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 柳亭詩帖
유정시첩
原韻
원운
豁若開襟坐柳亭옷깃을 활짝 열고 버드나무 정자에 앉으니 淸風瀟灑掃塵情 맑은 바람이 세속의 생각을 깨끗이 쓸어버리네.
良朋日日閒來往날마다 어진 벗들이 편안히 오고가는데
却恨談餘主客醒이야기 끝에 주인과 빈객이 술에서 깨어남을 매우 한스러워하네.
次韻二首
차운 2 수
黃躔 奉禮 贈參判
황 전은 봉례이며 참판에 증직되었다.
誰將五柳種門亭 36)누가 장차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문정(門亭)에 심을까
自箇淵明玩世情 한 그루씩 연명선생처럼 세정(世情)을 완미 하리.
千載金公慕往躅 천세토록김공께서 왕림하신 자취를흠모하니
綠陰澳處酒初醒녹음이 우거진 깊숙한 곳이라술이이제야깨네.
門垂碧柳自成亭 문에 푸른 버들 드리워 정자가 되니
每引凉風慰客情 매번 맑은 바람 끌어와 나그네 회포를 위무하네.
遙想主人珍重意주인이 품은진중한 마음을 아스라이상상하니
但期長醉不期醒 다만 길이길이 취하기를 기약할 뿐 술 깨기는 기약하지 않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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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문정(門亭):성 안에 설치된것은 ' 도정(都亭)' 이라고 하며, 성 문에 설치한 것은 ' 문정 ( 門亭)' 이라고 한다.
又
또 차운하다
金次明
김차명
阿誰種柳作溪亭 언덕에 누가 버들을 심어 시내 정자를 만들 었는가
繼得陶潛未盡情 도잠(陶潛)의뜻을 계승하니 그마음 그지 없네.
從此只應多飮客이로부터 다만 술 많이 마시는 빈객만 받으니
幾人爛醉幾人醒 너무 취한 사람은 몇이나 되며 술이 깬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又
또 차운하다
朴引之
박인지
門前楊柳蔭沙亭문 앞의 수양버들은 모래톱 정자의그늘인데
觀德吟詩兩合情 덕을 관조하며 시를 읊으니 양쪽의 생각이 합치되네.
魚躍鸚啼佳景足 물고기 뛰고 꾀꼬리 울어 아름다운 경치에 만족하니
每將詩醉不須醒매번 시 읊으며 취하면 모름지기 깰 수 없으리.
又
또 차운하다
孫士章 別坐
손사장은 별좌이다.
宅前陰畔綠楊亭 집 앞 그늘 가엔 푸른 버드나무 정자 있으니 宛似淵明愛柳情완연하게 도연명이 버드나무 사랑하던마음과 같네.
珍重主人多憶此 진중한 주인은도연명의 마음을 많이도 회억 ( 回憶) 하느라
每將詩客醉還醒 매번 시객 ( 詩客)과 취했다가 도로 깨네
又
또 차운하다
從子震孫
조카진손
亭下溪流溪上亭 정자 아래 내 흐르고 시내 위엔 정자 있으니
引風呼喚自懽情 바람을 불러 들여 절로 기쁘고 정겹네.
金龜換得忘憂物금거북을 얻었으니 근심은 잊고서
何日高亭答醉醒높은 정자에서 어느 날이나 취했다가 깨어날
又
차운하다
金舜壽
김순수
柳溪邊作好亭 시냇가에버드나무 심어 좋은 정자를 만드니
引杯臨水滌愁情 물을 대해 술잔 당겨 근심하던 마음을 씻네.
嘉賓上客耽佳景 훌륭한 빈객들이 아름다운 경치를 탐하느라
日日來來醉不醒 날마다 올 때마다 취하면 깨어나지 못하네.
又二首并序
또 2수를 차운함에 아울러 서문을 쓰다
金光粹 37 ) 進士 松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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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김광수(金光粹,1468-1563):조선 전기의 대학자. 자는 국화(國華)이며, 호는 송은(松隱)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그는 지레현감(知禮縣監)을 지낸 김극해(金克諧)의 자제이며, 서애(西厓)류성룡(柳成龍)의 외조부이다. 의성군 (義城郡)
점곡면(點谷面)사촌리(沙村里)에서 태어났다. 1501년(연산군 7)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태학에서 종용(從容)과
수강(修講)에 독실하였다. 무오사화 (戊午土禍)직후 정국이 혼란할 것을 예견하고 대과 ( 大科 ) 급제를 와 관직을단념하
였다.낙향한 이후로 성현(聖賢)의 학문에 잠심(潛心)하였으며 후진 양성과 강학에 전념하였다. 차후에 그의 말대로 갑자 ·
기묘 · 을사 사화가 일으났으며,당대의 명현(名賢)들이 참화를면치 못했다. 자택 앞에 소나무 한 그루를 심고,자신의 호를
송은(松隱)이라 하였다.신지제(申之悌)•신원록(申元祿)•이민성(李民宬)등과함께 장대서원(藏待書院)에 배향되었다.
