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갯비나리: 바다를 향하여 무사 안녕을 비는 일.
2010년대 초반 대학로는 아마 공연·예술 흥행의 최전성기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근무했던 극장은 평일 오후 2시, 4시, 6시, 8시 간격으로 공연이 있었고, 주말에는 지하 1층, 지상 2층 두 개의 소극장에 더블 캐스팅을 하여 총 8회의 공연을 상연했습니다. 게다가 봄·가을에 중학교나 고등학교에서 단체 관람 예약을 하는 날에는 오전 10시에 별도의 공연을 열기도 했습니다. 서울 이외의 지역에는 한시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연극을 볼 수 있는 기회는 극히 제한적입니다. 지방에서 서울로 수학여행을 오는 학생들에게 대학로는 수학여행 코스의 단골 여행지였고, 교통이 그나마 나은 수도권에서 수학하는 학생들은 체험 학습의 형태로 극장을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연극은 영사기가 재생하는 필름이 아니기에, 배우들과 무대 위 조명과 음악 제어하는 기사들의 인력이 지속적으로 투입되어야 합니다. 조명과 음악을 제어하는 역할을 주로 ‘오퍼'라고 부르는데, 소극장의 공연들은 대부분 아르바이트 형태로 인력을 고용하기에 수 많은 회차의 공연에 투입하기에 어려움이 없었지만, 배우들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육성으로 무대에서 객석 끝까지 올바른 발성으로 관객에게 대사를 전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짧게는 한 시간 반, 애드리브가 가미되면 길게는 두 시간 동안의 러닝타임을 팽팽한 긴장감을 가지고 극의 흐름을 이끌어나가는 일은 몹시 힘이 듭니다. 그러나 배우들의 대부분은 하루에 2타임 이상의 공연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배우들은 프리랜서 형태의 노동자입니다. 대형 뮤지컬 공연은 사전에 정해진 개런티를 받지만 소극장 공연의 배우들은 1회 출연을 할 때마다 정해진 임금을 받는 형식으로 월말에 한꺼번에 정산을 받습니다. 무대 경력이 얼마 되지 않는 신입 배우는 보통 회당 3만 원을 받았고, 팬들이 많거나 경력이 있는 배우들은 그보다 많은 금액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극장에서는 누가 회당 얼마를 받는지 투명하게 밝히지 않았고 배우들도 서로의 출연료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나름의 불문율이었습니다만, 그것이 크지 않은 금액이라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배우들은 하루에 세 번의 공연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극단에서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를 대비하여 인후염에 효과가 있는 ‘스트랩실’을 대량으로 구매하여 사무실과 대기실에 비치해놓았는데 그것을 캔디처럼 자주 복용했습니다. 사실 세번째 공연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스트랩실의 도움이 있어야만 합니다. 목이 잠겨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 약을 먹는다고 제대로 좋은 목소리가 나올 일은 만무하지만, 나름 성대 주변 근육을 쥐어짜서 쉰 소리라도 나올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극단에서 조연출이 되어 하는 업무 중 하나는 배우들의 일정표를 편성하는 일이었습니다. 한달에 출연 횟수가 몇번이냐에 따라 배우들의 수입이 달라지므로 최대한 형평성 있게 라인업을 구성했습니다만,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나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배우들은 자신의 공연이 없는 날에도 할 일이 많습니다. 충무로에 모여있는 영화사에 자신의 프로필을 돌리거나 대학 영화과 학생들의 졸업 작품이 될 독립영화에 출연하러 가기도 하고, 서울살이를 견뎌낼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골프장에 잡초를 뽑는 일을 하거나 인력사무소를 통해 건설현장에 나가야 했습니다. 카페나 주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은 꽤 보편적인 일이었습니다. 소형 트럭을 구매하여 악세사리를 팔거나 화물 용달을 하던 배우도 있었습니다. 공중파TV의 드라마편성국 ‘PD수첩’에 이름이 올라있는 배우들의 형편은 사정이 조금 나은 편이었습니다. 드라마의 출연료는 연극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좋은 편이기에 그렇습니다. 