하여 예수 시대에는 일부 하층민에게만
적용되었고, 4세기경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완전히 폐지되었다. 이토록 잔혹했던 십자가의
길이 당신에게는 죽음의 길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 인간들에게는 구원의 길이었다. 당신께서는
전 생애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셨지만 이
마지막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야 다 이루었다는 한
말씀을 남기실 수 있었다. 치욕과 고통, 오로지
죽음밖에 보이지 않는 이 길을 통해 당신은 무엇을
다 이루었을까? 우리는 오늘도 이 길을 걸으며
당신께서 이루신 그 길이 나와 우리 삶의 길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가질까 묻고 또 묻는다.
십자가의 길 기도는 초기 교회시대 예루살렘을
찾던 순례자들이 실제로 빌라도 관저에서
갈바리아산까지의 거리를 걸으면서 기도 드렸던
데서 유래한다. 이 순례지가 지리적 정치적 장애를
받게 되자 15~16세기 유럽에서는 성지 모형의
십자가의 길을 만들어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예루살렘을 중세 초부터 맡아보았던 프란치스코회(1209년
창립) 수도자들이 14세기부터 이 순례 기도를 적극
권장하고 전파하여 15세기에 이르러 널리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각 처의 숫자와 기도의 구체적인 형태는
굳어지지 않았었다. 처음에는 그 멈추는 곳의
수효조차도 일정치 않던 것을 교황 클레멘스 12세(1730~1740년)가
열넷으로, 즉 십사처(十四處)로 정하고 각 처마다의
묵상 내용도 복음서와 전승에서 찾아 정하였다.
그리고 모든 교회에 십자가의 길을 설립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에 앞서 1688년 교황 인노첸시오 11세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모든 성당에 십자가의 길을
두도록 허락했다. 또한 예수의 수난을 묵상하며
경건하게 이 기도를 바치는 신자에게는 전대사도
허락하였다. 1694년 교황 인노첸시오 12세는 이
특전을 확증했으며, 1726년 교황 베네딕토 13세는
모든 신자들이 이 특전을 얻을 수 있게 하였다.
처음에는 노천에서 걸어가며 바치던 성로신공(聖路神功)이었다.
기도를 하기 위해 멈추는 곳마다 나무 십자가
하나씩만을 세웠으나 점차 묵상 내용에 적합한
장면을 그림이나 조각 등으로 대신하게 됐다.
성당이나 가정의 실내로도 들여놓게 되었으며,
움직이기 어려운 신자들을 위해서는 그저
십자가상만 바라보며 묵상기도를 하도록 하였다.
19세기 들어 이 신심은 전세계에 퍼져 예수의
수난을 묵상하는 가장 좋은 기도로 특별히
사순절에 널리 행해지고 있다. 주로 성당이나 그
밖의 공적인 기도 장소에서 개별적으로 혹은
사제와 함께 단체로 행해진다. 각 처를 순례하듯
옮겨가는 것이 원칙이나 단체로 할 때는 대표만
움직이고 다른 신자들은 움직이지 않아도 무방하다.
각 처마다 정해진 기도문과 함께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치며 묵상한다.
근래들어 십사처에 십오처를 하나 더 보태
부활로써 마무리하는 경향도 있다. 1975년 성년(聖年)에는
교황 바오로 6세가 최후만찬으로 시작하여 부활로
완결되는 , 복음서에 더 깊이 근거한 새 형식의
십육처 십자가의 길을 인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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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배마을
흔들바위
높이
2.1미터 둘레 10.4미터로 일제 강점시 일본사람들이
이 바위를 떼어내려고 반 정도 뒤집었으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으며 팀 스피리트 훈련시 미군 9명이
이 바위를 넘기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고
한다. 바위 밑으로 실을 통과 시킬 수 있다고 하니
궁금한 분은 실을 가지고 가서 직접 실험해 보길...
엄지손가락으로 흔들리는 이 바위는 예로부터
아기를 낳지 못하는 사람들이 지성을 들이면
아기를 점지해 준다는 전설이 내려오며 뒤로는
팔봉산의 8개 명당 중 한곳인 무덤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은 사냥꾼에게 쫓기던 노루를
살려주었더니 노루가 두 바위 사이의 땅을 파고
떠나지 않아 이곳에 묘를 썼더니 후손이
번성하였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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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농장 - 된장
박사 서분례 씨의 재래 된장 만들기
긴
세월 묵힌 장처럼 진득한 정성
경기도
안성 일죽면. 그곳에 다다르면 짙은 향을 느끼게
된다. 그 향에 이끌려 가보면 "서일농원"이
있다. 거기에는, 대통령이 노벨상을 수상하고
경제가 파탄났다고 야단법석인 세상소리에 꿈쩍도
하지 않는 진귀한 그림이 있었다. 깊이와 너그러움,
중심을 지키며 제 맡은 임무에 묵묵한 2,000여개
항아리들의 장엄한 도열은 탄성을 절로 자아낸다.
또한 그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알게 되면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네 전통장을 담그는
일은 그렇게 엄숙한 작업이었다. 그저 한 해 먹을
찬을 준비한다는 의미를 넘어 장 담는 일은 우리
선조의 지혜와 삶 자체가 스며 있었다. 전통
장마저도 인스턴트식으로 생산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장에 담긴 선조의 지혜와 의미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세계 석학들로부터 암 예방은 물론
변비, 고혈압, 노화방지에 신비한 효능을 가진
기능성 식품이라는 호평을 받으며 지속적인 연구가
진행 중인 우리 장이 아닌가. 그러나 정작 우리
자신은 그 가치에 너무도 소홀한 듯하다.
