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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종격투기 원문보기 글쓴이: [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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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어’야 말로 가을의 전설이다. ‘집 나간 며느리도 가을 전어 굽는 냄새에 돌아올 정도’이기 때문이다. 프로야구에도 전어가 있다. 이른바 ‘미친 선수’들이다. 정규 시즌 내내 부진하다가 한국시리즈만 되면 펄펄 나는 '미친 사내'들 때문에 야구 팬은 열광하고, 시리즈 판도는 순식간에 뒤바뀐다. 다른 팀 팬들 역시 ‘미친 선수’들의 활약을 보려고 TV 앞에 모이게 마련이다. 31번째 한국시리즈를 맞아 <스포츠춘추>가 역대 한국시리즈 ‘미친 선수’BEST 10을 꼽았다.
![]() 1984년 한국시리즈가 끝나고 롯데 유두열(사진 왼쪽)과 최동원이 부상으로 받은 승용차 위에 앉아 팬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사진=롯데) |
1984년 한국시리즈 롯데 유두열
정규 시즌 성적 : 89경기 타율 2할2푼9리 11홈런, 32타점, 9도루
한국시리즈 성적 : 7경기 21타수 3안타, 1홈런, 3타점
1984년 한국시리즈는 가장 극적인 전설이 탄생하는 무대였다. 전설의 주인공은 최동원. 롯데 에이스 최동원은 이해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따내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최동원의, 최동원에 의한, 최동원을 위한’무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유두열이 없었다면 최동원은 ‘전설’보단 ‘비운의 스타’로 남았을 일이다.
마산상고-한국전력 출신의 유두열은 아마추어 시절 실업야구 MVP에 뽑힐 만큼 타격이 좋았다. 1983년 롯데가 창단할 때 유두열에게 A급 선수에 해당하는 연봉 2천만 원을 지급한 것도 그의 지명도가 매우 높기 때문이었다.
데뷔 첫해 유두열은 실력을 발휘했다. 타율 3할7리, 9홈런, 36타점으로 팀 공격을 이끌었다. 그러나 정규 시즌이 끝나고 그에게 남은 건 상처뿐이었다. 타율 5위를 했는데도 롯데는 “팀 성적이 좋지 않다”며 연봉 인상에 난색을 표했다. 구단과의 대립 끝에 합의점을 찾긴 했지만, 유두열은 몸도 마음도 이미 롯데를 떠난 상태였다. 아니나다를까 1984년 그의 성적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곤두박질쳤다. 타율은 8푼이나 떨어져 2할2푼9리에 그쳤고, 경기 중간 대타로 바뀌는 일도 잦았다.
부진은 한국시리즈에서도 이어졌다. 유두열은 한국시리즈 6차전까지 17타수 1안타를 기록했다. 롯데 타자들 가운데 가장 부진했다. 언론과 야구 관계자들은 롯데 강병철 감독에게“컨디션이 좋지 않은 유두열을 다른 선수와 교체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강 감독은 “언젠가 좋아질 것”이라며 유두열을 7차전에도 기용했다. 사실 강 감독은 타격은 부진해도 ‘강견’인 유두열이 외야에 버티고 있으면 삼성 주자들이 감히 2루에서 홈으로 뛸 수 없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니까 타격보단 수비에 방점을 뒀다는 뜻이다.
유두열은 7차전에서도 타격이 좋지 못했다. 2회 병살타, 4회 삼진을 기록한다. 롯데 팬들은 시쳇말로 ‘미치기 일보 직전’상황. 삼성에 3대 4로 뒤진 8회말 1사 1·3루 유두열에 마지막 찬스가 찾아온다.
“타석에 들어서려는데 강 감독님이 불렀다. ‘니 사인 똑바로 봐라. 스퀴즈 사인 나갈지 모른데이’라고 했다. 마음 속으로 스퀴즈를 생각하고 있는데 2구째까지 사인이 나오지 않았다. 1볼 1스트라이크에서 속구가 오면 바로 치자고 결심했다. 운이 좋았다. 속구가 날아왔고, 본능적으로 스윙했다. 처음엔 파울이 되는가 싶었는데, 아! 그게 담장을 넘기지 뭔가.”
유두열의 한방으로 롯데는 6대 4 대역전극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홈런이 결국 그해 한국시리즈의 결승점이 됐고, 정규 시즌 내내 부진했던 유두열은 홈런 한방으로 한국시리즈 MVP에 올랐다. 현재 충훈고에서 타격인스트럭터로 활동 중인 유두열은 자신이 미칠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으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정신력”을 꼽았다.
