又二首并序
또 2수를 차운함에 아울러 서문을쓰다
李汝馪56 ) 文典籍 饮沙
이여빈은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이 되었으며 호는 취사이다.
金上舍始伯一日遺其胤子袖一編詩 若文邀其屬和 余即季而披問457 ) 則乃其家前柳亭 唱和之作也 夫亭乃上含高祖某 所手自封植
而詠之 其胤子某官某能 存桑梓 58)之敬 勿剪勿伐 又加以栽培 嘱一詩文人村老家詠而离之者也 雖未必盡能刮目59)嵬眼 而亦足 以想見前人 當太平時 寓物興懐暢敘 自適之氣像也 而況周愼齋一詩 亦在其中 則豈不足為亭之光彩盛美哉 上舍之所欲 撥揚稱述 以久其先世之事 而爲後孫永世之玩者 容得已乎 余即其里中後生也 自吹蔥騎什之年遊玩乎 亭之下 滌煩敲而避炎 蒸引精風 而玩晧 月者 曾不知幾許也 猶不如亭之有序述題詠之存也 今因 上含始得見焉 非上含之篤 於追遠圖其不朽 安能湔拂 於積年塵 蠹之間裁
余雖不能於詩文 不可以拙 爲辭 孤自上舍 厚望 既爲 之次其詩韻 文書其事之顚末 文書其事之顚末 以還之 若其等之所見異致之美
觀覽之勝 則前人之作已備 而上含之友 文人朴栗甫 後說 進士金仲亨詩書 又詳之盡矣 今不復贅
天啓四年秋 鑑谷散人書
상사 (上舍)김시백이 어느 하룻그 맏 아들의 소매 속에 한 편의 시를 보냈는데, 글을 마주하니 그 시의 화운을 부탁한 것 이었다.
나는 곧 받들고 펼쳐읽으니.그 가문의 옛 유정 (柳亭)을 이미창화(唱和)한 작품이다. 무릇 버드나무 정자는 상사의 고조(高祖)이신 모(某)께서 손수 봉식(封植)한 것으로 유래된 바이며 그것을 음영(吟詠)하였다.
그 맏자제는 모(某) 관직이나 능신(能臣)이어도 조상에 대한 공경심을 지녀 그 나무를 자르거나 베지 않았다. 또한
심고 기르기를 더 힘쓰니 일시에 문인들과 촌노(村老)를 막론하고 버드나무 정자를(吟詠)해 음온궤적(軌跡)이 이어진 것이다.
비록 반드시 높은 안목이라든지 괄목 할만한능력을 다 갖추지 못해도 또한 족히 휼륭한 선현의 자취를 상상해 볼수 있다.
그때의 태평시절에 사물에흥취를 의탁해 회포를 펼친 것은 자적(自適)의 기상에 의한것이다.
하물며 주신재 선생의 시 한 수가 또한 그 가운데 있으니, 어찌 정자로 삼을 만한 광채와 성대한 아름다음이 부족하겠는가. 상사 (上舍)의 바라던 바는 지극히 찬양하고 칭술(稱述) 하여 그 선대의 유업이 오래도록 후손에게 길이 대대로 완미(玩味) 60)하게 하는 것이니 용납이 가능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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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의의 (依供):연약한 나뭇가지가 바람에 한들거리는 모양을 나타낸다.
56)이여빈(李汝馪.1556~1631)자는 덕훈(德薰)이며, 호는취사(炊沙)또는 감곡(鑑谷)이다. 본관은 우계(羽溪)이며, 부친은 참봉
이효신(李孝信)이다.
모당은 전주(全州)이씨 부인으로 ,효령대군(孝寧大君)의 4대손 이귀윤(李貴胤)의 따님이다.
한 우(韓 佑)의 문인으로.1591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1605년 중광문과 (増康文科) 에 병과(兵科)로 급제하였다.
1606년 벽사도칠방(碧沙道察訪)을 액임하고 1610년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으로 등용이 되나 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李爾瞻)이 국정이 문란케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1715년에 도계서원 (道溪書院 )에 배양되었다.
57)피열(被閱): 펴보다.
58)상제(桑梓): 상제(桑梓)는뽕나무와 가래나무를 뜻하는데, <시경> '소아(小雅) 소변(小弁) 에 " 어버이가 심어 놓으신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반드시 공정 해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하물며 우러러 뵐 분으로는 아버지 말고 다른 사람이 없으며, 의지할 분으로는 어머니 말고 다른 사람이 없다' (維桑與梓 必恭敬止靡瞻父 靡依匪母)," 라는 말이 나온다.
59)괄목 (括目):눈을비비다. 음,후 비비다. 몰라보게 발전한데 놀라서 눈을 비비고조 다시 보다.