一日金平之來自龜城 敍寒喧了 袖出絶句若干首示余 而請序曰 吾家門外古有柳亭 綠陰婆娑 青山流水 控帶一塢 其興可掬
吾先君每於令節 或博奕留賓 或射帿送日 又書絶句 留 諸壁間繼而和之者 數人焉 其所著詩句 雖不工也 亦一時村老 各言其所志爾
豈可以工與拙爲之慮乎 獨恨家君早逝柳亦老嶊 星霜屢換風景 蕭條其於人子之情 寧不爲之慨然耶 僕武人不喜文墨未能發揮 其所溫言之何益 且日 僕托葭莩之親 而輸肝膽相從 者久矣 請吾兄 毋惜一揮翰之勞序引卷 端以副所懇 則不獨僕之欣感拜 受而已 後之若子若孫目此 於高堂之素壁 而如聞聲效之音 愈久而愈仰 則吾兄今日之賜 豈不重且大也 余笑而答曰 昔淵明爲晉 處士 結廬潯陽 愛柳長醉 日以詩酒自娛 唐之德裕卜 築平泉 植花草松竹 而戒後世子孫 古今雖異意味一也 以此觀之平之 可謂揖二公之芳躅 而益思其親厚矣 是以余嘉其意 忘其拙 濡筆略 敍所言 因步韻和之 以爲知己者共之 維年月日 永嘉四休 序
어느 날 김평지 (金平之)가구성(龜城)38)에서 와서 인사를 마치고 소매 속에서 넣어둔 절구 ( 絶句)약간 수를 나에게 보이고 서문을 청하며 말하기를, " 우리 집 문밖에는 예부터 버드나무 정자가 있어서 녹음(綠陰)이 앙상한데 푸른 산과 흐르는 물이 언덕을 끼고 있어 흥을 움켜쥘만하니 저의 부친께서 매번 영절 (令節)이면 바둑을 두시며 빈객을 머무르게 하시거나 과녁을 쏘며 날을 보내시거나 또한 절구를 벽에 써놓으시니 이어 화답하신 분들이 여러 분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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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구성(龜城):영주 고을을 뜻한다.
지으신 시구(詩句)가비록 공교롭지 않아도 한때의 촌로들이 그 뜻하신 바를 말씀하신 것이니. 어찌 가히 교묘함 과졸(拙)함을 생각하겠습니까. 다만 한 스러운 것은 가군(家君 )께서 일찍 별세하시고 버드나무 또한 늙음을 재촉하여 세월이 여러번 바꿔어 풍경이 쓸쓸하니 남의 자식 된 사람의 마음이 어찌 습프지 않겠습니까. 저는 무인(武人)이므로문목(文墨)을 즐기지 아니해서 마음에쌓인 바를 드러내지 못하니. 말씀드린다 해도 무슨 이로움이 있겠습니까.
또한 저는 먼 인척 이시라는 점에 의재해 간담(肝膽)을 쏟으며 서로 상봉한 지도 오래입니다. 청하오니, 형님께서는 일필휘지(一筆揮之) 하셔서 글 쓰시는 노고를 아끼지 마시옵고 책 끝에 서문을 쓰셔서 간절한 마음을 풀어 주신다면 저만 흡족히 감동 해 절하며
받지않았을 뿐만 아니라 후대 자손들이 고당(高堂)께서 쓰신 이 글을 보면 기침소리를 든는 것 같아 오래될수록 더욱 우러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형님께서 오늘 주신 글이 어찌 중차대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며 대답하기를, " 옛날에 도연명 (陶淵明)은 진(晉)나라 처사가 되어 심양 (潯陽)에 집을얽고서버드나무를 좋아하며 길이길이취하여 날마다 시와 술로 즐겼다. 당(唐)나라 이덕유(李德裕)는 평천(平泉)에 집을 짓고 화초와 소나무•대나무를심어 후대 경제하였었다.
따라서 옛날과 지금이 다르다고 해도 그 의미는 하나라고 할것이다. 김평지(金平之)는 도연명(陶淵明)과 이덕유(李德裕)두 분의 꽃다운 발자취를 취해더하였으니 그 부모님의 은혜를 두텁게 생각한다고 이를만하다. 이에 내가 그 뜻을 가상히여겨 졸열(拙劣)한 재주를잊고 붓을 적셔 말하려는 바를 대략 서문에 쓰고 이로 인해 화운(和韻)하여 내 지기 (知己)와 뜻을 함께 한다. 모년 모월 모일에 영
가(永嘉)39)에서 사휴자(四休子)가 서문을 쓴다.
잊고 붓을 적셔 말하려는 바를 대략 서문에 쓰고 이로 인하 원 ( 和韻 ) 하여 H 지기 ( 知己 ) 와 뜻을 함께 한다. 모넌 모월 일에 영가 ( 永嘉 ) 에서 사휴자 ( 四休子 ) 가 시 쓴다.
