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동안이나 그렇게 알아내려고 애를 써도 알아낼 수 없었던 어머니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은 실로 우연찮게 만나게 된 고향 사람으로부터였다. 어머니는 그 남자와 종적을 감추면서 주민등록조차도 옮기지 않아 친족인 나로써도 추적을 할 수가 없었다. 아마 어머니는 내가 추적해 올 것을 생각해서 그렇게 주민등록조차 옮기지 않은 채 종적을 감추었을 것이다. 하더라도 어머니는 왜 그렇게 뒤늦게 종적을 감추어야 했던 것이었을까?
아무튼 우연히 만나게 된 고향 사람과 잠시 함께하게 된 자리에서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사실 고향 사람을 만나게 되면 반기기보다는 피하고 싶은 게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내 유년과 소년기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서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일 분 일 초라도 빨리 자리를 뜨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어머니는 잘 계시지? 지금도 평택에 사시나?”하는 말로 그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잘 계시냐는 물음에는 대충 얼버무리면서도 지금도 평택에 사시냐는 물음에는 자신도 모르게 놀라고 당황하여
“평택이라뇨?”하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고향 사람은 나무라듯이,
“아, 평택에 사시잖아.”하고 말하더니 곧 무엇인가를 눈치 채고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평택에서 안성 쪽으로 가는 한 시골 마을에 몇 년에 한 번 정도 내왕이 있을까말까 한 아주 먼 친척이 하나 살고 있는데 그 집이 상을 당하여 조문을 갔다가 상갓집에서 일을 거들고 있는 내 어머니를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 알고 보니 바로 그 마을에서 어머니의 남자 염규철과 함께 살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상갓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집이라고, 잠깐 그 집에 들어가기까지 했었다고도 고향 사람은 말했다.
나로서는 믿어지지가 않는 이야기였다. 어머니는 어떻게 아무런 연고도 없는 그곳에 들어가 살면서 일체의 연락을 끊어버렸던 것일까?
어떻든 고향 사람이 헛소리를 할 리는 없었고, 그리하여 나는 그곳의 대략적인 주소를 적어두었다.
그렇게 적은 주소를 나는 어쩌지도 못한 채 오랜 동안 수첩 속에 끼워두고만 있었다. 어머니를 찾아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무런 결정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수첩을 들추어 그것을 보게 될 때마다 어머니의 환영에 시달렸다. 밤이면 옷을 말끔히 갈아입고 여름이건 겨울이건 사내가 그 때마다 다르게 내는 갖가지 새소리를 따라 숫골 골짜기와 그 고개 너머까지 귀신같은 모습으로 오가던 어머니, 헛간방에서 쿨럭대던 아버지의 기침소리, 그럼에도 나중에는 까마귀 대가리 같이 생긴 어머니의 남자 염규철이가 드나들던 일, 그리고 그 남자가 내 손에 쥐어주고 나간 지폐 몇 장과 헛간방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기침 소리에 바짓가랑이를 철떡철떡 적시며 줄줄 오줌을 싸던 일과 끝내 천금정에서 주검으로 떠올랐던 아버지……. 그런 환영에 시달리며 몇 번이고 그 주소를 없애버리려 했지만 정작 그러지는 못했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가게 되면서부터 어머니는 아버지가 남긴 재산을 정리해 그 동네에서 읍내로 이사를 갔다. 읍내 중학교에 다니게 된 나를 위해서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의 쑥덕거림과 손가락질을 피하기 위해 그런 것이었다. 아무리 나 때문에 이사를 가는 것이라 해도 그 말을 믿어줄 동네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당신이 불편하고 고개를 들고 다니기가 어려우니까 그랬던 것일 뿐이었다.
사실 아버지가 그렇게 죽고 난 뒤부터 어머니는 집 밖에는 잘 나다니지 않았다. 동네 어른들 뿐만 아니라 아이들 까지도 서방질 하느라 지 남편 죽여 버린 년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대는 데에는 아무리 낯짝 두꺼워도 얼굴 들고 다니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아무튼 읍내로 이사를 간 어머니는 염규철과 함께 조그만 음식점을 열었다. 돼지 뼈다귀를 푹푹 고아 삶고 거기에 시래기를 넣고 끓여 내는 해장국집이었다. 한길 쪽으로 가게가 딸린 집안은 언제나 돼지 뼈다귀를 고는 냄새와 시래기를 삶는 냄새로 진동을 하곤 했다.
