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0장
"커억!"
초상과 서문천이 혀를 차고 있는 그 순간, 풍뢰검객 문상은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앞에 서 있는 여인을 쳐다보았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음이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앞을 가로막는 인물을 보며 냉소를 했다. 아직 운이 다하지 않았다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여인, 아직 서른도 안 돼 보이는 여인이 자신을 막겠다고 서 있는 게 아닌가. 서둘러 끝내고 떠나야 하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달려들며 공격을 가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자신의 공격이 전혀 먹히질 않는 것이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무렵, 지금껏 방어만 하고 있던 여인이 처음으로 공격을 했는데 그 결과가 지금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자신의 왼팔이었다.
"누구냐? 어찌 남궁세가에 너 같은 인물이 있단 말이냐?"
감숙성에 있는 남궁세가 인물들에 대해선 대부분 파악을 하고 있었지만 저 정도 고수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었다.
그런데 자신은 그에게 일초지적도 되지 않는다.
"당신은 실수했어. 제갈수연 같은 계집을 따르는 게 아니었단 말이야."
언제나 차분하던 남궁미령의 몸에서 질식할 듯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제갈수연, 그리고 제천맹. 결코 같은 하늘 아래서 공존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분을 공격했다는 게 가장 큰 죄야."
넋을 잃고 자신을 쳐다보는 문상을 향해 제왕검을 던졌다.
그녀의 분노였다. 태어나 처음으로 정을 주었던 그 남자가 적에게 쫓기고 있었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약했기 때문이었다. 강하지 못했기에 그를 돕지 못했고, 그의 형제들이 죽어가는 현실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래서 지난 사 년간 죽을힘을 다해 무공을 익혔다. 그가 살아오지 못하면 자신이라도 나가서 복수를 하기 위해 익혔던 무공이었다.
그런데 그가 돌아왔다. 비록 한 팔이 없어진 상태라 하였지만 혼자만 살아왔단다. 당장 달려가 그의 품에 뛰어들고 싶었다.
왜 소식 한 번 없었냐고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 허나 아직은 참아야 한다. 그의 일이 끝날 때까지.
"그 정도였더냐……."
날아오는 검을 쳐다보던 문상이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자신의 힘으론 감당할 수 없는 여인이었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과 함께 정신이 아득해졌다.
"빌어먹을……."
풍뢰검객 문상, 청성파의 제자였던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석공자, 한 명 보냈어요."
무심한 눈길로 문상의 가슴에 박혀 있는 제왕검을 뽑아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조그마한 복수일 뿐이었다.
"누님, 너무 싱거워."
고대랑을 처치한 남궁무가 입맛을 다시며 남궁미령이 있는 곳으로 왔다.
그 또한 많이 변해 있었다. 과거의 오만하고 치기 어린 모습은 사라지고 잔잔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내적인 성장이 있었다는 의미인 게다.
"근데 매형은 어디 있을까."
"너~?"
남궁무의 매형이란 말에 남궁미령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싫어하는 표정은 결코 아니었다.
"저 하늘 어딘가에 있겠지. 아마 붉은 광기를 휘날리고 있을지도…."
하늘을 쳐다보던 남궁미령이 남궁무와 같이 몸을 날렸다. 이곳에 남아 있던 오십여 명의 남궁세가 인물들은 이제 낙양으로 갈 터이다.
그곳에서 제갈세가로부터 받았던 빚을 그대로 돌려줘야 한다. 받았던 대로….
* * *
남궁미령이 그리워하고 있는 당사자인 석두와 광풍대원들은 산서성의 제천맹 지부에서 그들만의 분노를 쏟아내고 있었다.
철수무정(鐵手無情) 좌홍. 제천맹 산서지부 지부장으로 벼락출세의 표본이 된 자였다.
사 년 전 혈광마겁 때 추격대의 선두에서 움직이고 있었던 관계로, 모든 힘을 소진하고 죽어가던 공적의 등판에 자신의 우수를 찔러 넣을 수 있었다.
순전히 운이었다. 몇 개의 검이 꽂혀 있던 상대의 등이 앞에 있었고 그곳을 향해 전력을 다한 장을 뻗어냈을 뿐인데, 그게 마침 그놈의 마지막이었던 거였다.
그런 다음, 좌홍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광의 세월이었다. 죽어가던 놈에게 뻗어낸 한 번의 손짓이 제천맹 산서지부의 지부장이라는 명예를 안겨주었다.
물론 무공이 약한 것은 아니었지만 남들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벼락출세한 대표적인 인물로 부각되었고, 수많은 무인들을 제천맹으로 모여들게 한 장본인이 되었다.
제갈수연의 머리 씀씀이였다. 외부인물들을 영입하기 위한 얼굴 노릇이 그의 역할이었다.
그랬던 그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바로 조금 전에 철수 지시를 받았는데, 그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흉수들이 들이닥쳐 버렸다.
대항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즉결처분까지 하며 이탈하는 부하들을 잡아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감시의 눈길이 조금만 느슨해져도 여지없이 도망을 쳤다.
오백의 병력 중 남아 있는 부하들은 백여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이곳보다 몇 배나 강한 안휘지부마저 당했는데 산서지부는 말할 나위가 없다.
"도망을 가야 해. 빨리 피해야 해."
밖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비밀통로가 있는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아이, 씨팔! 만들려면 좀 높게 할 일이지."
신경질적인 표정을 지으며 외팔이 한 명이 통로 안에서 나왔다. 소살우였다.
다른 동료보다 일찍 뛰어들었던 그가 산서지부 무인들을 도륙할 때마다 비밀통로의 존재 유무를 물었던 거였다.
결국 열 번째 도를 날릴 때쯤 해서 이곳의 존재를 알고 있는 놈을 찾을 수 있었다.
"응?"
두려움에 떨고 있던 좌홍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아니, 희망의 표정이라 해야 옳았다.
비밀통로를 타고 들어온 소살우의 행색이 그에게 안도감을 심어준 원인이 되었던 거였다.
불구, 한 팔이 없는 병신이 자신을 잡겠다고 온 게 아닌가. 저 정도면 처치하고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이봐, 내 등이야. 어서 쳐, 네놈이 가장 잘하는 짓이잖아."
좌홍이란 놈에 대해서는 이미 들었다. 이놈도 형제의 머리를 들고 제천맹으로 개선(凱旋)했던 놈이라 하였다.