항암, 혈액순환장애 등 다양한 효능을 가진
기능성식품 된장
어느
화려한 여 사업가가 전통장을 되살리기 위해 두
팔을 걷어 부쳤다. 서일농원의 서분례 여사. 재래
장을 보다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체계화 시켜
현대화하려는 노력으로 이제는 "된장박사"로
통하는 그녀다. 그녀는 전통 장의 활발한 연구·개발을
위해 중앙대학교, 충북대학교와 산·학 협력을
체결하여 심도있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최근
속속 밝혀지고 있는 우리 된장의 효능에 대해 우선
생명공학연구소의 김승호 박사는 "재래식
된장을 많이 먹으면 뇌졸중이나 뇌출혈 등
혈액순환장애로 인한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지혈뿐 아니라 혈액응고 방지 역할도
밝혀내 "혈관 내 혈전이 형성되면 영양소와
산소공급을 방지해 뇌출혈 등의 질병을 일으키게
되는데 된장 속의 바실러스균이 특수한 단백질을
분해해 혈전 덩어리를 잘게 분해시키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며 단, 기계화된 대량 생산이
아니라 재래식 방법으로 만든 된장을 날로 먹을 때
효과가 높다고 설명했다. 또한 부산대학교 박건영
교수는 "재래식 된장의 안정성과 항암 효과"라는
연구보고서에서 "된장은 암세포 유발과 성장을
억제하고 간 기능 회복과 해독작용에 탁월한
효과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그
또한 일본된장이나 개량된장이 아닌 재래식
된장에서 효과를 보이며 이는 콩 성분 발효과정
중의 생성물질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
같은 연구결과가 발표되면서 서분례 여사는 또
한번 흐뭇한 보람을 느낀다. 제대로 된 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장을 소중히 여기는 옛 아낙의
마음을 본받아야 한다는 그녀. 투박한 옛 어머니의
손길에서 우려낸 재래된장은 어떤 모습인지 그녀의
작업을 따라가 본다.
된장의 제 맛내기, 콩. 물. 소금. 장독. 정성이
조화 이뤄야...
"제대로
된 장맛을 내려면 좋은 콩과 물, 소금의 배합이
적절해야 하며 좋은 항아리에서 적당한 기간
묵혀야 합니다. 무엇보다 정성이 가장 중요하구요.
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서분례 여사의 설명이다. 서일농원에서는 안성지방
재래품종의 햇콩을 사용하는데 참나무 장작불에 푹
삶아낸 콩을 절구에 찧어 목침만한 메주를
만들면서 장 만들기의 첫 단계가 시작된다. 삼베로
싸서 꾹꾹 밟아 다진 메주는 실내에서 2,3일간
두었다가 반응달에서 60-70일간 말린 다음 따뜻한
온돌에 볏짚을 깔아 15-20일간 띄운다. 장 담글 물은
농원 내 150km 지하 암반수를 끌어올려 사용하며,
소금은 1년중 가장 볕이 좋은 6,7월에 거치하여
수년간 재워 간수를 뺀, 서해안 천일염만을 쓴다.
암반수와 천일염을 10:3의 비율로 섞어 염수를
만드는데 이때 비율이 매우 중요하다. 염수가
싱거우면 장에 곰팡이가 생기고, 너무 짜면 장맛이
나쁘기 때문이라며 "전통방식에서는 소금물에
계란을 띄워 동전크기만큼 보일 때 염도 17도라고
맞추었다"고 그녀는 귀뜸한다.
서일농원에서는 음력 정월에 손 없는 날을 받아
고사를 지내고 장 담글 채비를 한다. 항아리에
메주와 소금물을 넣고 메주가 띄지 않도록
대나무를 걸쳐 누른다. 그 위에 대추, 통깨, 소금을
얹고, 악귀를 쫓기 위해 붉은 태양초를 넣은 후
마지막으로 벌겋게 달군 참숯을 넣는데 이는
살균을 위한 것이라 한다. 담그기를 마치면
일조량에 가장 정성을 쏟아야 한다. 담근 후 3일간
뚜껑을 닫아두고 그 후 매일 뚜껑을 열어 볕을 쬐어
주고 통풍을 시켜야 한다. 정월 장은 70-80일 정도
숙성시킨 후 장을 가른다. 이렇게 담근 된장은 1년
정도 숙성 후에야 먹을 수 있는데 2-3년 이상 숙성된
것이 제일 맛있다고 한다.
이것만으로 서일농원의 장맛이 나는 것은 아니다.
100년이 된 옛날 항아리와 지리산 흙으로 빚은 인월
항아리를 쓰는 것에서 장을 덮는 보자기 하나까지
재래방식 그대로 최선을 다하는 손길이 담겨야
하며 무엇보다 혈육을 길러내는 정성으로 한 독 한
독 혼을 다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서분례 여사는 어릴 적 경험과 전국의 종가를
찾아다니며 장맛을 익혔으며. 옛 문헌을 통해
연구를 거듭했다. "된장박사"로서 진면목은
재래방법을 과학화, 체계화, 이론화시킨 데 있다.
그리하여 다양한 제품으로도 개발, 응용하였는데
"냄새없는 청국장"을 선보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경기도 신지식인으로
선정되었고, 전통식품인증서를 받았다. 재래된장
생산으로 벤처기업에 등록되기도 했다.
서일농원의 장은 비싼 편이다. 전 과정이 재래식
수작업을 통해 이루어지며, 최고의 원재료만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농원운영은 수지
맞는 사업은 아니다. 그래도 재래된장을
고수하면서 매실식초, 전통주 등의 개발을 통해
사업의 다각화를 꾀하고 있으며 다품목 소량 생산
전략으로 질적 고급화를 지향한다.
관광명소, 실습현장으로도 각광
서일농원은
더 이상 장 만드는 생산현장만이 아니다. 사계절
다른 폼을 내는 아름다운 조경과 전국에서 수집해
갖가지 얼굴을 한 항아리의 장엄한 풍광, 초가를
얹어 단아한 멋을 풍기는 길을 따라 걷노라면 주인
아낙의 정갈한 매무새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
멋으로 휴일이면 가족 나들이 장소가 되기도 하고
주부나 학생들의 장 담그기 실습장소가 되기도
한다. 서분례 여사는 장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아낌없이 일러준다. 장맛에 대한 애정을 널리
확산시키려는 뜻에서란다. 그녀는 22년동안 매월 15일이면
어김없이 양로원을 찾아 노인들을 위로했다.