나는 곧 그 마을에 살던 후생이어서 스스로 풀피리 불며 대나무 타던 이런 시절에 즐겁게 놀았다. 정자 아래에서 씻으면서 더위를 피하고 맑은 바람으로 후끈한 날씨를. 물리치며 맑은 달을 완상한 것은 일찍이 몇 번이었는지 셀 수도 없다. 정자의 서문(序文)이 있다
는 것은 정자의 제영(題詠)에 대한 서술(敍述)을 보존하는 것만 못하다.오늘 상사로 인해 능히 볼 수 있었다. 상사의 독실함이 어니면 선조에 대한 추모의 마음으로 그 책이 썩지 않고 계승되기를도모하는 것이 어찌 여러 해 동 안 종이를 먹는 좀벌레 사이에서 떨치고 나올 수 있었겠는가. 나는 비록 시문에 능하지 못하여 졸렬함을 이유로 사양하려 해도 상사의 깊은 소망을 멀리 저버릴 수가 없어 이미 그 시의 운자에 맞춰 차운하였다.
또한 그 일의 전말을 써서 주었다. 그 정자에 대한 경치의 아름다움, 경관 조망의 빼어남을 나타내는 것은 엎 시대 현인들의작품에 잘 갖추어져 있으며 상사의 벗인 문인 박율보(朴栗甫)가 뒤에 설명한 내용과 진사 김 중형(金仲亨)시의 서문 또한 상세히 다 기록한 것이다. 오늘은 군더디기의 말을 반복하지 않는다.
천계(天啓) 4년 가을에 감곡 후인이 쓰다.
少少频遊比樹亭 잠깐씩 자주 이 버드나무 정자를 유람하니
炎烝但覺爽煩情번뇌의 마음조차 시원하게 사라짐을 깨닫내.
如今始閱諸許序 이제 비로소 여러 현인의 시와 서문을 보니
舊事看來若喚醒현인들의 일을보니 환성(喚醒)61)과도 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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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완미(玩味): 시문(詩文)의뜻을 깊이 음미함.
61)환성(喚醒): 잠자는 사람을 깨움. 어리책은 사람을 일깨움. 어리석은 사람을 일깨움. 취몽환성(醉夢喚醒). 연암(燕巖)박지원(朴趾源)은<환성당기(喚醒堂記)>에서 주인 서봉(西峯)이공 (李公)이 세상 사람들이 무지몽매하여 취생몽사하는 사이에 아무리 불러도 꿈에서 못 깨어나고. 아무리 흔들어도 취기를 벗어나지 못함을 슬피 여겨, '환성당 '이란 당호를 지어 아침저녁으로 올려다보며 스스로를 깨치려 한 일을 옳게 여겼다.
探勝人爭侈榭亭사람들이 다투어 경치를 탐하느라 정자에 많 이 있는데
何如古柳自無情어찌 하여늙은버들은 스스로 무정한가.
偶蒙先世栽培惠 뜻하지 않게 선조께서 심고 기르신 은혜로움 을 입으니
庇及玄孫尙醉醒 현손 ( 玄孫 ) 과 의지해 여전히 술 취했다가 깨네.
又二首并序
또 2 수를 차운함에 아울러서문을 쓰다
郭山晉 62 ) 叁奉 丹谷
곽단곡은 참봉이며 호는단곡이다.
柳之爲樹 易盛而易衰性也 過百年而不衰者 鮮矣 况於數百年乎 兹亭之柳 歷五世 而根幹依舊 手澤 63)尙存 何其異哉 意者 當初種柳 非徒種樹 實乃種德 故神明扶護而然欺 吁 植根既澳 旁枝漸茂 安知其更過數千齡也耶 孤露餘生 早離桑梓 遠棲林壑 詠玆集 而想兹樹 不覺泫然 64) 感涕 途爲之敬次元韻云
時天啓乙丑秋 八月 生魄 丹谷居士 謹題
버들의 나무 됨됨이는 쉽게 성장하고 쉽게 쇠잔해지는 것이 본성이니, 백년이 지나도 쇠잔해지지 않는 것은 드문 일인데 하물며 수백 년 동안 그러했단 말인가. 이 정자의 버들은5대를지났음에도 뿌리와줄기가 변함이 없고 수택(手澤)이 오히려남아 있으니 어찌 기이하지 않겠는가.
생각하니 당초에 버들은 심은 것은 나무를 심은 것이 아니라 진실로 덕을 심었기 때문에 신명이 붙들어 보호하였으므로그러한 것인가. 아! 나무를 심고 뿌리가 깊어지면 곁가지가 점점무성해지니, 다시금 수천년의나이를 지낼지 어찌 알겠는가. 고로(孤露)한 여생은 일찍이 고향을 떠나서 임학(林壑)에 멀리 길들여져서 이 문집을 읊고 이 버드나무를 생각하니 감격하여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림을 깨닫지 못하면서 마침내 원운 ( 元韻)에 삼가 차운한다.
때는 천계(天啓)을축년(乙표年)가을 8월 열엿샛날에 단곡거사가 삼가 쓴다.
老柳依依蔭小亭 늙은 버드나무 한들한들 작은 정자에 그늘을 만드니
無情植物亦多情 무정한 식물일진대 또한 정이 많구나.
