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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용어500(18)사승마유~사홍서원~산화
225. 사승마유 (蛇繩麻喩)
법상종에서 실체(實體)와 현상(現像)의 성질을 세 종(種)으로 나누어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ㆍ
‘의타기성(依他起性)’ㆍ‘원성실성(圓成實性)’으로 하고 이 3성의 관계를 표시하는 데 쓰는 비유이다.
밤중에 노끈을 밟고 뱀인 줄 생각하지만은 뱀의 실체는 한 가닥의 노끈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다만 엉겁결에 공포심에서 나타난 망집(妄執)에 불과하므로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요, 노끈은 삼(麻)에 이해 가(假)로 이루어진 모양이므로
의타기성(依他起性)이요, 삼은 노끈의 실체이므로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 한다.
☀ 사복
사복은 신라 스님으로 사동(蛇童)이라고도 한다.
서울의 만선복리에 한 과부가 있는데 남편 없이 아들을 낳았다. 이 아이는 12세가 되어도 말도 못하고
일어나지도 못하여 이름을 사복이라 지었다. 하루는 어머니가 죽으매 고선사(高仙寺)의 원효에게
사복이 말했다.
‘스님과 내가 옛날에 경(經)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죽었으니 함께 장사지내지 아니하려는가?’
원효가 허락하고 사복의 집에 가서 포살(布薩)하기를, ‘나지 말라, 죽는 것이 고통이니라, 죽지 말라,
나는 것이 고통이니라.’ 하자 사복이 원효에게 말했다.
‘말이 너무 길다.’ 하고 짧게 말했다.
‘나는 것도 죽는 것도 고통이니라.’
둘이서 상여를 메고 활리산(活里山) 동쪽 기슭에 이르러서 원효가 사복에게 말했다.
‘지혜 호랑이를 지혜 숲 속에 장사 지냄이 그 아니 마땅하랴!’
사복이 게송으로 답했다.
‘옛날 석가모니불(往昔釋迦牟尼佛)이 사라수 아래 열반하셨다. 지금도 그와 같은 이 있어
(于今亦有如彼者) 연화장세계에 들려하네(欲入蓮華藏界寬).’ 하고 띠풀을 뽑으니 그 속에 7보(寶)로
단장한 누각이 있었다.
이는 인간세계가 아니었다.
사복이 송장을 메고 그 속으로 들어가니 땅이 오므라졌다고 한다.
226. 사신 (四神)
사신(四神)사상의 사방(四方)은 동, 서, 남, 북을 말하며, 사계(四季)로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상징하기도 한다. 중국 고대에는 황도의 항성을 28개의 성좌로 나누었는데 사방에 각기 7수(宿)가 있다.
성수(星宿)는 불교와 도교 모두에게서 신앙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동물로서 그 대표를 삼았다.
7개로 이루어진 이 별의 집은 천궁(天宮)의 네 분원(分圓)마다 배치되어 있다.
청룡(靑龍) : 목(木)기운을 맡은 용의 형상이 되어 나타난다. 하늘의 28수 가운데 동방을 맡고 봄(春)을
상징한다.
백호(白虎) : 금(金) 기운을 맡은 호랑이 모양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하늘 의 28수 가운데 서방을 맡고
가을을 상징한다.
주작(朱雀) : 화(火) 기운을 맡고 붉은 봉황의 형상을 하고 있다. 하늘의 28수 가운데 남방을 맡고
여름을 상징한다.
현무(玄武) : 수(水) 기운을 맡고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뱀과 거북이 한데 얽혀 있는 형상으로 묘사된다.
하늘의 28수 가운데 북방을 맡고 겨울을 상징한다.
<탱화 272쪽 김의식저 운주사>
227. 사은 (四恩)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 친지의 은혜(恩惠)와 사람 사이의 정다움 속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그렇게 살도록 되어 있다. 그것을 은혜라고 한다. 그 은혜(恩惠)는 무한하고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불교가 전파되기 전부터 중국에서 흔히들 꼽던 네 가지의 은혜(恩惠)는 부모의 은혜ㆍ스승의 은혜ㆍ
임금의 은혜ㆍ시주(施主)의 은혜 등이었다.
불교에서의 네 가지 은혜란 것은 부모의 은혜ㆍ중생의 은혜ㆍ임금의 은혜ㆍ삼보의 은혜 등이다.