세월이 더 지나면 마련해 둔 근처의 대지에 아담한
양로원을 지어 본격적으로 노인들을 부양할 것이라
한다. 그리고 "장류 박물관"을 지어 우리의
전통 장맛을 지켜갈 것이라 한다. 그녀다운
모습이었다. 콩 다섯말의 수확으로 우연히
시작하게 된 된장 만들기. 과학적인 선조의 지혜를
지키고 다듬어가기 위해 오늘도 서분례 여사는
손끝과 혀끝에 온 신경을 모은다. 인스턴트 음식에
길들여진 우리네 자녀들과 꼭 한번 가고 싶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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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리 5층석탑 (보물
제435호)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tour.anseong.go.kr%2Fdata%2Fimage%2Fmain_107518620480.gif)
죽주산성이
있는 비봉산 자락의 이죽면 죽산리에 봉업사(奉業寺)터가
있다. 죽주산성에서 빠져 나와 죽산교를 건너면
국도변 오른쪽에 힘찬 당간지주와 오층석탑이 서
있다. 당간지주와 탑이 불과 20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가람배치양식으로 봐서 당간지주는
몰라도 탑은 본디 제자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봉업사는 언제 창건되고 폐사가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절이 매우 중요한 절이었음을
밝혀주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죽산현 고적조」에 "봉업사는 비봉산 아래에
있다. 고려 때에 태조의 진영(眞影)을 봉안하였는데,
공민왕 12년 2월에 거가(車駕, 왕이 탄 가마)가
청주를 떠나 이 절에 들러 진전(眞殿)을 참알(參謁,
참배)하였다. 지금은 석탑만 남아 있다."고 한
기록이다. 봉업사는 고려 때 개국조인 태조의
진영을 모신 진전사원(眞殿寺院)이었던 것이다.
진전사원이란 왕실의 의지에 따라 죽은 왕의
진영을 모시고 위업을 기리며 명복을 비는
사찰이다. 조선시대의 원찰(願刹)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진전사에는 사찰 호위군인
위숙군(圍宿軍)을 상주시키고 적절한 시혜를
베풀었다. 태조의 진전사원은 개성 봉은사, 논산
개태사를 비롯해 안성 봉업사 등 여러 곳에
있었다고 전한다.
따라서 봉업사의 규모가 왜소했을 리 없다. 바로
건너다보이는 비봉산 아래에는 불상과 탑이 뿔뿔이
놓여 있으니 봉업사터가 매우 드넓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 보물 제983호인 봉업사
석불입상 1기는 현재 칠장사에 모셔져 있다.
고려시대의
대찰로만 알려진 봉업사 당간지주는 찬연한 세월의
흔적이 검푸른 이끼에 배어 있다. 높이 4.7m인
당간지주는 남북으로 1m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다.
화강암지주의 안팎 면은 특별한 장식 없이
소박하게 다듬었고, 지주 끝에만 위로 길게 뚫어
당간을 거는 간구(杆構)를 설치하였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9호로 지정되어 있다.
당간지주를 바라보며 당당한 기품으로 서 있는
오층석탑이다. 단층 기단 위에 5층이 탑신을 안치한
일반적인 석탑인데, 7.8m의 우뚝한 키가 위용을
자랑한다. 기단부는 다소 둔중함을 보이지만, 1층
몸돌의 정면에 문을 조각하는 대신 감실을 조성한
점은 각별하다. 지붕돌 층급받침은 층층마다
정연하게 5단씩 모각하였고 규율이 엄정하며
장중하다.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안성군 내에서 가장 우수한 석탑으로 꼽히고
있다. 지난 1968년 복원공사 때 사리장치와 더불어
유물이 4층 몸돌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보물 제435호이다.
당간지주에서 가까운 밭 한가운데 서 있는
삼층석탑이다. 기단 면석 아래로는 매몰되어
온전한 모습을 알기 어렵다. 겉으로 보기에 단층
기단을 갖춘 탑으로 3층의 탑신이 올려졌고
상륜부는 없어졌다. 기단 면석은 4매로 짜였고, 각
면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으나 다른 조식은 없어
조촐하다. 1층 몸돌은 유독 키가 커서 균형이 맞지
않으며, 지붕돌은 두툼하고 네 귀에서 추녀의
윗선만 반전했다. 삼층석탑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신라 말의 고승 혜소국사(慧炤國師)와
연관이 있다고 전하나 확실치는 않다. 탑 주변엔 잘
가꿔진 향나무가 탑을 외호하고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8호이다.
<답사여행의 길잡이 9권, "경기북부와 북한강"편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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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장사
이죽면
칠장리 칠장사는 칠현산에 바짝 등을 기대고 안겨
있다. 앞으로는 철따라 바뀌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울창한 숲에 고색창연한 칠장사가 포옥 싸여 산도
절도 빛이 난다. 칠장사(漆長寺)라고도 불렸던
칠장사(七長寺)의 전설 또한 생명력이 있다. 고려
때 혜소국사(慧炤國師)가 일곱도적을 제도하니
이들은 일심정진해 도를 깨달았다. 이 덕에
칠현산이 되고 칠장사가 되었는데, 한때 칠현사(七賢寺)라고도
불렸다.
임진왜란 때 적장 가토 기요마사는 혜소국사비의
신통력에 혼비백산해 돌아갔다. 벽초 홍명희는
임꺽정의 스승 갖바치를 이곳에 은둔시켜 백정
출신 도인을 탄생시키고 민중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모두가 부처의 정신이 살아 있는, 아름답고
통쾌한 전설이다.