![]() 1987년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 해태 선수들(사진=해태) |
1987년 한국시리즈 해태 김준환
정규 시즌 성적 : 63경기 타율 2할4리, 2홈런, 23타점
한국시리즈 성적 : 4경기 12타수 6안타, 2홈런, 4타점
“천하의 해태도 이번엔 삼성한텐 안 된다.”1987년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야구전문가 대부분은 삼성의 완승을 예상했다. 그도 그럴 게 그해 삼성은 전·후기리그 우승을 독식했다. 마운드와 타선, 수비 어디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그해 김시진은 23승을 거두며 다승왕에 올랐고, 진동한은 12승으로 김시진의 뒤를 받쳤다. 타선은 사상 초유의 팀 타율 3할을 기록할 만큼 강력했는데, 팀 홈런 역시 105개로 역대 최고를 자랑했다.
반면 해태는 전기리그에서 공동 3위에 그치고, 후기리그에서도 막판에 롯데, MBC를 제치고 가까스로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따냈다. 플레이오프서도 OB(두산의 전신)와 5차전까지 가는 격전을 치르고 3승2패로 힘겹게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터였다. 무엇보다 해태는 시즌 막판 ‘에이스’ 선동열이 어깨부상을 당해 한국시리즈 출전이 불투명했다.
하지만, 삼성은 에이스 김시진을 투입하고도 1차전에서 해태에 졌다. 1984년 2패, 1986년 3패로 한국시리즈서 승리없이 5패를 기록한 김시진은 이번에도 고지를 넘지 못하고, 패전투수가 됐다. 삼성은 2차전에 재일교포 잠수함 투수 김기태를 내세운다. 이때 해태 김응용 감독이 꺼내 든 카드가 바로 김준환이었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해태 중심타자로 활약하던 김준환은 1987년엔 잔부상과 부진으로 자주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이해 그가 기록한 타율 2할4리, 2홈런, 23타점은 그의 명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김준환은 OB와의 플레이오프서 15타수 5안타 1타점을 기록하며 맹활약했고, 여세를 몰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도 3타수 1안타를 기록했다.
“큰 경기 승패는 베테랑이 좌우한다”고 믿었던 김 감독은 2차전에서도 김준환을 다시 7번 타자로 선발 출전시킨다. 김 감독의 예상은 맞았다. 김준환은 2회 첫 타석에서 좌전안타를 치고 나가 결승 득점을 올렸고, 경기 중반 안타 1개를 더해 4타수 2안타를 기록했다. 팀 내 유일한 멀티 히트였다.
3차전에서도 김준환은 맹활약한다. 양팀이 2대 2로 맞선 4회, 김준환은 삼성 좌완 권영호를 상대로 우월결승 홈런을 때려냈다.
4차전은 ‘노장은 죽지 않았다’를 현실에서 보여준 경기였다. 김준환은 팀이 0대 1로 뒤지던 2회 김시진을 상대로 좌월 2점 홈런을 터트린다. 이 홈런을 맞고 김시진은 자멸했고, 삼성 역시 ‘해태의 벽’을 넘지 못하고 4연패로 고개를 숙여야 했다.
3차전 역전 결승홈런에 이어 4차전에서도 역전 2점 홈런을 때린 김준환은 기자단 투표에서 총 24표 가운데 23표의 압도적인 득표로 한국시리즈 MVP에 올랐다. 현재 김준환은 원광대 야구부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 MBC 유니폼을 입고 있는 마지막 훈련을 받고 있는 LG 선수들 |
1990년 한국시리즈 LG 김영직
정규시즌 : 96경기 타율 2할6푼8리, 6홈런, 40타점
한국시리즈 : 4경기 12타수 4안타, 5타점
22년 전. LG는 지금의 LG가 아니었다. ‘근성의 팀’이었다. 그해 LG는 시즌 종료 19경기를 남기고 빙그레에 4.5경기 차로 뒤진 2위였다. 누가 봐도 정규 시즌 1위 가능성이 희박했다. 그러나 LG는 19경기에서 14승5패를 기록하며 정규 시즌 1위로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다.
특히나 OB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신인왕 김동수의 9회말 끝내기 홈런으로 우승을 확정 짓는 장면은 LG가 얼마나 강팀인지를 잘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이해 LG는 유난히 역전승이 많아 ‘역전의 명수’라는 별명이 달렸다. 한국시리즈에서도 LG는 강팀이었다. ‘강호’삼성을 맞아 4전 전승으로 시리즈를 끝냈기 때문이다.
이때 LG의 가장 큰 장점은 ‘등번호보다 팀명을 중시한’선수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좌타자 김영직이 그랬다. 김영직은 시즌 내내 주전자리를 확보하지 못했지만, 언제 어디서든 한 번의 대타 출전을 위해 준비하고 또 준비하는 이였다. 우투수가 선발일 땐 4번 타자로 출전하기도 했던 김영직은 안타수(54개)에 비해 타점(40타점)이 많은 ‘찬스에 강한 선수’였다.
LG 백인천 감독은 2차전 삼성 선발이 언더핸드 김성길임을 고려해 김영직을 4번 타자에 기용했다. 작전은 성공했다.
