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13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14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15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16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사도들은 솔로몬의 행각[성전에는 성전을 둘러싼 두 개의 큰 행각이 있는데 솔로몬 행각은 그 중에 하나이다. 이 행각은 성전 바깥 뜰 동편 끝에 있는 기다란 집채이다. 이곳에서는 강론이 자유롭게 행해졌다]에서 집회를 갖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곳은 유대인들이 군중들이 집회로 갖기 위해서 매일 모이는 장소로 넓어서 수천의 그리스도인들이 집회를 갖기에 아주 적합하였습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유대인과 그리스도인과의 외형적 구별이 되지는 않지만 이곳에 회집한 그리스도인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모여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다 같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주로 섬기며 주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이러한 집회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베풀어졌습니다. '표적과 기사'란 표적 따로 기사 따로가 아니라 한 이적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놀라운 이적이 많이 베풀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았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는 행동들이 있었다는 것을 묘사하는 것으로 앉은뱅이를 고친 것에서 보듯이 병고침의 이적이 많이 행해졌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5절에서는 사람들은 병자들을 침상이나 요에 눕힌 채 거리로 메고 나오기까지 하였다고 하였는데 그들은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의 그림자만이라도 덮이기를 바랐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베드로의 그림자만이라도 닿으면 낫겠다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표적과 기사가 많이 베풀어진 것을 다루고 있는 것은 왜일까요? 그러니까 이것이 우리에게 말해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한 말에서 유대인들은 사도들이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하다면 그것을 증명할 수 있게 표적[하늘의 표징]을 보이라고 요구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헬라인들은 자기들의 철학의 이해로 사도들이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22).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그래서 세월이 흘러도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육의 본능적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다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인데 여기에 믿음을 두지 않고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표적을 보는 것에서 확인하고 확신하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이 그렇게도 병 고치는 은사를 좇으며 신비한 능력을 입고자 하는 것은 병을 고침을 받는다든지 그런 것에서 보는 것과 같은 이런 저런 특별한 혜택(?)을 입음으로써 살고자 해서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지만 건강한 몸이 아니며 떡이 없이는 그 영원한 생명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물을 미워하면서까지 주님을 사랑하고자 하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별스런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기독교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늘상 보는 이야기입니다. 교회가 집회를 갖는다고 하면 예외 없이 신유집회, 은사집회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표적과 기사의 내용만 접하면 설교는 하나님의 능력이 병을 고침을 받고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힌 데서 고침을 받는 이적으로 또는 오병이어의 이적으로 말해집니다. 병과 귀신으로부터 고침을 받는 이적, 오병이어로 배부르는 경험을 하는 이적이 없이는 영원한 생명에 관심이 없습니다. 당연히 신자들의 신앙의 수준이 갖는 이적은 육적입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이적을 베푸신 것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자들에게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다가 육이 욕망하는 온갖 것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16절을 보면 예루살렘 부근에 있는 여러 동네에서도 병자들과 더러운 귀신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을 데리고 왔는데 그들도 모두 다 고침을 받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도들에 의해서 행해진 많은 이적이 있습니다만, 지금 이 이적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병과 귀신으로부터 고쳐 주고 떡을 먹고 배부르게 하는 일을 하신다는 것을 전혀 말해 주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이적을 행한 것에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능력은 그 이적과는 전혀 다른 것에서 행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을 고침을 받는다든지 하는 것에서 이적의 혜택이 다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행한 이적이 결코 병을 고치는 등의 이적을 일으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이적이 행해진 목적은 다른데 있었습니다. 13절은 사도들이 이적을 행하는 것을 본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상종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감히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가담할 수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백성이 칭송하더라'는 사도들이 이적을 행하는 것을 본 사람들이 사도들을 극진히 존경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그러하면서도 감히 그리스도인들과 한 무리가 되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현장에서 14절은 믿고 주께로 나오는 사람이 더욱더 많아져서 큰 무리를 이루었다고 하였습니다.
사도들이 행한 이적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예수님의 이름이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시는 것으로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이 이적이 주로 병 고치는 기사로 것으로 나타난 것은 사단의 종 되어 있는 죄의 비참함으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게 하려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행한 이적에서 이를 본 사람들은 지금 그 현장에 눈에 보이지 않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으로 임하신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적[표적]을 보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하나님의 능력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적을 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그리스도인들과 한 무리가 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표적과 기사에서 놀라워 할 수 밖에 없는 일은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을 거부하는 것에서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눈은 봄으로 복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보고도 보지 못한 눈으로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듣고도 듣지 못한 귀로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마음은 더욱더 강팎하며 완악합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그러한 남녀의 수가 큰 무리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사도들이 행한 이적을 보고 그와 똑같은 이적이 자신들에게도 있기를 사도들에게 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이들이 보고 들은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자신들과 함께 실제적으로 현존하는 것이었으며,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는 것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신 것처럼 지금 자신들에게 죄를 용서하시고 참 생명인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일을 하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사도들이 행한 이적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왜 지금 자신들이 보는 눈 앞에서 베풀어지고 있는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병자들을 낫게 한 그 하나님의 능력이 지금 자신들을 죄에서 구원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것이며 그래서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섬기게 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런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생명의 주가 되심을 믿는 믿음이 주어지는 것을 순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여기에 유대인적인 사고 방식은 깨어져나가고 포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헬라인적인 사고 방식도 깨어져나가고 포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적[기적]이 솔로몬의 행각에 모여 있던 많은 남녀에게 행해졌습니다. 그럼으로써 앉은뱅이를 고쳐 걷게 한 이적[기적]은 그들에게도 주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베푸신 이적[기적]은 예수님을 주로 믿고 그리스도인의 수에 가담하는 자가 되는 것으로 계속되어졌습니다. 이 기적의 은혜를 입은 우리입니다. 어찌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으며 그 분의 이름을 높여 찬송하지 않을 수 있을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