不許紅塵到野亭 세속을 불허하여 들의 정자에 이르니
溪山烟月稱閒情 산수의경치가한적한 마음을 부르내.
興來投轄40)流連飮흥이 나면 못 가게 하느라 연이어 마시는데
醉夢終教烏喚醒취해 꿈꾸이도 끝내 새 소리가 슬을 깨우네.
林花依舊照溪亭숲의 꽃은변함없이 시내의 정자를 밝게 하나
人去留詩一愴情 떠난 사람이 지은 시가 한결같이 슬픈심정이네
報道買心應是酒도를 말하는 관대한 마음으로 이 술을 응하노니
但長醉宣不宜醒다만 길이 취하면 마땅한데 깨면마땅치않네
又二首
또2수를 차운하다
南季英 進士
남계영은 진사이다.
百年身世付園亭 백년의 신세를 동산의 정자에 줕이니
肯許紅塵宦路情세속에서 벼슬살이하던 마음을 수긍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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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영가(永嘉):안동 庫을을 뜻한다.
40)투활(投轄):만류하며 못 가게 하는 것을 뜻한다. 한(漢)나라 때 진준(陳遵)이 빈객을모아놓고 술마시기를 좋아하여매번
빈객들과 술을 마실 때마다 그들이 타고 온 수래 굴대의 쇠를뽑아서 우물에 던져버렸으므로아무리 급한 일이 계속하여 있
어도 가지 못했다.
有水有山因有酒 산수가 있으니 이로 인해 술이 있는데영목이 없으니 취하면 개를 사 없네.
無榮無辱醉無醒영욕이 없으니취하면 깰 수 없네
誰植溪心碧柳亭 시내에 푸른 버드나무를 심어 정자 되니
人兦世換惹生情사람 없던 세상이 바꿔어 정이 일어나내.
當時行樂無尋處 당시의 행락하던 곳을 찾을 수 없는데
猶有留詩問醉醒 오히려 시가 있어 취했다가 깸을 보내.
又
또차운하다
嘉靖辛五除豊基郡守時
周世鵬41)文敏42)公 愼齋 가정 신축년 풍기군수에 제수되었을 때이다.
주세붕은 문민공이며 호는 신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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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주세붕(周世鵬.1495-1554): 주세붕은 신기(神氣)가 매우 탁월하였으며.어렸을 때부터 주변에서 그를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라고 청찬하였으며이에 자손들까지 의탁할 것이라는 말을들었다.7세 때 모당이 병환으로 인해오래도록 머리를 빗지 못하자직접 머리를 감겨서 빗겨 드리고 이를 잡아드렸다.16세 때 모당의 부종(浮腫)이 심해지자 의술을 배워 직접 탕악을 끓여 봉양함에 잠과 식사도 있었으므로, 효동 (孝童)이라 불리있다.
놀러 다니는 것에는 관심 없이 학문에 몰두하여 18세에 향시(鄕試)에서 장원 급제하였는데시험관이 그의 답안지를 보고 극찬하다.
내직 외에 외적도 맡았으니, 강원도 도사•곤양 군수 풍기 군수 황해도 관찰사 등을 역임했다.부임하는 곳마다 학문을. 일으켜서 풍속을 교화하고 백성을구제하였다. 1541년에 풍기 군수로 부임했을 당시에 회헌(晦軒) 안향(安珦)의 고향인 순흥(順興)에 회헌 선생을 제사올리는 사묘(祀廟)를 세우고 주향(主享)으로 배향하였다.
1542년에는 회헌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학사(學舍)를세웠는데 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본받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명명하였다.
42 ) 문민(文敏): 시호(諡號 ) 이다.
當日風流說柳亭그옛날의 풍류는버드나무 정자가 말해주는데
至今溪水尙含情 지금도 시냇물은 옛 정을 머금었네.
綠陰正合兒孫醉 짙푸른 그늘이 정녕 자식과 후손을 취하게하는데
爲報黃鸝莫喚醒 꾀꼬리부르는 소리에 대답하느라 깨지나마오
又
또 차운하다
黃 彬 生員
황빈은 생원이다.
歷歷晴川繞一亭역력히 비개인냇물은 한결 같이 정자를 둘러있고
靣陽基地似含볕을 마주한 근거지는 정을 머금은 것 같네.
人間榮貴尊三樂인간의 영화부귀는 세 가지 즐거움을 높이는데
世事聞來醉復醒 世事가 들려오면 취했다가깨 다시 깨네
又
또 차운하다
琴軔 進士 松溪
금 인은행 진사이며
호가 송계이다.
任意經營辦一亭 임의로 힘써 정자 하나를 경영하는데
柳條牽挽幾人情버드나무 가지는 사람의 정을 몇 번이나 끌어당겼을까.