이미 죽어버린 광풍대원의 목을 잘라간 놈. 또한 남 등쳐먹는 걸 즐겨하는 놈이라 하였다.
"이야합!"
얼굴이 붉어진 좌홍이 전력으로 몸을 날렸다.
말이 필요 없는 상황이다. 사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등을 보이고 있는 놈을 향해 일 장을 먹이고 도망가면 그뿐인 게다.
"헉!"
좌홍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분명 눈앞에 있던 자의 몸이 꺼지듯 사라져버린 거였다. 그리고 왼팔에 느껴지는 이 느낌은.
툭!
"으아악!"
왼쪽 손목에서 피가 솟구쳐나왔다. 어떤 무기가 스치고 지나갔다는 느낌도 없었는데 손목이 잘려버렸다. 너무 빨랐기에 알아차리지 못했던 거였다.
"등이다!"
여전히 반 장 거리에 등을 들이밀며 웃고 있었다. 반 장, 한 걸음 앞으로 나가며 손만 뻗으면 되는 거리인데 너무 멀게 느껴졌다.
"빨리 하고 도망가야지. 시간 없어."
"놈!"
거의 무방비 상태로 등을 열어둔 채 자신을 우롱하고 있는 게다. 거친 고함을 지르며 하나 남은 오른팔을 찔러 넣었다.
"잡았다!"
눈앞으로 다가오는 등을 쳐다보며 좌홍이 쾌재를 불렀다.
놈이 너무 방심했던 터였다. 굳이 죽일 필요까지도 없다. 놈을 쓰러뜨리고 비밀통로를 향해 뛰어들기만 하면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퍽!
"끄아악!"
소살우의 등에 붉은 기운이 어리는가 싶더니 선연한 핏방울이 날렸다. 좌홍의 오른손이 완전하게 부서져버렸다. 마치 돌로 짓이겨버린 것처럼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등을 줘도 안 되는 모양이구나."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소살우의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방에 죽음을 내리지도 않았다.
팔부터 시작하여 전신의 뼈마디란 뼈마디는 전부 부러뜨리고 있었다.
좌홍의 키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처음 다리 쪽이 짧아지고 이어 허리가, 마지막엔 목만 남자 소살우의 행동이 멈췄다.
제천맹 산서지부의 멸망이었다.
불타고 있는 산서지부를 쳐다보고 있는 자들. 수많은 살겁을 저지르고, 셀 수 없이 많은 인간들의 숨통을 끊었지만 여전히 그들의 눈에는 살기가 맺혀 있다.
풀리지 않음이다. 조금이라도 더 거세게 반항을 해주길 바랐는데 너무 맥없이 쓰러진다. 가슴속에 타오르는 분노의 불길이 식질 않는데, 적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빨리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혼자 갈 테냐?"
밤하늘을 밝히는 불빛을 뒤로하고 모든 일행이 움직이고 있을 때 떠나지 않는 한 사람, 백산이었다. 이젠 대부분의 지부들도 정리되었기에, 늙은 귀신을 찾아나서야 할 때가 되었다.
"천오백 년 전에도 혼자 했다고 하더만요."
어디에 숨어 있는지 굳이 알 필요가 없다. 그동안 석숭이 조사해왔던 사실을 바탕으로 찾아가면 된다.
근처에 도착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천비가 알아서 찾아줄 것이다. 몸속에 있는 기운 중 천신가의 기운에 해당하는 놈, 생천비에서 풍기는 기운만 따르면 될 터이다.
과거 자신과 같은 운명을 가졌던 그는 혼자서 오신가와 천가들을 전부 없앴다.
천신가와 사신가는 너무 쉬운 상대일 뿐이다. 숭산이라 하였다. 숭산 어느 구석에 쥐새끼처럼 숨어 있다 하였다.
"끝나고 하남성에서 봅시다. 석두야, 전부 파악하는 것 있지 말고."
"네, 형님!"
석두의 얼굴도 이젠 소살우와 같이 변했다. 수천의 죽음을 말하면서도 웃고 있었다. 백산이 원하는 건 별게 아니다. 제천맹에 대해서 완전하게 알아두라는 말이었다.
제갈세가는 이미 발목이 묶여 있기에 신경조차 쓸 필요가 없음이다. 단지 제갈수연을 미치게 할 제물이 그들인 것이다.
"그럼."
일행의 시야에서 백산의 모습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자네도 따라가게."
"알겠습니다, 사돈어른. 둘 중 한 놈은 제몫입니다."
철목승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걸렸다.
살기(殺氣). 알량한 무공 좀 익혔다 하여 세상을, 아니 인간을 우습게 보는 자들. 자신들의 인생만 생각하는 그런 자들. 이번에는 뿌리를 뽑을 참이다.
영원히 지옥의 구렁텅이 속으로 던져버릴 것이다. 심판당하는 기분이 어떠한 것인가를 확실하게 알려줄 테다.
일행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한 철목승의 모습도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삼 년 전에 비해서 더욱 가공해진 몸놀림이었다. 마신가의 무공을 극성으로 익혔다는 의미인 게다.
철목승이 자신을 따르고 있음을 알지 못한 백산은 빛살 같은 속도로 숭산을 향해 날았다. 거의 바닥에 내려서지 않았다. 파멸안의 세 번째 단계인 광혈지안의 위력이었다.
"결국은 그놈들이 원흉이었어."
모든 일의 원흉이 담운천과 각인이었다.
칠성리에 혈랑 떼를 몰고 와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놈도 그놈이었고, 연동립을 시켜 아버지를 살해한 놈도 그놈이었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해주마. 지옥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단 말이다."
백산의 몸에서 흘러나온 전율적인 살기에 전방에 있던 초목들이 터져나갔다. 또다시 분노하고 있음이다.
그러나.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던 담운천의 천신가는 숭산에 도착한 지 한 달이라는 기간이 지났지만 그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지 못했다.
"이곳이 어디 동네 뒷산인가. 너무 조급해하지 말게나."
철목승이었다. 숭산 언저리에서 백산을 따라잡았던 거였다.
처음엔 의아하게 여겼던 백산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만의 원수가 아닌 것이다. 추렴의 아버지인 철목승도 복수할 권리가 있다.
"알겠습니다."
'그래, 차분하게 하는 거다. 남는 게 시간이지 않느냐.'