앞의 세 가지는 세간의 것 뒤의 한 가지는 출세간의 것이다.
중국에서 엮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이란 것이 있다. 부모의 은혜란 매우
중한 것이니 그것에 보답하려면 각종 불사 공양(佛事供養)에 힘쓰라고 이야기되어 있다.
은혜(恩惠)란 남의 것이 나에게 미치는 것으로 은덕이라고도 한다.
사람은 그 은혜(恩惠)를 깊이 알아야 하고 또 어떻게든 그것을 갚으려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런 것을 지은(知恩) 보은(報恩) 또는 보덕(報德)이라 한다.
228. 사의법 (四依法) ☀불교에서 나온 말
부처님께서 불자들이 의지해야 할 네 가지 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1)의법불의인(依法不依人):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
2)의지불의식(依智不依識): 지혜에 의지하고 분별식에 의지하지 말라.
3)의의불의어(依意不依語):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말라.
4)의요의불의불요의(依了意不依不了意): 요의법문에 의지하고 불요의 법문에 의지하지 말라.
229. 사의지, 사위의 (四依止,四威儀) ☀불교에서 나온 말
☀ 사의지(四依止)는 출가 수행자가 의지해야 할 기본적인 네 가지 생활 양식을 말한다.
첫째: 걸식(乞食)이다.
둘째: 분소의(糞掃衣)이다.
셋째: 수하좌(樹下座)이다.
넷째: 부란약(腐爛藥)으로 생활하는 것이다.
☀ 사위의 (四威儀)
일상의 기거동작(起居動作)인 행(行)ㆍ주(住)ㆍ좌(坐)ㆍ와(臥) 여기에 지 켜야 할 제약을
계율로 정하고 있다.
행법(行法)은 똑바로 앞에 서지 말고, 곧 바로 뒤에 서지 말라는 등,
좌법(坐法)은 좌구(坐具)를 깔고 결가부좌나 반가부좌하는 등인데 피로하여 다리를 뻗을 때에도
한 다리만 뻗어야 하고, 눕는 법은 와구(臥具)를 깔고 바른 손을 베개로 하여 우협(右脇)을 바닥에
대고누어야 하며 두 발을 겹친다는 등의 규정이 있다.
230. 사자후 (獅子吼)
사자(獅子)는 부처님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동물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비유할 때 사자후
(獅子吼)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사자의 용맹스러운 소리에 모든 미물이 몸을 낮추는 것처럼
부처님 설법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뜻이다. 즉 진리나 정의를 당당하게 설파하기 위해 열변을 토하는
것을 사자후라고 한다.
이 같은 ‘외침’을 사자후(獅子吼)에 비유하는 예가 많다. 정치인들이나 사회 활동가부터 웅변하는 이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나타낼 경우 사자후(獅子吼)라고 표현한다. 중생을 위한 가르침이
사자후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대중(大衆)보다는 특정 집단이나 이기적인 주장은 사자후가 아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 설법의 위엄은 마치 사자가 부르짓는 것과 같으며 그 해설은 우레가 울려 퍼지는 것처럼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유마경>
231. 사찰의 기원 (寺刹,紀元)
절(사찰)은 부처님을 모시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성스러운 곳으로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가 두루 갖추어져 있는 곳이다. 절은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배우고 업장을 참회해서 번뇌가 없는 즐거움의 세계를 증득하여 생사를 초월하여 성불(成佛)하는 곳이다. 따라서 불자들이 지혜(智慧)와 희망과 용기를 얻는 근원지이고 또한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함께 모으는 장소이기도 하다.
절을 가리키는 말에는 도량(道場)ㆍ가람(伽藍)ㆍ총림(叢林)ㆍ산림(山林)ㆍ사찰(寺刹)ㆍ사원(寺院)ㆍ
사(寺)ㆍ암(庵)ㆍ정사(精舍)ㆍ원(院)ㆍ포교당(布敎堂)ㆍ포교원(布敎院)ㆍ선원(禪院)ㆍ아란야(阿蘭若) 등이 있다.
1) 절의 어원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절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몇 가지 설이 있다.
첫째, 아도화상(墨胡子)이 신라 땅에 들어와 지금의 경북 선산군(구미시에 통합),일선군(一善郡)
모례(毛禮)의 집 (문경으로 가는 국도변에 지금도 모례가 정(井)이라는 표지) 에 숨어서 몰래 포교하였다. 모례는 본래 우리말인 “털례” 비롯되어 모례→털례→철례→절례→절로 음운 변화되었다는 설이 있다.