當時舊物渾凄斷그 당시의 옛사물마저 쓸쓸히 단절되니
壽席今辰願莫醒 오늘은 오래 자리하며 깨어나지 말기를 바라네.
又
또 차운하다
高應陟 43) 參奉 翠屛
고응!척은 참봉이며
호가 취병이다.
祇見書眞未見亭 때마침 글에서는 보여도 참으로 정자를 아직 보지 못했으니
傷今感古不勝情 옛 생각에 오늘 상심하여 정한(情恨)을 이길수 없네.
仍 44) 雲45)莫學人皆折 7대손과 8대손, 먼 후손들은 모두가지꺽는 사람들에게는 배울 게 없으니
唯學紫桑46)石上醒다만 옛 고향을 배우느라 돌 위에서 술을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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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 고응척 ( 高應陟,1531-1605 ): 자는 숙명(叔明) 이며, 호는 두곡(杜谷)또는취병(翠屛)이다. 분관은 안동 (安東) 이다. 김범(金範)의 문인으로1549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61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함홍교수 ( 成興教收)로 부임하여 문회당(文會堂)을 짓고「 대학장구혹문(大學章句或)」에 발문(跋文)을 지어 간행하였다.
「대학 (大學)」의 여러 편을 시조로 읊는 바 있다.1595 년에 풍기군수(豊基 郡守),이어회덕현감 (懷德縣監), 사성(司成)등을 역임 하고 들아왔다가 다시 경주부윤(慶州府尹) 으로 부임하였는데 바로 사직했다. 선산(善山)의 낙봉서원(洛峯書院)에 배향되었다.
44) 잉(仍):잉손(仍孫) 즉 7대손이다. 1대는 자(子).2대는 손자 (孫子).3대는 증손(曾孫). 4대는고손(高孫).또는 현송(玄孫).5대는 내손(來孫), 6 대는(昆孫 ), 7대는 잉손(仍孫), 8대는 운손 (雲孫ㅂ) 이라고 한다. 45 ) 운(雲): 운손 (雲孫), 즉 8 대 손이다.
46)시상(柴桑): 고향을 뜻한다. 도연명의 이름은 잠(潛). 자는 연명 또는 완량(元亮)이다. 호 는 오류(五柳)선생이라 불렀다.
인데 후세에는 정절(靖節) 선생이라 불렀다. 그가 낙향해 살았던 마을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가 있어 스스로 오류선생 이라 했다.
도연명은 친하 명산인 여산(廬山)과 파앙호(罷揚湖)가 있는 강서성(江西省)심양(尋陽) 사람이다. 심양을 진(晋)나라 때
는 '시상(柴桑)'이라 불렀다. 그가 평력령 자리를 박차고 시상교를 건너 집으로 돌아와 ' 귀거래사를 썼다.
又
또 차운하다
李孝良 奉事
이효랑은 봉사이다.
古人家胖古人亭고인의 집 주변에 고인의 정자 있는데
幾問風流豪客情호걸의 뜻으로 풍류를 몇번이나 보았는가
如今遺迹流傳後 이제갈이 남겨진 자취가 유전한 뒤로는
尙使來任醉飯 오히려 후손으로 하여금 술 깨고 취향을 일삼게하네
曾孫 孝彦증손효언이효향은 봉사이다. 고인의 집
又
또 차운하다
曾孫 孝彦
중손 효인
綠樹重陰作一亭 푸른 나무라 그늘이 짙어 정자 하나를 삼으니
無邊幽趣會元情 무한히 깊은 풍취 (風趣)47) 는 원래의 뜻을 모으 네.
初吟手澤靈根述 선조의 정령으로 쓴수택 (手澤)을 처음 음미하는데
莫負羣孫慰醉醒 많은후손들이술 깨고 취하며 위로함을 저버 리지 마오.
又
또 차운하다
玄孫 聲震
현손 성진
遺安基業百年亭 편안한 터전의 유업(遺業)은 백년의 정자이니
老柳猶含不盡情늙은 버드나무가 오히려 다함없는 정을 머금 었네.
小子正蒙餘慶遠 소자는 정히 먼 선조의 경복(慶福)이 남아있으니
綠陰奧處醉還醒 푸른 그늘이 깊은 곳에서 다시 취했다 깨는
구나.
又
또 차운하다
李興門 生員水北
이흥문은 생원이며.
호는 수북이다.
休說唐時短李亭 당나라 때 단리(短李)48)의 정자라고 말하지 말게
記存亭廢變無情기록되어 있던정자는 부서져 무정하게 변하였네,
何如五世空心樹 5 대에 걸쳐 전해지는데 어찌 하여 공심수(空心樹) 이겠는가.
老幹清陰閱醉醒 늙은 나무줄기가 푸른 그늘을 드리워 술 취하고 깨어나 본다네.
又并後說
또 차운함에 뒤에 설명을 아울러 쓰다
朴璥 東川
박 경은 호가 동천이다.