칠장사는 선덕여왕 5년(636)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곳에서 수도하고 입적한 고려 때
고승 혜소국사가 현재 비각이 있는 자리에 홍제관(弘濟館)이라는
수행처를 세웠고, 현종 5년(1014) 크게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불교가 억압을 당하던 무렵 1674년,
세도가에게 절을 빼앗겨 스님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비운을 겪었다. 얼마 후 거사 초견(楚堅)이 절을
찾아 중수했다.
고려 말 왜적의 피해가 극심할 때 충주 개천사에서
보관하던 나라의 사서(史書)를 이곳 칠장사로 옮겨
8년간 비장해 소실을 면한 일이 있다. 조선 선조의
부인 인목대비는 인조반정으로 복위되자 당쟁으로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을
위하여 칠장사를 원찰로 삼고 자주 찾았다. 그때
인목대비가 쓴 『금광명최승왕경』 10권 1질과
자신의 한스런 심정을 토로한 시가 친필 족자(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전해오고 있다. 금강산
유점사에는 인목대비의 친필 법화경 보문품(普門品)이
전해온다고 한다.
손때가 묻지 않아 절로 감동이 이는 칠장사는
찬찬히 눈여겨봐야 할 보물들이 많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9호인 철당간이 절 입구에 서 있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5호인 사천왕상이 압도한다.
진흙 소조로 만든, 빛바래고 상처투성이인
사천왕상을 시멘트로 덧입히지 않고 그대로 놔둬
고마운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역시 오랜 풍상을
겪은 대웅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4호)이 힘찬
자태를 드러내고 있으며, 대웅전 오른쪽에는
봉업사터에서 옮겨온 석불 입상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 좌측 언덕 위로는 보물 제488호인
혜소국사비가 있다. 이 밖에 절 입구에 14기의
부도와 절 뒤에 있는 수많은 부도가 칠장사의
면면을 말해 주고 있다. 화려하고 번잡스런 것은
모두 피해 있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절이다.
철당간지주
칠장사
주차장에서 조금 못 미처에 있는 14층의 철제 원통
당간지주가 하늘 높이 우뚝 솟아 위용을 자랑한다.
지름 50cm 정도인 원형 철통은 현재 14층으로 11.5m가
남아 있지만 본래는 28층이었다고 한다. 그 위에서
칠장사를 알리는 깃발이 나부꼈을 터이니
장관이었을 게다.
당간지주를 지탱하고 있는 지주석은 매우 소박하고
단아하다. 지주석 사이에 견고하게 끼여 솟아 있는
이 당간은 풍수설에 관련된 전설을 지니고 있다.
칠장사의 지형이 마치 배 모양과 같은 형국이어서
이 당간을 돛대에 비유해 세웠다는 것이다. 땅도
사람 몸과 같이 허약한 부분이 있다고 한다. 이
허약한 부분을 보해주기 위한 방법으로 탑을 주로
세웠는데, 칠장사 당간이 그런 전설을 지니고 있다.
철당간은 전국을 통틀어 몇 안 된다. 그 중 충북
청주 시내의 용두사터 철당간과 계룡산 갑사의
철당간이 유명하다. 청주 용두사처 철당간은 조성
연대와 철통의 척수가 새겨진 명문이 있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칠장사 철당간은 조선 중기
작품으로 밝혀져 있으나 명문은 없다. 초파일 때면
연등이 환하게 주위를 밝힌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9호이다.
소조 사천왕상
전통사찰에
들어서면 대개의 절에서 만나볼 수 있는 게
사천왕상이다. 불이문을 지나 절 가까이에서
통과하는 문이 사천왕문이고, 여기에 절을
수호하는 동서남북의 신장으로 양쪽에서 2구씩
사천왕상이 자리잡고 있다. 칠장사 사천왕문도
그와 같은데 사천왕상은 매우 다르다. 그 거대한
사천왕상이 진흙을 빚어 만든 소조상이라는 데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또한 정교하고 웅장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사천왕상은 모두 악귀
위에 걸터앉았거나 악귀를 한쪽 발로 짓누르며
힘센 두 팔을 당장이라도 휘두를 듯 치켜들고 있다.
손에는 무기를 들었거나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비파나 창을 들기도 했으며 얼굴에는 한껏 위엄이
차 있고, 왕방울 같은 두 눈으로 무섭게 쏘아보고
있다.
그러나 사천왕이 단지 무섭기만 하대서야 무슨
매력이 있겠는가. 짐짓 무서운 모습을 보이고는
있으나 속내는 한없이 부드러운 게 사천왕이다. 절
구경 오는 사람들에게 무례를 범하지 말고
경건하게 참배하고 가라고 짐짓 경고하는 한편,
부처님 뵈러 오는 사람들이 신통하고 방통해 그들
곁에서 외호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사천왕상을
찬찬히 뜯어보면 두 눈은 부릅뜬 듯하지만, 양 볼과
허연 이를 드러낸 입에는 비어져 나오는 미소가
감돌고 있다. 당당하게 여유를 보이고 있으며,
한편으론 해학미 넘치는 친근감을 보여주고 있다.
화려한 보관, 정교한 무늬의 갑옷을 입고 더러는
부드러운 천의를 나부끼며 절문을 지킨다. 이러한
칠장사 사천왕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일반적인
모습 중 매우 뛰어난 걸작으로 꼽힌다. 다만 세월의
풍화는 어쩔 수 없는듯, 빛바랜 채색은 창연해
보이나 손가락 등 신체의 일부에 상처가 나 있어
안쓰럽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호이다.
대웅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4호인 대웅전의 건립 연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조선 중기에 중창되고 16세기에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고종 14년(1877)에 중건된
대웅전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빛바랜 단청이
고색창연하다. 새것을 덧씌우는 것만이 아름다움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칠장사 대웅전은 말해준다.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곱다.