철목승의 말대로 동네 뒷산도 아니고, 중원 오악이라는 숭산이다. 그런 곳에서 수백 년 동안을 발견되지 않고 숨어살았던 가문을 찾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터이다.
석숭도 발견하지 못했던 곳이 아닌가.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조급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벌써 수십 개의 계곡을 들어갔다 나왔고, 수십 곳의 절벽을 내려갔다.
준극봉. 숭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였기에 도착하자마자 조사했던 곳이다.
자신을 신의 자손이라 여기는 자이니, 숭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준극봉에 둥지를 틀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에서였다. 한 번 뒤졌던 곳이지만 다시 시작하기 위해 찾았다.
"저기서 물이나 좀 마시세. ……응?"
갑자기 철목승의 표정이 흠칫 변하더니 나뭇잎에 받았던 물을 자세히 살폈다. 달빛에 비쳐진 물의 표면에서 칠색의 무지갯빛이 잠깐씩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었다.
기름기. 음식을 만들 때 사용하는 미세한 기름기가 달빛에 반사되어 그 빛을 발했다.
"찾았군!"
백산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이던 철목승이 이내 그 물을 마셔버렸다. 마치 천신가의 모든 것을 마셔버리려는 행위처럼.
"이곳에 숨어 있었더냐, 이곳에……."
백산의 눈에서 붉은 혈광이 일렁댔다. 드디어 놈들의 흔적을 찾았다.
몇 백 년을 이곳에서 살았는지 모르지만 과거 혈가의 후예를 피해 도망쳤던 천신가의 일당이 준극봉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게다. 마치 쥐새끼처럼.
흐르는 계곡의 물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거의 한 시진 정도 물길을 따라 올랐을 때 백여 장 높이의 절벽이 앞을 막았다.
"여기는……?"
전에 와본 곳이었다. 지금처럼 아래쪽에서 올라왔던 게 아니라 위에서 내려왔었다. 그때와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분지에 수십 그루의 노송만이 서 있는 곳. 초여름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조차 똑같았다.
"놀라운 일이군."
따라왔던 물줄기를 쳐다보던 철목승이 중얼거렸다.
절벽 아래쪽에서 그 물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분명 땅속 깊이 박혀 있는 바위일진대 물이 흐르다니, 처음 대하는 기현상인 것이다.
"진(陣)이구먼."
백산을 쳐다보며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던 철목승이 절벽을 향해 손을 쑥 집어넣었다. 마치 허공을 짚는 것처럼 그의 손이 들어갔다.
놀라운 진이었다. 아무리 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지만 천하제일인 두 사람을 동시에 속이지 않았는가. 이번에도 물길을 따라오지 않았다면 찾지 못했을 터였다.
"어이쿠!"
환상미로진을 경험해보았던 터라 거침없이 진안으로 들어섰던 백산이 나직한 비명을 질렀다. 불과 반 장밖에 전진해 들어오지 않았는데 이번엔 진짜 바위가 있었다.
"쯧쯧, 급하기는. 그냥 물줄기만 따르면 될 걸 가지고."
무작정 앞으로 향해 나아가는 백산의 행동을 보고 철목승이 혀를 찼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그의 얼굴도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과연 천신가가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인간을 하찮게 여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왔다. 아울러 복수도.
'대단한 진이군요.'
물이 흐르고 있음이 분명할진대 거의 소리가 나지 않는다. 상당히 집중해서야 간신히 흐름을 잡아냈던 거였다. 진에 의한 효과인 게다. 소음마저도 차단시키는 절대적인 진이었다.
내부 또한 마찬가지였다. 바로 눈앞에 바위가 있었다.
환영이란 걸 알면서도 멈칫거려지는 것이었다. 꼭 바위 속을 걸어 올라가는 그런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가공할 진식임에는 틀림없었다. 숨기에는…….
미약한 물소리를 따라 나아가기를 반 시진 정도. 동굴의 끝에 도달했는지 무수한 수목들로 가득한 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십여 장 높이의 수목들 아래 오십여 채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나타났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쉽게 구분해내기 힘들 정도로 은밀한 건물들이었다.
백산과 철목승의 얼굴이 실망스럽게 변했다. 천오백 년 전 천하를 지배했던 가문이고, 모든 음모의 주역이 있는 곳치곤 너무 초라했다.
기껏 오십여 채의 집이라니. 잘해야 백여 명이 조금 넘을 그런 놈들이 지금껏 세상을 우롱했던 거였다. 신이라는 명목으로 말이다.
마음속에서 격렬한 반응이 일었다. 죽여야 할 적을 발견했을 때만 나타나는 적의가 분노와 함께 솟구쳐 올랐다.
초리하에서 느꼈던 그 기분, 얼마 전 섯다와 모사를 만났을 때, 그리고 철목승을 만났을 때 느꼈던 그 묘한 느낌, 친숙한 듯한 그 느낌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백산의 뒤쪽에 있던 철목승 또한 분노하고 있는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저 따위 것들에게, 기껏 오십여 가구의 건물 안에 있는 자들이 남의 인생을 파괴하고 딸의 행복을 가져갔다니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세상에 나서지도 못하고 이런 곳에 숨어 있는 자들이 아닌가.
"어떻게 할 텐가."
천신가의 처리에 대해 묻는 게다. 막무가내로 들이닥쳐 몰살시킬 것인지, 아니면 한 명씩 잡아 없애버릴 것인지를.
"일단 담운천과 대머리 녀석만 제외하고……. 시험을 해볼 겁니다. 정말 신인지."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알 수 없지만 최고로 기억에 남는 날이 될 터이다. 물에 떠 있는 기름기 때문에 내일이 천신가의 중요한 어떤 날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평소보다 많은 음식을 장만했기에 그 먼 아래쪽까지 기름기가 흘러온 것이리라.
"네놈들은 제갈수연에게 보내는 선물로 쓸 거다. 일생일대의 최고의 선물 말이다."
백산의 눈에서 붉은 혈광이 쏟아져나왔다. 살심을 먹었을 때, 극도로 분노했을 때 나타나는 핏빛 광채였다.
백산의 그런 예상이 맞았는지,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는 건물 속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노야, 경하드리옵니다."
"허허! 백육십이란 나이가 어디 축복받을 일인가."
각인대사의 축하인사에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으나 담운천의 얼굴에는 공허함이 가득했다.