雲仍對此如爽梓후손은 이나무를 대하면 고향같이 여기는데
追遠初心取次醒 먼 선조를 추모하는 초심이 있어 차례로 술깨네.
前人亭作後人亭선인의 정자가후인의 정자로 되니
追慕遺芬不盡情선인의 남은 향기 추모할수록 정이 다함없네.
滿樹蟬聲動晴旭나무에 가득한매미 소리는 아침해를 움직이는데
先容入夢夢還醒먼저 꿈에들기를 용납해도 꿈에서 도리어 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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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곽진(郭 山晉, 1568-1633): 자는 정보(靜甫)이며, 호는 단곡(丹谷)이다. 본관은 현풍 ( 玄風)이며, 아버지는 생원곽 한(郭 澣)이다. 모당은 평해 황씨 부인으로 참봉 황언량(黃彦良)의 따님이다. 권 우(權 宇)의문하에서 수학하였 으며, 임진왜란 때 학봉(鶴峯) 김성일 (金誠一)의 초유문(招除文)을 읽고 그의 둘째 형과 의병을 모으고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들어가 전투하였는데 그때 나이가25세였다.
1601년 진사에 합격했으나 벼슬하지 않았으며 태백산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차후에 서부참봉(西部參奉) 광릉참봉(光陵参奉)에 제수 되자 잠시 부임하고는 바로 사임하여 30년을 산중에서 살았다. 1618년 자제 곽 영(郭 瓔)이 이이첨(李爾瞻)을 주참하자고 상
소하여 이로 인해 투옥된 후 별세하게 된다.
1621년 영남유생을 대표하여 이이첨을 탄핵 상소문을 조정 에 올렸다.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고 하며「 심경(心經)」 「 근사록(近
思錄)」등을 중시하였으며 시문에도 능하였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창석(蒼 石) 이준(李埈), 우복(愚伏) 정경세 (鄭經世) 등 명현(名賢)과 교유하였다.
63) 수택 ( 手澤 ): 옛 선조의 흔적.
64) 현연 ( 泣然 ): 눈물 흘리다.
又四首
또 4수를 파웅하다
權省吾65)文正郎 東巖
권정오는 문과에 급제해 정랑이며 호는 동암이다.
高柳濃陰稱野亭큰 버들은 짙푸른 그들로 들의 정자라 청하는데
古今詩老一般情 고금의 노대가(老大家)시에서는 한결같은 뜻이 담겼네.
箇奇絶君知否개중에 기이한절구를 그대는 아는지 모르는지
春送流鸎俗耳醒봄이면 피고리를 보내속인(俗人)의 귀를깨우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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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권성오( 權省吾, 1587-1671): 자는 자수(子守)이며. 호는 동암 (東巖)이다. 분관은 안동 ( 安東)으로, 부친은 경기전 참봉 권호신(權虎臣)이다. 1612 년 26세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학유(學諭)와 박사를 거쳐 전적 (典籍)에 올라 사관직(史館職 ) 을 겸했다. 1616년 칠원현감 ( 漆原縣監)에 임명되나 정인홍(鄭仁弘)으로 인해 사직하고 유곡할방(幽谷察訪)에도 제수되나 바로 사임하였다.
1617 년 사한부감찰(司惠府監察)을 거쳐 에조화랑 (禮曹佐郞)이되고경상도사(慶尙都不事)가되나 부임하지 않았다. 공조 (工曹)·
형조(刑曹)의 정랑 (正郞)이 되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으로 인조가 강화도로 파천할 때 호종하였다. 1628년 보령현감(保寧縣監)이 되어 청렴하고 간소한 생활이 몸에 배어 봉급에 여유가 있으므로 빈궁한 족친과 친지에게 회사하였다.
1637 년 남한산성이 함락됨에 청(清) 과의 글욕적인 강화로 인해 버슬길에 발을 끊고 산수자연 에서 울분을 달래기도 하였다.
年年春信到溪亭해마다 봄소식은 시냇물 정자에 당도하는데
多荷東君6)不世情점이 많은 봄의 신은 세속의 정이 없네.
百歲陽和九十日백세토록 븜의 따뜻한 날은 90 일이니
主人那忍暫時醒 주인은 어찌차마 잠시 술이 깰까.
種柳亭爲種德亭비들 심은정자는 덕은 심은 정자가 되니
無情植物便多情무정한 식물도듣고 문득 정이 많네.
觀棊穿葉67)眞餘事나뭇잎 뚫어 바둑두는 것은 참으로 여가 (餘暇)에할 일이니
要使羣蒙讀易醒다만 무리들과 <주역(周易)의 몽패(蒙封)를 읽어 술 깰 따름이내.
時聞彈指響虛亭때로 손가락을 통기니 빈 정자에 울리는데
九烈神君豈薄情구열의 선군은 어찌 박정하신가.
