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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원. |
귀밑머리 풀어주고 칠보단장 못했어도
금삭같은 굳은절개 비바람에 꺾일손가
한양낭군 일편단심 춘향아씨 사랑은~
에루화 둥둥둥 참사랑 이로다
삼월삼진 제비편에 낭군소식 여삼춘데
살을 에는 설한풍은 옥중설움 애달어라
화촉동방 첫날밤에 만리장성 쌓았는데
일편단심 춘향절개 비바람에 꺾일손가
어사화에 삼현육각 한양낭군 돌아오니
에루화 둥둥둥 참사랑 이로다
제목 : 성춘향
노래 : 하춘화
작자·연대 미상. 현재 국문본·한문본 등 70 여 종
남원 기생 성춘향과 사또 아들 이몽룡의 사랑 이야기
이 작품은 조선 후기 영조·정조 시대에 생성되어
개화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승되는 이야기.
이 작품은 소설 뿐만 아니라 판소리·희곡·
시나리오·오페라 등의 다양한 형태로 개작.
이에 따라 제목도 〈춘향전〉·〈춘향가〉·
〈열녀춘향수절가〉·〈광한루기 廣寒樓記〉·
〈광한루악부 廣寒樓樂府〉·〈남원고사〉·
〈옥중화 獄中花〉·〈옥중가인 獄中佳人〉
〈춘향전〉은 설화를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진 소설.
작품의 근원설화는 〈박색터설화〉·〈암행어사설화〉
〈박색터설화〉는 일명 〈신원설화 伸寃說話〉
남원지방에 추하게 생긴 박색 기생이 있었는데
너무나 못생겨 아무도 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빨래터에서 다리 건너는 사또 아들을 본 박색 기생.
첫눈에 홀로 사모하게 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것이 병이 되어 그녀는 홀로 한을 품고 죽게 된다.
그후 남원에 가뭄이 들어 3년이나 비가 오지 않았다.
사또가 그 사정을 알고 박색 기생의 혼을 달래는 굿
비가 왔다는데, 그 내용은 〈춘향전〉의 전반부와 일치.
<암행어사설화〉는 양반 자제와 기생 사이의 연애담
노진·성이창·박문수 등 실존 인물 등과 관련된 설화.
양반 자제가 시골 어린 기생을 사귀다가 헤어지게 된다.
기생은 양반 자제와 사귄 이후 절개를 지킨다.
그러다가 암행어사가 된 양반 자제를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산다는데 〈춘향전〉 줄거리와 일치한다.
〈춘향전〉양반사회 어투와 서민사회 어투가 혼재.
여인의 정절을 고취하고, 부정한 관리에 대한 저항
후대의 개화기 작품은 남녀간 사랑에 초점을 맞춘다.
춘향의 정절과 저항은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을 위한 방편
이 작품은 일관성의 결여, 논리의 상실 등 몇 가지 결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서민문학의 걸작으로 평가.
첫째, 서민들에게 친근한 소재를 선택하고 있고,
둘째, 서민 예술양식 설화와 판소리를 통해 전파
셋째, 서민의 꿈과 정서를 절실하게 표출한 때문.
이 작품은 예나 지금이나 서민문학의 대표적 작품
여러 형태로 개작되면서 작품의 생명을 유지해왔다.
........................줄거리.....................................
조선 숙종 초 전라도 남원에 월매라는 퇴기가 있었다.
월매와 성참판 사이에서 낳아 기른 외동 딸이 성춘향.
천하일색 춘향은 성장하며 시와 서예에도 능통하였다.
어느 봄날 남원부사 아들 이몽룡
광한루에 올라 시를 읊고 있었다.
이때 춘향은 향단이를 데리고
광한루에서 그네 뛰며 놀았다.
우연히 춘향을 보고는 한눈에 반한 이도령
방자를 시켜 춘향을 불러오게 하여 첫 상봉
헤어지며 밤에 찾아가겠노라고 언약한 이도령.
