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 야학과의 인연
1) 1988년~1989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렵게 공부를 하여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입학한 지 어마되지 않아 선배로부터 야학을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86년에 개교하여 장소가 없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다가 88년 3월에 학교 개관식을 하던 날에 학교를 방문했습니다. 많은 근로청소년과 만학도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야학과의 인연은 시작되었고 학생모집 광고를 위해 협조하였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는 봉사를 하게 된 이유는 부모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부모님께서도 배우지 못하셨기 때문에 배우지 못한 분들을 위해 가르쳐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주향토시민학교 설립 취지문을 보면서도 감동을 받았습니다.
다음은 설립 취지문의 내용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많은 교육기관이 있지만 여러 가지 개인적 경제적 상황으로 인하여 교육 기회를 잃은 사람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사회생활을 통하여 배움을 향한 강한 열망을 가지게 되었으나 이를 충분히 수용하여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제도적 교육이 마련되지 못하였으며 지역사회 단체들의 교육참여 또한 미진한 실정입니다. 민족 분단 40년을 보내고 한민족의 기상이 세계에 나타나는 이때 기존의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음을 통감하고 지금까지 축적해 온 지식과 문화역량을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배움의 길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에게 환원시켜서 개인의 지적인 가능성과 삶의 가치를 구현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한민족 모두는 공동운명체라는 자각에서 지성인들이 출신 지역의 발전을 위해 봉사함으로써 사회적 계층적 차원의 대립과 갈등을 화해와 단결로 전환하고 민족통일과 번영을 지향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고자 향토학교를 설립하고자 합니다.”
2) 1995년~1997년
군대를 제대하고 2년 남은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준비하기 위해 공부를 하던 중 진주향토학교가 폐교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학교를 방문했습니다. 88년 3월 진주향토학교를 방문했을 때의 설립 취지문을 떠올리며 폐교를 막기 위해 학생 모집과 자원봉사 교사 모집을 하게 되었습니다.
95년의 야학의 상황은 88년과는 달랐습니다. 진주향토학교는 야간 수업이 없어지고 근로청소년도 사라진 만학도 위주로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저도 또한 주간 위주의 수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지역사회에 배우지 못한 분들께 배움을 제공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17명의 학우들을 모시고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지만 96년 12월까지 건물을 비어달라는 건물주의 통보를 받고 많이 망설였습니다.
고민 끝에 언론을 통해 폐교를 막기 위해 취재 요청을 했습니다. 그 덕분으로 학교는 무사히 이사를 하게 되었고 새로운 배움터에서 수업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과 가중된 수업으로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멀리 거창.함양.산청.남해.사천.의령.합천.통영.고성 등지에서 배움을 위해 달려오시는 분들을 생각하며 보람을 느끼며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3) 1998년-2007년
98년 3월에는 봉곡동(현재 학교 위치)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30명이 넘는 학생들과 12명의 자원봉사 교사와 함께 새로운 배움터에서 수업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업도 서부경남에 배우지 못한 분들의 요청에 의해 주간과 야간으로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23평의 작은 배움터에서 야간 수업을 할 때면 한 공간에 블라인드를 설치하여 중학교와 고등학교 수업을 하다 보니 뒤쪽에 있는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하는 것이 어려웠던 적도 있었습니다. 10대에서 70대에 이르기까지 오직 배움을 위해 오시는 분들께 최선을 다해 학교를 운영했습니다.
진주향토학교의 교무로서 전체적인 수업운영과 관리를 해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많은 학생들이 배움의 기회를 얻게 되었고 검정고시에 합격할 수 있음에 보람을 느꼈습니다. 2000년이 되면서 자원봉사 교사도 모집이 되지 않았고 기존의 교사들도 하나둘씩 떠났습니다. 누군가는 학교를 지켜야 했기 때문에 배우지 못한 분들께 배움의 한을 풀어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홀로 학교를 지켜야 했으므로 수업은 오직 저의 몫이었습니다.
혼자서 모든 과목을 가르쳐야만 했습니다. 하루 12시간이 넘는 수업에 몸이 지쳤지만 정신은 오직 교육 봉사로 가득했습니다. 1년에 40명이 넘는 검정고시 합격자를 배출하고 5명 이상의 대학 입학자를 배출하자는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주야로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 목표는 이루어졌고 많은 학생들이 배움의 기회를 얻어 활기차고 고 행복한 시간들을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4) 2008년~2020년
열악한 재정상태로 진주향토시민학교를 운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루에 12시간 수업을 하다 보니 목이 쉬기도 하고 다리에 통증이 심해서 서 있기도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눈을 보면서 힘든 시간을 이겨냈습니다.
그러던 중 2008년 딸아이의 생사를 오가는 사고로 인해 학교를 폐교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때 주변의 지인들이 힘들어도 학교는 폐교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를 해 주셨습니다. 20여 명의 제자들을 그냥 보낼 수가 없어 힘들어도 학교를 운영하기로 했습니다. 딸은 사고로 뇌병변 1급 판정을 받았습니다. 목을 가누지 못하고 누워만 있습니다. 11년 동안 딸을 데리고 오후에는 치료실에 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혼자서 전 과목을 가르치고 하루에 10시간을 넘게 강의하지만 힘들지는 않습니다. 저를 보고 먼 곳에서 달려오는 제자들이 있기에 이 걸음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진주향토시민학교가 폐교하면 서부경남에서 만학도들이 배울 수 있는 시설이 없게 됩니다. 평생교육은 배운 사람들을 위해서 필요할 수도 있지만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더 절실합니다. 힘들어도 폐교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배움터를 찾아 먼 곳까지 달려오는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2015년에는 지방재정법 개정에 따라 그동안 보조금을 지원해 온 경남도교육청이 보조금 지원 중단을 통보했습니다. 1986년 문을 연 진주향토시민학교는 35년 동안 주·야간 시설로 운영되었습니다. 상평공단이나 인근 하동, 산청, 사천 등에서 가정형편 때문에 학업을 중도 포기한 근로 청소년과 50~60대 장년층들이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진주향토시민학교는 진주시와 경남도교육청으로부터 보조금을 받아 교재나 학습 기자재 등을 구입해 왔습니다. 하지만 진주시가 2007년부터 이미 지원을 중단했고, 지난해 지방재정법 개정에 따라 교육청의 지원도 2016년도부터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폐교를 걱정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한국남동발전으로부터 연간 500만원의 후원금을 받게 되어 폐교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학교 운영
서부 경남 지역에 교육참여의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1시 15분까지 고등학교 수업을 진행하였고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오전 8시 40분부터 오후 1시 20분까지 한글 수업과 중학교 수업을 진행하였습니다. 야간에는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저녁 7시부터 10시 20분까지 중학교 수업과 고등학교 수업을 격년으로 운영하였습니다. 검정고시가 있는 4월과 8월 이전에는 오후 2시부터 4시 30분까지 오후 검정고시 특강을 진행하고 야간 화요일과 목요일에도 검정고시 특강을 진행하였습니다. 하루 많이 수업할 때는 12시간 이상을 수업하였는데 최근 몇 년간은 쉬는 시간 없이 강의하였습니다. 제자들의 눈을 보며 기뻐하시는 모습에 보람을 느끼면서 하나라도 더 가르쳐드리고 싶었습니다.
고등학교 주간 수업
8:50-1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