他日監袍飲他醒다른 날 푸른도포입고 신선이 빛은 술 마시는데
歸鞍醉夢柳邊醒돌아가는안장에 취해 꿈꾸어도 버들 가에서술이 깨네.
又
또 차운하여 쓰다
權 點 進士 休溪 진사이며
권 점은진사이며호는휴계이다.
老柳槎牙護野亭 늙은버드나무는 무기처럼 들의하다 정자를 보호하는데
百年猶帶昔人情백년토록 더욱선인의 정을 띠었네.
多君能繼靑氈業그대는 능히푸른 융단 같이 고결한 유업(遺業)을 많이 계승할 수 있는데
日與親朋醉復醒날마다 친한벗과 취하고다시 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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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동군(東君):봄을 주관하는 신(神)이라는 뜻의시적인 표현이다.
67)천엽(穿葉): ' 천엽지공(穿 葉之功)과관련이있다. 유기(由基)는초(楚)나라의궁술명인(弓術名人)으로100보 밖에서버들
잎을 백발백중시켜 이를'천엽지공(穿葉之功)'또는백보천양(百步穿楊)'이라고 한다.
又
또 차운하여 쓰다
李汝馦 進士
이여형은 진사이다.
手植何年柳以亭어느 해에 손수 심은 버드나무가 정자가 되었는가
半摧技幹尙舍情반나마 꺽인가지와 줄기는 오히려 정을 머금었네.
夕陽多少當時事지는해는 다소 당시의 일을 아지는
盡入黃鸝喚醒노란 꾀꼬리부르는 소리 다 들어오니 취해 자도술이 깨네.
又 并序
또 차운함에 아울러 서문을쓰다
李成樺 生員 荷泉
이성화는 생원이며.호는 하천이다.
吾同年金始伯氏所居門外有一古柳墠 其下爲野亭 蓋其先世所封植 而世守者 有詩若干首 亦其一時從遊68)所與唱酬者也 始伯氏 早有才藝 晚參蓮籍 遂不復舉 守拙丘園 追述先志 懇懇不已 益求歌詠 以發其志 而亦及於余 余不敢以拙辭 因謂金兄曰 昔姜 通亭淮伯 少時 遊斷俗寺 手植一株梅 其後釋褐 官至政堂文學 故寺恰因名爲政堂梅 政堂兦 百有餘年 而至其曾孫 往尋遺跡 則梅己枯矣 慨然69)增感 途栽新根於其傍 仍施舊號 傳詠一時 至今稱為盛事 今此柳累世 猶存 豈非吾兄 家世愛護之勤耶 然風霜歳月之久 亦安知不爲衰折 如政堂梅耶 吾兄盍亦種新根於 其傍 而使兄之子孫 又守護之如兄之篤於追遠 則此柳與此詩 將得以同爲不朽 而傳之無窮孰不 曰金氏之有子有孫 而柳亦與之同 其久長哉 金兄曰 善遂爲之次其韻而歸之
나와 같은 나이인 김시백씨가 사는 곳에는 문밖에 오래된 버 드나무 한 그루 정갈한 제터가 있다. 그 나무 아래가 정자를 삼았으니 대개 그의 선대에서 봉식(封植)한 바이며 대대로 수호한 것이다. 시가 약간 수있으니 또한 일시에 종유하던 분들 과 수창한것이다.
시백씨는 일찍이 재예가 있어 늦게 세 번 과거에 이름이 올 랐다가 다시금 나아가지 않았다. 전원에서 졸박(拙朴)의 성품을 지키고 선조(先祖)의 뜻을 추숭해 찬술함에 정성스러워그만두지 않았다. 옛날 강통정(姜通亭 ) 회백이 젊었을 때 단속사에서 유거(遊居)하며 손수 매화나무 한 그루를 심었었다.
그 후로 갈 옷을 벗으니 그의 관직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그러자 사찰의 승려가 이러한 연유를 들어 그가 심은 매화나
무를 ' 정당매'라고 이름 붙였다. 정당이 서거하고 백 여 년이 지나 그의 증손이 그 사찰에 이르렀다. 선조(先祖)의 유적에가서 살 펴보니 매화는 이미 말라죽어 있었다. 개연히 슬픈 감정이 더 해졌다.
그는 마침내 죽은 나무 곁에 새로운 뿌리의 나무를 심고 이에 옛 나무의 이름을 부여하니 일시에 전해져 음영(吟詠)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성대한 유업(遺業)이 되어 칭송을받는다. 오늘날 이 버드나무는 여러대에 걸쳐 보존되고 있으니 어찌 우리 형님이 아니시면 가문 대대로 아끼고 수호한 근실(勤實) 함이 유지되었겠는가. 그러나 바람서리 같은 모진 세월이 길어 또한 ' 정당매'와 같이 쇠잔해지고 부러지지 않게 됨을 어찌 알 았겠는가. 우리 형님이 어찌 또한 그 나무 곁에 새 뿌리를 심 겠는가.형님의 자손으로하여금또한 형님과 같이 먼 선조(先祖를 추모하는 마음이 독실하여 잘 지키고 보존케 하면 이 버드나무와 이 시가 장차 똑같이 썩지
않아 영원히 전할 수 있다면 누가 그리 안하겠는가. 말하자면, " 김씨의 자제가 있고 손자가 있어서 버드나무 또한 그들과 함께 있으니 그 장구함이여!" 라고 하였다.김형이 말하기를, " 드디어 그 시의 운자에 맞추어 차운이 잘 되었으니 돌아 가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種柳何年作此亭어느해에 버드나무를 심어이 정자를삼았을까
能令追感子孫情 자손으로하여금 선조의 추모하는 그리움을부추기네.
