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2-목 일본 임상화학회 포스터 발표
마츠자끼상과 가와구치상이 일본임상화학회 참석하는 것을 감이라도 잡았는지 학회 발표 후에 만나자는 메일을 받아 놓은 터라 9월 1일 에는 조금 일찍 퇴근을 하여 출국준비를 점검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9월 1일 수요일 1시에 출근을 하여 간부회의 중에 모 교수가 교육인적자원부의 8월 31일 오후 3시 언론보도자료를 모든 교수의 메일에 발송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긴급 과장회의를 2시30분에 소집하였다.
8월 31일 교육인적자원부의 전국 대학 총.학장회의에서의 결론은 전국 대학-전문대학의 입학정원이 고졸자보다 많고, 전문대학 5만명, 대학 3만명의 입학생이 모자란다고 한다. 그동안 줄기차게 교육부의 정원 정책은 전국 어느 곳에나 서울을 제외하고 심지어 서울로부터 50km이내에도 신설대학을 만들어 줄 정도로 전국 곳 곳에 엄청난 증원을 허가하여 그 구조는 세계의 유례가 없는 몬스터형의 유형이 되다싶이 되었다.
이런 지경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를 불확실한 안개속의 정황에서 어느 대학이 자기대학의 정원을 이만큼 줄여서 국가시책에 호응을 하고, 아니면 모자라는 대학에 얼마만큼 정원을 떼어주어 돕고 나서겠다는 대학이 있겠는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립대학이 솔선수범을 하여 연구중심대학원으로의 발전을 도모하고 학부 입학생의 수를 줄여나가면서 인재들의 사립대학에의 균점도 꾀한다는 서울대 총장의 사례발표도 있었다. 거기에 모든면에서 부족한 대학을 수도권이 아니다하여 4년제 학부로의 전환을 함부로 허가하여 학문 인프레 현상에 학사 인프레, 석사 인프레, 박사남발마저 초래하고 있다. 정치가 교육을 우선하여 운전을 하니 행선지는 뻔한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에 해외 유명대학의 한국분교설치의 압박 또한 간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또한 일류 대학 입학 실패자들의 해외로의 탈출 또한 절박한 현실이 되는 것 같다.서울이다 수도권이다 차-포 다 떼고 지방대학 육성이라는 미명하에 수도권 공동화현상이 되었고 세금의 낭비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된 것 같다.
물론 공도 있다. 너무나 간단하게 지방에 옮기기만 하면 그리고 연구비만 지원 한다면 좋은 대학이 되는 줄만 알았고 재미를 보아 왔다. 그러나 대학 입학생이 모자라는 시대가 되면서 지방기피 현상은 두드러져 갔으며 한술 더 떠서 해외로의 탈출이 심화되어 갔다. .
선물도 사야하고 짐도 싸야 하는데 왜 이렇게 잔무가 많은지. 김포와 하네다간의 직항 노선이 복원되어 한일 간은 더욱 가까워 저서 시간대를 맞추다 보니 아시아나로 결정이 났다. 선물은 인천공항, 나리따공항, 기내면세 판매의 순으로 싸다. 하네다는 일본 국내선 전용으로 하다가 한일 국제노선을 복원시켰기 때문에 하네다 공항행 리무진을 타고 국내선에 도착을 한 뒤 셔틀로 다시 국제선까지 갈아타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으며 도착했을 때는 이것과 반대이다.
서울의 우리 집에서 8시 반에 출발을 해서 신주꾸 가부끼조의 프라자호텔에 오후 3시에 도착을 하였다. 금년의 일본임상화학회 총회는 신주꾸의 케이오호텔에서 학술대회를 하기 때문에 걸어서도 갈 수 있고 급할 때는 택시기본 요금 660엔으로도 갈 수 있기 때문에 가부끼쬬의 한국인 타운의 프라자호텔을 얻었다. 작년에는 정운원선생과 남기호사장의 일행으로 마츠자끼의 유전자검사실을 방문하기는 했으나 실제로 가이하라와 마츠자끼는 만나지를 못했었다.
금년 7월 25일 미국 LA에서 AACC 포스터발표에 갔을 때 호텔전화로 LA시내 연락도 하고 집에도 전화를 걸고 했었다. 발표를 끝내고 체크아웃을 하려니 전화 요금이 96불이 나왔었다. 뉴욕에 가서는 로밍을 해서 가지고 온 정 박사의 PDA를 사용했었다. 그런 일도 있고 해서 요번 일본 출국 때는 로밍을 해서 내 PDA를 사용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미국과는 달리 로밍을 해도 쓸 수가 없어서 김포공항의 출국장에서 일본의 핸드폰을 아예 임대를 해 주고 있었다. 호텔에서 짐을 풀고 마츠자끼상에게 전화를 했다. 7시에 신주꾸의 동쪽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만날 시간까지는 짬이 있어서 가이하라에게 줄 동전 콜렉션과 기내 매점에서 산 버버리 남자용 면도 향수를 가방에 집어넣고 키노쿠니야 책방엘 갔다. 그 동안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책방에서 대충 이것 저것 읽다 보면 현재의 돌아가는 판세를 어느 정도 점을 칠 수 있는 것이다. 그 무거운 중고 카메라를 이번에도 메고 왔는데 라이트를 챙기지 않고 와서 그것도 하나 마련을 해야 한다. 마츠자끼상이 먼저 오고 핸드폰으로 가이하라에 연락을 하고 조금 기다리니 3인이 모두 모였다. JR신주꾸 역사의 7층에는 식당가가 있어서 일식집으로 정하고 올라갔다. 김봉근(임상 91학번, 34회, 동경대 박사과정) 군은 알바이트가 끝나지를 않아서 나중에 핸드폰으로 연락을 하기로 했다.