김영직은 팀이 1대 2로 뒤진 9회말 대기타석에 있었다. 무사 1, 2루. 타석엔 김상훈이 있었다. 김상훈은 LG 타자 가운데 최고의 타격감각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투수는 당대 최고의 우완 정통파 김상엽. 결과는 병살이었다. 순식간에 2사 3루가 되자 김상엽은 자신감을 얻은 듯했다.
타석에 선 김영직은 초구로 변화구를 예상했다. 역시 변화구가 들어왔다. 하지만, 김영직은 치지 않았다. 2구는 무엇을 던질까. 다른 타자였다면 속구를 노렸을 일이었다. 그러나 김영직은 ‘다시 변화구가 오리라’예상했다. 1볼 노스트라이크에서 김상엽은 2구째 승부구를 던졌다. 변화구였다.
“딱!”
김영직의 배트가 힘차게 돌아갔고, 타구는 중견수 앞으로 떨어졌다. 기적같은 동점타. 김영직은 연장 11회말 1사 만루에서도 볼넷으로 출루하며 밀어내기 결승타점을 기록했다.
김영직은 “내가 봐도 가을만 되면 무척 강했던 것 같다”며 “가을 무대를 철저히 준비한 게 도움이 됐지만, 눈싸움에서 이긴 것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고 회상했다. 눈싸움이라, 무슨 뜻일까.
“포스트 시즌 타석에 서면 투수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투수 대부분은 내 눈을 피했다. 그걸 보고 ‘아, 나한테 유리하겠구나’하는 확신을 느꼈다. 실제로 눈싸움에서 이기면 항상 안타를 기록했다.”
LG에서 선수와 지도자로 26년간 근무하며 ‘영원한 LG맨’이길 바랐던 김영직은 올 시즌을 끝으로 LG에서 나왔다. 김영직은 계속 현장에서 선수들을 지도하길 바라고 있다.
![]() OB 정수근 |
1995년 한국시리즈 OB 정수근
정규 시즌 : 117경기 타율 2할1푼4리, 10타점, 25도루
한국시리즈 : 5경기 3타수 1안타 1타점 3득점
‘경부선 시리즈’. 1995년 OB와 롯데의 한국시리즈를 야구인들은 그렇게 불렀다. 경부선 종착역인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한국시리즈는 그때가 사상 처음이었다.
1982년 박철순의 호투와 김유동의 홈런으로 한국시리즈 원년 우승을 차지했던 두산과 1984, 1992년 두번의 정상 도전을 모두 성공시킨 롯데는 서로 ‘우승은 우리 것’이라며 목소릴 높였다.
1차전은 염종석이 호투한 롯데 승리였다. 1982년부터 1994년까지 한국시리즈 1차전을 승리한 팀이 최종 우승을 거머쥔 경우는 모두 10번이었다. 예외가 있다면 2번. 삼성이 OB에 1차전 무승부 이후 2차전에서 이기고도 내리 4연패했던 1982년과 빙그레가 해태에 1차전 승리 후, 역시 4연패 당했던 1989년이었다.
그러나 기적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렸다. 2차전 롯데 선발이 플레이오프 MVP로 뽑혔던 좌완 에이스 주형광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OB 선발 권명철의 힘이 더 강했다. 권명철은 9회까지 2안타 1실점으로 완투하며 팀의 2대 1 승리를 이끌었다.
3차전은 ‘황태자’ 윤학길과 ‘신예’ 진필중의 대결이었다. 많은 야구인은 ‘3차전 승리팀이 시리즈 최종 승리팀이 될 것’이라며 ‘양팀 모두 3차전에 사활을 걸 것’이라고 예상했다.
9회까지 2대 2로 동점을 이룬 두 팀은 연장전에 돌입한다. 이때 등장한 OB의 ‘미친 선수’가 바로 신인 정수근이었다.
연장 10회초. 1사 후 김민호가 중전안타를 치고 출루한 뒤 2루 도루에 성공한다. OB 김인식 감독은 장원진을 빼고 대타자로 정수근을 타석에 세운다. 그해 덕수상고를 졸업하고 프로에 데뷔한 정수근은 정규 시즌에선 주로 대수비, 대주자로 활약한 신인이었다.
김 감독은 “그해 타율은 2할1푼4리밖에 되지 않았지만, 우투수 공을 잘 쳤다”며 “벤치에 앉아있는 정수근의 눈빛이 무척 날카로워 ‘뭘 해도 하겠다’는 감(感)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감은 맞았다. 정수근은 롯데 구원투수 김상현으로부터 우중간을 꿰뚫는 3루타를 뽑아내며 팽팽했던 동점 행진을 마감했다. 정수근은 이어 김상호의 1루 땅볼이 내야안타가 되는 사이 잽싸게 홈까지 밟아 점수 차를 4대 2로 벌려놨다.