삼 년 전의 실패가 가져다준 충격 때문이었다. 거의 완전한 계획이라 생각했기에 몸소 나서서 거사를 시작했는데 남아 있던 혈맹의 병력만 잃고 말았다.
아울러 황제의 꿈도 사라져버렸다. 진정 신으로 군림할 수 있는 기회였었는데, 천오백 년 전의 영광을 다시 한 번 재현할 수 있었는데, 그 모든 게 꿈으로 끝나버렸다.
"나의 시대는 이미 끝났어."
담운천의 얼굴에 회한의 빛이 어렸다. 이제는 강호에 나설 수도 없다. 강한 무공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터였다.
주변에 사람이 따르지 않는 강함은 결코 강함이 아닌 것이다. 타인들이 강함을 인정하고 떠받들어야만, 강한 사람이 되는 세상 아니던가. 누구도 자신 곁에 다가설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역적(逆賊). 황실에서는 역적으로, 강호무림에서는 모든 음모의 배후로 낙인찍혀버렸다. 천신가가 있는 이곳이 아니면 갈 곳이 없는 혼자만의 천하제일인이 된 것이다.
"제천맹은 어찌 되었는가!"
여전히 미련이 남았는지 아직 강호무림의 근황에 대해 묻고 있었다.
"그곳도 쉬워 보이진 않습니다. 전 병력을 제천맹으로 집결시키는 초강수를 쓰고 있습니다만, 상대는 마신가의 철목승과 파멸안입니다."
허황된 발악일 뿐이라는 말이었다. 제천맹이 어느 정도 성장했다고 판단했을 때 제갈수연을 불렀다.
그녀의 머리에 심었던 제령침을 믿었던 터였다. 그러나 제갈수연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제야 자신들이 당했다는 걸 알았고, 은밀하게 죽여버릴까도 생각해보았지만 다 부질없다는 생각에 그만두고 말았다.
설사 제갈수연이나 백무천을 제거하여 제천맹을 차지한다 하더라도 석숭의 추적을 피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렇게 되면 다시 명 황실과 전쟁을 치러야 할 터이고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황실의 힘을 너무 무시했다. 결코 무인들로는 그들을 이길 수 없음을 삼 년 전 전투로 알게 되었다.
그런데 다시 파멸안이 등장했다.
비록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다지만 파멸안이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더구나 마신가의 철목승까지 파멸안에 합세해 있다면 제갈수연의 미래는 뻔하다.
파멸. 그녀의 마지막을 장식할 말일 게다.
"그녀 또한 최악의 수를 둔 거지요. 파멸안에게 원한을 샀으니."
각인대사에게서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쩔 수 없다는 자괴감이었다.
각인대사가 두려워하고 있는 파멸안의 주인인 백산은 철목승과 함께 죽음의 향연을 시작하고 있었다.
굳이 비도를 휘날리며 살겁을 자행할 필요도 없었다. 그 또한 바라는 바도 아니었다.
천신가의 인물들이 잠들어 있는 방 안으로 스며들어 독천비를 이용해 독만 뿌려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강한 독이 아니었다.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의 독으로 천신가의 인물들을 제압해나갔다.
"이놈들은 담운천의 선물이고, 담운천 그놈은 제갈수연에게 보낼 선물입니다."
중독되어 있는 인물들의 혈도를 하나씩 짚어가며 환하게 미소를 짓는다. 광기 어린 악마의 미소였다.
* * *
제갈수연을 파멸시키기 위한 백산의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는 그 시간, 당사자인 제갈수연도 다가오는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제천맹의 대 연무장.
다시 시작된 혈광마겁(血光魔劫), 즉 귀마겁(鬼魔劫)의 혈겁을 피해 급거 맹으로 복귀한 지부원들과 제천맹에 있던 전 무사들이 대 연무장으로 모여들었다.
맹의 진로를 결정할 발표가 있을 거라는 소식 때문이었다.
비록 최후까지 제천맹의 잔류를 선택했던 무인들이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조금씩 다가오는 적을 두려워하는 공포심으로 가득했다.
연일 들려오는 소식은 제천맹 지부에 대한 멸망소식밖에 없었다. 제천맹에 있어봐야 죽음밖에 없다며 떠나는 자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러한 와중에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은 제천맹이 아니면 딱히 갈 곳이 없는 자들과, 이 난세를 기점으로 또 다른 비상을 꿈꾸는 자들이었다.
삼삼오오 모여드는 제천맹 무인들을 쳐다보는 이 여인. 현시대의 천하제일인인 제갈수연이었다.
"선동할 사람은 다 풀었나?"
최악의 위기상황이 닥쳤음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해 보였다. 그러나 차분하고 침착해 보이는 것은 그녀의 겉모습일 뿐이었다.
그녀의 내심은 누구보다 불안했다. 자신의 모든 것이고 제갈세가의 영광인 제천맹이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다.
'수연아 힘을 내라. 이보다 더한 경우에도 살아남았다. 지금 있는 인원만 뭉치게 만들면 아직 승산은 있다.'
내심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비록 최대의 위기상황이지만 이번만 잘 넘기면 제갈세가의 영원한 제국을 만들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혈광마인들과 감숙성 무인들만 없앤다면 더 이상 제천맹을 위협할 세력은 어디에도 없을 터였다. 이 위기만 넘길 수 있다면.자신을 다잡기라도 하듯 두 주먹을 불끈 말아 쥐었다.
"자신이 있는 거요?"
제갈수연과는 달리, 백무천과 지청인은 연신 바깥쪽을 흘끔거리며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늘 밤 제갈수연의 연설에 따라 제천맹의 운명이 갈리기 때문이었다.
절반, 제갈수연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무인들이 절반이고 그 나머지는 아직 진로를 확실하게 정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
즉 이쪽이 불리하다 싶으면 바로 떠나버릴 사람들이란 것이다. 그들을 잡지 못하면 제천맹의 전력은 적과 동일하게 된다. 백이면 백, 패한다는 의미인 게다.
"해내야지요."
제갈수연이 굳은 얼굴로 백무천을 쳐다보았다. 다시 한 번의 승부, 구파일방과의 승부에서 이겼고, 담운천과의 승부에서도 이겼다.
