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27일 화요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51-56
51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52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5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54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55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주님의 심부름꾼으로 나는 적합한가?
우리가 살면서 가장 어려운 일은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고, 주님의 품에 안겨 있다 하여도 역시 죽음은 가장 힘든 고비이고, 죽음의 뒤편에 있을 미래를 자신이 더욱 예측할 수 없기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미래를 안다면 정말 죽음이 두려울 것이지만 자신의 미래가 정말 하늘나라를 보장 받고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래도 죽음이 두렵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미래에 지옥에 떨어질 것을 익히 안다면 얼마나 두렵고 불안하고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어느 누구도 미래에 대한 확신을 하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는 1946년에 다르질롱으로 기차를 타고 가다가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지요. “데레사야! 칼타고에 가게 되면 수많은 거지와 문둥병자들이 길거리에서 살다가 길거리에서 죽는데, 너는 그들에게 가서 산 자에게는 잠자리를 주고, 죽은 자에게는 무덤을 주어라.” 그녀는 이 부르심을 받자 즉시 수도원을 떠날 결심을 하고 로레토 수녀복을 벗어버리고 어깨에 십자가를 멘 수도복으로 갈아입고 길을 떠나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오늘 밤 잠자리가 어딘지도 모르고 떠나나이다. 또 이 한 벌의 옷이 헤지면 무슨 옷을 입을지도 모르나이다. 주께서 떠나라고 하여 떠나오니 주께서 제 일생을 책임져 주소서.”
마더 데레사는 오늘 십자가에 처절하게 죽임을 당하리라는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예루살렘으로 떠나시는 주님의 사랑을 닮고 싶었을 것이고 그녀는 성모님처럼 오직 순종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과 마더 데레사의 환경에는 공통점과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은 고난의 길을 확실히 알고 계시고, 마더 데레사는 고난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확실히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으시고 그 고난으로 죽임을 당하시고 철저하게 외면을 당하시지만 마더 데레사는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지만 그녀가 기도한대로 주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고 보호해 주시어 은총으로 모든 것을 나눌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성부 하느님께 완전히 자신을 의탁하신 것처럼 마더 데레사도 주님께 완전히 자신의 삶을 의탁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의탁을 모르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살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타산지석 가이공옥'(他山之石 可以攻玉)<다른 산의 돌로 옥을 갈다.>는 뜻이지요. 남의 산에서 나오는 보잘것없는 돌일지라도 자신의 옥을 닦는 숫돌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의 언행도 자신의 몸을 수양하고 학문을 닦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뜻이지요. 나보다 잘난 사람뿐만 아니라 나보다 못한 사람들의 말이나 행실을 보고도 나를 반성하고 거울로 삼는 것은 우리가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이러한 자세와 행실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을 보고 나를 반성해봅니다. 예수님께서 단지 예루살렘으로 걸어가시겠다는 결심으로 굳게 그 길을 가는데 막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나무랄 자격이 내게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은총을 주시기 위해서 내 주위에 맴도시는 주님을 항상 차버리는 것도 바로 내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심부름으로 사마리아 마을에 들어선 제자들이 어떻게 주님을 소개하고, 어떻게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주님을 잘못 모셨으면 예수님까지 미워하였는지 생각해봅니다. 그들은 교만하고 으스대며, 주님을 위한다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협박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 항상 자신을 낮추고 어린이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잊어버리고 처신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이 서로 원수지간으로 지낸다고 하여도 야고보와 요한과 같이 아니 다른 제자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였을지 모릅니다만 하늘에서 불을 내려 보복하겠다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모실 자리를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나는 주님의 심부름을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반성해 봅니다. 주님의 심부름꾼으로 자처하면서 많이 살았지만 세상을 사는 순간순간 주님을 배척하도록 나의 언행은 앞에서 춤을 추며 살아온 듯합니다. 교만하고 으스대면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신을 높이며 주님을 배척하고 미워하게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겠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주님을 미워하게 하였기에 부끄럽고 죄송스런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반성하면서 새롭게 결심하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 앞에 놓아진 그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겸손하게 짊어지고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어찌하여 하느님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는가?>
▥ 욥기의 말씀입니다. 3,1-3.11-17.20-23
1 욥이 입을 열어 제 생일을 저주하였다.
2 욥이 말하기 시작하였다.