題詩爲記當詩事당시의 일을기억하기 위해 시를 쓰는데
豈是無心藥醉醒어찌 이리도 무심해 술 취하고 깨기를 즐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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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종유(從遊): 학덕이 있는 사람을 따라 함께 하다.
69)개연(槪然): 슬퍼하는 모양을 나타낸 것이다.
又
또 차운하다
金汝煜70) 生進 虛舟
김여욱은 생원과 진사이며양과
에 급제하였으며. 호는 허주 이다.
名好曾聞未到情일찍이 들으니이름이 좋으면 정이 가지 않는다고 하는데
況今新綠最多情하물며 지금 신록은 정이 가장 많구나
開樽比日成佳會오늘 술단지를열고 아름다운 모임을 하네
剩得虛舟大寐醒더욱 빈 배를얻어 긴 잠에서 깨어나네.
又
또 차운하다
朴 旱 文府使 梅易堂
박한은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이며 호는 희이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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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김여욱(金汝煜.1581~1661): 자는 숙희(叔晦)이며.호는허주(虛舟)이다.본관은연안(延安)으로,부친은 만취당(晩翠堂)
김개국(金蓋國)이다.1613년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으나 연흥부원군 김제남(金悌南)의 사사(賜死)되자 낙향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임진왜란 때의병장인 부친과 함께 전투에참가하였다.
手澤猶存此柳亭 선조의 옛 흔적이 이 버드나무 정자에 오히려 있으니
誰云植物也無情식물이 무정하다고 말한 사람은 누구이던가.
雲仍世世思恭敬대대로 후손들은 선조를 추모하는 생각에 공경하는데
莫向濃陰但醉醒다만 술 취했다가 깨는 것만 한다면 짙푸른 버드나무 그늘로 향하지 마오.
又
또 차운하다
李成健 生員
이성건은 생원이다.
百載青氈有古亭 백년을이어온푸른 융단같이 고결한 유업이 옛 정자에 있으니
羹墙71)可想後昆亭선조에 대한 추모의 정은 후손의 정자에서 가히 상상할 수 있네.
政堂常日梅杏慶 정당(政堂)은그 날에 매화를 보고 깊이 축하하였는데
爭似今宸任醉醒어찌 하면오늘처럼 술 깨고 취함을 일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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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갱장(羹墻):죽은 사람에 대한 간절한 추모의 정을 말한다. 요(堯)임금이 죽은 뒤에 순(舜) 이3년 동안 사모하는 정을 이기
지 못한 나머지, 밥을 먹을 때에는 요 임금의 얼굴이 국그릇 가운데 (羹中)비치는 듯하고,앉아있을 때 에는 담장(墙)에. 요임
금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듯했다는 고사가 있다 (「 後 漢書 」 巻63「 李杜列傳 」).
又
또 차운하다
郭 玹 進士
곽 현은 진사이다.
年垂二百松垂亭 나이가 거의 200살인 버드나무 드리워진 정자이니
老幹偏傷後裔情늙은 즐기는절반이 상해 후손의 정을 아프게 하네.
幾度逍遙思手澤72)몇번이나 소요하며 옛선조의 혼적을생각하였을까 어찌 그리 불러도
九原其奈叫難醒구원에서 어찌 그리 불러도 술 깨기는 어렵네.
又
또 차운하다 .
李光前 生進
이광전은 생원과 진사.양과에 모두 급제하였다.
依然古柳百年亭버드나무 고목은 백년의 정자에서 의연한데
占得淸音不世情맑은 소리점으로 얻으니 세속의 정이 아니네.
醉生夢死73)何须說아무 의미 없는 삶을 모름지기 누가 말했던가
顧視人間我獨醒세상을 돌아보니 나만 홀로 깨었네.
又
또 차운하다
琴是諧 生員 峩洋軒
금시해는 생원이며.호는 아양헌이다.
豪放當年屬柳亭그해의 호방함을 버드나무 정자에 맡기니
幾多觴詠暢幽亭얼마나많이 잔잡아 시 읊으며 그윽한 정자에서 통하였던가.
至今猶有疎枝影지금은 오히려 성긴 나뭇가지에그림자만있네.
留與我孫任醉醒우리손자와 머무르니 술 깨고 취함을 일삼네.