이 또한 무공을 겨루는 승부가 아니기에 자신이 더 유리한 입장이다. 이도 저도 아닌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부하들,
그들의 마음을 붙잡아 제천맹에 충성하는 최고의 무인으로 바꾸어놓아야 하는 것이 오늘 밤 그녀가 해야 하는 일이다.
즉 싸우고자 하는 당위성과,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고자 지금의 연설이 계획되었다. 오늘 밤 성공 여하에 따라 칠천 명의 병력이 칠만 명이 될 수도 있다.
아니면 오늘 밤으로 자신들의 운명이 끝장난다. 해서 많은 준비를 했다. 낮보다는 밤이 더 효과가 있기에 한밤을 선택했고, 부하들을 선동할 자들도 미리 심었다.
"갑시다."
두 명의 부맹주를 대동한 제갈수연이 대 연무장에 마련되어 있는 단상으로 올랐다.
순식간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칠천의 병력이 모여 있는 곳임에도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완전한 침묵의 바다였다.
그만큼 목전의 상황이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그들을 향해 제갈수연이 연설을 시작했다.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들은 근자에 일어난 일로 인하여 많은 혼란이 있을 줄 압니다.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선 이유는 여러분들이 궁금해하는 일들에 대해 그 전모를 밝히고 제천맹의 진로를 결정하기 위함입니다."
차분한 제갈수연의 목소리가 연무장 안에 울렸다.
결코 선동하려는 목소리가 아닌, 모든 진실을 밝히고 이곳에 있는 무인들의 의사를 따르겠다는, 맹의 해체마저도 생각하고 있음을 내비치는 발언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우리가 묻는 말에 속 시원하게 답해주실 수 있습니까?"
군웅들이 모여 있는 한곳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평소 같으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제천맹의 맹주인 제갈수연을 마치 죄인 다루듯 하고 있었다.
"말씀하십시오."
"신중하게 대답해주십시오. 소림과 무당에서 발표한 내용이 사실입니까?"
사실 제천맹이 이런 위기상황으로 치닫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소림과 무당의 포고문이었다. 그러나 모든 무림인들이 전부 믿는 건 아니었다.
무려 오십 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고, 소림이나 무당은 사 년 전에 있었던 전쟁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세상일이 그렇듯 일부 믿는 사람도 있었고, 설마 하는 사람도 있을 터였다. 오히려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봐야 맞을 것이다.
"사실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갈수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호에 나돌던 소림과 무당의 포고문이 사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제천맹 자체가 비겁한 음모의 토양 위에서 세워졌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다시 한 번 제갈수연의 목소리가 연무장에 울렸다.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훨씬 큰 목소리였다.
"여기 있는 저도 포고문을 접하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과거 오천맹의 한 축이었던 저희 제갈세가가 음모의 희생자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또한 여기 계시는 여러분은 전부 알고 있습니다. 비록 음모에 의해 강호공적이 되었다지만 사 년 전 혈광마인들은 무수한 혈겁을 저질렀습니다.
그 혈겁은 음모에 의한 살육이 아닌 그들 스스로 저지른 것이었습니다. 그런 혈겁을 좌시(坐視)한다면 제천맹의 존재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사 년 전, 소림이나 무당에선 백살마대 후예였던 그들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없었단 말입니까?"
"그런 상황에 대하여 보고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소림과 무당은 정도 제일문파입니다! 우리 제천맹 정도는 우습게 생각하는 그런 대 문파란 말입니다."
"그 당시에는 분명 그랬습니다. 우리 제천맹의 힘은 소림이나 무당에 비해 한참 미약했지요."
"소림과 무당을 모함하지 마시오, 맹주. 정도의 기둥이라는 거대문파 두 곳이 이 따위 제천맹이 두려워 그런 포고문을 발표했다고 하시는 게요?"
순간 모여 있던 군웅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다시 한 번 웅성거렸다. 이 따위 제천맹이라 하였다.
소림과 무당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한 그런 곳에서 자신들이 있었다는 말인 것이었다.
더구나 과거 제천맹의 세력이 미약했을 때는 아무런 언질이 없다가, 제천맹의 세력이 최고조에 달하게 되니까 이제야 오십 년 전의 사실을 발표했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럴 리가 없지요. 소림과 무당은 무림의 영원한 양대 산맥입니다. 우리 제천맹은 발치에도 따라갈 수 없는 위대한 곳 말입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소림과 무당을 넘어선 제천맹을 만들기 위해서요."
잠시 말을 멈춘 제갈수연이 아래쪽에 있는 무인들을 둘러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또한 혈광마인을 공적으로 선포했던 저의 판단은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보다는 현재의 일이 더 중요했기에 그들을 강호공적으로 선포했을 뿐입니다."
"그건 소림이나 무당의 질시 때문이라 해두고, 그럼 황실의 일은 어쩔 것이오."
아예 소림과 무당이 제천맹을 무너뜨리기 위해 퍼뜨린 포고문이라 결론을 내려버렸다. 사실 따지고 보면 백살대를 백살마대로 만든 장본인은 바로 그들이었기에.
그러나 그들보다 더 중요한 황실이 남아 있다. 잘못하면 황실에 반란자의 무리로 찍힐 수도 있음이다.
"그 또한 확답을 들었습니다. 무림의 일은 무림인들끼리 해결하라 하였습니다. 결정은 여기 계시는 여러분들이 하시는 겁니다. 제가 아닌.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제천맹을 해체하자고 하면 어쩔 겁니까?"
결정적인 질문이었다. 정확하게는 너의 야망이 숨쉬고 있는 이곳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다.
"물론 저는 제천맹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저 혼자만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떠나시면 제천맹은 저절로 없어질 겁니다."
말을 마친 제갈수연이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단상을 내려갔다. 그러나 연무장에 모여 있는 제천맹 소속 무인들은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런데 그들의 표정이 묘하게 변해 있었다. 처음 연무장에 왔을 때만 해도 불안한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마치 모욕을 당한 사람들처럼 잔뜩 붉어진 얼굴로 하늘을 노려보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일비, 부하들의 반응은 어떻더냐?"
내실로 들어온 제갈수연이 다급히 일비를 찾아 부하들의 상태를 물었다.
"다행히 우리 측 이야기가 먹힌 것 같습니다. 대부분 무당과 소림의 질시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좋다, 내일부터 은밀하게 소문을 흘려라. 소림의 각인을 들먹이면서 말이다."
"알겠습니다, 맹주님."
"성공한 것 같소?"