정수근의 ‘원맨쇼’로 OB는 시리즈 운명이 달린 3차전을 승리할 수 있었다. 만약 이 경기에서 두산이 패했다면 1995년 한국시리즈 주인공은 롯데가 됐을지 모른다. 어쨌거나 3차전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린 정수근은 경기가 끝나고서 OB 팬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그리고 2003년까지 두산 유니폼을 입고 뛴다.
역설적이게도 2003시즌을 끝으로 FA(자유계약선수)로 풀린 정수근은 9년 전 자신이 한국시리즈에서 무너트렸던 롯데로 둥지를 옮긴다. 많은 롯데 팬은 정수근이 1995년 그랬던 것처럼 ‘우승 전령’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1995년의 생기발랄했던 정수근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는 각종 사건 사고에 휘말리며 2009년을 끝으로 야구계를 떠났다. 현재 정수근은 개인사업과 인터넷 야구중계 해설을 병행하고 있다.
![]() 1999년 한국시리즈에 우승한 한화(사진=삼성) |
1999년 한국시리즈 한화 조경택
정규시즌 : 118경기 타율 2할3푼2리, 2홈런, 20타점
한국시리즈 : 12타수 1안타 1홈런 1타점
‘4전 5기’. 1999년 한화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컫는 말이었다. 한화는 전신인 빙그레 시절 1988, 1989, 1991, 1992년 한국시리즈에 올랐지만, 한번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당시 빙그레는 최강 전력이었다. 정작 한화가 우승을 맛본 1999년은 ‘잘해야 4강 턱걸이 후보’라는 냉담한 평을 듣던 때였다. 한화는 1997, 1998년 2년 연속 7위에 그쳤다.
그래서일까. 한화는 1999년 시즌 전부터 배수진을 쳤다. 사장 이하 대리까지 이미 사표를 제출했다. 올 시즌까지 팀 성적이 좋지 않으면 모두 보따리를 싸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런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한화는 이희수 감독을 새 사령탑으로 앉히고, 유승안 배터리 코치를 수석코치로, 이정훈을 1군 타격코치로 발탁하며 선수단 분위기를 다잡았다. 여기다 전년도 외국인 선수 영입 실패를 교훈삼아 일찌감치 친분이 있던 미국 시애틀 매리너스와 접촉, 댄 로마이어를 영입했고, 발 빠르고 수비폭이 넓은 데다 타격정확성까지 갖춘 제이 데이비스를 데려왔다.
트레이드 시장에도 적극 뛰어들어 투수 노장진을 삼성에 내주고, 톱타자 최익성을 수혈했다. 내친 김에 한화는 유니폼 교체, 프런트 조직개편으로 구단 전체에 새바람을 일으킨다.
구단의 피나는 노력은 결국 가시적 성과로 이어졌다. 매직리그 2위로 플레이오프에 올라 드림리그 1위 두산을 4연승으로 꺾고서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한 것이다. 한국시리즈에서도 한화는 롯데를 4승1패로 가볍게 꺾으며 구단 창단 이래 첫 우승을 맛본다.
당시 한화의 우승 주역은 잘 알려진 데로 송진우, 정민철, 이상목 등 선발 3인과 마무리 구대성이었다. 타선에선 외국인 선수로는 첫 ‘30(홈런)-30(도루) 클럽’에 가입한 데이스와 45홈런, 109타점을 올린 4번 타자 로마이어가 주인공이었다. 여기다 27홈런, 86타점으로 녹슬지 않은 방망이 위력을 뽐낸 장종훈도 1등 우승 공신이었다.
하지만, 정작 한화 우승의 숨은 주역은 포수 조경택이었다. 1992년 OB에 입단해 1995년부터 한화에서 뛰기 시작한 조경택은 전형적인 ‘수비형 포수’였다. 그의 통산 타율이 2할3푼1리인 것만 봐도 안다. 프로 12년 동안 그가 때린 홈런도 15개에 불과하다. 하지만, 영리한 공배합과 안정적인 투수리드는 타율 3할 타자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그의 진가가 발휘된 건 1999년 한국시리즈였다. 그해 한화는 포수자원이 풍부했다. 하지만, 정작 중심이 되는 포수는 보이지 않았다. 고심 끝에 이 감독은 수비가 안정적인 조경택을 1차전부터 5차전까지 선발 주전포수로 출전시켰다.
이 감독의 선택은 옳았다. 조경택은 한화 투수들을 잘 이끌었다. 특히나 5경기 내내 공배합을 바꾸는 통에 롯데 타자들은 어떤 공을 노려야할지 난감해하다 시리즈를 마쳤다. 당시 롯데 주축타자였던 박정태는 “원체 한화 투수들의 공이 좋기도 했지만, 조경택의 공배합이 뛰어나 매경기 득점이 3점 이하에 그쳤다”고 회상했다.
