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다섯식구다. 아빤 어디에 계신지 모르겠구, 엄만 전라도에, 여동생은 충청도에, 남동생은 강원도에, 그리고 난.. 경기도에 있다….. 난 이제 스물여섯이 되었다. 궁합도 안본다는 4살차이 애인도 있다. 청년실업이 한창인 이때 난 반듯한 직장도 가졌다. 3년 할부로 장만한, 3달후면 할부금도 끝나는 내 소형차도 있다. 하지만 난,, 내 나이때에 남들은 갖지못하는 또 한가지를 가졌다.. 평생 만지지 못할지도 모르는 몇억이나 되는 돈을 빚으로 갖고있다… 그빚중 10분의1, 아니 100분의1, 1000분의1이라도 내가 써본 돈이라면 이렇게 억울하진 않을텐데.. 나 너무 억울하다. 너무 억울하고 답답해서 벙어리라도 되어버릴것만 같다. 목구멍에선 단단한 무언가가 한참전부터 자리잡고있다. 이 빚이 생긴건 정말 순식간 이었다. 우리 아빤 정말이지 사업을 좋아하셨다. 내가 초등학교 막 입학했을때부터 아빤 조그만 사업을 시작하셨다. 그치만 아빠에게 사업이란 것은 정말 맞지 않았나보다. 슈퍼에서 오락실 카드사업, 잡화도소매, 학원, 심지어 결혼상담소까지 정말 골고루도 하셨다. 엄만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던 그 많은 사업들을 정말 잘도 뒷바라지 해주셨다. 아빤 사업의 종류가 하나씩 바뀔 때마다 전사업의 정리는 뒷전인 채 계속 종류만 늘려가셨다. 그러기를 20년.. 우리집에 말로만 듣던 부도라는 놈이 들이닥쳤다. 빚은 산더미처럼 불어나 손쓸 겨를도 없었고 아빤 잠적한 뒤였다. 아빠를 제외한 우리 네 식구는 무슨 범죄자처럼 전화만 오면 떨어야 했고 문소리만 들려도 움츠려야했다. 아빠의 마지막 사업은 슈퍼였다. 슈퍼의 창고를 한 삼분의 일쯤 헐어서 손바닥만한 방 두칸을 만들어 방 하나엔 나와 내 여동생과 남동생, 또 한칸은 부모님 방으로 정했다. 거실도, 주방도, 욕실과 화장실도 없이 달랑 방 두칸 뿐이었다. 두칸 합해봐야 다섯평 정도가 될까한 집이었다. 항상그랬다. 오락실을 할 때는 방한칸에 다섯식구가 살았었으니까.. 비라도 오면 천정 구석에선 비가샛고, 슈펴에 들어가는 전기탓에 방에 형광등이라도 켜면 정전이 되기 일쑤여서 대부분 방엔 불을 켜지 못했다. 대신 전기를 덜 먹는 작은 전구를 켜는게 고작이었다. 스무살이 되어버린 막내 남동생은 그 나이가 되도록 누나들과 작은 방에서 함께 자야 한다는게 불편했는지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엄만 사업할 돈 중에서 조금이라도 떼어 애들 편히살 방 한 칸 이라도 마련해 주자고 아빠에게 늘 말했지만 아빤 들은척도 안하셨다. 그저 조금만 참으면 편히 잘 살 수 있는데 왜 자꾸 보채냐는 식이셨다. 내 한참 사춘기 때부터 지금까지 난 그렇게 살았다. 샤워라도 해야 할때면 슈퍼 화장실에 들어가 호스를 연결해 씻어야 했고 머리를 감을땐 변기를 눈앞에 두고 감아야 했다. 처음엔 너무 구역질이 나고 참을 수가 없었다. 하루는 남자친구가 우리집에 와서는 슈퍼 화장실엘 갔는데 그곳에 있는 수건과 칫솔, 샴푸 등 세면도구들을 보고는 혹시 여기서 씻는거야? 라고 물었다. 당연히 난 아니라고 그냥 일보고 씻으려고 놔둔 것들이라고 얘기했었다. 얼마나 창피했었는지 모른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었던건 화장실 밖에서 연결해야 하는 호스 때문에 문을 조금 열어 놓아야 했기 때문에 슈퍼에 온 손님이 화장실이라도 들어오는 날이면 창피한 장면을 그대로 보여줄 수 밖에 없는거였다. 