대웅전 기단은 장대석을 5단으로 쌓았고, 원형의
초석 위에 약간의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공포를 갖춘 맞배지붕
집이다. 단정하면서 견고하고 장중한 무게감을
주는 것이 맞배지붕의 특색이다. 이러한 형식의
건물은 조선 후기의 소규모 사찰 대웅전에 거의
공통으로 등장한다. 아담한 절이 힘차게 느껴지는
눈맛을 주기 때문이다. 높은 기둥을 세우지 않고
대들보가 그대로 앞뒤의 기둥에 걸리게 하였으며
채색은 불화와 연화문으로 하였다.
법당 안에는 원만한 상호의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특히 인중이 길고 윗입술이 약간 들린 본존불의
모습은 그저 위엄있는 얼굴이 아니라 우리
이웃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친근한 얼굴이다. 문수·보현
보살이 양 옆의 협시 보살로 모셔져 있고, 본존
후불탱화와 지장탱·신중탱·칠성탱이 안치되어
있다. 이들 탱화의 화기(畵記)는 모두 조선 고종
말년의 것으로 나와 있다.
칠장사
접시꽃
서창원
칠현산 기슭에 자리한 칠장사에는
여름 마지 접시꽃이 한참 피어올랐다
대웅전 앞에도 종탑 앞에도 칠성각 앞에도
붉게 피어올랐다
타는 듯이 열린 접시꽃은 두 손을 모아
대웅전을 향해 서 있다
종탑 앞에서는 법고소리에 귀기울이는
모습으로 침묵되어 있다
아픔의 눈망울을 걸어 놓은 듯이 접시꽃이
피었다
아프게 터진 접시꽃 입술에 번지는 빗방울을
공허하게 흘려 보낸다
칠장사 절 뜰은 오색으로 그렇게 물들었다
오색이어도 대웅전 안은 공허의 안이다
비어 있는 자비의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가는 스님이 총총이 사라진다
공간의 벽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생과 사가 갈리는 순간이다
이승과 저승이 갈리는 순간이다
물질과 공백이 갈리는 순간이다
참의 현상이 나타나는 순간이다
거짓의 모습이 보이는 순간이다
시간이 한계를 극복하는 순간이다
있고 없음의 순치를 보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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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업사터
석불입상
대웅전
오른쪽 옆에 조각솜씨가 빼어난 석불입상 한 기가
모셔져 있다. 본래 죽산리 봉업사터에 있었던 이
불상은 절이 폐사되자 죽산중고등학교 교정에까지
흘러갔던 모양이다. 학생들에게 손타 훼손이 심해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하는데 퍽 다행한 일이다.
불상은 두광 아래로 발께까지 신광이 표현되어
있고 큼직한 꽃무늬 대좌 위에 모셔져 있다. 불상에
비해 대좌는 풍상의 흔적이 적은 깨끗한
화강암이다. 미루어 보건대 본래의 대좌는
없어지고 이 불상을 모시느라 근래에 새로 만든
대좌임에 틀림없겠다.
불상은 특히 얼굴의 눈 코부분이 마모가 심하지만
불상을 빚은 조각 솜씨는 매우 곱고 섬세하다.
오른손을 들어 살포시 가슴에 얹고 왼손을 차분히
내려 무릎 아래로 늘어진 옷자락을 잡고 있는데 그
자태가 일품이다. 어깨에 걸쳐 가슴을 타고 내린
얇은 법의(法衣)의 선, 3기의 화불을 인 두광, 그
뒤로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신광의 화염문 등
세부적인 묘사가 8세기 통일신라시대 양식의
우수한 수작으로 꼽는 데 모자람이 없다. 보물 제988호이다.
혜소국사비
칠현산의
울창한 소나무숲의 새소리가 한결 가깝다. 대웅전
왼쪽으로 꺾어돌아 야트막한 언덕 위에 혜소국사(慧炤國師,
972∼1054)비가 있다. 안성에서 태어나 칠장사의
조사를 지내고 여기서 생을 마친 혜소국사를
기념하기 위해 고려 문종 14년(1060)에 세운 비이다.
혜소국사는 유가종(瑜伽宗)의 고승으로 속성은
이씨이다. 혜소국사는 시호이고, 생전의 법명은
정현(鼎賢)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화성 광교산 충회(忠會)의
제자가 되었고 이곳 칠장사 융철(融哲)에게서 유가(瑜伽)에
관한 공부를 한 뒤 영통사(靈通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대강사로 이름을 떨치던 스님은 고려 목종 2년(999)
대사가 되었으며, 덕종 때는 왕명에 따라 법천사(法泉寺)에
머물렀고, 이어 승통이 되었다. 금광명경 등 왕에게
종종 설법을 해오던 스님은 1049년 문종의 왕사가
되었고 1054년에 국사에 올랐다. 어느덧 스님의 나이
82세. 고승들의 귀향은 곧 열반지를 찾아드는
일이다. 혜소국사는 처음 유가를 공부했던
칠장사로 돌아와 11월 15일 임종게를 남기고
가부좌를 한 채 앉아서 열반에 들었다. 법랍 74년이었다.
혜소국사의 비가 세워진 지 930여 년. 기나긴 풍상
탓인가. 임진왜란 때 적장 가토에게 훼손당한
것일까. 전하는 바대로 이 지역의 세도가들이 이
곳을 차지하기 위해 파괴했던 것일까. 그도 아니면
제 머릿돌이 수백년 무게를 못 이겨 스스로
주저앉고 말았을까. 결론 내릴 수 없는 이설이
무성한 채 비간 안의 비는 현재 세 부분으로
해체되어 있다. 왼쪽부터 비신귀부이수가 각각
옆으로 나란히 안치되어 있다. 얼른 보아도 비신은
날렵한데, 그에 비하면 대좌와 머릿돌의 규모가
엄청나다. 머릿돌에 못 이겨 비신이 쓰러지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봄직하다.