둘째, 팔리어 테라(Thea)에서 왔다는 설이다.
셋째, 절을 많이 하는 곳이라는 뜻에서 생긴 설이다.
2) 절의 다른 이름들
절을 가르키는 말들의 뜻은 다름과 같다.
첫째, 사(寺)는 중국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중국에서 원래 사신을 대접하는 곳이 공사(公司)였다.
이것이 사(寺)라는 의미로 쓰여진 것은 마등(摩騰), 법란(法蘭)이 처음으로 불교경전을 가지고 와서
홍려사(鴻臚寺)에서 묵었다고 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둘째, 도량(道場)은 불법의 도를 닦는 장소를 말한다.
셋째, 가람(伽藍)은 승려들이 모여 수행하는 곳으로 승가람마(僧枷藍摩, sangrama)의 약자다.
넷째, 정사(精舍,비하라vihara)는 정진하시며 스님들이 계시는 집이란 뜻 이다.
다섯째, 선원(禪院)은 참선하는 곳이란 뜻이다.
여섯째, 아란야(aranya,林主)는 수행하기 좋은 한적한 숲속 수도처란 말 이다.
232. 사찰의 성립과 전각불화
사찰이 어원은 산스크리트어 Samgha-rama이다. 이를 중국인들이 소리나는 대로 옮겨 승가람마
(僧枷藍摩), 혹은 줄여서 가람(伽藍)이라고 하였다. 상가(Samgha)는 무리, 모임의 뜻이고,
아라마(arama)는 정원 또는 담장을 두른 집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중원(衆園), 승단(僧團),
승원(僧院)이라 한다. 수행자들이 모여 수행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가장 오래된 사찰은 마가다국의 빈비사라 왕이 붓다에게 바친 죽림정사 였으며, 붓다 당시 최대의 사찰은 코샬라국의 수닷타가 지어 바친 기원정사(祇園精舍)였다.
기록에 의하면, A.D.1세기경 인도의 승려 가섭마등과 축법란 등이 불경(佛經)과 불상(佛像)을 흰말에
싣고 오자 후한의 명제는 그들을 홍려사(鴻臚寺)에 머물게 하였고, 후에 낙양에 백마사(白馬寺)를 지어
머무르게 하였다고 한다. 당시까지 중국에서 ‘사(寺)’는 외국사절을 접대하는 공공기관이었는데,
이때부터 스님들이 머무는 곳을 사(寺)라 칭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정사(精舍)를 사찰(寺刹),
사원(寺院)이라 한다.
고구려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것은 372년(소수림왕2)이다. 전진 왕 부견이 승려 순도(順道)를 시켜
불상과 불경을 전하였으며, 374년에는 승려 아도(阿道)가 왔는데, 왕은 초문사(肖門寺)를 세워 순도를,
그리고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워 아도를 머물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한반도 최고(最古)의
사찰로 전해진다.
사찰의 가장 중요한 건축물은 불전(佛典)이다. 그런데 불교의 역사적 전개와 더불어 여러 종파가 생겨나고 그들이 의거하는 경전, 교리 등에 차이를 보이게 됨에 따라, 예배의 대상인 본존불(本尊佛)이 달라진다.
예컨대 화엄종의 사찰에서는 비로자나불을, 정토종은 아미타불, 천태종은 석가모니불을 봉안한다.
흔히 한국 사찰의 구성을 칠당가람(七堂伽藍)이라고 하는데, 이는 전각(殿閣)ㆍ강당(講堂)ㆍ승당(僧堂)ㆍ주고(廚庫)ㆍ욕실(浴室)ㆍ동사(東司)ㆍ산문(山門)의 일곱 가지를 말한다.
전각(殿閣)은 불ㆍ보살 및 신중 등을 봉안하는 사찰의 중심 건물로서 대웅전에는 불교의 교주인
석가모니 부처님과 좌우 협시로 문수와 보현보살을 모셔놓고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 사찰의 중심에
위치한 가장 큰 법당을 대웅전으로 조성하고 있다.