씻고 나올때면 손님들은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나오는 날 보며 다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곤했다. 주방도 따로 없었기 때문에 슈퍼에 딸린 작은 주방을 이용했는데 그곳은 슈퍼의 제일 구석진 곳이라 바퀴와 파리의 천국이었다. 여름엔 파리 때문에 파리끈끈이를 항상 길게 매달아 놓았었다. 덕분에 내 머리카락은 하루가 멀다하고 하늘로 치솟아야만 했다. 쥐도 참 많았다. 엄만 쥐를 잡아야 한다며 쥐 끈끈이도 여기저기 놓으셨는데 어디서 쥐가 죽었는지 항상 이상한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내 사춘기는 그랬다. 부모님은 항상 싸우셨고 동생들은 삐뚤어져만 갔다. 하루에 몇번을 짐을 쌌다가 풀곤했다. 아빠가 미웠고 그곳이 싫었다. 빠져 나오고만 싶었다. 잠자리에 들때면 방구석 어딘가에서 바퀴벌레들이 바스락 거리디가 어쩔땐 내 귓속으로 들어온적도 있었다. 그래서 난 항상 온몸을 이불로 둘둘 말고 자야만 했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잠을 설쳐야 했다. 새는 빗물을 받아야 했는데 떨어지는 빗물의 양이 많아서 수시로 갈아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그곳을 나올 수가 없었다. 난 장녀였고, 엄마가 믿고 의지하는 단 한사람 이었기 때문이다. 방 천정은 곰팡이가 까맣게 피어 내려않기 시작했고 천정 위에선 쥐들이 뛰어다녔다. 창문도 없었다. 방에 있으면 밖이 밤인지 낮인지, 눈이오는지 해가떴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그곳에 살 때 지금의 애인을 만났는데 한동네에 살아서 우리집까지 나를 만나기 위해 종종 걸어오곤 했는데 난 만나주지 못했다. 방을 나가려면 부모님방을 거쳐야했고, 슈퍼를 거쳐야 했다. 그러려면 부모님과 마주쳐야 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밤늦게 나가는걸 무척 싫어하셨기 때문에 그사람을 그냥 보내야 했다. 그사람은 그럼 얼굴만이라도 보고 간다며 창밖으로 얼굴좀 보여달라 했지만 우리방엔 창문이 없었기 때문에 창문이 없으니 미안하지만 그냥 가달라고했다. 그사람은 창문없는 집이 어디있냐며 내가 자기를 보고싶어하지 않는다고했다. 그래도 사실대로 얘기할 수는 없었다. 나 이렇게 산다고는 도저히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그사람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숨기고 싶었다. 그사람은 내가 피곤하다고 할때면 얼른 집에들어가 욕조에 뜨거운물 받아놓고 몸좀 담그면 나아진다며 그렇게 하라고 했다. 난 그러겠다고 했고, 그렇게 했다고 했다. 그렇게 지내던 그 때가 지금에와 생각해보면 차라리 행복했던 것 같다. 적어도 그땐 가족이 함께 있었으니까.. 아빠가 잠적하고 빚쟁이들이 수시로 슈퍼를 오갔다. 어떤 사람은 아빠를 고소한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슈퍼에 하루종인 진을 치고 아빨 기다리다 가곤했다. 엄만 그런일들을 매일 당하면서도 돈 때문에 슈퍼문은 매일 여셨다. 하루는 회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엄마가 내 차를 아빠 명의에서 내 애인 명의로 돌리자고 하셨다. 