그날 밤 월담하여 춘향집에서 백년가약을 맺고
이도령은 밤마다 춘향을 찾아가 사랑을 속삭인다.
그런데 이부사가 내직으로 전출하게 되어
이도령은 부득불 상경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
이도령은 춘향에게 후일을 약속하고 서울로 떠난다.
춘향은 이도령으로부터 기쁜 소식이 오기를 학수고대.
그무렵 남원에 새로 부임한 신관사또 변학도
정사는 돌보지 않고 기생 점고부터 시작한다.
그는 춘향을 발견하고 수청을 강요하지만,
춘향에게 거절당하자 노해 태형을 가하지만
춘향은 죽기를 결심하고 몸을 허락하지 않는다.
옥에 갇힌 춘향은 임을 그리워하다가
잠이 들면 꿈속에서 이도령을 만난다.
장님에게 물어보니 서방님 돌아오고
부귀영화를 누릴 꿈이라고 일러준다.
변학도는 자신의 생일잔치에 춘향을 불러낸다.
마지막으로 춘향의 의중을 묻는 자리이기도 하다.
만약 춘향이 수청을 거절한다면 처형하겠다 한다.(중략)
...............................................................................
'당시 이도령 나이 17세, 성춘향 나이 16세.'
조선시대 유교관 시대적 배경에서는 있기 어려운 일.
자유연애, 혼전 합방, 신분 격차를 초월한 양가의 혼인.
춘향전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라고 믿기는 어렵다.
............
춘향무굿.
............
원시종교는 무속에 기원을 두듯 '춘향가'는 무굿에서 유래.
이조 숙종 초, 남원 퇴기의 딸 성춘향은 인물이 몹시 박색.
어쩌다가 당시 남원부사 아들 이몽룡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2년 임기를 마친 이부사는 한양으로 올라가니,
이몽룡과 성춘향은 후일을 기약하고 이별하였다.
그후 이부사가 관직에서 물러나 집안은 점차 몰락.
이런 이몽룡 사정을 모르는 춘향은 병이 깊어가고,
소식 없는 이몽룡의 무정을 원망하면서 죽고 말았다.
춘향이가 죽은 이듬해부터 남원지방에 흉년과 재앙
군민들이 굶어죽어가자 원귀가 된 춘향 소치라 생각
흉흉한 민심을 걱정한 당시 이방이 지었던 '춘향전'
무당으로 하여금 <씻김굿>을 하게 한 춘향무굿.
그 '씻김굿' 다음해부터 재앙이 없어지고 풍년.
그후 춘향무굿은 남원은 물론 팔도에 퍼져 성행
당시 명창 하은담과 결성 최선달
판소리로 부르기 시작한 [춘향전]
이것이 우리나라 판소리의 첫출발.
고려 때 무당과 박수는 궁중출입 할만큼 성행
가무가 출중하면 궁중 무희를 전담할 정도였다.
이조 때 星宿廳에 나라무당을 소속시켰다는 기록
이조 말까지 나라당주로서 존재한 나라무당과 주무.
주무는 내무녀(內巫女)로 주읍의 성황당을 받들었다.
관부(官府)의 부군당(府君堂)을 모시는 관선무(官選巫)
남자는 장악청에 속하여 관아의 의식 때는 주악을 하고,
무사(巫事)에는 무악을 연주해 한때 군대에 조직을 편성.
각 관아와 민가 인근의 무당과 박수에겐 무세(巫稅) 징수.
왕실에 출입하는 무격의 힘은 참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연산군 11년(1505년) 9월 박나인은 원주기생 궁궐무녀 월매
음률이 곱고 희학(戱謔)을 잘해 왕이 각별하게 돌보고 사랑
월매는 오래 살지 못하고 죽자 왕은 몹시 슬퍼하며
여완(麗婉)이라 호를 지어주고, 후원에 차린 제사상
희빈과 기녀 흥청(興淸)과 함께 참석하여 슬퍼하였다.