3 “차라리 없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 ‘사내아이를 배었네!’ 하고 말하던 밤!
11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
12 어째서 무릎은 나를 받아 냈던가? 젖은 왜 있어서 내가 빨았던가?
13 나 지금 누워 쉬고 있을 터인데. 잠들어 안식을 누리고 있을 터인데.
14 임금들과 나라의 고관들, 폐허를 제집으로 지은 자들과 함께 있을 터인데.
15 또 금을 소유한 제후들, 제집을 은으로 가득 채운 자들과 함께 있을 터인데.
16 파묻힌 유산아처럼, 빛을 보지 못한 아기들처럼 나 지금 있지 않을 터인데.
17 그곳은 악인들이 소란을 멈추는 곳. 힘 다한 이들이 안식을 누리는 곳.
20 어찌하여 그분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고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21 그들은 죽음을 기다리건만, 숨겨진 보물보다 더 찾아 헤매건만 오지 않는구나.
22 그들이 무덤을 얻으면 환호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련만.
23 어찌하여 앞길이 보이지 않는 사내에게 하느님께서 사방을 에워싸 버리시고는 생명을 주시는가?”
축일9월 27일 성 빈첸시오 드 폴 (Vincent de Paul)
신분 : 신부, 설립자
활동 연도 : 1581-1660년
같은 이름 :뱅상, 빈센트, 빈첸시오 아 바오로, 빈첸시우스, 빈첸티오, 빈첸티우스, 빈켄티오, 빈켄티우스, 원선시오
프랑스의 농부인 쟝 드 폴(Jean de Paul)과 베르트랑드 드 모라스(Bertrande de Moras)의 6남매 중 셋째 아들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Vincentius a Paulus)는 프랑스 남서부 랑드(Landes) 지방의 푸이(Pouy)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고향 인근의 닥스(Dax) 대학교와 툴루즈(Toulouse) 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1600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1605년 그는 어떤 부인의 기부금을 받기 위해 마르세유(Marseilles)에 갔다 돌아오던 중에 해적들에게 잡혀 튀니지에서 노예로 팔려 가는 불운을 겪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1607년 아비뇽(Avignon)으로 탈출하였고, 그 후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로마로 갔으나 1609년에 앙리 4세(Henry IV)에 대한 비밀 임무를 띠고 프랑스로 돌아갔다. 이때 그는 파리(Paris)에서 프랑스 해군 함대의 사령관인 공디(Gondi) 백작 가문의 가정교사와 영적 지도신부로 활동하였다. 어느 날 공디 백작 부인의 청으로 죽어가는 가난한 농부의 병자성사를 집전하면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신의 사명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스스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신을 봉헌하겠다는 서원을 한 그는 1617년 샤티옹(Chatillon)의 주임신부로 사목을 시작했다. 그리고 1618년 그는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cus de Sales, 1월 24일)을 파리에서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가난한 이를 돕기 위한 조직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625년 선교회를 설립했는데, 이 회는 ‘빈첸시오회와 라자로회’로 알려졌다. 그는 주로 농부들에게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그는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본당 단위의 회를 구성하였으며, 1633년에는 성녀 루도비카 드 마리약(Louise de Marillac, 3월 15일)과 더불어 ‘애덕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병원과 고아원을 세웠고, 북아프리카의 그리스도인 노예들을 대속하였으며, 새로운 신학교를 세움으로써 사제 양성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또한 해외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것은 물론 프롱드(Fronde) 전쟁의 희생자를 위한 구호소를 세우고 영적인 저술도 많이 남겼다.
귀족적이고도 충성스러운 성격을 지녔던 그는 가난한 이들 안에서 자신의 성소를 발견하고 인간의 고통과 비참을 경감시키기 위해 일생을 다 바쳤다. 그는 또한 가난을 유발하는 구조적 환경을 개선하고 제거하는데 적극성을 보인 탁월한 인본주의 그리스도인이었다. 1660년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가 파리에서 선종했을 때, 그가 설립한 회와 수도회는 이미 프랑스를 넘어 세계 곳곳으로 퍼져있었다. 그는 1737년 6월 16일 교황 클레멘스 12세(Clemens X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1885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하여 모든 자선단체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오늘 축일을 맞은 빈첸시오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또한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가 더욱 축복 속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기를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
첫댓글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세르지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