吾友金上舍聲震始伯 高祖公之家 在道村 川水之東 其門外 有柳堤焉 公夷而築之 因柳而爲之亭上 可坐數十人 母淸和節後 綠陰婆娑 於白沙之上 四隣之不期而會者 殆無虛日 或與之爭酌 而觀德 或與之棊酒 而送日樂天放 而自得之趣 其庶幾矣 公雖不事文墨 而風調自成興發於心 而詩出於口一絶題來怳然 有出塵之想 蓋其漸漬於先世文風 而晚來收拾 亦有餘也 一時從遊賡和之作 能使後人 起飲灑灑然 猶有風聲 公逝之後 公之子 上將公 諱砥 字平之 力於公劉之業 富以其隣 是亭之設席開尊於斯爲盛 其時文士之詠相繼而作輝暎於簡篇 而有若愼齋 周先生之詩 蓋其傑然特出於其間 則斯亭光彩 豈啻百倍 而金斯文光粹之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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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풍취(風趣): 아취(雅趣)또는 풍치(風致).
48 ) 단리 (短李): 당 (唐) 나라 때 이신(李紳)을 말한 것이다. 이신은 시를 잘하였는데 성남에 살았으며 체구가 매우 왜소 하여'
성남단리(城南短李)'라는별칭이 있었다 한다. 이신은 처음에 재질(才質)과 절조(節操)로써 진용도었다가. 뒤에 소인들의 모함으로 거의 화란을 당할 뻔했지만 정인(正人)들의 극력 구호로 풀려나 공명을 누렸다.
又以盡其家世之風流 繼述之美事 因以永傳于時 今年夏余乘閒 暇訪金上舍 上舍坐我 於柳亭 柳之大數圍 而以其古 其空腹之中人可立 而容三四 猶且虬技屈曲 綠影交輝 余奇其愈古而愈新 間之上舍而後 始知爲上舍高祖公之柳亭也 嗚呼 喬木世家 十罕一二 而獨君家比亭 傳之守之 今二 百年餘 以至于 上舍之身 則技技葉葉 無非四五代 封植之勤也 愛議之至也 手澤之存 宛然如昨 傳家之寶 孰有大於
此者乎 昔宋時 有三塊堂 國朝有政堂梅 而其子孫榮顯世莫與京 今上含能繼其先人之緒業 而使之復 起於今日 則後葉之峻茂 其無窮也 而人將兼美而稱之曰 槐也梅 也柳也 不其休歟 旣以 是勉上舍仍以書之于後 時天啓紀元之二年 初夏也.
나의 벗 창재(上舍) 성진(聲震) 김시백(金始伯)의 고조(高祖) 이신 공(公)의 가택(家宅)이 도촌에 있었다. 개울 동쪽으로 문밖에 버드니무 언덕이 있었는데, 공께서 평평하게 토양을 정비 하셨다. 그 위에 있는 버드니무로 인해 정자를 잠으시고 정자 명칭을 삼으셨으니, 가히 수집 명의 사람들이 앉을 수 있었다.
매번 음력 4월 이후부터 녹음이 나부낄때마다 흰 모래톱 위로 사방(四方)의 친척들이 약속하지 않아도 모였으니 빈 날이 거의 없었
다. 그들과 더불어 잔을 맞대어 선조께서 심으신 덕을 관조하였다. 간혹 더불어 바둑 두거나 술 마시어 날을 보내며 절기를 즐겼으니 자득(自得)49)의 정취가 없을 수 없었다. 공께서는 비록 문장 쓰는 것을 일삼지는 않을지라도 풍취(風趣)가 조화를 이루어 마음에서 흥을 일으켜 감발하면 시가 되고 입에서 절구 한 수가 흘러나오셨으니 놀랍다. 때 묻은 세상을 벗어난 사상이 있으신대 이는 대체로 그 선조로부터 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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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자득(自得): 스스로 깨달아 얻음.
점차 쌓여진 문풍(文風)이니 만년(晚年)에 이를 시정신( 詩精神)에 담아 간직하시니 또한 여운이 있으셨다. 일시에 함께 학문 으로
서로 따르던 선비들께서 화답하신 시편들이 이어졌는데. 능히 후인(後人)들로 하여금 일어나 음미할수록 맑고 맑은 시정신이 담겨 있었다. 여전히 풍성(風聲)이 있으신대 공께서 별세하신 뒤 공의 자제인 상장공 (휘 지(砥), 자 평지 ( 平之)께서 공의 유업 (遺業)에 힘쓰셔서 그 풍화 (風化)의풍성함이 주변의 가까운 이웃까지 이어졌다.