장날 같은 날이면 먼저 살던 동네 사람들이 몇 명씩 찾아오기도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동네에서 살던 때와는 달리 아무렇지도 않게 대했고, 큼지막한 돼지 뼈를 한두 개씩 더 얹어주며 헤실헤실 웃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해장국집은 썩 잘 되지는 않았다. 매일 돼지 뼈다귀를 고는 냄새와 시래기를 삶는 냄새가 진동을 하곤 했지만 손님들은 그리 많지가 않았다. 나로서는 해장국집 운영에 관한 내막은 잘 알 수 없었지만 아마 겨우겨우 현상유지나 해 나가는 정도였던 것 같았다.
어머니는 내가 어머니의 남자인 염규철을 새 아버지라 불러주기를 원했지만 나는 절대 그러지 않았다. 그 무렵 머리통이 굵어지기 시작한 나는 그러기는커녕 집에 잘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누구들처럼 어머니에게 대들거나 큰 말썽을 일으키며 돌아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또래의 친구들보다 훨씬 큰 덩치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나는 소심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소심한 내가 싫었지만 그런 것은 고치려 한다고 해서 고쳐지는 게 아니었다. 나는 그저 집에는 잘 들어가지도 않은 채 친구들 집을 전전하고 돌아다니며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한 채 혼자 속으로만 어머니에 대한 증오를 키워갔다.
도저히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언젠가는 당신이 지은 죄의 대가를 받게 되리라는 것도 내 생각이었다. 그렇게 내 속에서 그런 생각들은 점점 커나갔다. 아니, 커나갔다기보다는 나의 어떤 의지로 그 생각들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어머니로부터 떠나갈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정말이지 어디론가 훌쩍 떠나 버려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어머니의 얼굴을 본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숨통이 막혀왔다. 그리고 어머니와 염규철의 얼굴을 보게 되면 헛간방에서 기침을 토하고, 천금정의 물속에서 주검으로 건져지던 아버지가 떠올라 머리통이 터져버리는 것만 같곤 했다.
어머니의 얼굴을 완전히 보지 않는 것, 그것은 읍내로 이사를 한지 육 년 만에야 찾아왔다. 육군 사관학교에 들어가면서 읍내를 떠나 올라오게 된 것이었다. 내가 일반 대학이 아니고 육군 사관학교를 선택했던 것은 어쩌면 아버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를 데리고 읍내에 나갔던 날 나를 향해 군인이 되라고 했던 말과 그 날 집으로 돌아와서 들려주었던 월남전에 대한 이야기를, 그 이야기를 하던 아버지의 눈빛을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그것들은 막상 당신이 그처럼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자 내게 유언처럼 작용했던 것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곳을 떠나오고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않게 되자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고, 꽉 막혀 썩어버릴 것만 같던 머리통 속에도 비로소 시원한 바람결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내가 가장 기다려왔던 것도 그것이었고, 어쩌면 그것 때문에 내가 육 년 동안을 버텨올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떠나온 뒤로 나는 읍내에는 거의 내려가지 않았다. 사관학교에 다니는 사 년 동안 세 번 밖엔 내려가지 않았다. 그것도 내려가서는 친구들을 만나 돌아다니다가 다시 올라오는 길에야 잠깐 집에 들러 얼굴만 들이밀었다가 나오는 게 전부였다.
어머니와 나 사이의 거래 관계는 이제 금전적인 것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사관학교이기 때문에 일반 대학들처럼 학비가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러저러하게 필요한 만큼의 돈은 어머니에게 손을 내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금전적인 것만 아니라면 더 이상 어머니와의 관계를 계속 이어갈 필요가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버지가 남긴 재산 중에는 분명히 내 몫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따지기도 싫었고, 어떠한 경우든 다시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사실 얼마간의 돈 때문에 손을 내민다는 것은 치사하기도 할뿐더러 얼마든지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랬던 것은 그 치사함을 빙자해 오히려 어머니 당신의 그 무엇인가를 배려하려 했던, 마지막 선물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사관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휴가 때 마지막이다 싶은 심정으로 찾아갔을 때 어머니는 한참 동안이나 더듬거리더니 어렵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 졸업식 때 가도 되겠냐? 다른 것은 몰라도 니가 졸업하는 것은 보고 싶구나.”