장례를 치를 때 왕은 몸소 무당이 되어 노래와 춤
백악사에 올라 폐비 윤씨를 위로하고 의지하는 굿.
연산군은 무당 박수들과 음란한 제사를 올렸던 기록.
당시 왕실에서 성행한 무속신앙은 민중에게 절대적
인생 운명을 무의기원(巫儀祈願)에 의지할 정도였다.
따라서, 판소리 춘향전은 '춘향무굿'에서 유래되었다.
............... 여자 재혼을 금기로 여긴, 조선시대................
제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열녀는 두 사내를 섬기지 않는다."
<시경>의 '백주' 또는 이조시대의 법전 '경국대전'에도 언급.
<다시 시집 간 여자의 자손에게는 벼슬을 주지 말라.>는 기록.
'가물가물한 등잔불이 내 그림자 조문하듯.
외롭고 고독한 밤에는 새벽도 더디 오더이다.
처마 끝 빗방울 떨어질 때나 창가에 비친 달빛.
하얀 빛 흘리는 밤에 나뭇잎 하나 뜰에 흩날릴 때
외기러기가 먼 하늘에서 우는 밤, 멀리 닭 울음소리.
어린 자식 깊이 잠든 밤, 가물가물 졸음 오지 않는 밤.
'외로운 밤 깊은 고충을 누구에게 하소연할까?'
이처럼 과부에게도 절개를 강요했던 이조 국법의 영향.
죽은 남편 옷만 보고 혼례를 치룬 '함양 박씨부인 열부전'
함양 군수 윤광석이 한밤중 기이한 꿈을 꾸고 지은 <열부전>
그녀가 남편 상복과 혼례를 치룬 것은 장사를 지내야 했기 때문
장사를 지낸 뒤에도 자결을 참았던 것은 소상(小祥)이 있기 때문.
소상을 끝낸 뒤에도 죽음을 참았던 것은 대상(大祥)이 있기 때문.
3년 상을 마치고 지아비 죽은 날 같은 시각에 죽은 그녀.
그것이 이조시대에 바람직하게 여겼던 이상적인 열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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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퇴기 월매까지도 춘향 앞날을 위해 재혼하지 않은듯.
조선 여인네의 정절은 그 시대적 배경의 소산물로도 보인다.
그러나, 춘향전 밑바탕엔 보이지 않는 민초의 바램이 담긴 듯.
성춘향(成春香)은 1675년(조선 제19대 숙종) 음력 4월 8일,
남원의 퇴기(退妓) 월매와 성씨라는 양반 사이에서 태어났다.
춘향이 16세가 되던 단오에 이몽룡과 광한루에서의.. 첫 만남.
'성춘향과 이몽룡의 사랑이 뜨겁게 시작.'
이도령이 한양으로 영전해 가는 부친을 따라 떠난 후
춘향은 후임 사또 수청을 거절한 죄로 고초를 겪다가
암행어사가 된 이도령을 다시 만나 행복을 찾게 된다.
춘향전은 창극 소설 연극 영화 오페라로 많이 알려졌다.
이몽룡은 춘향을 정실부인으로 맞아 백년해로하는 내용.
춘향전은 설화를 소재로 시대적 배경을 가미한 작품인 듯.
춘향은 성참판의 딸이지만 퇴기 월매의 딸 신분이다.
춘향이 신분을 초월한 사랑은 서민의 입맛에 맞는다.
춘향이 겪는 고초를 통해 탐관오리 비리도 꼬집는다.
춘향의 정절은 이조의 고루한 유교사상과 어울린다.
기생의 딸이어도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유교 윤리관
탐관오리 응징하는 암행어사 제도의 정당성도 합리화.
춘향전은 이조의 병폐를 지적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그것을 바로 잡아달라는 백성들의 염원도 깃들어 있다.
남녀노소 누구나 거부감 없이 즐길 수 있는 줄거리 구성.