높이 2.27m, 폭 1.27m의 검은 대리석〔烏石〕 비신은
양 옆면 아래 위로 길게 여의주를 희롱하는 쌍룡을
새겼는데 생동감있는 조각솜씨가 볼만하다. 비신은
중간에서 부러져 보수의 힘으로 버텨내고 있으나
비문은 성해 판독이 가능하다. 김현(金顯)이 짓고,
민상제(閔賞濟)가 쓰고 전액을 하였으며, 각은
배가성(裴可成) 이맹(李孟) 등이 했는데 구양순법의
해서체로 굳세고 엄정하다. 귀부와 이수의
생김새가 웅장하고 화려하다. 거북의 등은
방원형에 육각의 갑문(甲文)이 뚜렷하고 머리와
꼬리, 네 개의 발에는 물결무늬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머리를 치켜 들고 코를 한껏 벌름거리며
부리부리한 눈망울로 쏘아보는 거북의 모습이 매우
사실적이다. 비신이 안치될 자리는 소담스런
복련으로 조각했다. 운무 속에 꿈틀거리는 거대한
이수의 용이 사실감을 준다. 머릿돌 가운데로는
비가 오면 물이 빠져나가도록 구멍을 내었다. 탑의
상륜부에 있는 보주와 같은 연꽃돌이 올라가
있는데 원래 이수에 있었던 것은 아닌 듯이 보인다.
현존하는 크고 화려한 비 중의 하나로 보물 제488호이다.
<답사여행의 길잡이 7권, "경기남부와 남한강"편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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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사
한여름
무더위를 가르며 수상스키를 즐기는 청룡호수를
지나 청룡사에 닿는다. 충남 천안시 입장면과
맞닿은 청룡사 쪽은 안성에서 가장 남쪽인 셈이다.
자연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 또한 진천, 천안,
평택에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러 찾아오는
여행객들이 많다고 한다. 소문을 듣고 찾았던
여행객들은 소박하고 아담한 청룡사의 인상에
정겨움을 느낄 수 있다.
청룡사 대웅전
아담한
경내에 유독 크게 보이는 것은 마당 귀퉁이를
지키고 있는 커다란 보리수나무와 유독 웅장한
대웅전이 그것. 보물 제824호인 대웅전은
건축학적으로 흥미롭다. 자연석으로 기단을 쌓고,
화강석으로 주초석을 놓은 다음 기둥을 세웠다. 그
기둥 하나하나가 이리 휘고 저리 휘어 무거운
기와지붕을 떠받치고 있다. 이렇듯 칸칸을 받친 큰
기둥을 자연목 그대로 쓴 것은 청룡사만의
매력이다. 연륜이 깊어 이리저리 등 굽은 노송을
그대로 옮겨와 가지만을 뚝뚝 잘라내고 기둥을
삼은 것이 자연스럽다.
절의 중심 법당인 대웅전은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건물로 추측한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를
다포 양식이라 하는데 밖으로 뻗쳐 나온 재료
윗몸에 연꽃과 연꽃봉오리를 화려하게 조각해 놓아
장식이 많이 섞인 조선 후기의 특징을 보인다.
기둥은 전혀 가공하지 않은 원목을 그대로 세운
것이 눈길을 끈다. 건물의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천장으로 꾸몄다.
청룡사는 원래 고려 원종 6년(1265) 명본국사가 세워
대장암(大藏庵)이라 불렀던 곳이다. 공민왕 13년(1364)
나옹화상이 크게 넓히면서 청룡사라 이름을
고쳤는데 청룡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광경을
보고 지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사찰 안에는 대웅전,
관음전, 봉향각, 명부전 등이 있고 대웅전 앞에는 5톤
무게의 구리로 된 종이 있다. 2.2미터 높이의 아담한
3층 석탑은 대웅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게 보인다.
고려 원종 명본국사가 세운 것으로 당대의 불탑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법당 안에 있는
청동종은 종신에 명문이 새겨져 있고 표면의
문양이나 양식, 수법이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범봉으로 조사됐다.
이곳은 안성 남사당패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남사당패는 불당골에 살면서 겨울을 뺀 세
계절동안 전국을 돌다가 겨울에는 돌아와
기예공부를 익혔던 것. 청룡사 사적비에서
부도군을 지나쳐 시멘트길을따라 올라가면 제법
산중의 운치를 느낄 수 있는 불당골도 볼거리이다.
청룡사 감로탱
경기도
안성 청룡사 감로탱은 보물로 대웅전 내벽에 걸린
불화로, 가로 239.9㎝, 세로 200㎝의 1692년 작품이다.
감로탱은 명료한 주제와 안정된 구도 그리고
선명한 색채로 18세기 조선 후기의 불화양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자, 당대의 중생제도와 효사상을
찾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불화의 구성은 상단의 아미타삼존, 칠여래,
관음보살, 지장보살, 인로왕보살 등과 중단의
성반의식을 강조하고, 하단에는 속세의 여러
장면이 함께 표현되어 있다. 특히 불·보살의 몸에
금니를 한 것은, 다른 불화에서는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는 주목할 만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청룡사 동종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와 소리의 울림을
도와준다는 대나무 모양의 음통에 역동적인 모습의
용이 새겨져 있다. 또한 종의 어깨와 아래 입구
부분에는 연꽃과 덩굴을 새긴 넓은 띠를 두르고
있으며, 어깨 띠 아래에는 사각형 모양의 대가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보살상을 세웠다. 사실적으로
표현한 수법이 특히 돋보이는 작품으로,
사인비구의 작품세계와 조선 종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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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년의 글과
여행] 내 어린 시절의 오솔길(여행기)
안성땅에는
미륵불이 많다. 미륵당의 태평미륵, 기솔리 쌍미륵,
궁예미륵, 대농리 미륵, 아양동 미륵 등이 그들이다.
민중들은 그들이 고대하는 이상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미륵불을 세웠을 것이고 미륵의 넉넉한
미소는 그들의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임꺽정의 스승인 갖바치가 살았던 칠장사와 소설
<장길산>에 나오는 비운의 여인 묘옥이 몸을
의탁하였던 안성 남사당패의 잔영이 남아 있는
청룡사도 동네 아저씨 집이라도 방문한 듯 편안한
인상을 준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낭자한 청룡사.