又
또 차운하다
五世孫 煥
5 세손 환
五世吾家一柳亭오세손인 우리가문에 버드나무 정자 하나 있으니
至今封植出常情 지금 봉식(封植)해도 변함없는 정을 내뿜네.
卷中喜看諸賢筆여러 현인들의필적을 책 속에서 기쁘게 보데데
留記遺風叫後醒유풍(遺風)을굳게 기억하려 외친 뒤엔 술이 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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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수택 (手澤)물건에 남아있는 옛사람의 혼적을 의미한다.
73)취생몽사(醉生夢死):술에 취하여 자는 동안에 꾸는 꿈속에 살고 축는다는 뜻으로.아무하는 일 없이
한평생을 흐리멍덩하게 살아감을 비유적으로이르는 말이다.
又并後說
또차운함에 아울러 후설(後說)을 쓰다
郭 久 進士
곽 구는 진사이다.
金公景華 煥人之君子也 一日來訪余 仍示 一小帖 帖乃柳亭詩橋也 余未暇披閱 先之以問曰 所謂之亭也 惡乎在亭之者誰 景華口 將營之容 將形之久 而曰噫速矣 吾五世祖亭斯亭 詠斯亭 繼而和之者 都一時所嘗從遊之朋執也 逮至吾先君 思欲 述其志 廣其傳 故囑之韻人 以詩以序焉 今者 亭之柳獨依舊 而風樹奄忽 卒之孤露爲比柳亭主 吾惡得無迫慕感痛之情 於此亭哉 念吾子 即吾先君之同榜也 吾敢以吾先君之思 求之於吾子 吾子盍亦 以未嘗言於吾先君者 為吾言之 余乃耳其言 目其詩 蹷然而起曰 惜乎 有柳亭如此其久也 而吾未之一策靑黎無爲其側也 有詩序 如比其多也 而吾獨未之一效東施載名其間也 吾既不得與上舍公 作柳亭遊 又不得爲上舍公步柳亭韻 而今景華之所言 亦柳亭之蹟也 則吾於柳亭張口而不能嗋也 吾又何規矣乎 姑略序其所聞 終歸之感惜之情而已爾
維年月日 苞山 後人 謹書
김경화(金景華)공은 사람의 마음을 밝혀주는 군자이다.하루는 나 에게 내방 하여 작은 책 한 권 을 보여주는데 , 그 책은 유정 시고 (柳亭詩稿 ) 』였다 . 나는 그 책을 펴고 읽어볼 여가가 있지 않아 먼저 묻기를 , “ 정자 는 무엇이라 합니까 . 어디에 있는 정자이며 누구의 것 입니까 . " 라고 하였다 .
경화가 버드나무정자의 규모와버드나무 정자가 보전된 오랜 세월을 말하고는 "아! 고원 (高遠)합니다 . 우리 5대조의 정자 가 이것입니다 . 정자 에서 시를읊고 이어서 화답 을 한 분들 은 모두 일시에 일찍이 종유(從遊) 하신 벗들입니다 . 우리 선군의 뜻을 뒤따라서 그 분들의 뜻을 찬술하고 싶으며 그분들의 작품을 널리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그러므로 남에게 화운해줄 것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
지금 정자의 버드나무가 유독 변함이 없어 문득 풍수의 탄식 을 하게 됩니다 . 졸지에 외로운 이슬 같은 처지로 이 정자 의 주인이 되었으니 제가 이 정자에서 어찌 조상을 그리워하며 가슴 아파하는 정이 없겠습니까 . 우리 선생을 생각하자면 , 곧 우리 선군과 동방급제를 하셔서 제가 감히 우리 선군의 생각 으로 우리 선생께 써주실 것을 청하옵니다 .
우리 선생께서는 어찌 또한 일찍이 우리 선군을 위해 말씀 하
시지 않은 것으로써 저를 위해 말씀 하시겠습니까 . ”라고 한데 , 내가 그 말을 귀담아 듣고 그 시를 눈여겨 보고 갑자기 일어
나 말하기 를 , “애석 하도다 ! 버드나무 정자가 이와 같이 있은 지가 오래됨에도 내가 청려장 지팡이를 잡고서 아무 일 없이 그 주변을 거닐러 가지를 않았다 .
시와 서문이 이와 같이 현전해 있는 것이 많았음에도 나는 유달리 동방 현인들의 이름이 실
린 그 시첩 사이에 있는 작품 한 편조차 효칙(效則) 하지 않았다 . " 라고 하였다 .
나는 이미 상사 공과 함께 버드 나무 정자에서 종유(從遊)할 수 없다 . 또한 살아계신 상사공을 위해 유정의 시운에 맞추어 화 운할 수도 없다 . 오늘 경화가 언급한 바의 내용이 또한 버드 나무 정자에 서린 선인(先人)들의 자취였으니, 이에 나는 벌린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내가 또한 살짝 보았을 뿐이니 어찌하 겠는가. 버드나무 정자에 대해서 들은 바가 마침내 감석(感惜 )의 정에 이르게 하여 서문을 간추려 조금 썼을 따름이다. 모넌 모월 모일에 포산 후인이 삼가 쓴다.