우린 그렇게 했고, 그러고 며칠뒤에 또 한사람의 빚쟁이가 찾아와서는 내 차를 가리키며 이젠 차까지 돌려놨냐며 엄마에게 손가락질을 해댔다. 그사람은 아마도 내차를 빼앗아갈 작정이었나보다. 그렇게 내차를 아빠명의에서 남자친구 명의로 돌려놓은 후 자동차세나 보험료 고지서 등이 남자친구 집으로 날아들었었나보다. 남자친구는 보험료와 세금, 심지어 여기저기 오가며 뗀 딱지들까지 자기가 냈었드랬다. 그사람은 그런얘기들은 내가 미안해 할까봐 한참이 지난뒤에야 얘기하곤 했었다. 그래서 지금 내 남자친구의 카드빚도 나 때문에 한 3백 정도 되는걸로 안다. 지난 연말엔 남자친구가 회사에 입사해 처음으로 받아본 연말 보너스를 자기 카드값 갚는데 쓰는대신 날위해 선뜻 내주는, 정말이지 나로서는 상상도 못했을 일도 저질렀다. 엄만 너무 고마워서 내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아무말도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시기만 했더란다. 집은 청주였는데 회사는 천안이어서 면허를 따고 작은 중고차를 살까 했는데 아빠가 책임지지도 못할 새차를 덜컥 계약을 하셨다. 아빤 능력보다는 남에게 보이는걸 더 따지시는 분이셨다. 나에게는 전문대를 다니면서 용돈을 틈틈이 모아 120만원쯤 모여둔 비상금 통장이 있었다. 그 돈은 여지껏 비행기한번 못타본 우리 부모님 제주도라도 보내드리기 위해 정말 열심히 모은 돈이었었다. 그렇지만 난 그 비상금을 털어 그차에 처음 들어가는 돈을 내야했고 3년 할부로 지금까지 매달 갚아가고있다. 자꾸 빚쟁이들이 찾아와 견디다못한 엄마는 슈퍼를 내놓으셨지만 대형마트들이 자꾸 들어서는 탓에 가게는 나가지 않았고, 처음 인수시 1억 2천에 샀던 그 슈퍼를 반값도 안되는 5천에 넘겨야만했다. 5천에 넘기기전에 7천에 산다는 사람이 있었지만 계약후 엄마가 슈퍼를 판후에 길거리에 나앉다 시피 할 우리 가족들을 생각해 쓰던 생필품 몇 개만 가져오시겠다며 슈퍼에 가신게 발각되어 계약이 파기되었고 두번째 5천에 넘기게 된거였다. 슈퍼를 넘기는 그날은 비가 참 많이도 왔다. 철이덜든 막내 남동생은 집에 안들어온지 꽤 되었기 때문에 짐은 엄마와 나, 여동생만이 날라야 했다. 갈곳이 없었기에 외할머니 댁으로 짐을 옮겨야 했다. 수건하나씩 머리에 두르고 남이 볼까 깜깜한 밤에 죄인처럼 그렇게 우린 도망치듯 이사를 해야만 했다. 떨어지는 빗속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난다. 첫 직장은 2년 7개월 정도 다녔는데 하루는 아빠가 회사까지 찾아오셔서는 신용카드를 빌려달라고 한번만 아빠를 도와달라시며 사정을 하셨다. 순간 아빠가 너무 안되 보였고 난 선뜻 내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그때 그일이 내 평생 정말 후회될 일이었다는걸 그땐 미처 몰랐다. 아빤 그카드 한도 천만원중 900만원을 쓰셨고 그 900만원은 18개월 할부로 끊으셨다. 한달에 이자까지 60만원쯤 되는 카드값을 갚다못해 난 직장인 대출을 받았다. 그래서 그 돈은 갚을 수 있었지만 대출금 천만원은 고스란히 남았다. 첫직장을 다니면서 알뜰히 모은돈을 만기도 되기전에 해약을 해서 불쌍한 엄말 드렸다. 내가 첫직장에서 처음으로 만든 내 적금통장을 난 또 그렇게 깨야만했다. 아빠의 계속되는 사업에 엄마가 들볶이는걸 보다못한 내 선택이었다. 엄만 그돈도 아빠의 사업에 보탤 수 밖에 없었다. 안그러면 아빠와 매일 싸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빤 엄마에게 돈좀 빌려보라며 항상 보채셨기 때문이다. 