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만 안젤로 신부
연중 제8주간 화요일
베드로 1서 1,10-16 마르코 10,28-3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지방 카파르나움을 떠나
유다 지방 예루살렘으로 걸어가고 계십니다(마르코 9,33 / 10,1 참조).
십자가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길 위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멈추지 않으십니다(10,1 참조).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10,28).
하느님 나라를 위한 제자들의 과감한 선택과 결정은
부자 청년의 머뭇거림(10,22 참조)과 대조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물었던 부자는 지상에서 가지고 있던
재물 때문에 하늘에서 받을 수 있는 보화를 포기하고 떠났습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가족의 유대와 소유의 안전을
포기하고 예수님 곁에 머물러 있습니다(1,18.20 참조).
제자들은 부자 청년이 하지 못한 행동, 곧 소유한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요청에
응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용기 있는 결정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그 어떤 것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포기한 것들을 백 배로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은 부자 청년이 간절히 바라던
것이었습니다(10,17 참조).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를 때 수많은 어려움(포기, 박해 등)이 함께 따른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얻게 될 유익도 많음을 환기시켜 줍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분과 함께 걷고 있는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받고자 가진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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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연중 제8주간 화요일
베드로 1서 1,10-16 마르코 10,28-31
"나 때문에 버린 사람은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코 10,29-30)
우리는 날마다 어딘가를 향해 떠나며,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 시간과 돈을 쓴다.
이 평범한 일상의 몸짓 안에 담겨 있는 생각과 의식은 무엇일까? 이 움직임 안에 행복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다면 삶을 한번쯤 깊이 되짚어봐야 하지 않을까? 떠나지만 왜 떠나는 것이며
무엇을 얻기 위해 떠나는가? 시간과 돈은 나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모두의 선을 위한 것인가?
오늘 복음에서 그 단서를 찾아보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10,28)하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은 현세에서 백배의 보상을 받고 하늘나라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10,29-30).
그런데 오늘 복음의 말씀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현세적인 보상을 약속하신 바가 없고,
언제나 영원한 생명이나 하느님 나라를 약속하셨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적 사랑을
나누던 초대교회 공동체의 삶이 반영된 표현이다.
그렇다면 보상에 관한 예수의 말씀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당신을 추종하는 제자들에 대한 위로의
말씀이며 항구히 추종하라는 새로운 부름인 셈이다.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린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온전히 그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길은 고통과 박해가 따르는
만만치 않은 길이었다. ‘예수님 때문에’(10,29) 자신을 떠나서 지혜이신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그분을 경외하는 이들만이 기쁨과 행복을 맛보며, 축복을 받을 것이다.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추종하려면 제자들이 부모와 형제, 토지를 모두 버렸듯이 어려움과
큰 희생이 따르더라도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그것은 법적인 포기를 말한다기보다는 모든 것에 대한
애착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애착을 버리고 재물에 대한 포기한다는 것은 떠남이 없이는
불가능하며 그 자체가 영성생활의 종착점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과의 거룩한 관계에 들어가기 위한 과정이요 하나의 매듭일 뿐이다.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애착을 버리는 것이며 그것은 ‘떠남’이다. 무엇보다도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행동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보상은
이런 떠남과 떠남에 따른 하느님과의 거룩한 관계맺음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예수님께서도 성부의 뜻을 따라 죽기 위하여 가장 가까운 제자들마저 떠나셨고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그들을 포기하셨다. ‘구원적 떠남’, ‘성사적 떠남’이다.
누구나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떠나간다. 그런데 오늘 제1독서는 ‘주님 앞에 빈손으로
나타나지 마라’(집회 35,6)고 권고한다. 자기 것에 애착하고 소유의 끈을 놓지 못하며
떠나지 못하는 이들은 하느님께 드릴 것이 없는 빈털터리일 뿐이다.
대단한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이라 해도 티끌 하나도 지니지 못한 채 떠나가지 않는가!
중요한 것은 그저 죽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사람답게 죽는 것이다.
따라서 모두가 행복한 죽음을 향하여 지금 여기서부터 애착을 버리고,
자신을 떠나 하느님께로 향해가는 삶을 준비하여야 한다.
자기 것만 챙기는 옹졸함, 재물에 대한 집착, 하느님의 주도권을 무시함, 악에 동조하고, 불의에
가담하는 삶,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 등은 ‘영적 치매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 모두 아무런 준비도 없이 허무한 죽음을
맞는 일이 없도록 이기심으로 가득 찬 ‘나’를 떠나 모두를 하느님께 돌려드리며,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정하며 그분 안에서 감사와 찬미를 드리도록 하여야 한다.
하느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우는 삶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꼴찌 인생이고 바보짓이며
박해까지도 각오해야 하지만, 참으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최고로 행복한 인생이다.
진정 소중하고 값진 것을 얻으려면 자신을 떠나 모두를 버리고 되돌려야 함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오늘도 성사적 떠남과 버림을 향한 해방의 순례를 시작하자!
