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시에서 국립백운산 자연휴양림 거의 다 가서 후리사 계곡 주변 용수골가든 오른쪽으로 후리사 공소가 있다. 후리사 공소는 박해를 피하여 ‘덕가산’ 에서 살던 교우들에 의해 흥업면 매지리 분지동(분지울)에서 시작되었다. 공소 설립은 1880년으로 알려져 있다. 1890년경 공소는 교우들이 많이 모여 있는 백운산 아래 용소골로 옮겨졌다가 후리사 마을까지 교세가 확장되자 1900년 초에 용소골에서 현재 강당이 있는 후리사로 공소룔 옮겨 회장댁에서 공소 예절을 지냈다. 1896년 원동 성당에 르메르 신부가 부임시 관할 공소로 용수골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공소의 교세가 컸음을 알 수 있다.
1952년 봄 당시 공소회장이었던 조상준(벨라도) 회장이 공소예절을 보던 자신의 짐 121평을 기증하여 그해 가을에 현 강당 31평읊 완공하여 원동 이 바드리시오 신부에 의태 죽성되었다. 이후 1960년 12월 5일 원동 성당에서 단구동 성당으로 1998년 2월 17일에 구곡 성당으로 관할구역이 편입되었고 2005년 6윌 구곡 배달하(밀립보) 신부에 의해 강당이 전면 개보수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후리사(厚理寺)는 사찰의 이름이다. 구전에 의하면, 후리사는 신라시대 진흥왕 때 서곡 대사라는 이가 이 지역에 절을 세우고 후리사라고 했다고 한다. 9층 석탑까지 있었으며 승려 수십 명이 수도하는 대사찰이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고 탑의 파편들이 발견된다. 사찰은 사라졌지만, 창건자인 서곡대사의 이름이 서곡리라는 지명으로 정착되었고, 후리사는 이 지역에 들어선 천주교의 공소의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다른 종교의 사원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것이 놀랍다. 천주교는 본래 교회 명칭을 지을 때 주로 마을 이름을 사용하였는데, 그런 관습으로 후리사 공소의 이름도 지었던 것이다. 마을에 옹기 가마터가 있어 옹기 장사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걸로 집작하면, 천주교 박해시대에 신자들이 피난을 와서 옹기를 구워 팔면서 외부와 접촉을 끙고 숨어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던 곳이 분명하다. 1910년경에는 약 16〜17가구가 거주하였다고 하는데, 당시는 마을 전체가 천주교 신자였으며, 마을에는 옹기 가마가 두 군데나 있었고, 옹기가마 하나는 현재 동그랑산 공동묘지 밑에 있었으며, 옹기가마와 옹기점이 같이 있어 항아리들을 주로 만들었는데 또 하나의 옹기가마는 현재 천주교 공소 강당 뒷밭에 있었고, 옹기점은 강당 앞에 있었으며 주로 자배기, 물동이, 옹배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때로부터 백 년이 훨씬 지난 지금은 용기 터를 찾아볼 수 없으나, 천주교 박해시대에 박해를 피해 은둔한 이들이 용기를 구워 생계를 꾸려갔다는 기록이 한국천주교 박해사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더욱이 천주교의 전래에 큰 공을 세운 분으로 알려진 이하진과 그의 증손주(?)인 이가환의 사적비가 후리사 공소로부터 차량으로 10여 분 거리의 분지골이라는 곳에 있는 것을 보면, 비록 작은 공소지만 후리사 공소가 천주교의 중요한 문화유산임을 알 수 있다. 이하진은 조정의 사신으로 중국을 왕래하면서 천주학을 접한 후 자신의 친척인 이승훈을 자비로 중국까지 유학을 보낸 인물이며, 또 정조 시대에 성균관 대사성까지 지낸 이가환은 신묘박해 때 천주교의 수괴로 지목되어 심한 매질과 고문을 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후리사 공소는 불교 사원 명칭을 천주교 공소 이름으로 썼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곳이다. 아무리 마을의 이름을 교회의 명칭으로 하는 관례가 있다 하더라도, 만일 공소 이름을 지었던 이들의 가슴 속에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 의식이 있었다면, 그런 명칭을 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후대 신자나 성직자들이 관용의 의식이 부족했다면, 공소 명칭을 바꾸려 시도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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