백무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서둘러 자리를 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더 그들을 설득했더라면 완전하게 돌아설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제갈수연이 그만둔 것이다.
그럼에도 제갈수연은 만족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성공입니다. 아니, 성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갈수연이 노렸던 것은 군중심리에 의해 만들어진 여론이 아니었다. 스스로가 판단하여 제천맹에 남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럴싸한 연설로 군중을 끌어오기는 쉽지만 위기상황이 닥치면 그들은 전부 흩어지게 된다.
그러나 하루나 이틀 동안 스스로 생각해서 내린 결정은 신념으로 굳어지고, 위기상황에서 더욱더 빛을 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정문도 열어두어야 합니다. 목숨이 아까운 자들은 언제든지 떠나라고 말입니다.
"그럼 이삼 일 후에 다시 한 번 더 모여야 하겠네?"
"그렇지요. 그때는 선동을 해야 하고요."
급하게 먹는 밥은 체한다는 금언을 확실하게 지키고 있었다. 큰일이라 하여 엄청난 사상이나 하는 것들이 결부되는 건 아니다.
가장 평범하고 단순하게 추진되는 일이 성공 확률이 높다는 것을 이미 체득하고 있었던 거였다. 이럴 때일수록 느긋하게 처리해야 한다. 급하게 몰아치면 역효과만 날 뿐이기에.
'이젠 제대로 싸워볼 수 있겠군.'
"참, 본가에서는 아직인가?"
"그쪽은 이미 진을 설치하고 방어태세에 돌입했다는 전갈을 끝으로, 더 이상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큰일이군……."
제갈수연이 걱정스런 얼굴로 백무천을 쳐다보았다. 맹 내에 있는 무사들이야 문제될 게 없지만 제때에 철수를 시키지 못한 세가인들이 가장 걱정이었다.
이미 포위되어 나올 수 없다고 하였던 것이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진을 설치하여 방어 상태에 돌입했지만 상대는 남궁세가와 팽가다.
과거 같은 오천맹의 일원인 그들이었기에 얼마의 잠재력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온 세가를 진으로 에워싸 두었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소.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백무천은 남궁세가에서 진식을 몸소 겪어보았기에 그 무서움을 알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진식마저도 자신의 진입을 막았는데, 하물며 진에 있어서 최고라는 제갈세가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는 생각이었다.
더구나 제갈세가에 펼쳐져 있는 진은 천라만상대혼진(天羅萬狀大混陣)이다. 제갈세가에서 가장 무섭다는 두 가지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런 진이 펼쳐져 있기에 안심할 수 있었던 터였다. 제갈세가의 인물을 제외하곤 그 진을 뚫을 수 있는 인물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러나.
제갈수연이 무림인들보다 더 신뢰하고 있는 진식(陣式)은 정공법, 즉 정면돌파를 하고자 하는 자들에게나 최고의 위력을 발휘할 뿐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아울러 제갈세가의 건물을 새로 지을 때 인부들 중 청루에 있던 풍신개의 아들들이 대거 참여했었고, 제갈세가의 도면이 완벽하게 유출되어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무공이 약했기에 떠나지 못했던 그들, 힘이 없었기에 동참하지 못했던 그들이 동한과객을 비롯한 형님과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준비한 것들이었다.
제131장
"이제 얼마나 남았나?"
"아직 이십여 장 남았습니다."
감숙성을 미리 떠났던 남궁세가와 팽가의 무인들이었다. 중원전역에 세워졌던 제천맹의 모든 지부는 무너졌다는 판단 하에 제천맹 섬서지부는 들르지 않았다.
제천맹주인 제갈수연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제갈세가를 제거하기 위해 곧바로 하남으로 직행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제갈세가가 그들보다 한발 빨랐다. 몸을 빼기에는 늦었다고 생각했는지 그들이 가진 가장 강점인 진(陣)으로 모든 건물들을 감싸버렸다.
제갈세가가 자랑하는 천라만상대혼진이었다.
안에서 해진하기 전에는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못한다는 절진. 천라만상대혼진에 의해 발생된 백색의 운무만이 제갈세가의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그런 제갈세가의 처리에 고심하고 있던 일행에게 개방 인물이 희소식을 들고 왔다. 제갈세가를 구성하는 건물들의 배치도였다.
풍신개의 아들이라 할 수 있는 그들의 힘이었다. 해법은 바로 나왔다. 하늘까지 가로막는 천고의 진(陣)이지만 땅속은 방법이 없는 게다.
그때부터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전부 다섯 곳을 파고 들어갔고 거의 마무리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이십 장, 제갈세가의 담장 안쪽까지 남은 거리였다.
"수고 많으십니다."
"어서 오게, 사공자."
방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남궁지우가 밖으로 나오다 막 대문을 들어서는 인물을 향해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사진악이었다.
청루.
남궁세가와 팽가, 그리고 악천의 직할대들이 임시 숙소로 쓰고 있는 곳이다. 과거 짐승들과 인간의 오물냄새로 가득 차 있던 더러운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반듯하게 지어진 수백 채의 건물들과 깨끗하게 단장된 길들은 과연 이곳이 청루인가 싶을 정도였다.
사 년 전 죽어버린 몸을 팔던 그녀들도 이젠 웃음만 판다. 결코 버려진 곳이 아니었다.
새롭게 단장되어 화려하게 불을 밝히던 그 청루가 사 년 만에 전부 문을 닫았다.
"무욕인들은 어디에 있다고 하던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남아 있던 지부들도 텅텅 비어 있으니 갈 곳이 없는 게지요. 그런데 그 백산이란 친구는……."
"왜 만나보고 싶나, 천하제일인이라니까?"
남궁지우가 미소를 지으며 사진악을 쳐다보았다. 젊기 때문인 게다. 지금이 전쟁의 시기이고 그 정점을 향해 가고 있다지만 그건 자신들의 일일 뿐이다.
젊은 무인들은 아닌 것이다. 특히 무공에 일가를 이루었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젊은이들은 그런 경향이 더욱 컸다.
더구나 사진악 입장에서 보면 지금 치르고 있는 전쟁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형님은 좋겠군.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서."
"석두 형님도 기다리는 사람이 있지 않소."
"허억!"
사진악과 남궁지우가 기겁한 얼굴로 헛바람을 들이켰다.
등 뒤에서 들려온 말소리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들의 이목을 속이고 다가왔다는 사실에 더욱 놀란 것이었다.