항마촉지인의 수인(手印)에 인도의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는 장면을 담은 영산회상도를
조성하는데, 수인의 경우 역할이나 성격에 따라 달리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대웅보전(大雄寶殿)에는 현재의 석가, 과거의 연등, 미래의 미륵 등
삼세여래(三世如來) 불화를 조성한다. 또 삼계(三界)여래 불화를 조성하기도 하는데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왼쪽에 동방약사불을, 오른쪽에 서방아미타불을 조성한다.
팔상전(八相殿)에는 석가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가 봉안되는데㉠도솔래의상 ㉡비람강생상
㉢사문유관상 ㉣유성출가상 ㉤설산수도상 ㉥수하항마상 ㉦녹원전법상 ㉧쌍림열반상으로 조성한다.
대적광전(大寂光殿)은 화엄전(華嚴殿), 비로전(毘盧殿), 대광명전(大光明殿) 등으로 불리며 진리
그 자체로서 우주의 본체인 법신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하고 있다. 삼신불 탱화의 경우 법신(法神)
비로자나불, 보신(報神) 노사나불, 화신(化神) 석가모니불을 함께 조성하기도 하고 각기 세 폭으로
나누어 따로 조성하기도 한다.
극락보전(極樂寶殿)에는 서방극락정토의 교주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주존으로 하여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혹은 지장보살)을 좌우 보처로 조성한다. 중생들의 무량수명과 안락을 보장하는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하는 삼존의 회상도 형식과 16간경변상도, 망자를 극락으로 안도하는 내영도
형식으로 조성된다.
약사전(藥師殿)동방약사유리광세계의 주불로서 질병 치료와 수명 연장 등을 통해 중생을 제도하는
약사여래(藥師如來)를 주존으로, 좌우 보처를 일광보살과 월광보살로 하고 약사여래 후불탱화를
조성한다.
응진전(應眞殿) 혹은 나한전(羅漢殿)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번뇌를 멸하고 세간에
길이 머물면서 널리 교법을 수호하고자 서원한 제자들로서 16나한상과 500나한상을 많이 조성한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과거불인 정광여래의 화신인 제화갈라보살과 미래불인 미륵보살을 배치하는데, 탱화로 조성하는 경우는 드물다. 또는 33조사를 그리기도 한다.
명부전(冥府殿) 혹은 지장전(地藏殿)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 미륵보처님이 출현하실 때까지
무불(無佛)시대의 교주로서, 모든 지옥중생을 구제하기 전까지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한
대원본존지장보살을 모신다. 또한 지옥의 시왕(十王)이 망자(亡者)를 심판하는 광경이 묘사된 지옥도
(地獄圖)와 사바세계 중생들의 현실을 묘사한 감로탱화(甘露幀畵) 등이 포함된다.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의 지장삼존에 시왕이 시립하는 형식으로 조성된다.
조사전(祖師殿)에는 사원 창건(寺院創建)의 공로자나 역대 커다란 업적을 남긴 조사스님의 진영이나
위패를 보존하고 있다.
삼성각(三聖閣)에는 칠성탱화를 중심으로 산신과 독성탱화를 좌우로 두고 있는데. 칠성탱화에서는
도교에서 불교로 유입되어 인간의 길흉화복을 담당하는 금륜불정나무치성광여래를 주불로 하고
좌우 협시에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두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전통신앙인 산신탱화에는 호랑이가 의인화(擬人化)된 산신(山神)을 그리고,
독성탱화에는 말세에 중생들이 의지할 복전(福田)이라 일컫는 분으로 희고 긴 눈썹이 특징인
나반존자를 조성하고 있다.
종각(鐘閣)에는 불교의 4물(四物)인 범종, 법고, 운판, 목어를 걸어둔다.
일주문(一株門)은 사찰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건물로, 2개의 기둥을 나란히 세워 옆에서 보면 하나의 기둥으로 보이는 까닭에 이렇게 부른다. 산문이라고도 한다.
이 문은 승(僧)과 속(俗)의 경계와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구분, 생사윤회의 중생계와 열반적정의 불국토를 구분 짓는 의미가 있다.
금강문(金剛門)에는 부처의 가르침에 귀의하여 가람과 불법을 수호하기로 서원한 고대 인도신화의
두 신으로 좌측에 밀적금강, 우측에 나라연금강을 모셨다.
천왕문(天王門)에는 욕계(欲界) 육천(六天)의 4방(四方)을 다스리며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중(外護衆)으로서 동방 지국천왕, 남방 증장천왕, 서방 광목천왕, 북방 다문천왕이 배치된다.