하루는 집에서 동네 아줌마가 엄마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돈내놓으라고 하는 것을 보았다. 때문에 엄만 매일밤 우셨다. 보다못한 나는 그러면 안되는걸 알면서도 또 카드에 손을댔다. 현금서비스 400만원을 받아 엄마에게 그 아줌마 주라며 건냈다. 그날 엄만 날보며 고맙다는 말과함께 미안하다며 한참을 우셨다. 그렇게 내 빚은 천 사백이 되었다. 아빤 카드사업을 하시면서 아빠 이름으로 카드를 더 이상 만들 수 없게되자 엄마 이름으로된 신용카드를 몇장 더 만드셨다. 사업자금으로 엄마 이름으로된 카드로 돈을 쓰셨다. 아빠카드도 엄마카드도 값을 길이 없자 아빠카드는 엄마가, 엄마카드는 내가 보증인이 되어 할부로 끊게 되었다. 아빠쪽은 친척이 별로없다. 하지만 엄마쪽은 친척이 참많다. 그래서 엄마가 친척들에게 빌린돈만도 많다. 셋째 외삼촌에게 빌린 돈만 1억인데 부도가 나고 갚지 못하게 되자 삼촌집마저 잡히게 되었다. 엄만 외가 친척들에게 신용을 잃어야 했고 친척들은 엄마에게 등을 돌렸다. 엄마가 보증을 선 아빠카드도, 내가 보증을 선 엄마카드도 이제 다 내 몫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막내 대학입학금을 낼 돈이 없어 학자금 대출을 받았었는데 집에 갚을 사람이 없으니 그것또한 내 몫이 되었다. 친척들에게만 손을 내민게 아니었다. 은행 여기저기 에서도 대출을 받았었는지 아빠가 잠적을 하자 독촉장이 날아들었고 고소장도 여기저기서 날아들었다. 아빠 이름으로된건 몰라도 엄마와 내 이름으로 된 것들은 갚아야 했다. 아빠가 너무 미웠다. 용서할 수 없었다. 일이 터진후에도 아빤 우리 가족에게 미안하단 말한마디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많은걸 바라지 않았다. 다만 미안했다고 우리 힘을 합해 다시 시작하자는 그 말 한마디가 듣고싶었다. 하지만 아빤 그렇게 사라지셨다. 엄만 갚지 못하는 카드빚 때문에 신용불량자 위기에 놓이셨고 난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생각했기에 첫 직장을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진 않았지만 퇴직금 때문이었다. 그렇게 내 소중한 첫 직장에서 난 나와야만 했다.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 퇴직금으로 엄마를 신용불량자에서 빼올 수 있었다. 그러다가 난 다행이 바로 경기도로 취직이 되었고 엄만 전라도 이모댁으로 남동생은 군대로, 여동생은 청주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한마디로 이산가족이 따로 없었다. 처음엔 너무 막막해서 하루종일 계산기를 끼고 살았었다. 그러기를 3년,, 이젠 그것도 익숙해 졌는지 당연한 하나의 일과로 생각하고 있다. 이제 내 나이 스물 여섯.. 남자친구는 이제 서른이 되었다. 사귄지는 5년째로 접어들었고, 서로의 가족들도 결혼할 사이로 인정한 상태다. 요즘 들어 남자친구 집에서 결혼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니 작년 가을쯤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남자친구도 내 사정을 대충 알았기 때문에 고맙게도 나와 부모님 중간에서 잘 미뤄주었다. 이젠 남자친구 집에 가는 것이 너무 부담스럽다. 