"놀라기는?"
나직한 웃음소리와 함께 팽무도 일행이 공간 속에서 나타났다.
"석공자!"
남궁지우가 반색을 하며 석두에게 다가갔다. 가장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딸이 기다리고 자신이 기다리던 사람.
석두 때문에 번민하는 딸을 보며 가슴 아파했던 세월이었고, 번민하던 그 딸에게 무공에만 전념토록 만들었던 장본인이 돌아왔다.
"자네?"
잡은 손길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에 남궁지우의 얼굴은 아픔으로 물들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냥 의수가 아닌 터였다. 검이었다. 온통 살기를 머금은 괴이한 검이 그의 팔 대신 자리하고 있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그래, 운이 좋았지……."
더 이상 묻지 못했다.
전부 오십 명이었던 녀석들이 다섯 명만 살아왔는데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더 이상 딸의 한숨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기뻐해야 함이다.
"이 녀석아, 우리는 보이지도 않는 게냐?"
"다 늙은 노인네들이 뭐가 보고 싶어서 기다렸겠소?"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남궁지우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누구 하나 정상적인 사람이 없었다. 의형도 한 팔이 없다.
더구나 살아온 광풍대원들은 전부가 비정상이었다. 팔이 없고, 다리가 없다. 온몸이 검게 변한 독인까지…….
누가 저들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그저 건달처럼 살고 싶어 했고, 건달이 되는 게 유일한 꿈이었던 이들이었는데…….
"들어갑시다."
그나마 이 정도라도 살아왔다는 데 만족해야 함이다. 광풍대원들이나 되니까 살아왔던 것이다.
남궁세가나 팽가가 그런 입장에 있었다면 아무도,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을 터이고 복수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해내고 있다. 다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강호무림을 짓밟아버리고 있는 것이다.
아니, 천하제일인이 되어버렸다.
덜컹!
막 일행을 안으로 안내하려는 순간, 거칠게 방문이 열렸다. 울 듯한 표정의 남궁미령이었다. 그러나 방문만 활짝 열어젖혔을 뿐 더 이상 움직이질 못했다.
지난 사 년간을 기다렸던 그가 돌아왔다.
사랑한단 말 한마디 못했고, 기다리겠다는 말도 하지 못했던 그 사람이 살아서 자신 앞에 서 있는데 얼어버린 듯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가보쇼! 젠장! 어째 우린 기다리는 사람 하나 없냐?"
석두의 어깨를 툭 친 소살우가 사방을 둘러보며 이죽거렸다.
"왜 기다리는 사람이 없누. 낙양 최고의 명기인 내가 있잖나."
"어이쿠! 할머니는 사양이오."
너스레를 떨며 화월을 향해 웃어 보인 소살우가 안으로 들어갔다. 사 년 만에 처음 느껴보는 편안함이었다. 살귀가 아닌 인간으로서 느끼는 기분.
"강하군……."
사진악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이었다.
벽력천가의 무공을 완성하여 오직 신가의 무공만이 자신의 상대라 여기고 있었건만, 등 뒤로 다가오는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정도로 강한 자들이었다.
진에 의해 그 기척이 숨겨졌다 하더라도 개개인의 강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자신보다 약자로 보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숙명이기 때문이오.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될."
사진악의 곁을 지나가던 일휘가 나지막이 말했다. 사진악의 몸에서 발생하는 투기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간절한 바람이라는 건가?"
"맞소. 무심일심이라고도 하고."
"그렇겠지. 강해져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이면 강해질 수밖에 없겠지."
사진악의 중얼거림을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온 일행은 제갈세가를 공략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는 결코 쉴 수가 없다. 피비린내가 가득 풍기는 옷도 벗지 못한다.
"내부에서 붕괴시킬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극단적인 공포 속에서 미쳐가도록."
제갈세가의 처리 방향이 대충 잡혀지자 남궁지우를 향해 일휘가 나지막이 말했다.
숭산으로 떠난 백산의 지시사항이었다. 시작은 담운천부터 할 테니 준비만 하고 있으라고 하였다.
"무슨 소리냐?"
"일단 말 이백 필 정도 준비해주십시오. 양쪽에 바구니를 달고 있는 말로 말입니다. 사람의 몸통이 들어갈 만한 바구니로."
"일휘 자네?"
남궁지우의 표정이 해쓱하게 변했다.
지금 일휘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선 차마 할 수 없는 일을 준비하고 있는 게다. 아무리 비정한 인간이라도 할 수 없는 일을.
"미치지 못하는 저에게 더 화납니다. 더 잔인한 방법을 생각하지 못하는 머리를 잘라버리고 싶을 정도로. 제갈세가 놈들을 생포해주십시오. 가급적 많이……."
순간 방 안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쿡! 오늘따라 유난히 육포가 맛있네. 형님은 혼자 재미 보고 있겠지? 담운천인가 하는 그 개새끼 살려왔으면 좋겠다. 피맛 좀 보게."
"걱정 마라, 싱싱한 피맛을 보게 된다. 그건 내가 보장한다."
방 안에 들여진 따뜻한 식사는 쳐다보지도 않고 소살우와 일휘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들의 몸에서 새파란 살기가 몰아치고 있었다.
* * *
낙양에서 몰아치는 살기는 천신가가 있는 준극봉에서도 예외 없이 일었다.
"이곳이 완전한 동굴 속은 아니었나보네요?"
아침이 되었는지 절벽이 있던 곳으로부터 햇빛이 비쳐들었다.
"어떨 때 보면 자넨 참 둔해. 어젯밤에 달빛이 들어온 건 생각 안 하나? 그리고 햇빛이 없으면 저 나무들이 자랄 수 있었겠나."
백산에 대해서 철목승이 느끼는 바는 언제 봐도 참 단순하다는 것이었다.
제가 해야 할 일에는 극도로 집중력을 보이면서도 그 외의 일들에 대해선 도무지 신경을 쓰는 법이 없다.
이게 백산의 단점이자 장점이었다. 쓸데없는 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
"저것도 진이겠지, 아마."
"근데 이 새끼는 왜 아직 안 나오죠?"
담운천을 말함이다. 간밤에 모든 일을 끝냈고, 이제 자신이 만든 작품을 보아줄 관객이 나타나야 하는데 그 당사자에게서 소식이 없었던 거였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담운천은 각인대사와 이야기를 나누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설핏 잠이 들었다.