타석에서도 결정적인 한방을 기록했다. 2차전 2회 조경택은 롯데 선발 문동환의 초구를 받아쳐 좌측담장을 넘기는 솔로 홈런을 터트렸다. 1대 0으로 앞서던 한화는 이 홈런으로 2대 0으로 도망갔고, 결국 4대 3으로 승리했다. 그해 정규 시즌에서 홈런을 2개밖에 치지 못했던 조경택은 그의 야구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홈런을 한국시리즈에서 뽑아낸 것이다.
현재 조경택은 한화 배터리 코치로 활약하고 있다.
![]() 2004년의 현대 조용준은 1984년의 최동원과 닮았다 |
2004년 한국시리즈 현대 조용준
정규 시즌 : 63경기 10승3패 34세이브 평균자책 2.28
한국시리즈 : 7경기 12.1이닝, 3세이브, 평균자책 0
2004년 한국시리즈는 한국 최고의 대기업간의 결전이었다. 현대와 삼성이 주인공이었다. 시리즈 전부터 현대는 “고위층에서 ‘반드시 삼성엔 이겨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며 “우리가 삼성을 누를 건 야구밖에 없다. 그라운드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승리하자”고 선수단을 독려했다. 삼성도 마찬가지였다. “꼭 현대만은 이기라”며 “만약 현대에 이기면 사상 최고의 보너스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한국시리즈엔 현대와 삼성가(家)가 총출동했고, 양팀 선수들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시리즈를 치렀다. 객관적인 전력에선 현대가 앞섰다. 전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데다 2004년에도 정규 시즌 1위가 될 만큼 투수진과 야수진 모두 좋았다. 삼성은 불펜진과 플레이오프 4경기를 통해 경기감각이 최고조에 올랐다는 게 장점이었다.
1차전은 현대의 승리였다. 현대는 삼성 선발 배영수와 불펜진을 두들겨 6대 2로 이겼다. 현대 마무리 조용준은 8회 1사 1루에 등판해 무실점 세이브를 기록했다. 삼성에게 조용준의 등판은 지금의 오승환 만큼이나 절망적인 순간이었다. 이해 조용준은 삼성 타자를 상대로 피안타율 2할1푼7리를 기록했다.
삼성 벤치는 ‘2차전부턴 어떻게든 조용준의 등판만은 막아야 한다’고 외쳤다.
2차전은 4시간 11분까지 가는 접전 끝에 8대 8로 비겼다. 조용준은 8회 1사에 등판해 9회까지 무실점 호투를 펼쳤다. 대구에서 치러진 3차전은 8대 3, 삼성의 승리였다. 4차전은 시리즈 판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일전이었다. 현대는 에이스' 마이크 피어리, 삼성은 ‘푸른 피의 에이스’ 배영수를 올렸다. 결과는 연장 12회 0대 0, 무승부였다.
삼성은 배영수를 연장 10회까지 마운드에 올리고 승리를 갈구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배영수가 비공인 10이닝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게 그나마 소득이었다. 총력전을 펼치긴 현대도 같았다.
현대 김재박 감독은 1, 2차전에 등판하고 이틀을 쉬었던 마무리 조용준을 9회부터 등판시켰고, 12회까지 4이닝을 던지도록 했다. 조용준 역시 팀의 기대에 무실점으로 응답했다.
5차전은 현대의 승리였다. 현대는 오재영의 호투와 신철인, 이상열, 조용준으로 이어지는 필승 불펜진을 출동시켜 4대 1 승리를 거머줬다. 조용준은 이 경기에서도 2타자를 상대했다. 6차전은 삼성이 따내며 두 팀은 2승2무2패가 된다. 7차전은 시리즈 3번째 무승부로 끝났다. 조용준은 9회 등판해 1이닝을 막았다.
8차전은 현대의 3대 2 승리였다. 이 경기에서 조용준은 8회 2사에 마운드에 올라 9회까지 무실점을 기록하며 세이브를 챙겼다.
야구계는 “1, 2, 4, 5, 7, 8차전에 조용준이 투입됐다”며 “저렇게 혹사하다간 큰부상당하거나 9차전에서 구위가 눈에 띄게 떨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조용준도 그런 우려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컨디션이 좋았다. 몸이 가벼웠다. 조용준은 코칭스태프가 “오늘 나올 수 있겠느냐”고 물을 때마다 항상 “OK”라고 대답했다.
운명의 9차전. 2회 대거 8득점한 현대는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지은 듯보였다. 하지만, 7회까지 삼성이 5점을 내며 8대 5, 3점 차로 점수가 좁혀졌지며 현대는 8회부터 마무리 조용준을 투입했다. 조용준은 피곤한 기색없이 특유의 날카로운 슬라이더와 속구를 던졌다. 그러나 문제는 날씨였다.