이 정자에서 자리를 마련해 이 풍화(風化)의 유업 ( 遺業)을 존모하니 번성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 문사들께서 음영(吟詠)하신 전통을 서로 게승하였으므로 책의 시편(詩篇) 속에서 찬란히 빛나게 되었다. 신재(愼齋) 주(周)선생 께서 읊 으신 시가 그러한 것 같으니 대
개 그 작품은 걸연(傑然)히 책 속에서도 특히 빼어났다. 이 정자의 광채로움이 어찌 백천 가지 뿐이겠는가.사문(斯文)이신 김광수(金光粹 )선생의 서문이 또한 그 가문에서 대대로 이어진 풍류를 핍진하게 나타내어 훌륭한 유업(遺業)에의 판술이 연계되었기 때문에 당대부터 영원히 전해진 것이다.
올해 여름, 나는 한가한 틈을 타서 김 상사(上舍)께서는 버드나무 정자에 나를 앉히었다. 버드나무의 둘레는 수치로도대단한데 나무가 오래되어 그 나무의속이 비니 그 안에 사람들이 가히 서있을 수 있고 용량은 서너 명이었다. 또 긴 가지가 구불거리며 휘어저서 푸른 그림자가 서로 반짝이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나무가 오래될수록수록 더욱 더 신록(新綠)인 것이신기하여 상사(上舍)께 여쭌 뒤에야 비로소 상사 (上舍)의고조(高祖)이신 공의 버드나무 정자임을 알게 되었다.교목(喬木)이 대대로 보존된 가문은 열이면 한둘인데 유독 그대의 가문에 이 정자가 전해지고 지켜지니오늘날 이백 여년이 되어 상사 ( 上舍)의 육신에 도달하였다.
가지마다 잎사귀마다 4대5대에걸친 봉식(封植)에의 근면 ·아끼고 보호함의 지극함이 없지 않았다. 선조(先祖)의 수택 (手澤) 이 잔존(殘存)하여 완연히 어제 같다. 가문에서 전해온 보배이니 누가 이보다 더 큰 것을 가지고 있겠는가. 옛 송(宋)나라 때에는 삼괴당 (三槐堂)이 있었고 본조에는 정당매(政堂梅)가 있어서 그 자손이 대대로 영화롭게 현달함이 이보다 더 클 수 없었다.
지금 상사(上舍)께서는 능히 선인(先人)서업 (緒業)을 계승해 오늘날 그것을 다시. 흥기하도록 하셨다. 나중에 나온 잎의 무성함으로 그 나무는 무궁한 것이다.
사람과 나무의 장성(將盛 )이 모두 아름다워서 말하기를, "느티나무.매화나무, 버드나무 는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 " 라고 하였다.
이미 이 때문에 상사 (上舍)께서 면려(勉勵) 하셨으니, 이러한 사실을 뒤에 쓴다. 땨는천계(天啓) 기원(紀元) 2 년 초여름이다.
沙上扶踈古柳亭 모래톱 위 옛 버드나무 정자에 가지가 무성한데
技條猶帶百年情 나뭇가지들은 오히려 백년의 정취를 띠네.
仁村世世風流地 어진 마을은 대대로 풍류의 땅이니
幾度詞人醉變醒 사인(詞人)50)들이 술 취했다가 변하여 깨어남을 몇 번 하였는지 셀 수 있을까.
又
또 차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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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사인(詞人): 시문을 짓는 사람. 문사(文士)
權 紀 參奉 龍巒
권 기는 참봉이며
호는 용만이다.
處處溪山皆有亭산수의 곳곳마다 모두 정자가 있는데
兹亭獨使感吾情 이 곳의 정자는 유독 나의 뜻을 감동시키네.
主翁剩得淵明趣 주인옹께서는 도연명의 흥취를 더욱 체득하셨으니
肯學三問澤畔醒 삼려(三閭) 51)의 못가에서 깨우침을 즐겨 배우네.
又二首并序
또 2 수를차운함에 아울러 서문을 쓰다
金遇秋52) 進士 長笑
김우추는 진사이며호는. 장소이다.
吾家有一孤松童童然 可人鐵幹虬枝盤互屈曲 莊而不俗 澹而不 塵依稀矮小 古怪丈夫掀髥披褐偃蹇 獨立於荒閒寂寞之界 乃王 父年當時 手植而亭之者也 逆指幾二甲 而無恙 余在羈丱 53 ) 常攀綠嬉戲 於其下 只愛其亭亭而根疎疎 而葉勁 資貞質 冬夏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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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삼려(三閭): 초(楚) 나라의 삼려대부(三閭大夫)가 굴원(屈原)이며, 굴원의 사당을 삼려묘 (三間廟)라고 한다.
52) 김우추(金遇秋,1581 ~1642): 자는 중정(仲亭)이며,호는장소(長笑)이다. 본관 함창(咸昌)이며, 부친은 김도(金陶) 이다.
어려서 모친상을 당했으나 상제 (喪制)를 행함이 성인과 똑같았다. 같은 해에 중부(仲父 ) 인 물암(勿巖) 김 융(金隆)의 상을
당하였다.