五世相傳74)樹亭 오대에 절쳐 버드나무 한 그루의 정자를 잔하였는데
傍人誰解主人情 옆 사람들 중에 주인의 뜻을 아는 사람은 누구인가.
鯫生75) 獨負陰邊醉보잘 것없는 이몸은 홀로 그늘가에 의지해 술 취하니
慚愧吾君勤押醒억지로 술깨기를 권하신 우리 선군께 부끄럽네.
又并續錄序
또 차운함에 아울러 연속해 서문을 쓰다
金應祖76)文右尹 鶴沙
김용조는 문과에 급제하여. 우윤이며 호는 학사이다
大凡自古 人家能傳之子之孫 而不替者 鮮矣 又况故家喬水鬱鬱 爲德之符 而祖先遊息 於前雲仍避息 於後世傳六七年 壓數百而不破折 不腐壞 枝枝條達 葉葉濃翠 豈非神物 有以護扶77)而然歟 余友於人金君景華 所袖示柳亭詩話 重有感矣 柳亭卽景華 五世祖處士金公 所築一生逍遙於其下 而仍作詩 以寓懷者 其胤 上將公及其玄孫上舍公 能繼其迹 求詩文 以記其事 而景華乃上舍公胤也 既自和其詩 仍囑諸文士和之 今將續 而錄之 以爲後世子孫 勿替引之之地 使其先迹傳之無窮 額物中易或行者都也 今是柳歷數百年
傳六七世 而急来茂 兹非 柳亭印象章 上將公及其玄孫上含公 求請文 以記其事 而景華乃上 世子孫 勿告引之之地 使其先迹傳之無窮 豈但六七世而止哉 噫植物中易袁朽者柳也 今是柳歷數百年 傳六七世 而愈繁茂 玆非德之符歟 非神物所扶護而何 余於景華為忘年友 於上舍公為同年 又感其事之首 未嘗以爲柳亭詩話續錄序
是年白牛仲夏下澣 鶴沙 耄人 謹書
대개 무룩 에로부터 인가(人家 )에서 아들 · 손자에게 전해주면 서 변하지 않은 것은 드물었다. 또한 하물며 고가(古家)의 큰나무
가 우지저서 덕망의상서로움이 되어 선조(先祖) 들은 앞서유람하고 자손들은 나중에 유람하면서 6 대 7 대를 전해지고수 백년을 지나면서 꺾이지 않고 썩거나 무너지지 않아 가지들이 서로 닿고 잎들이 질푸르니 이것이어쩌 신물(神物)이 수호하지 않고서야 그렇겠는가. 나의 벗 김경화 군이 소매 속에서 「 유정시화(柳亭詩話)」를 꺼내 보이니 거듭 감동하게 되었다.
버드나무 정자는 곧 경화 의 5세조이신 김처사 공께서 쌓으셨으며 일생토록 그 아래를 소요하시면서 시를 지으셨다. 그 시정(詩情)에 마음읗 담아 회포를 편 분이 그 아드님이신 상사공 (上舍公)과 그 현손(玄孫)이 셨다. 상사공께서 능히
자취를 이어받으셔서시문을 구
하시며 그 옛 일을 기록하셨다. 경화는 상사공의 자제이므로 이에 그 선조(先祖)의 시에 스 스로 화답하고 여러 문사들께 화답해주실 것을 부탁하여오늘날에도 그 뜻을 계승해 기록하려 한 것이다. 후대(後代)의 자손 들이 끌어오는자리를 바꾸지 않고 선조(先祖
)께서 남기신 자취로 하여금영원히 전해지도록 할 수 있다면, 어찌 6 대 7 대에서멈출 따름이겠는가. 아!식물 가운데서도 쉽게
쇠 하는 썩는 식물은 버드나무이나, 오늘날 이 버드나무는 수백 년을 지냈으며 6대 7대를 지냈어도 오히려 번성하고 올창하니 이는 덕망의 상서로움이 아니겠는가. 신물(神物) 이 불들고 보호한 바가 아니었다면 어찌 되었는가. 나의 벗 경화는 나이를 잊고
교유한 벗이며 상사공(上舍公)과는동년(同年)의 벗이다.
또한 일의 처음과 끝에 감동하여 「유징시화 (柳亭詩話),」를 위해 속룩(續錄)의 서문을 짓노라.
이 해는 신축년(辛丑年 )5월 하순으로 학사(鶴沙)모인 (耄人) 이삼가 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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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상전(相傳): 대대로 이어 서로 전하다.
75)추생 (鯫生): 송사리 같은소생(小生).자신을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낮추어 표현한 것이다.
76)김응조(金應祖):풍산(豊山) 이 본관이며 안동 출신이다. 조부는 장레원사의 김농(金農) 이고, 부친은 산음현장 김대현 ( 金大賢)이며, 모당은 수의부위 (守義副義)이찬금 (李纘金)의 따님이다.17세 때 유성용(柳成龍)을사사했으며,1613년(광해군5)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로인해1623년에 인조가 즉위하자 알성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병조정랑 •홍덕원감•선산부사 등을액임하고,1634 년인조 12)에 사직하고 낙앙하였다.