선두타자 신동주가 3루수 실책으로 출루하고, 대타 박종호가 볼넷으로 나가며 1사 1, 3루가 됐다. 이때 빗줄기가 굵어지며 경기는 11분동안 중단됐다. 거듭된 연투와 궃은 날씨 탓에 조용준은 지칠 데로 지친 상태였다. 조용준은 박한이에게 내야땅볼을 맞고 1실점했다.
조용준은 9회에도 위기를 맞았다. 2사 1, 2루 위기에 몰린 것이다. 신동주의 타구가 내야 높이 솟아올랐을 때만 해도 현대의 한국시리즈 우승은 기정사실이었다. 그러나 쏟아지는 비 때문에 야수가 이 공을 놓치며 현대는 다시 1점을 허용한다. 스코어는 8대 7. 주자는 다시 2사 1, 2루.
이때 조용준이 모르는 게 있었다. 현대 수비수들은 내야 땅볼이 나올 시 “홈으로 던지지 말 것”이라는 지시를 받은 상태였다. 조용준의 말을 들어보자.
“나만 모르고 있었다. 당시 벤치에서 내야 땅볼 시 홈으로 던지지 말라는 지시가 나왔다. 타구를 잡으면 가까운 베이스에 던지든가 아예 공을 갖고 있으라는 지시였다. 비로 그라운드가 많이 젖고, 시야도 좋지 못한 상태라, 잘못 송구했다간 공이 빠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을 정리하려면 내가 삼진을 잡든가 외야플라이를 유도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때까지 난 전혀 그런 지시가 있는지 몰랐기에 내야 땅볼을 유도하기로 마음먹었다.”
타석엔 강동우. 조용준은 강동우의 몸쪽을 향해 슬라이더를 던졌다. 내야 땅볼을 유도할 참이었다. 하지만, 현대는 이미 내야수들에게 “어중간한 타구를 잡으면 그냥 공을 잡고 있으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에 내야 땅볼은 답이 아니었다. 그걸 몰랐던 조용준은 있는 힘껏 슬라이더를 뿌렸다.
박한이의 배트가 돌아가고, 다행히 공은 1루수 이숭용 앞으로 굴러갔다.
“운이 좋았다. 1루수 이숭용 선배 쪽으로 타구가 갔다. 그걸 이 선배가 잡고 1루를 밟으며 상황이 종결됐다. 만약 다른 야수가 잡았다면 결과가 어땠을까 싶다.”
조용준은 9차전 혈전이 펼쳐지는 동안 7경기에 등판해 12.1이닝을 던졌다. 평균자책은 ‘0’. 시리즈가 끝나고 조용준은 한국시리즈 MVP에 올랐다. 하지만, 대가는 컸다.
이듬해 조용준은 2승1패 27세이브 평균자책 3.27을 기록하고서 조용히 사라졌다. 어깨부상 때문이었다. 많은 야구인은 “2004년 혹사가 원인이었다”며 “1984년 최동원처럼 조용준도 결국 철인은 아니었다”고 평했다.
하지만, 조용준은 “혹사와는 상관 없는 부상이었다”고 말했다.
“난 연세대 때부터 어깨가 좋지 않은 투수였다. 그걸 알고도 현대에서 날 스카우트했다. 어쩌면 시한폭탄일지도 모를 나를 현대는 잘 관리해줬고, 코칭스태프 역시 연투할 때면 내 상태를 먼저 물어봐줬다. 2005년 시즌이 끝나고 어깨를 다친 건 ‘터질 때가 됐기 때문’이지 2004년 너무 많이 던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지금도 당시 등판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 한국시리즈가 있었기 때문에 세월이 흘러도 사람들이 날 기억하는 게 아닌가 싶다. 만약 시간을 되돌려 코칭스태프가 ‘또 던질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하나다. ‘당연하죠. 공 주십시오.’”
현재 조용준은 현역에서 은퇴하고서, 지도자로 거듭나려고 전문야구지도자 양성과정인 [베이스볼아카데미]에 지원서를 낸 상태다.
![]() '걸사마' 삼성 김재걸(사진=삼성) |
2005년 한국시리즈 삼성 김재걸
정규 시즌 : 103경기 타율 2할4푼7리, 1홈런, 23타점, 8도루
한국시리즈 : 4경기 12타수 6안타, 5볼넷, 2타점
이른바 ‘미친 선수’를 공론화한 첫 번째 선수다. 한국시리즈에서 펄펄 나는 미친 선수는 1982년 OB 김유동서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2004년까지 ‘미친 선수’라는 닉네임을 얻은 선수는 없었다. 그러다 2005년 삼성 김재걸이 한국시리즈에서 맹활약하며 ‘미친 선수’의 계보가 시작했다.