청룡사는 고려 원종 때에 명본대사가 창건하였고
후에 나옹선사가 크게 중창했다. 이때 나옹선사가
서기어린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청룡을 보았다고
해서 본래 대장암이었던 절이름을 청룡사라 하고
산이름을 서운산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인적 드문 마을에서는 그래도 나뭇짐을 한 짐씩
해서 산을 내려오는 분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런데
모두 연세 많으신 분들이다. 깨끗하게 다듬어진
돌길을 따라 ‘서운산 청룡사’라는 현판을 단
문간채를 지나니 다른 절과는 달리 사천왕상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객실’이라고 쓰인 작은
팻말이 보이고 객(客)이라도 들었는지 겨울 털신이
한 켤레 가지런하다. 바로 앞에는 마을집 같은
요사채가 있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낭자하다.
이제 초등학교에 다닐 법한 아이들이 시린 아침을
마다하고 나와 배드민턴을 한다. 시골 큰댁에라도
다니러 온 듯 즐거운 표정이다. 모두 부처같은 환한
미소를 가지고 있다.
절마당을 이리저리 거니니 살이 통통 오른
멍멍이가 따라 온다. 이놈들도 절밥을 오래
먹어서인가. 견성(犬性)이 불성(佛性)이다. 단정한
모양새의 대웅전 문설주 위에는 다섯분의 부처님이
설법을 베푸신다. 굳이 법당 안에 들지 않아도 이미
불계(佛界)에 든 듯하다. 양쪽 추녀 끝에
금강력사가 칼을 들고 서 있다. 오른쪽에는 입을
굳게 앙다문 밀적금강이, 왼쪽에는 입을 벌린 채
공격자세를 취하고 있는 나라연금강이 그려져 있다.
저토록 예쁜 금강력사도 다 있던가. 사면을 받치고
있는 큰 기둥은 자연목 그대로이다. 손을 뻗쳐 보니
한아름이 넘는다. 연륜이 깊어 이리저리 등이 굽은
노송을 그대로 옮겨와 기둥으로 삼았다. 과연 천대
받던 연희패인 남사당을 품어 한겨울 따뜻하게
지내게 한 절답다. 굽으면 굽은 대로, 꼿꼿하면
꼿꼿한 대로 부처님 세상에 쓰임새가 다 있는 것을.
대웅전을 한바퀴 돌아 천천히 돌계단을 내려오는데
배우 김민종이 모델이 된 불교신도 등록 포스터가
눈에 들어온다. 일정한 회비를 내면 부처님 세상에
등록이 된단다. 나무아미타불을 열심히 외면
모두가 극락에 갈 수 있다고 했는데 저 포스터는
그렇지 않은 건가. 허허로운 웃음을 안고 작은
쪽문으로 걸어갔다.
대부분의 절이 수세식으로 바뀐 해우소가 여기는
아직도 커다란 똥통 위에 걸친 나무에서 볼일을
보아야 한다. 남자칸과 여자칸을 가린 것도 적당히
해 놓아 일어 서면 다 보인다. 무언가 딱딱한
느낌이 없어 편안하다.
남사당패의 근거지
비구니가
아침예불을 이끌고 있다. 급히 아낙네들이 법당
안으로 들어가고 스님의 고운 음성이 염불로 산
속에 퍼진다. ‘수리 수리 마하수리…’
염불소리가 민요가락처럼 흥겨워 지더니 풍경이
덩달아 춤을 춘다.
이윽고 절마당에는 남사당패들이 올리는 또다른
공양이 시작된다. 1920년 대에는 청룡사가 안성
남사당패의 본거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남자들만으로 패를 짠 남사당패와 여자들만으로
패를 짠 사당패, 또 맥을 달리했던 걸립패가 같이
어우러지기 시작한 것이 이 무렵이다. 겨울철이면
이들은 절에서 기거하며 절의 잡일을 도우면서
살았다. 청룡사 중수기에는 이들의 이름이
기부인으로 많이 등장하여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절을 나와 불당마을을 찾았다. 개울 건너 바로 앞에
있는 평화로운 마을일까. 안내서에는 500미터쯤 더
오르라고 되어 있다. 뜨거운 커피를 한 잔 하고
싶어 수퍼 옆에 있는 자판기에 가니 마을 사람인듯
초로(初老)의 사람들이 서 있다. 불당골도 알고
바우덕이도 안다.
얼음 밑으로 개울물이 흐른다. 차가운 겨울 날씨
만큼이나 투명하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뜬쇠
이경화처럼 그 물에 얼굴을 씻어 본다. 정신이 맑아
온다. 남사당이 겨울을 나던 불당골에는 옛
바우덕이의 그림자는 없고 음식점만 들어서 있다.
지금 이곳은 다섯 가구가 음식점을 경영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그 중 ‘불당가든’만이 몇 대에
걸쳐 살고 있는 집이란다. 할머니 한 분이 손님을
맞이하는데 오늘은 장사를 하지 않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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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덕이와
이경화
‘첫
사랑의 연인’ 같은 삼층목탑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돌아 나오는데 ‘불당가든’
위의 양지녘에 금방 새긴듯 검은 비(碑)가 눈에
띈다. 1990년에 이장한 바우덕이의 무덤이다.
바우덕이는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암덕(岩德)이기
때문에 암(岩)을 바위로 풀어 바우덕이라고 하기도
하고 박(朴)우덕을 쉽게 바우덕이로 부르게 된
것이라고도 한다. 바우덕이는 청룡사(靑龍寺)를
거점으로 한 능력있는 사당(社堂)으로 남사당패의
말기로 볼 수 있는 1900년대 초에 안성 개다리패
유지에 공헌하였다.
바우덕이의 기량은 유랑집단의 뭇 기예인 중에서
가장 뛰어나, 경복궁 중건시에 각처에서 모인
유랑집단의 기예인들이 재주를 보인 중에
바우덕이패가 대원군으로부터 옥관자(玉貫子)를
하사 받았다. 안성 지방의 민요에도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결에 잘도 떠나간다.”