잠깐 얼굴을 비추는 단역이라 할지라도 공연의 10배 이상의 급여를 수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방송 출연의 기회는 자주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픈런 공연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일정한 회차의 공연 횟수를 보장받는 것이 고정적 수입을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게다가 공연을 쉬지 않고 수행하며 연기에 대한 감을 잃지 않는 것이 그들이 최종적으로 되기를 희구하는 ‘스크린 스타'가 되기 위해 적잖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매번 같은 역할을 하지만, 장기 공연에 출연하며 언제든 오디션을 볼 준비가 되어있는 몸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우들은 늘 바빴습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 오디션이나 촬영 일정이 생겨 빠지는 경우도 자주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극장장이 빠진 배우들은 대신하여 출연하였고, 나중에는 저도 배우로서 무대 위에 서게 되었습니다. 스트랩실에서 레몬 캔디 맛이 난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한때 무대 위에서 박수받던 사람이라는 것이 스스로도 믿겨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서 그런 것일테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제가 했던 공연 대사를 외울 수 있습니다. 소방서의 직원들은 배우들이 어떻게 그 많은 대사를 외울 수 있는가 하고 대단하게 생각하지만, 실은 그게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의식적으로 외우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무수히 많이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의식 속에 자연스레 대본이 자리잡는 것입니다. 3년 이상 경력의 서당개는 진짜로 천자문을 외우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극단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했던 일이 극장 청소와 관객 안내 그리고 포스터를 붙이는 홍보 업무와 무대 음악와 조명을 제어하는 ‘오퍼'역할이었는데, 매일 많게는 5번의 공연을 몇 년동안 보며 음악과 조명을 제어하는 것을 반복하다보니 대사를 어렵지 않게 습득할 수 있었습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2021)>를 보면 그의 예술 철학을 엿볼 수 있는데, 배우들이 감정 없이 대본을 반복하여 나의 대사 뿐만 아니라 상대의 대사까지도 모두 암송할 수 있게 될 때 무대 위에서 자연스러운 감정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극중 배우들의 대본 연습 장면을 통해 드러냅니다. 저는 그 당시, 극단에 소속된 사람들 중에서 공연을 가장 많이 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연기를 잘 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관객들은 귀한 시간을 내서 영화와는 다른 시각적 체험을 하기 위해 열린 마음으로 공연을 보러 왔고, 좋지 못한 실력을 보였음에도 커튼콜 때 큰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 저는 새로 들어온 배우들과 개성적이며 유일한 인물을 구축하는 여정을 함께 모색할 수 있을정도로 사상적으로 준비되어 있었지만, 바랐던 것만큼 연기를 잘 하지는 못했습니다. 대중에게 주목 받는 직업은 누구나 하고 싶어하는 분야이기에 처음부터 아주 잘 할 수 있는 재능이 아니라면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저는 공연계의 대호황을 맞이하여 운 좋게 공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 뿐입니다.
둔재였기에 남다른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극단에서 맡은 역할도 점점 많아졌습니다. 스스로를 교육할 시간이 늘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극장을 마무리하는 10시 무렵에 퇴근을 하면 새벽에 고시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밤새 대학로 주변 24시간 운영 카페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새로 선발한 배우들에게 보여줄 자료를 만들었습니다. 자신이 연기할 인물의 성격을 세밀하고 자세하게 구축할수록 무대 위에서 설득력 있는 연기를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말이 되도록 만드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영화 속 악인을 증오하고 동정하는 등 악인임에도 불구하고 복잡한 심상을 갖게 되는 이유 역시 인물이 지닌 개인적 서사가 극적 사건의 원인이었음을 납득시킬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조커> 속 주인공 ‘아서 플렉’은 고담시에서 운영하는 사회 보장 시스템의 긴축으로 의료적 지원과 상담이 종료되고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등 극한 상황을 겪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그가 빌런이 될 수밖에 없는 시대적 배경과 개인적 이유를 설정하는 것이 허구를 필연으로 만드는 극 예술의 묘미라고 생각합니다.