2005년 한국시리즈를 앞둔 삼성은 백업 멤버가 극히 부족했다. 2군에서 올릴 히든 카드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삼성 선동열 감독은 무슨 영문인지 시리즈 전 “김재걸이 잘해줄 것 같다”는 묘한 말을 되풀이했다. 그해 김재걸은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타격성적도 그저 그랬다. 팀 동료 박종호에 밀려 많은 타석에 서지도 못했다.
하지만,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기회가 찾아왔다. 박종호가 스퀴즈 번트를 시도하다 왼 검지 실금부상을 당하며 5회 갑자기 김재걸이 대타로 타석에 들어선 것이다. 김재걸은 2대 2 동점이던 5회 1사 3루에서 두산 선발 다니엘 리오스의 공을 받아쳐 귀중한 적시타를 때렸다. 김재걸은 7회에도 쇄기 2루타를 치며 3타수 2안타 2타점으로 맹활약했다.
선 감독은 2차전부터 박종호 대신 김재걸을 주전 2루수로 기용했고, 부담이 적은 9번 타순에 배치했다. 한번 기회를 잡은 김재걸은 2차전에서도 연장 12회 선두타자로 나와 2루타를 치며 역전승의 물꼬를 텄다.
김재걸은 조동찬의 보내기 번트 때 3루에 도달하고서 후속 김종훈의 우안타 때 홈을 밟아 극적인 끝내기 주자가 됐다.
김재걸의 맹활약으로 1, 2차전을 승리한 삼성은 내친김에 2승을 더하며 4전 전승으로 두산을 꺾고 3년 만에 다시 우승컵을 안았다. 김재걸은 현재 삼성 주루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 '캐넌 히터' SK 김재현 |
2007년 한국시리즈 SK 김재현
정규 시즌 : 84경기 타율 1할9푼6리, 5홈런, 19타점
한국시리즈 : 5경기 23타수 8안타, 2홈런, 4타점
김재현은 슈퍼스타였다. LG에 있을 때도, SK로 옮겨왔을 때도 그랬다. 김재현은 2006년 타율 2할8푼7리, 8홈런, 51타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2007년이 되자 그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 ‘한물 갔다’, ‘이제 은퇴할 때가 됐다’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그해 그의 성적은 바닥이었다. 타율은 1할9푼6리에 불과했고, 홈런과 타점도 각각 5, 19개밖에 되지 않았다. 이유는 있었다.
그해 김재현은 김성근 감독과의 ‘플래툰 시스템’ 적용으로 좌투수만 나오면 벤치에 앉았다. 김재현의 자존심은 상할 데로 상한 상태였다. 김재현은 그래서 한때 은퇴를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시리즈에서 명예 회복의 기회가 찾아왔다. 1, 2차전까지 벤치에 앉아있던 김재현은 이진영 대신 3차전 선발 외야수로 출전했다. 이 안엔 재미난 사연이 숨어있었다. 2차전이 끝나고 김 감독은 자율훈련을 지시했다. 말은 ‘자율훈련’이었지만, 김 감독은 구장에 나와 선수들의 훈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때 자율훈련에 나오지 않은 선수가 바로 이진영이었고, 나온 선수가 김재현이었다.
김 감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다 3차전 선발오더에 이진영을 빼고 그 자리에 김재현을 넣었다. 어쩌면 2차전까지 2연패하며 일시에 무너진 팀의 분분위기를 되살리기 위해 베테랑 김재현이 필요했는지도 몰랐다. 김 감독 특유의 감이 맞았다. 김재현은 3차전에서 5타수 2안타 1타점을 기록하며 팀 승리를 이끌었다. 4차전에선 조동화와 함께 연속타자 홈런을 터트리며 다시 팀에 승리를 안겼다.
김재현은 5차전에서도 7회 0대 0 동점을 깨는 결승 3루타를 기록했다. 대미를 장식한 건 6차전이었다. 김재현은 팀이 2대 1로 이기던 3회 두산 임태훈의 공을 받아쳐 솔로 홈런을 터트렸다. 김재현은 이 장면을 “선수생활 가운데 가장 짜릿했던 순간”으로 꼽는다.
한국시리즈에서 타율 3할4푼8리, 2홈런, 4타점을 기록한 김재현은 MVP로 뽑혔고, 상처난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었다. 현재 김재현은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코치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현장 복귀와 TV 중계 해설위원 데뷔를 두고 고민 중이다.
![]() 타이거즈의 전설 이종범(사진=KIA) |
2009년 한국시리즈 KIA 이종범
정규 시즌 : 123경기 타율 2할7푼3리, 6홈런, 40타점, 11도루
한국시리즈 : 7경기 21타수 5안타, 4타점
‘6번을 누구한테 맡기나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1차전 선발 오더를 짜던 KIA 조범현 감독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조 감독은 황병일 타격코치에게 “이종범을 넣으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이유는 간명했다. 한국시리즈처럼 큰 경기 경험이 풍부한 타자가 이종범을 빼면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었다. 황 코치는 “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하며 조 감독의 뜻에 찬성했다.