모두 좋은 분들이시긴 하지만 또 결혼 얘기를 하실게 뻔하기 때문이다. 날 변함없이 오랫동안 기다려주는 남자친구에게도 너무 미안해서 하루에도 세네번은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을 하곤한다. 나도 결혼이란 것이 정말 하고싶었다. 결혼한 친구집에 가면 친구와, 남편과 해맑게 웃는 그들의 아이가 있다. 부러운 눈으로 한참을 바라보는 날 보며 친구는 결혼 이라는게 지금은 하고싶어도 막상 해보면 그리 좋은 것만도 아니라며 내게 투정을 부리곤 한다. 그래도 그래도.. 하고싶다. 나만 바라보며 나를 정말이지 지독하게도 아껴주는 그 사람과 이제 애인이 아닌 부부가 되고 싶다. 투정이라도 좋으니 내눈엔 행복해보이는 그 투정을 나도 빨리 부려보고 싶다. 그러려면 조금, 아니 조금 더 많이 오래 걸릴테지만.. 얼마전 엄마에게 차마 결혼얘기는 꺼낼수가 없어서 빙빙 돌려 한다는 말이 오빠가 나랑 빨리 결혼하고 싶어서 자기 카드값도 못갚으면서 여유돈은 모두 날 주는거라며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는데 대뜸 엄만 그러셨다. 너 시집가면 우리집 빚은 누가 갚고?.. 가끔 어른들은 자식들 마음에 상처를 준다. 그말이 아니었더라도 날 빨리 시집 못보내는 이유는 정말이지 많았을텐데 왜 꼭 그말을 하셨어야 했을까… 그말을 듣는순간 또한번 내 가슴은 뻥 뚫려 버렸다. 그냥 마른 웃음만 나올뿐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아무 걱정이 없는 사람인줄안다. 내겐 차도있고, 결혼할 애인도 있고, 직장도 있고, 그리고.. 항상 아무걱정 없는 사람처럼 웃기 때문이다… 때로는 한없이 목이 터지도록 소리내어 엉엉 울고도 싶고,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고도 싶고, 아무나 붙잡고 가슴속에 있는말 다 꺼내놓고 위로도 받고 싶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 힘들다는걸 알기 때문에, 그러면 그럴수록 더 아프다는걸 알기 때문에.. 그냥 웃는다.. 십년, 이십년.. 한 오십년쯤 지나면 아.. 그때 내가 그랬었던적도 있었지. 하면서 하나의 작은 추억을 꺼내는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날들이 내게도 있을거라 믿기 때문이다.
첫댓글 어떤 사람이 겪고있는 일들이랍니다. 우리모두 힘든일 있어두 웃으며 삽시다~ 그러면 언젠간 정말 웃을날이 오겠죠?*^^*
정말이지 저렇게 사는 사람이 정말 많이 있는거 같은데 내 주의에서 도 가끔보는데 보는 사람이 더 가슴 아픈데 그 사람이 겪고있는 시련이 마음 한구석에 전해 오는군요~~
그러게요ㅠ.ㅠ 저도 가슴이 아프답니당...
요즘 어렵게 사는분들 힘네세여 열씨미 정직하게 살다보면 좋은결과가 있을꺼라고..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첫댓글 어떤 사람이 겪고있는 일들이랍니다. 우리모두 힘든일 있어두 웃으며 삽시다~ 그러면 언젠간 정말 웃을날이 오겠죠?*^^*
정말이지 저렇게 사는 사람이 정말 많이 있는거 같은데 내 주의에서 도 가끔보는데 보는 사람이 더 가슴 아픈데 그 사람이 겪고있는 시련이 마음 한구석에 전해 오는군요~~
그러게요ㅠ.ㅠ 저도 가슴이 아프답니당...
요즘 어렵게 사는분들 힘네세여 열씨미 정직하게 살다보면 좋은결과가 있을꺼라고..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