상상 속 세계는 황홀합니다. 돌이켜보면 극장에서 하는 일보다 퇴근 이후의 시간이 더 좋았습니다. 그 무렵, 만년필 한 자루를 쓰는 것이 부족하여 당시 소공동 롯데호텔 지하에 있는 펜샵에서 ‘파버카스텔 온도로' 만년필을 하나 더 구입했습니다. 그 당시 문화인류학자 김정운 교수가 인플루언서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책 <남자의 물건(2012)>에서 소개된 육각형 나무 배럴의 만년필을 구입한 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나무 만년필이 좋아서 안경도 나무로 만든 제품을 쓰고 다녔습니다. 새벽의 대학로 심야 카페에는 늘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학습량이 많은 서울대학교 병원 간호학과 학생들이 과잠바를 입고 늘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공개 코미디 방송에 출연하는 희극인들이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늘 모이는 사람들이 늘 같은 자리를 지키는 늦은 시간의 카페를 좋아했고, 사람들이 가득했던 대학로의 낮과 그와 정반대로 한산한 대학로의 밤 모두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카페 안에서 위로 받을 수 있었고, 그래서 고된 시간들을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큰 호황기였습니다. 거리에는 하하호호 웃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울고 싶은 날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웃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학로의 호황은 2014년 4월 16일 오전 10시경, 인천에서 제주로 항해하던 여객선이 침몰하며 거리의 분위기는 크게 바뀌게 됩니다. 그날, 공연을 보러 오기 위해 극장을 찾았던 관객들은 탑승객 전원이 구조되었다는 오보를 철썩같이 믿고 가벼운 마음으로 극장을 찾았지만, 대학로에서 집으로 돌아갈 무렵에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배에는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 제주 수학여행을 위해 다수 타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제가 일하는 극장에 봄·가을 소풍을 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배가 완전히 가라앉을 때까지 1시간 30분의 골든타임이 있었지만 정부와 해경, 선사와 선원들은 사고에 대응하여 유효한 조치를 아무것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팽목항 부근에서 조업 활동을 하던 어민들이 영세한 목선을 이끌고 조직적인 구조 활동을 벌였습니다. 그날 이후로 대학로에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꽃다운 아이들의 소중한 삶이 속절없이 가라앉는 영상을 실시간으로 보며 저는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잘 살아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한사람이 저 뿐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대학로는 참사 이후 더 이상 창의와 예술의 공간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매일 크고 작은 촛불 집회가 있었고, 기동대를 태운 버스와 살수차 그리고 이동식 화장실이 늘 마로니에 공원 한 자리를 당연하게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공연을 보러 혜화역에 온 관객들은 집회를 보며 세월호를 연상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 중 몇몇은 극장에 들어와서 통행로가 좁고 어둡다며 공연을 보지 않을테니 입장료를 환불해달라고 했습니다. 요청의 말미에는 꼭 ‘참사'라는 말이 덧붙었습니다. “여기 너무 위험한 것 같아요. 참사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환불을 요청하지 않고 자리를 뜨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더이상 연극을 보러 대학로에 오지 않았습니다. 촛불을 들기 위해 왔습니다. 투명한 방패로 집회에 참여하는 시민들을 가로막는 경찰들을 보며 저는 절대로 경찰이 될 수 없겠다고 생각했고, 연극을 그만두고 생계가 막막하여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때 경찰이 아닌 소방을 선택한 것도 그러한 영향이 없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루 최대 8회 공연을 하던 것이 무색하게, 공연 회차가 급감했습니다. 배우들은 고정 수입의 상당부분을 잃었고, 버티지 못한 이들은 연극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관광객이 아니라 공연 업계 종사자에게 저렴하고 영양가 있는 식사를 제공했던 식당들은 대형 프렌차이즈가 업체가 되거나 편의점이 되었습니다. 극단은 더이상 신규 배우를 양성할 일이 없어졌으므로 조연출이라는 직함은 무색하게 되었습니다. 무대 위에 서는 것은 고사하고, 대학로를 해질 때까지 뱅글뱅글 돌며 식당과 노점의 메뉴판과 스티커, 물통배너를 제작하기 위해 돌아다녔습니다. 그즈음, 공연계에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박근형 연출가나 동방우(명계남) 배우처럼 세월호와 관련하여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공연을 제작하거나 출연한 예술인들은 각종 문화 지원 사업에서 배제된다고 했습니다. 과연 박근형 연출가의 공연이 상연되기로 했던 극장이 돌연 대관을 취소했고, 공연은 무산되었습니다. 명계남 배우는 동방우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사건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대책에 대한 담론은 실종되었고, 참사는 점점 권력을 수성하느냐 공략하느냐를 두고 벌이는 정치 게임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양측의 지지자들은 강하게 결집하여 대학로에서, 시청에서 맞붙었습니다. 