'불과, 16세와 17세에 사랑을 나눈 춘향과 몽룡.'
양반 도령이 야밤에 규수 집 담을 넘어 벌리는 혼전 정사.
옆방에서 숨죽이며 엿듣던 월매의 억장을 무너뜨린 첫날밤.
조선시대에 그 나이면 성혼하는 경우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이팔 청춘 춘정을 못이긴 남녀 합방이 흠이 아니던 시절.
그러나, 조선시대 고루한 유교 윤리관으로 보면 대담한 일.
이도령은 입신양명후 춘향과 굳게 백년가약하기로 맹세한다.
그후 목숨걸고 지조와 정절을 지킨 성춘향.
성춘향과의 첫날밤 굳은 약속을 지킨 이도령
두 사람은 백년해로하며 행복하게 살았다 한다.
춘향전은 모두 9 마당 판소리로도 오늘날까지 꾸준히 각광.
사랑은 기쁨 만큼 고통과 인내도 따르는 감정 임을 알려준다.
십장가.
춘향전 '십장가'엔 우리 민족의 맺힌 한이 잘 담겨 있다.
남원 사또 변학도가 춘향에게 수청을 강요하는 줄거리이다.
수청 거부하는 춘향의 지조와 절개가 심금을 울리는 십장가.
......................춘향전의 십장가. <판소리>......................
사또 분이 어찌 났던지 벌벌 떨며 기가 막혀 허푸허푸 하며
"여봐라, 그년에게 다짐이 왜 있으리. 묻도 말고 형틀에 올려매고
정치를 부수고 물고장을 올려라." (물고장 : 몸에 물 뿌려 곤장치기)
춘향을 형틀에 올려매고 쇄장이 거동 봐라.
형장이며 태장이며 곤장이며 한아름 담쏙 안아다가
형틀 아래 좌르륵 부딪치는 소리 춘향의 정신이 혼미한다.
집장 사령 거동 봐라.
이 놈도 잡고 능청능청 등심 좋고 빳빳하고 잘 부러지는 놈
골라 잡고 오른 어깨 벗어 메고 형장 집고 대상청령 기다릴 제
"분부 모셔라. 네 그년을 사정두고 허장하여서는
당장에 명을 바칠 것이니 각별히 매우 치라."
집장 사령 여쭈오되
"사또 분부 지엄한데 저만한 년을 무슨 사정 두오리까.
이년 다리를 까딱 말라. 만일 요동하다가는 뼈 부러지리라."
호통하고 들어서서 검장 소리 발 맞추어 서면서 가만히 하는 말이
"한두 개만 견디소. 어쩔 수가 없네.
요 다리는 요리 틀고 저 다리는 저리 트소."
"매우 치라"
"예잇, 때리오."
딱 붙이니 부러진 형장 개비는 푸르르 날이 공중에 빙빙 솟아
상대 대뜰 아래 떨어지고 춘향이는 아무쪼록 아픈 데를 참으려고
이를 복복 갈며 고개만 빙빙 두르면서
"애고 이게 웬일이어."
곤장(棍杖) 태장(笞杖) 치는 데는 사령(使令)이 서서
하나 둘 세건마는 형장(刑杖)부터는 법장(法杖)이라,
형리(刑吏)와 통인(通引)이 닭쌈하는 모양으로 마주 엎뎌서
하나 치면 하나 긋고, 둘 치면 둘 긋고, 무식하고 돈 없는 놈
술집벽에 술값 긋듯 그어 놓니 한일(一)자가 되었구나.
춘향이는 저절로 설움겨워 맞으면서 우는데,
"일편 단심(一片丹心) 굳은 마음 일부 종사(一夫從事) 뜻이오니,
일개 형벌 치옵신들 일 년이 다 못가서 일 각인들 변하리까?"
이 때 남원부(南原府) 한량(閑良)이며
남녀 노소 없이 구경할 제, 좌우의 한량들이,
"모질구나 모질구나. 우리 골 원(員)님들이 모질구나.