“아뇨.”
나는 단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어머니는 나의 그 한 마디에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기어들어가는 듯 힘없는 목소리로 알았다고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런 날은 내가 폭음을 하는 날이기도 했다. 더 이상 머물지 못하고 내처 서울로 올라와 다른 친구들을 만나지만 마음은 엉망진창이 되곤 했다. 왜 말 한 마디 곱게 하지 못하고 그런 식으로 밖에 말하지 못했는가 하는 자책이 일곤 했다. 그것도 자식으로써의 선물이라면 졸업식 및 임관식에 참석하는 선물도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갈등하면서도 아니, 오히려 갈등할수록 어머니에 대한 증오의 싹은 더해가기만 했다. 아무리 그러지 말자고 자신을 타일러도 그래지지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엉망진창인 내 마음처럼 엉망진창이 되도록 밤새 술만 퍼마셨다. 며칠이고 술만 퍼마시고 또 퍼마셔 나중에는 병원에 실려 가야 했던 적도 여러 번이었다.
내 졸업식에 오고 싶다는 말을 하기까지 어머니는 수 없이 망설이고 또 망설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단 한 마디로 잘라 버리자 어머니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도 역시 보통의 다른 어머니들과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아들의 졸업식을 지켜보고 싶었을 것이고, 견장도 화려한 제복을 입은 아들과 기념촬영을 하고서 사진을 액자에 넣어 걸어두고 싶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어머니는 내가 없는 곳에서는 언제나 우리 아들이 육군 사관학교에 다닌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늘어놓곤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어머니는 아들에게 그런 말을 하지 못했고, 나쁜 녀석이란 소리 한 번 하지 못했다.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어머니에게 나는 오히려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러지 않고 나쁜 녀석이라고, 못된 놈이라고, 마구 해 부쳤다면 나는 차라리 속이 후련하고 마음이 덜 무거웠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식 앞에서도 기를 펴지 못하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당신에게는 물론 내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어찌됐건, 상대가 누구건 남의 약점을 이용한다는 것처럼 치사한 일도 없을 것이다. 나는 정말 치사하게도 어머니의 약점을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신의 약점 때문에 아들에게조차 말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머니가 그 옛날 아버지에게는 어찌 그리도 모질게 굴었던 것일까.
어쨌든 내가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며 소위로 임관하고, 그러면서도 다시 학업을 계속하면서는 더욱 더 어머니와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결혼을 하면서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혼을 한 지 일 년 가까이 지나서야 전화를 넣어 결혼을 했다고 하자 어머니는 한참 동안이나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어머니는 소리 죽여 흐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걸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나서야 어머니는 축하한다는, 마치 자식이 아닌 남에게 하듯 그 말만 했을 뿐이었다.
그 이후에도 서로 연락이 없기로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삼사 년이 지나서야 전화를 넣어 봤을 때 전화는 뜻밖에도 다른 사람이 받았다. 다시 넣어 봐도 마찬가지였다. 새로 가설한 전화라고 상대방은 말했다. 그리고 먼저 그 번호를 쓰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 어떻게 된 것일까? 전화국에 확인해 보니 그 전화는 벌써 일 년쯤 전에 반납되었다는 것이었다. 타 지역으로 이전해 간 것도 아니고 반납되었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나는 그제야 읍내로 내려갔다. 어머니가 살던 집도 해장국집도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옛적의 건물들은 다 헐리고 그 해장국집 자리에 새 건물이 들어서는 중이었다. 어떻게 된 거냐고 주변 사람들에게 묻자 어머니는 벌써 전에 그 건물을 팔고 염규철이란 남자와 함께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고 했다.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고도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동안 해장국집이 잘 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현상유지는커녕 적자를 면치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서 나는 오래도록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내 몸이 푸슬푸슬 헐리고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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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