지평(持平)•장령(掌令)•헌납(獻納)•수찬(修撰)•교리(校理)•부수찬•집의(執義)•사간•응교(應敎)•승지•호군•공조참의•대사간•한성부윤 등의 관직을 인조•효종•현종 삼대에 걸쳐 역임하였다. 1637년에는 청나라 사신이 빈번히 출입하자 접대비 염출을 위해 삼분모회록법(三分耗會錄法)을 제안해 시행하게 하고,1658년(효종9)에 폐지하게 하였다.
1638년에 장령으로 있으면서8조를 건의했는데,'명대의(明大義 )로 사대교린의 외교 정책을 지지하고 절의를고집하면서 교린을 가볍게 단절함을 비판한 것이 일례이다. 1651년(효종 2)에는「대학연의(大學衍義)」의 강(講)을 마친 후.문교 (文教)가 전폐됨을 개탄하고 학문 권장을 건의하였다.
1656년 에는 예조참의로 있으면서 마음을 닦아 본성을 기를것,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들을사랑할 것. 문(文)을 숭상해 학문을 일으킬 것을 건의하고,1659년(현종 즉위년)에는 공조참의로 있으면서 임금의 도리를 상소하였다. 1664 년 에는 금성산성(金城山城)의 군량미 문제로 예조판서 홍중보 (洪重普)와 병조판서김좌명(金佐明)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현종은 삼조(三朝) 를 시종한 신하로 나이80세이며 먼 영남의 집에 있는 점을 고려해 사면하였다.
77)부호(扶護): 도와서 보호하다.
人去干秋尙有事오랜 세월이라 사람은 떠나도 정자는 오히려 남아있는데
烟枝露葉不勝特안개 서린가지와 이슬맺힌 잎은 정을 못이기네.
相傳六世為無恙6세에 걸쳐대대로 전해져도 오히려 무탈하니
永日滿陰睡味醒종일 맑은그늘에서 자다가 술 깨는 것을 완미 (玩味)하려네.
又
또 차운하다
李崇彦 文府使 追溯
이숭언은 문과에 급제하여부사이며 호는 추재이다.
六世遺風78)屬一亭6대에걸쳐전해진 유풍(遺風)이 한 정자에 이어지는데
百年衰柳尚含백년이라 쇠잔해진버드나무는 오히려 정을머금었네.
打沙月白淸陰轉모래톱의 밝은달은 푸른 나무 그늘을 돌고
詠罷遺篇俗慮醒남기신 시판을 옮고서 쉬니 속된생각이 깨네.
又
또 차운하다
朴檜茂 79 ) 進來訪 六友堂
박회무는 찰방 벼슬에 나아갔으며 호는 육우당이다.
古木槎牙號柳亭오래되니 나무정자를 유정이라 부르니
賢孫培植寓深情어진후손이 배식(培植)하여 깊은정 깃들었네.
綠陰滿地尊綠녹음이 세상에 가득하니 푸르지 않은 것을 우러르는데
猶有流鸎喚客醒오히려 지나가던 꾀꼬리가 부르는 소리에 나그네는 술이깨네 .
又
또 차운하다
張龍遇 生員 丹溪
장용우는 생원이며호는 단계이다.
六世相傳一柳亭 6대에 절쳐 대대로 전해진 버드나무 한 그루의 정자인데
風霜雨露古今情 바랍서리와비,이슬 내려도 고금의 정이 있네.
多君以孝爲家寶효를가진 그대에게 가문의 보물이 많이 되니
少帖新詩喚我醒작은 시첩에 새로운 시를 불러 내가 술 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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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유풍(遺風):선인(先人)이남긴 기풍이나가르침을의미한다.
79)박회무(朴檜茂, 1575-1666): 조선 중기의 의사(義士)로 알려져 있다. 자는 중식(仲植) 이며, 호는 육우당(六友堂)• 숭정야로(崇禎野老)이다. 본관은 나주(羅州)로, 조부는 목사(牧使) 소고(嘯皐)박승임(朴承任) 이며 부친은 의금부도사 (義禁府都事)박복(朴 漉)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우복(愚伏) 정경세 (鄭經世)의 문인이다. 중후한 성품이었으며 1606년 사마시(司馬試)에 함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했을때 인조(仁祖)임금이 강화도로문진하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호종하였다. 소를 올려화의를 배척하며 자강(自强)을도모할것을 강력히주장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했을때 의병을 일으켜 출정하였으나 화의가 성립되자 통곡하고은거하였다. 그는 소나무-전나무-매화나무- 대나무-연-국화를 벗 삼아 여생을 마침는데, 이로 인해 호가 육우(六友)이다. 영천(現 영주) 의 산천서원 (山泉書院)에배향
되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