마츠자끼가 하는 일은 유전자검사실을 운영하고 있는데 일본도 아직 의료보험으로 지급되는 유전자검사가 많지를 않아서 주로 연구를 하는 기업이나 대학의 연구실에서 하지 못하는 실험을 하여 운영을 해 가는데 처음 같지 않아서인지 조금은 고전을 하는 눈치인 것 같았다. 내일은 혹까이도의 삿포로엘 가기로 된 것도 영업상의 출장이라는 것이다.
이 자리에 김봉근 군을 소개시키려 하는 이유는 유전자검사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라서 앞으로 참고가 될 성 싶어서이다. 미스터 김은 전에 하던 중국인 회사의 알바를 그만 두고 새로 한글을 가르치는 학원선생으로 바꿨다. 오늘 학원의 강사 명함이 나온 날이라며 자랑스럽게 건넨다. 겨울연가 덕분에 외국어학원의 한글 선생이 모자라서 거기에 응모를 하여 합격을 한 것이다. 밤에는 도꾜대학교 유전학연구실엘 나가서 주경야독을 해야 한다. 식사를 끝내고 미스터 김과 호텔로 돌아와서 내일 발표할 포스터를 점검하였다.
04-9-3-금 남 관현씨를 만남
어김없이 새벽 5시에는 눈이 떠진다. 도꾜는 이 시간에도 훤하다. 죠깅차림으로 호텔을 나섰다. 와세다대학 쪽으로 가다가 가부끼쪼의 새벽 모습은 어떨까하고 어림처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두리번 두리번 하면서 천천히 걷기 시작하였다. 불이 꺼져 있는 업소, 불을 대낮같이 켜 놓고 영업을 하는 집, 한쪽에서는 쓰레기 청소를 해 가는데, 한 쪽에서는 어깨동무 하며 비틀거리며 이제야 업소를 나서는 팀도 있다.
방송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가부끼쪼의 진면목을 맨 정신에 보고 있는 것이다. 신주꾸의 구청쪽으로 가니 거기에는 까페 골목 같기도 해서 유심히 살펴보니 자기 나름대로의 장식으로 꾸민 점포들이 게딱지 같이들 엉켜 붙어 있었다. 어느 집에서는 도란 도란 이야기소리도 들리고 또 어떤 곳은 문을 굳게 닫은 곳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인가 이곳 마작을 하는 집에서 불이 나서 삼사십 여명의 희생자가 났던 곳이기도 하다.
가부끼쪼를 빠져나와 신주꾸역의 남쪽 입구방향인 신쭈꾸고엔으로 방향을 잡았다. 서쪽으로 울창한 숲이 나타나서 가까이 가 보니 신주꾸공원이 맞기는 하나 문을 열지를 않았다. 언제나 지도상에서 보아 왔지 처음이었다. 달렸다. 이번에는 북쪽으로 신주꾸역의 히가시구치를 지나 철로다리를 빠져 나와 북쪽으로 향하면 싱오꾸보역쪽이다.
한시간 정도는 걷거나 뛰거나 해야 한다. 토론토에 가서도 그랬고, 히로시마엘 가서도 그랬으며, LA에서도 새벽운동은 빠트리질 않았다. 작년에 도꾜엘 왔다가 새 구두를 신는 바람에 바른쪽 무릎을 다친 이래로 언제나 조심을 하긴 한다. 날씨도 덥고 해서 편의점에서 물과 간단한 도시락을 사서 아침을 해결하였다. 10시까지는 케이오호텔까지 가야 한다. 걸어갈 수도 있으나 택시 기본요금정도가 나온다니 택시로 갔다.
그리고 잔돈을 가지라고 했더니 날더러 인터나쇼나루 젠토루맨이란다. 접수엘 가서 명찰과 기념품, 세미나 안내 잡지를 받고 포스터발표 접수엘 가서 87번 번호를 부여 받았다. 의자위엘 올라가서 압침으로 그곳 여자 임원과 같이 반듯이 붙이고 강의장으로 들어갔다. 벌써 핸드폰으로 마츠야마의 남관현 씨와 그의 일본인 부인 그리고 푸로프진의 가와구치 박사와 학회장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해놓은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