여기서 천(天)은 ‘신들이 거주하는 곳’의 의미이다. <김의식 저, 운주사, 탱화 75쪽>
233. 사향사과 (四向四果)
소승불교의 수행계위는 사향사과로 집약된다.
‘향(向)’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고 ‘과(果)는 도착한 것이다. 아라한이 되는 데는 수다원의 길을 걸어
(須陀洹向) 수다원과(須陀洹果)을 얻고, 사다함의 길을 걸어(舍多含向) 사다함과(舍多含果)를 얻고,
아나함(阿那含向)의 길을 걸어 아나함과(阿那含果)를 얻고, 아라한의 길을 걸어(阿羅漢向)
아라한과(阿羅漢果)을 얻는다. 이것을 사향사과라 한다.
수다원(須陀洹)은 눈, 귀, 코, 혀, 몸, 뜻이 빛,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을 상대하여 분별시비가 없어진
상태다. 그러나 아직도 욕계(欲界)의 번뇌가 남아 한 번쯤 더 태어나 끊어야 할 형편이면 한 번쯤 와야
하므로 이것을 일왕래(一往來) 즉 사다함(舍多含)이라 한다.
한번 와서 욕계의 모든 번뇌를 다 끊어 다시 올 필요가 없게 되면 다음은 색계에서만 머물러 색계
무색계의번뇌를 끊으므로 다시 이 세계에는 오지 않아도 된다 하여 아나함(阿那含),
즉 무왕래(無往來)가 된다.
이렇게 하여 욕계, 색계, 무색계의 모든 번뇌를 끊고 생사를 해탈하면 이것을 무학성자(無學聖者)
즉 아라한(阿羅漢)이라 한다.
아라한은 일체의 도를 확실히 보고 또 그것을 닦아 확인함으로써 죽고 사는 것을 자유자재로한
인격자가 되는 것이다.
234. 사홍서원 (四弘誓願)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소원이 있고 소원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소원의 내용은 대부분 개인적인 바램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바램은 타인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이 같은 소망(所望)은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한 누구나 갖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이 남에게 손해를 끼
치는 것이 아닌 한 비난(非難)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쳤을 때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게 되고 사회를 어둡게 만든다. 불자들은 예로부터 네 가지 큰 서원을 세웠는데 이를 사홍서원
(四弘誓願)이라한다.
1)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중생이 가이 없더라도 반드시 다 건지겠습니다. 여기서 중생(衆生)이란 생명 있는 모든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불교의 구제 대상은 인간만이 아니고 일체 중생이다. 그래서 불교를 자비의 종교라
하는 것이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모두 다 고통 속에 헤매고 있으므로 이들을 다 내가 구제하겠다는 것이
첫 번째의 서원인 중생무변서원도이다.
2)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번뇌가 다함이 없더라도 반드시 다 끊겠습니다. 중생이 부처가 되지 못한 것은 번뇌(煩惱,迷惑) 때문이다. 이 번뇌만 여의면 바로 부처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번뇌를 다 끊겠다는 것이 두 번째의 서원인
번뇌무진서원단이다.
3)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법문이 한량이 없더라도 반드시 다 배우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의 근기(根氣,水準)에 따라서
법을 설하셨으므로(對機說法) 법문이 한량없이 많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것을 경전 또는
팔만대장경이라 하는데 그 많은 가르침을 다 배우겠다는 것이 법문무량서원학이다.
4)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불도가 위 없더라도 반드시 다 이루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성현의 가르침이 있다.
그러나 부처님보다 더 심오하고 높은 진리는 없다. 그것을 이루는 것이 불도(佛道:깨달음)이다.
그 불도를 반드시 이루겠다는 것이 마지막의 서원인 불도무상서원성이다.
235. 삭발 (削髮)
스님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는데 이를 삭발염의(削髮染衣)라 하고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는 것을 삭발위승(削髮爲僧)이라한다.
부처님은 삭발(削髮)에 대해 “이제 머리와 수염을 깎아서 일체의 번뇌와 습인(習因)을 남김없이
없애기를 발원하노라”고 했다. 또한 “머리를 깎는 이유는 교만(驕慢)을 제거(除去)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믿기 위함이다”라고 했다.