가르침을 잊지 않고 책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36세에 진사 (進士)에 올랐다. 성품이 화이(和易)해서 벗을 만날 때는 항상
웃는 모습이어서 호를 ' 장소(長笑)'라고 명명하였다. 맏형 김득추(金得秋),아 우 김치추(金値秋)가 모두문장에 능해 사람들에게 '
삼추문장(三秋文章)' 이라 는 칭송을 받았다.
53)기관(羈丱): 소년시절의 머리 양식.
凋而已爾 後齒髮壯 知覺稍人間世悲歡憂樂 又從而飽更之 踞王 父歿 二十餘曆 追王父而不得見 見王父之所親嘗者 則如見王父焉 始覺昔日松之愛 不如今日愛松之切也 每眄柯耳 風宛平陪杖屨 奉謦欬雨露風樹之感 不期然而然 蘇州古時綠之句 信不虚矣 繫豈獨吾亭松哉 金上舍始伯氏家住道村 川上亭有數圍獨柳 雖 星霜既久 幹腹半剝 而方春和煦 千絲嚲黃 余適就蔭而言及焉 上舍愴然移晷曰 斯吾高祖之所樹也 先祖之風詠賓主 於是亭 會幾許時 而繩繩 以到吾身 則吾家長物莫是柳 若常懼造物多猜封植 或情霜侵風饕 無以寄雲仍追遠之懷也 余作而歎日 有是哉柳也 何地之得也 何壽之長也 愚溪之柳祗帶還客之愁 隨堤之柳 空鎖兦國之羞 豈若江亭一株 避塵喧謝斧斤 閱祖孫之家 世送瀟灑之日月 與潯陽老先生之五柳 千載同臭味也 余與上舍 同宗也 同鄉也 同業也 松與柳 雖非一種 而其爲引興之物 則同也 植之時 雖異年代 而經先祖之手 則同也 培之壅之 息焉遊焉 目寓 而思隨之以無忘 先祖之心 又同也 余於是柳 可無一言之譽 而 雖遭角弓 54 ) 之謝 不敢固避矣 上舍手示一小帖喝余 效嚬跽而卒業 有詩若干首 序若干首 首一絶 乃種柳公之所題也 繼而和者 皆一時 朋執及後來諸彦 而周先生愼齋之筆 亦在其中焉 僭著畫 蛇足 詎敢云詩聊以詑兩家喬木之慶嘉 上舍孝思之篤 而祝後葉 之無不爾式承也 節近清和 翠陰將稠 右圍棊 左把杯 賦粘空之 飛絮 繼前人之華軌 不亦樂乎 上舍笑而不答 於是乎書
우리 가문에 고고(孤高)한 소나무 한 그루가 있어 우뚝한데 남들이 보기에는 단단한 줄기와 굵은 가지가 서로 감기면서 구 부러져
있다. 웅장하여 세속의 생물 같지 않으며 기상이 맑으니 속세의 때가 묻거나 희미하거나 왜소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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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각궁(角弓): 불활.「 시경 ( 詩經 )」의 ' 각궁'시는 군주가 친척들을 옳게 다스리 지 못해 불화하는 까닭에 불운이 닥칠 것을 두려워해서 부른 노래이다.
옛 기이한 장부가 수염을 치켜들고 베옷을 잡고 꼿꼿한 모습 으로 한적하게 적막한 경계에 홀로 서 있는 것 같다. 왕부 ( 王 父)께서 연부역강(年富力强)하실 때 손수 심으시고 정자로 삼 으신 것이다. 손가락으로 세어보아도 거의 120 년이 지났는데도 무탈하다.
내가 소년의 어린 나이에는 항상 소나무 아래에서 그 나무를 붙잡고 즐겁게 놀았다. 유독 그 소나무의 정정함이 사랑스러우니
뿌리는 성글어도 잎은 단단하였다. 자품은 곧은 기질을 지 녀 겨울과 여름에도 말라죽지 않을 따름이다. 훗날 나이가 장성해져
서 세상의 슬픔과 기쁨 · 근심과 즐거움을 점점 더 깨달아 또한 따르면서도 그것을 충분히 겪었다.
의지하던 왕부께서 별세하신지 20여 년이 지났으니 왕부를 그리워해도 뵐 수 없었다. 왕부께서 친히 아끼신 그 소나무를 보 니 왕부를 뵌 것과도 같았다. 비로소 지난 날 소나무를 사랑한 마음이 지금 소나무를 사랑하는 간절함과 같지 않음을 깨달았으니 매번 나뭇가지만 살필 뿐이었다. 풍취 (風趣 ) 가 완연하면 선조를 시종하거나 말씀을 받드는데 비와 이슬을 견디신 풍수 지탄 (風樹之嘆 ) 의 감흥을 기대하지 않아도 자연히 그렇게 된다.
' 소주 ( 蘇州 ) 옛날의 저푸르름'이란 시구(詩句)는 참으로거짓이 아니다. 대대로 이어지는 나무가 어찌 유독 우리 정자의 소나 무뿐이겠는가. 상사(上舍)김시백(金始伯)씨의 가문은 도촌에 살고 있다. 개울 위 정자처럼 둘레를 헤아릴 수 없는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홀로 서있다. 비록 나무가 겪은 세월은 이미 오래여도 줄기와 속은 반만 박상 ( 剝喪)되었다.