사안의 본질에서 이탈하여 대결에 집중하느라 우리가 사는 사회는 참사를 제대로 파악하고 반성하며 용서하는데 처절하게 실패했습니다. 사회 속에서 엄연히 존재하는 위험을 소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를 우리 스스로를 구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나고 이태원에서 참사가 다시 발생한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참사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집권 여당은 세월호 참사에서 얻은 마키아벨리즘을 토대로 참사 희생자들이 구체적 애도의 대상이 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전국에 영정과 위패가 없는 추모위령제를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행안부 장관과 용산구청장은 입을 모아 ‘이것은 국가 기관이 막을 수 없는 불가역적인 하나의 사건이자 현상’이라는 수사로 재난을 규정했습니다. 엄격하게 책임을 물을 대상은 현장 실무자들로 한정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잘못한 것이 없었으므로 반성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지난날, 연극을 잘 하고 싶어서 마련한 나무 만년필은 이후 연극보다는 불의한 사회에 대한 비통함을 토로하는 데 주로 활용되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이 내뱉은 비탄을 흡수한 온도로의 나무 배럴은 예전보다 더욱 묵직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원래 이런 글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쓰지 않으면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온도로가 제 심정을 대변해주었습니다.
코로나가 종식되고 올해부터는 소방서 직원들과 자주 회식을 하고는 합니다. 술잔이 몇 순배 돌고 나면 서로 그간 하지 못했던, 이태원에 참사 현장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하고는 합니다. 아무리 세게 잡아당겨도 넘어지고 끼어있는 사람들이 빠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너무나 초현실적인 대형재난을 앞에 두고 전부 거짓말 같아서 누구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지시하고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오면 무섭도록 착잡한 마음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럴 때마다 술이 깰 때까지 온도로를 꺼내서 그만 쓰고 싶을 때까지 일기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조금은 후련해진 나머지 겨우 내일의 삶을 이어나갈 기운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첫댓글 마지막 온도로의 사진에서 뭔가 힘이 느껴집니다
티티쌤 님,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날씨가 많이 춥습니다. 따뜻하고 좋은 하루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만년필보다 아름답게 보입니다. 좋은 필감만 찾는 제가 조금 부끄럽습니다. 멋진 만년필도 좋지만 그 펜촉에서 흘러나온 잉크에 어떤 의미를 담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숲에 홀로 살지 않는 한 우리들은 고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이다. 이 고리를 바라보는 것이 세상을 아는 길일지도 모릅니다. 이 시대를 제대로 보려 고민하시는 님께 박수를 보냅니다!
상당히 긴 글이었는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길동 님이 적어주신 덧글에서 깊은 의미를 느꼈습니다. 감사합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글, 잘 읽었습니다. 사진 속 만년필이 많은 걸 말해주네요.
별이 된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자렵니다.🙏
방랑고양이님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날씨가 많이 춥습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셔요!
인생이 묻어나는 펜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자리에 서서 버텨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끄럽지 않는 하루를 살아보겠습니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좋은날 님, 닉네임이 참 멋지십니다. 답댓글에 닉네임을 언급하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네요. 날씨가 춥습니다. 따뜻하고 건강한 하루 보내시길..!
마치 소설을 읽는 듯 했습니다. 소장하고 계신 만년필이 매우 특별하게 보이네요~
구입하기 전에 만년필은 기성품일 뿐이지만, 내 손 안에 들어와서 사용하게 되면 나만의 이야기를 품은 특별한 물건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장나고 녹이 슬어도 버릴 수 없게 되는 것 같아요.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길지만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가득한, 또한 “사람 냄새” 가득한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소방서에서 일하시면서, 항상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고민 가득하시다는 것에 대해 또 한번 감사드립니다. 어느 곳에서건 어디에 있건 항상 “사람”을 잊지 않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느낀점을 남겨주셔서 저 또한 크게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점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