흔히 절에서는 머리카락을 무명초(無明草)라 한다. 수행을 방해하는 근원이 아만(我慢)과 교만(驕慢)
그리고 온갖 유혹의 감정은 무명(無明)에서 기인한다. 삭발(削髮)을 함에 의해서 외형적으로나마 우선
원초적(原初的)인 무명을 없애는 것이다. 이런 정신에 입각해서 출가를 하면 삭발을 하고 그 뒤에는
보름마다 한 번씩 삭발을 통례적으로 한다.
☀ 체발 (剃髮)
체발은 체제수발(剃除鬚髮)의 준말로 삭발(削髮)ㆍ낙발(落髮)ㆍ체두(剃頭)라고도 한다. 부처님 제자는
세상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수염과 머리카락을 깎아 버리고 세속을 떠났다는 모습을 나타내기 위하여, 또 외도(外道)와 구별하기 위하여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는다.
<과거현재인과경권2,過去現在因果經卷二> 이때 태자가 곧 날카로운 칼로 스스로 머리와 수염을 깎고
발원하기를 “이제 수염과 머리를 깎으니 원컨대 일체중생과 더불어 모든 번뇌와 습관과 장애를 끊어
지이다” 하시니 석제환인은 머리카락을 가져가고, 천신들은 향과 꽃가루를 뿌리면서 찬탄하기를
“위대하시고 위대하시구나.” 하였다.(爾時太子 便以利劍 自剃鬚髮 卽發願言 今落鬚髮 願與一切 斷除煩惱及以習障 釋帝桓因 接髮而去 虛空諸天 燒香散花 異口同音讚言 善哉善哉) (大正藏 3卷 634쪽)
236. 산림기도 (山林祈禱) ☀불교에서 나온 말
산림(山林)은 숲이다. 숲은 온갖 새나 짐승들이 쉬는 곳이다. 우리들의 숲은 곧 부처님 도량이다.
결국 산림기도는 부처님 도량을 위한 기도이다. 숲이 울창하면 온갖 새나 짐승들이 평온하듯이,
절이 잘되면 그 절의 신도들이 편안하고 잘되는 것이다. 도량을 가꾸는 기도 성취는 곧 회향되어
자기 가정을 위한 기도 성취로 돌아다는 법이다.
237. 산신탱화 (山神幀畵)
산신(山神)은 원래 불교와는 관계없는 우리 민족 고유의 토착신(土着神)으로, 우리나라에는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산악숭배사상(山岳崇拜思想)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불교와 융합되면서 불법을 지키는 호법(護法) 신중(神衆)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불교가 전래된 이래 1600여 년이란 장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토속신앙(土俗信仰)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는데 그 자취를 사찰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칠성신앙(七星信仰)과 산신(山神) 등이다.
이러한 신앙은 하근기(下根氣)의 사람들을 위한 방편으로 이해된다.
산신(山神)과 호랑이가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 것은 호랑이는 우리나라 산악(山岳)짐승의 왕(王)이므로 산이 많고 산에 사는 사람이 많은 우리민족에게는 공포(恐怖)의 대상이었고 또한 한편으로는
외호신(外護神)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산신은 주로 탱화로 모셔지는데 산신탱화(山神幀畵)는 일반적으로 붉은 색에 가까운 노송의 뻗어 나온
가지의 우거진듯한 솔잎이 표현된 적송아래의 암반위에 흰 수염을 한 산신(山神)이 호랑이에 기대고
황색의 가사(袈裟)를 수하고 앉아있는 모습이다. 왼손에는 불로초(不老草)를 들고 오른손에는
학익선(鶴翼扇)을 들고 계신다. 뒤쪽으로 파초선(芭蕉扇)을 든 동자(童子)가 작게 묘사되어 있다.
산신의 모습은 고승의 모습에 염주나 단주를 들고 있는 불교적인 도상과 신선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도교적인 모습, 그리고 머리에 복건이나 유건을 쓴 유교적인 요소가 함께 나타나고 있다.
또한 산신(山神)은 시대와 종교에 따라서 그 성이 각각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는데 치마저고리를 입고
호랑이 위에 걸터앉아 있는 할머니(女山神)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인 도상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백발의 노인 모습으로 호랑이에게
몸을 기대고 있거나 등에 걸터앉아 있는데, 오른손에 파초선을 들고 왼손에는 지팡이나 불로초를 들고
있다. 동자와 동녀가 석류나 공양구를 들고 있으며, 호로병이나 파초잎 부채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배경에는 장수를 의미하는 노송과 애운(崖雲)이 등장한다.