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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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 바오로 신부
연중 제8주간 화요일
베드로 1서 1,10-16 마르코 10,28-31
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과 우리 사이에 소유와 내어드림이 어떤 의미인지 숙고하게 도와 주십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코 10,29-30)
예수님의 이 말씀은 먼저 우리에게 버림의 '지향점'을 주목하게 하십니다. 무언가를 봉헌하거나
나누거나 내어놓을 때 그것이 재물이든 자기 자신이든 시간이든 그 이유는 명백히 주님,
그리고 복음 때문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되받을 요량으로 계산해서 하는 행위나 짐짓 관대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자기 영광이 목적이라면 마음을 보시는 주님께 별 소용이 없는
헛수고가 될 뿐입니다.
이어서 주목하게 하시는 말씀은 "박해"입니다. 소유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세상은 탐욕을 용인하고
과시에 열광하며 부의 축적에 면죄부를 남발하고 정당성까지 부여합니다.
철저히 물질적인 가치관에 찌든 세상은 욕망을 불의한 과정마저 허용되는 선인 것처럼 둔갑시키고,
가난은 마치 절대 악처럼 혐오합니다. 물질이 정신과 영혼의 가치마저 장악해 버린,
가치 전도의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이런 세상에서 자발적 버림과 비움, 떠남과 나눔이 이해받기 어려운 영성이 되어 버린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수순일 겁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시대와 지금이 이천 년의 간극을
지니고 있음에도 적용에 전혀 무리가 없다는 게 놀라울 뿐입니다.
당시의 박해는 매우 직접적이고 위협적이기까지 했지요.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갈 정도였으니까요. 인권과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현대 사회에서 박해는
은근한 조롱과 무시, 혐오와 차별, 소외와 낙인찍기 등으로 표현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복음적으로 산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세상의 물살에 역행하는
고되고 험한 광야길에 비길 수 있을 겁니다.
"영원한 생명"
예수님께서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건네시는 보상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현세에서 되받으리라는 물질적 축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은총의 선물이지요.
어쩌면 원죄 이후 죽음을 제거 불가한 꼬리표로 달고 살아가는 인간 실존에 가장 위안이 되는
축복이 아닐까 합니다. 막막한 죽음 이후의 삶을 생명과 행복으로 보장해 주시니까요.
제1독서는 어떻게 내어드리고 비워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조언이 가득합니다.
"자선을 베푸는 것은 찬미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집회 35,3)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네게 주신 대로 바치고, 기꺼운 마음으로 능력껏 바쳐라."(집회 35,12)
주님은 물질의 양을 보시지 않고 마음을 보십니다. 문제는 많고 적음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오는지에 달렸지요. 오늘의 독서 대목에 머물다 보면 "기꺼이, 즐겁게, 기쁘게"
내어드리는 이의 마음을 주님도 기꺼워하시고 반기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재물이든 능력이든 시간이든 존재 자체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사실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채워 주신 것이지요. 이 선물이 우리 안에 고이고 쌓이면 물이 그러하듯 성품을 왜곡시키고
악취마저 풍겨 인간 본연의 선함을 훼손하게 됩니다. 물이 흘러흘러 땅을 적시고 생명을 싹 틔우듯,
주님께서 주신 것이 우리를 통해 제 길을 찾아 흘러나갈 때에야 비로소 유익이 되고
보물이 되어 이웃에게 도움이 되고 또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까지 이끌어 주게 됩니다.
사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주님이 무엇이 아쉬우셔서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시겠습니까.
우리가 주님께 바치는 모든 것은 주님께서 목숨 바쳐 사랑하시는 모든 피조물을 위한 것입니다.
또 우리가 가난한 이들에게 내미는 손길은 그들 안에 계신 주님께 드리는 것이지요.
주님은 가난한 이들과 분리될 수 없을 만큼 단단히 결속되어 계십니다. 그분의 거처가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쩌면 비움과 나눔은 특별한 신분의 사람들만 실천하는 어떤
지고한 선택적 덕행이라기보다 주님과 함께 사는 이의 일상이 되어야 할 겁니다.
이미 벗님도 체험하고 계시겠지만, 비움과 나눔은 긍정적인 중독성이 있습니다.
실천한 만큼 기쁘고 행복하다보니, 자기 깜냥 안에서 더 바치고 싶어
'어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없나' 두리번거리게 되지요.
이 선량한 중독은 더 깊은 영적 행복을 추구하게 해 준다는 차원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미리 맛보고 사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게다가 비움과 나눔의 행복은 물질과 소유와 과시가 절대 선인 것처럼 부추기는 세상의 교활한
목소리를 식별하게 해 줍니다. 물질과 소유와 과시의 끝은 결국 인간성 파괴임을 깨달았기에,
우리는 어둠으로 기울어져 가는 세상에서 미소하고 미약하나마 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쓰며 주님과의 사랑을 지키고 복음을 살아가려고 투신하게 되지요.
'주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말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부활 시기의 문을 닫고 일상에서 복음의 생명을 사는 연중 시기로 들어온 우리에게
오늘 말씀은 도전도 되고 위안도 됩니다. 각자의 삶에서 주님을 사랑하며 복음적으로 살고자
애쓰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세상에서 비운 만큼, 나눈 만큼이 영원한 생명으로
쌓여갈 것이니 우리 모두는 행복합니다.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