결국 이종범은 1차전에 6번 타자로 선발출전했다. SK는 KIA의 선발오더를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해 이종범은 타율 2할7푼7리로 괜찮은 성적을 거뒀지만, SK를 상대론 2할에 그친 터였다. 타점도 1개밖에 없었다. 특히나 1차전 SK 선발 가도쿠라 겐에 7타수 1안타로 절대 열세였다.
하지만, 이종범은 이종범이었다. KIA가 1대 2로 뒤지던 6회. 이종범은 2사 만루에서 바뀐 투수 윤길현을 상대로 좌중간에 떨어지는 2타점 적시타를 터트렸다. 그 한방으로 경기는 3대 2로 뒤집혔다. 이뿐이 아니었다. 이종범은 3대 3 동점이던 8회 1사 2, 3루에서도 외야 오른쪽을 꿰뚫는 결승 적시타를 때려내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타이거즈의 전설’이종범의 결승타였기에 광주구장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이종범의 맹활약으로 1차전을 승리한 KIA는 우여곡절 끝에 7차전에서 SK를 꺾고 대망의 ‘V 10’을 달성했다. 시리즈가 끝나고 우승 단상에 올랐을 때 이종범은 눈물을 쏟아냈다. 2007년 이후 은퇴 종용에 시달렸던 그에게 그 눈물은 인고의 세월을 묵묵히 견딘 자신에 대한 격려일지 몰랐다. 올 시즌을 앞두고 은퇴를 선언한 이종범은 최근 한화 주루코치로 부임해 ‘제2의 야구인생’을 살고 있다.
![]() 삼성 신명철(사진=삼성) |
2011년 한국시리즈 삼성 신명철
정규시즌 : 117경기 타율 2할8리, 2홈런, 39타점, 13도루
한국시리즈 : 5경기 30타수 5안타, 1홈런, 4타점
“1, 4차전이 중요할 것이다.”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SK 이만수 감독은 그렇게 말했다. “1차전에서 승리한 팀이 시리즈 판도를 주도할 거다. 그리고 4차전에서 승리한 팀이 시리즈 승리를 확정할 거다. 따라서 우리는 1, 4차전에 총력을 기울일 예정이다.”
빈말은 아니었다. 1차전 SK 선발은 고효준이었다. 만약 1차전에서 ‘거함’ 삼성을 잡는다면 3차전까지 1승2패로 뒤져도 4차전 선발로 김광현이 등판하기에 시리즈를 6차전 이상 끌고갈 수 있었다. 이 감독은 SK 선수들의 지구력과 큰 경기 경험을 믿었고, 6차전 이상 간다면 삼성보다 유리하다고 전망했다.
하지만, 이 감독의 구상은 삼성 2루수 신명철에 의해 무참히 깨졌다. 정규 시즌에서 타율 2할8리, 2홈런, 39타점에 그친 신명철은 한국시리즈 삼성 타선에서 가장 타격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삼성 류중일 감독은 신명철의 풍부한 경험과 수비력을 높이 평가해 그에게 1차전 선발 2루수를 맡겼다.
경기 전 신명철은 “난 원래 큰 경기에 강하다”라며 “한국시리즈 때 잘해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싶다”라며 여유를 보였다. 신명철의 여유가 통했다.
1차전에서 신명철은 4회 2사 1, 2루에서 고효준을 상대로 2타점 2루타를 기록했다. 팽팽했던 ‘0’의 행진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결국 신명철의 타점은 결승점이 됐고, 삼성은 1차전에서 승리했다.
4차전에서도 신명철은 날았다. 2대 0으로 앞서던 4회 이재영을 상대로 2점 홈런을 치며 승부에 쇄기를 박았다. 신명철의 활약으로 SK는 4차전에서도 승리하지 못하며 결국 시리즈 전적 1승4패로 2년 연속 우승에 실패했다.
시리즈가 끝나고 신명철은 “야구는 9회부터, 시즌도 한국시리즈부터”라며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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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종격투기 원문보기 글쓴이: [여유]
첫댓글 이 종범 이 종범 이 이이종범
근데 롯데는 언제 우승하지 ?
2004년 한국시리즈는 너무 기억에 남는다 사상유례없는 9차전 까지 가고 그만큼 전력이 비슷해서 재미도 엄청 있었고 9차전이였나 비가 엄청 온 기억까지 너무 생생하다.
근데 왜 뭔가없으면 종범 이라고 표현하나요?
바람의사나이라 바람처럼 사라져서그런거아님?? ㅋㅋ;
크보 최고의 타자로 양준혁이 많이 꼽히는데 기아팬들이 이종범은 양준혁보다 스탯이 안좋지만 보이지 않는 무언가 있다며 이종범이 최고타자라고 함
최동원이 1위..
왜박정권 엄지 09년이랑 10년 미쳤었는데
걸사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