저런 형벌이 왜 있으며, 저런 매질이 왜 있을까?
집장 사령(執杖使令)놈 눈 익혀 두어라.
삼문(三門)밖 나오면 급살(急殺)을 주리라."
보고 듣는 사람이야 누가 아니 낙루(落淚)하랴.
둘째 낱 딱 부치니,
"이부절(二夫節)을 아옵는데, 불경 이부(不更二夫)
이내 마음이 매 맞고 죽어도 이 도령은 못 잊겠소."
셋째 낱을 딱 부치니,
"삼종지례(三從之禮) 지중한 법 삼강오륜(三綱五倫)알았으니,
삼치 형문(三治刑問) 정배(定配)를 갈지라도
삼청동(三淸洞)우리 낭군 이도령은 못 잊겠소."
넷째 낱을 딱 부치니,
"사대부 사또님은 四民公事 살피잖고 威力公事 힘을 쓰니,
사십팔방(四十八坊) 남원 백성 원망한을 모르시오.
사지를 가른대도 사생동거 우리 낭군 사생간에 못있겠소."
다섯 낱째 딱 부치니,
"五倫倫氣 그치잖고 부부유별 五行으로 맺은 연분
올올이 찢어 낸들 오매불망 우리 낭군 온전히 생각나네.
오동추야 밝은 달은 임 계신데 보련마는, 오늘이나 편지 올까
내일이나 기별올까. 무죄한 이내 몸이 오사할 일 없사오니,
오결 죄수(誤決罪囚) 마옵소서. 애고애고 내 신세야."
여섯 낱째 딱 부치니,
"육육(六六)은 삼십육(三十六)으로 낱낱이 고찰(考察)하여,
육만 번 죽인대도 육천 마디 어린 사랑 맺힌 마음 변할 수 전혀 업소."
일곱 낱을 딱 부치니,
"칠거지악 범하였소? 칠거지악 아니여든 칠개 영문 웬일이요.
칠척검(七尺劍) 드는 칼로 동동이 장글러서 이제 바삐 죽여 주오.
치라 하는 저 형방아. 칠 때 고찰 마소. 칠보 홍안(七寶紅顔) 나 죽겠네."
여덟 낱을 딱 부치니,
"팔자 좋은 춘향몸이 팔도 방백 수령 중에 제일 명관 만났구나.
팔도방백 수령님네 치민(治民)하려 내려왔지 악형하려 내려왔소?"
아홉 낱을 딱 부치니,
"구곡간장 굽이 썩어 이내 눈물 구년지수(九年之水) 되겠구나.
구고(九고-깊숙한 곳) 청산 장송 베어 정강선 무엇 타고 한양성중 급히 가서
구중궁궐 나랏님께 구구히 억울한 사정을 여쭈옵고 구정(九庭) 뜰에 물러 나와
삼청동을 찾아가서 굽이굽이 반겨 만나 우리 사랑 맺힌 마음을 마음껏 풀련마는."
열 낱을 딱 부치니,
"십생구사(十生九死)할지라도 팔십년 정한 뜻을 십만 번 죽인대도 가망 없고
무개내지. 십육세 어린 춘향 곤장맞아 원통 한 귀신 되니 가련하고 가련하오."
열 치고 구만 둘 줄 알았더니 열 다섯째 번 매를 치니,
"십오야 밝은 달은 떼구름에 묻혀 있고
서울 계신 우리 낭군 삼청동에 묻혔으니
달아 달아 임 보느냐? 임 계신 곳 나는 어이 못 보는고."
수물(스물)치고 끝날까 하였더니 스물 다섯 매를 치니,
"이십 오현 야탄월에 불승청원 저 기러기, 너 가는데 어디메냐.
가는 길에 한양성 찾아들어 삼청동 우리 님께 내 말 부디 전해다오.
나의 모습을 자세히 보고 부디부디 잊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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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 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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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춘향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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