불교적 산신탱화는 삭발한 스님이 손에 법화경(法華經) 등의 불경(佛經)을 들거나 단주(短珠)를 쥐고
있는 경우가 많고 가사를 변형시켜 입은 것 같은 모습으로도 많이 표현된다.
도교적 산신탱화는 백발의 수염에 긴 눈썹이 휘날리는 신선의 모습으로 묘사되며 손에는 하얀 깃털
부채(학익선,鶴翼扇)나 파초선(芭蕉扇), 불로초(不老草) 등을 들고 있다. 그리고 산신의 뒤쪽으로 신선이 살고 있다는 봉래산ㆍ영주산ㆍ방장산(蓬萊山, 瀛洲山, 方丈山)을 의미하는 삼산(三山)이 그려진다.
유교적 산신탱화는 머리에 복건(幞巾)이나 유건(儒巾), 정자관(程子冠)을 쓰고 지팡이를 들고 있는
모습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책거리나 대나무 장식물이 놓이고 차를 달이는 도구들이 빠지지 않고 묘사되어 있다.
또한 전통적으로 여자 산신이 관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지리산, 계룡산, 속리산 등의 사찰에는
할머니 모습을 한 여자 산신탱화나 소상(塑像)을 드물게나마 찾아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속리산 천황사, 지리산 실상사 약수암의 산신탱화와 계룡산 동학사의 산신상 등이다.
치마 저고리를 입은 인자한 모습으로 호랑이를 걸터타거나 기대고 있으며 손에는 반드시 불로초를 들고 있다.
238. 산통 (算筒)
‘다 된 일인데 산통 깬다.’는 말이 있다. 흔히 의도하던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때 사용하는 단어다.
국어사전에도 ‘점치는 데 쓰는 산가지를 넣는 통’이라면서 ‘다 된 일을 이루지 못하게 뒤틀다’ 또는
‘다 되어 가는 일이 뒤틀리다’는 부정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하지만 산통은 불교와 인연있는 용어로
산통 깬다는 본래 의미는 ‘격렬한 논쟁’을 나타낸다.
산통은 강원(講院)에서 사용했던 물품으로 산(算)가지를 통(筒)에 넣은 것이다. 강원에서 중강(仲講)과
발의(發議)를 정할 때 이용했다.
대중 가운데 소임자를 뽑고 대중들의 의견을 정리할 때 사용했던 용품이다.
생(生)과 사(死)를 놓고 치열하게 공부하는 스님들 사이에 논쟁(論爭)이 일어나면 격렬한 토론이
불붙는다. 결국 산통(算筒)을 집어던질 만큼 커다란 논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239. 산화 (散華,散花) ☀ 불교에서 나온 말
① 어떤 대상이나 목적을 위하여 목숨을 바침 ② (불교) 꽃을 뿌리며 부처님을 공양하는 일
③ (식물) 꽃은 피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꽃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산화(散華)는 조국을 위하여 순국(殉國)한 분을 칭송할 때의 첫 번째 뜻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두 번째의 뜻이 일반화(一般化)하면서 은유적으로 의미가 확대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원래는 부처님을 찬양하고 공경하는 뜻에서 꽃을 뿌려 공양하는 행위, 곧 꽃을 뿌린다는 단순한 의미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것이 확대되어 첫 번째 뜻으로 발전했고, 또 특수화하여 세 번째 뜻도 생겼다.
“현충탑(顯忠塔)에 헌화(獻花) 분향(焚香)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산화(散花)한 이들의 넋을 기렸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진 영령들의 정신을 기리고자 할 때 사용하는 단어가 산화(散花)이다.
산화(散花)는 불교에서 치르는 의식으로 부처님 앞에 꽃을 뿌려 공양하는 것이다. 여러 경전에 산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현장스님이 지은 <대당서역기>에 다음 구절이 등장한다.
“부처님이 열반한 날이면 수십만 명이 보리수아래 모여 꽃과 향을 뿌리고 등불을 밝히면서 음악을
연주하고 공양한다.” 국어사전에는 불교의식(佛敎儀式)이란 설명과 함께
“꽃다운 목숨을 전장(戰場)등에서 잃는 것”이라 풀이한다.
불교는 모든 존재를 부처님으로 보고 있다. 다른 이들을 위해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호국영령(護國英靈)들의 모습을 산화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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