라고 전해질 정도로 바우덕이의 기예는 출중했다.
50여 명이나 되는 행중(단원)을 거느린 꼭두쇠(두목)
바우덕이는 남자만의 세계인 남사당패에 하나뿐인
여자였으나 그는 가히 뭇 사내들을 휘어잡을 만한
치마 두른 남자였다고 전한다. 쇳소리가 나는
독특한 음성은 떠돌이패일 망정 오금을 못썼단다.
그러나 바우덕이의 출생지, 또는 어버이의 이름,
그의 정확한 생몰일(生沒日)마저 알 수가 없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다만 다섯 살인가 됐을
때, 무슨 병인지에 걸려 앓아 누운 홀아비
머슴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남사당패를 따라가라고
했다.
그 후 계집애 바우덕이는 사내들 틈에 끼여 ‘선소리’를
익혔고 ‘줄타기’, ‘새미(舞童)’를 배워 일곱살
되던 해부터는 당당히 제 구실을 할 수가 있었다. 8도를
누비며 마을로 떠돌던 안성패 남사당은 바우덕이로
해서 그 인기가 대단했다. 안성패의 윤치덕이 죽자
새 꼭두쇠를 정하는데 이론이 분분했다. 이때
남사당패 전통에 유례가 없는 여자 꼭두쇠가
탄생하게 된다. 그것은 바우덕이의 인기를
이용하여 그를 앞장 세움으로써 득을 볼 수 있다는
노련한 뜬쇠들의 뜻이었다. 여하튼 꼭두쇠가 된
바우덕이는 이름만의 꼭두쇠가 아니었다. 사내
꼭두쇠가 이끌 때보다 잠자리도 편안하게
얻어냈으며 놀자리(연회장소)를 곰뱅이 트는데(허가를
얻는다는 남사당의 은어)도 남다른 수완을
발휘했다.
이러한 바우덕이는 당연히 뭇 사내들의 사모의
대상이 되었다. 더구나 남자들만의 집단인
남사당패인지라 여자로서의 인기가 대단했다.
그렇게 눈이 부신 바우덕이를 마음 속 깊이 사랑한
남자가 있었다. 같은 패거리에서 서른살이나
손위이며 뜬쇠(기예에 가장 뛰어난 사람을 말하는
남사당의 은어)인 이경화가 바로 그이다. 다른 젊고
재능이 뛰어난 남자들 틈에서 드러내고 바우덕이를
사랑할 수 없었다.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녀의 휘하에만 있다면 그것이 마냥 행복이었다.
개울가에 무덤을 쓴 까닭은
바우덕이에게
늘 젊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스무 살
되던 해, 그녀는 병을 얻었고 꼭두쇠인 그녀가 병을
얻었다는 것은 곧 행중(무리)을 떠나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한때는 그녀의 미소라도 얻기 위해 온갖
아양을 떨던 뭇 남성들이 그녀의 곁을 하나, 둘
떠났다. 마침내 바우덕이는 행중을 떠나 병든 몸을
끌고 청룡사 밑의 불당골을 찾아 정착했다.
그러한 그녀를 지켜준 사람이 바로 이경화였다.
모든 사람들에게서 버림을 받고 병들고 외로운
그녀 곁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병수발을 하고
동냥을 하여 끼니를 잇게한 것은 그의 마음에 있는
진실한 사랑이었다. 하루에도 몇번씩 선지피를
쏟으며 서서히 죽어가는 바우덕이, 떠가는
흰구름을 보며 어디론가 가고 있을 패거리를
그리며 지내는 나날을 이경화는 모두 지켜보았다.
스물 셋의 나이로 바우덕이가 죽자 이경화는
생전의 기구했던 팔자를 씻어버리라며 그녀의
무덤을 일부러 불당골 개울가에 묻었다.
바우덕이가 죽은 후 남사당패는 놀자리가 없어지며
하나 둘 흩어지니 청룡리는 쓸쓸해지고 그녀의
무덤도 돌보는 사람이 없었다. 3년 뒤, 가슴에 묻은
사랑을 찾아 다시 온 이경화는 무덤 앞 개울가에서
얼굴을 씻고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바우덕이는
아니 보이고
이경화는
바우덕이 바우덕이
바우덕이 찾아
불당골 들어 왔더니
바우덕이는 아니보이고
개울물만 얼음장 밑으로 졸졸졸
흐르더이다
스무 해 갓 넘긴 꼭두쇠 바우덕이
먼 발치에서만 그리다
병들어 비로소
비로소 내 사랑
어허둥둥 병수발 즐거워라
천하의 바우덕이
바우덕이 찌렁찌렁 쇳소리도 삭아져
그래도 내 사랑 바우덕이
마침내 내 님이시여
스물 세 해 겨울 끝내 못 넘겨
불당골 풍각쟁이 노래 그치니
생전에 기구했던 팔자 씻을지라
무덤일 망정 흐르는 물 가에 쓰니
이놈의 팔자
재 넘으니 따라오고
물 건너니 따라오누나
그예 잊지 못하고
흐르는 개울물에 얼굴을 씻고 씻고
그리움 씻어 내고 씻어 내도
이적지 떠나지 못해
나직한 한숨 되어
조용히
불당골에 남아 있더라
이경화는,
바우덕이 바우덕이
바우덕이 찾아
불당골 들어 왔더니
바우덕이는 아니보이고
개울물만 얼음장 밑으로 흐르더이다
그리움만 졸졸졸 낮게 흐르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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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봉업사지 당간지주와 탑과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잘못된 것같습니다. 탑은 제자리이고 당간지주가 옮겨진 것 같습니다. 제가 쓴 답사기를 참고하여 주십시요.
선생님 고맙습니다..잘 참고하겠습니다..선생님 글이 도움이 될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