바야흐로 봄이 되어 따뜻해 지면 수많은 실오라기 같은 가지 가 노랗게 휘어진다. 내가 때마침 나무 그늘에 가겠다고 언급하니 상사는 창연히 해가 질 무렵 말하기를."이 나무는 우리 고 조께서 심으신 나무입니다. 선조(先祖)의 풍류(風流)와 ,음영(吟詠)은 이 버드나무 정자에 빈객과 주인을 일찍이 얼마나 많이 만나게 하였을까요. 이것이 이어지고 이어져 나에게 도래하니 우리 가문 최고의 보물
은 이 버드나무만한 것이 없습니다.
항상 조물주가 버드나무의 봉식(封植)을 매우 시기할까 두려워한다거나 혹여 버드나무에 서리가 침노하거나 바람이 탐내 것을 소홀히 여겼다 면 후손들이 먼 선조의 덕을 기리는 나음을 붙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나는 서문을 짓고 감탄해 말하기를, " 맞습니다! 버드나무는 어떻게 이러한 토지에 자리하였을까요.어떻게 수명이 오래 유지될 수 있었을까요. 우계의 버드나무는 마침 떠나려는 나그네의 근심을 띠었고, 수 (隋) 나라 양제(煬帝)가 쌓은 운하 ( 運河)제방의 버드나무는공연히망국의 수치를. 봉쇄하였습니다.
어찌 강가의 한 그루 버드나무 정자가 티끌세상에 소란스런 도끼를 피함과 같을까요. 조손(祖孫)의 가문을 살펴보니 대대로 맑고 깨끗한 세월을 보냈으며, 심양 (潯陽)고을 노선생이신 도연명의 버드나무 다섯 그루와 더불어 천년 세월을 똑같은 취미로 살으셨습니다. 저는 상사(上舍)와 같은 종중이며 같은 고향이며 같은일을 합니다.
소나무와 버드나무는 비록 한 종류는 아니라 해도 그 나무들은 흥취를 끌어당기기 위한 식
물이란 점에서는 같습니다. 심은 시기가 비록 연대 차이는 있다 해도 먼 조상이 손수 경영 하셨다는 점에서는똑같습니다.
기르고 잘 북돋아주니 쉴 수 있으며 즐길 수 있습니다.눈에 맡기면 생각이 따르는데한도 끝도 없이 영원하니 선조 ( 先祖)의 마음과도 또한 똑같은것입니다. 제가 이러한 버드나무에게 가히 말 한 마디의 찬양을 할 수 없다면 비록 각궁을 만나기를 삼가도 감히 피할수 없을 것입니다.
상사(上舍)께서 손수 작은책 한권을 저에게 보이시며 시운에 맞추어 화답하는 것을 부탁하셔서 두려워 주저하다가 일을 마쳤습니다. 시 약간 수와 서문 약간 수가 으며 첫머리 절구 한 수는 곧 버드나무를 심으신 공께서 쓰신 것입니다.
이 시를 계승해 화운하신 분들께서는 모두 일시에 손잡으셨던 벗과 후세의 여러 선비들이십니다. 주 신재 선생의 필적 또한 그 가운데 있습니다. 저는 참람스럽게 사족(蛇足)을 그려 나타냈으니 어찌 감히 시를 썼다
고 자랑만 하겠습니까 두 가문의 우뚝한 나무가 선사한 축복과 상사(上舍)께서 효를 생각하신 마음의 돈독함으로 인해 후손들의 절도(節度)있는 계승이 없을 수 없음을 축원합니다. 4월에 근접한 절기여서 녹음은 울창해져 우측에서는 바둑두고좌측에서는 잔 잡아 시를 짓는데 날리는 버들 솜털이 붙었다 사라짐을 시로 읊습니다. 옛 선조(先祖)의 훌륭한 궤적(軌跡)을 계승함이 또한 즐겁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상사(上숨)께서는 웃으시며 말씀이 없으셔서 여기에 쓰노라.
君我松亭與柳亭 나의 소나무 정자처럼 그대에게 버드나무 자 있으니
端能提起聿追情오로지 선조를추모하는 뜻을 따를 수 있네.
相期後葉勤封植잎나기를 서로기약하며 부지런히 봉식하 니
莫遣芳辰但醉醒좋은 날을다만술 취했다가 깨는 것으로 내지 마오.
平生每感古思亭평생토록 고인의 마음이 담긴 정자에서 매번 느끼는데
樹木依依55)亦有情 한들한들 수양버들 또한 정이 있구나.
吾世君家亭上柳5대 후손인 그대 가문 정자 위의 버들은
孝思眞箇喚人醒참으로 줄기마다 효를 생각해 사람 불러 깨우네.
<다음에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