"아직 아무도 안 일어났나?"
눈을 뜬 담운천의 표정이 의아하게 변했다. 아침이 된 것 같은데 밖이 너무 조용했던 까닭이었다. 더구나 가문의 최고 연장자이고 가주인 자신의 생일이다.
증손자인 담진룡을 비롯하여 모든 가솔들이 아침 문안을 와야 함에도 간밤과 똑같이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으응? 이 냄새는……."
아침 바람을 타고 풍겨오는 냄새에 얼굴이 해쓱하게 변해버린 담운천이 문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혈향(血香)이었다. 인간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 냄새.
"이럴 수가?"
인간의 감정이 없다 했던 담운천과 옆방에서 튀어나온 각인대사가 못 박힌 듯 굳어버렸다. 지난 수백 년간 천신가의 바람막이가 되었던 노송들에 매달려 있는 물체 때문이었다.
천신가의 가솔들, 오십여 명의 가솔들이 사지가 전부 잘린 채 노송가지에 걸쳐져 있었다. 더욱 경악스러운 사실은 아직 죽어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아혈은 완전하게 파괴시켜버렸고, 혀마저 잘라버렸는지 비명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그들이 고통스러운 표정만 짓고 있었다.
"어이! 이제 일어났나? 늙은 놈이라 그런지 잠도 많고 귀까지 어두운 모양이구먼."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담운천과 각인대사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다.
마치 이웃집에 살던 사람이 인사하는 모양새처럼. 단지 웃는 것마냥 보이는 얼굴과 흔들어대는 손만.
천신가의 인물들은 백여 명이 전부였다. 어느 누구도 이곳을 찾아낼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는지 모두들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들을 제압하는 건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기척을 감지하고 깨어난 자들은 전부 죽이고, 사로잡은 자들의 수가 오십 명 정도 되었다.
"놀랍군. 다시 살아나다니. 천한 것들일수록 생명력이 강하다 하더니, 오늘 너를 보니 알 것 같구나."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으나 내심 기절할 지경이었다. 천백 년 전 혈가의 후예를 피해 도망친 곳이 이곳이었다.
처음엔 아래쪽 통로밖에 없는 어두운 곳이었으나 절벽을 뚫어 햇빛이 들어오게 만들었다. 이곳에 흙을 넣고 거주할 수 있도록 만든 세월만 해도 백년이 걸렸다고 하였다.
그렇게 지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발각되지 않았던 곳인데 파멸안이 찾아왔다. 자신이 허락한 각인대사 말고는 첫 외지인, 그에 의해서 전 가솔들이 도륙을 당해버렸다.
그나마 그가 안도의 숨을 쉬고 있는 것은 자신의 유일한 핏줄인 담진룡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저들 중에 한 놈이라도 팔과 다리가 자라나면 신(神)으로 인정해줄게, 그리고 이놈도."
"멈추지 못할까!"
담운천의 얼굴이 다급하게 변했다. 담진룡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나무 뒤쪽에 숨겨두고 있었던 거였다.
단순히 담진룡을 데리고 나왔다 하여 이렇게 놀라진 않을 터였다.
데려온 담진룡의 왼팔을 잡더니 오른발로 그의 어깨를 밟으며 담운천을 향해 슬쩍 미소를 보냈다. 뽑아버리기 위한 자세였다.
"노야!"
담운천의 행동에 가장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각인대사였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무엇인가에 절실함을 보이는 담운천을 처음 보았던 터였다. 더구나 그 절실함을 보이는 대상이 혈육이라니.
자신에게 신(神)이 되는 방법을 가르쳐준 사람이었다.
순박한 시골 처녀를 겁탈하여 자식을 보게 했던 사람도 그였고, 불심(佛心)을 없애는 방법으로 자식의 어미를 죽이면 된다 했던 사람도 그였다.
커가는 자식을 옆에 두고 마음을 시험하라 했던 사람도 그가 아니었던가.
그랬던 그가, 인간의 정을 끊어야 신이 될 수 있다 하였던 그가, 혈육의 죽음 앞에선 어쩔 줄 몰라 하며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우두둑!
"이놈!"
담운천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흘러나와 백산에게로 밀려갔다. 증손자의 팔을 통째로 뜯어내고, 그것을 자신을 향해 흔들며 웃고 있다.
그러나.
"어이! 그럼 안 되지. 이놈은 아직 안 죽었다고. 참아, 참아야지. 그래야 착한 늙은이라고."
재빨리 담진룡의 몸을 들어 전면을 방어한 백산이 담운천을 향해 이죽거렸다.
"룡아……."
담운천이 얼굴이 처절하게 변했다. 오른쪽 팔꿈치 부분이 뜯겨나간 담진룡의 고통스러워하는 눈과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고통을 이길 수 없어 비명을 지르는 듯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으나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입 안에 있어야 할 혀뿐만 아니라 이마저도 없었던 거였다.
아직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입과 파괴된 아혈, 소나무에 걸려 있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였다. 그들과 다른 점이라면 사지가 멀쩡하니 붙어 있다는 것이었다.
"잠시만 기다려봐. 저놈들에게 새살이 나오면 풀어줄 테니까."
담진룡의 목 위로 발을 올린 백산이 속삭이듯 말했다. 시선은 담진룡을 향하고 있지만 그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담운천, 오직 그에게 던진 말이었다.
"원하는 게 뭐냐. 다 들어주겠다. 그 애만은. 그 애만은 살려달라."
필사적이었다. 자신의 유일한 핏줄인 담진룡을 살리기 위해 애원하고 있었던 거였다.
"쿡!"
백산의 입에서 나직한 웃음이 터졌다. 소령이 생각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령을 해친 놈이 제 핏줄은 살려달라고 사정한다.
"내 딸을, 내 딸을 살려내라. 그리고 내 부인들과 동생들도. 그럼 이놈도 살려주마."
"그건 내가 한 일이 아니다. 여기 있는 각인이 저지른 일이란 말이다.
각인의 아들인 요몽이 그 애를 데려오다 얼어 죽었단 말이다. 제발 부탁이다. 나의 목숨을 달라면 주겠다. 그 애, 그 애만은……."
"별걱정을 다하네. 신이면 당연히 없어진 게 날 것 아냐. 잠시만 기다리면 될 텐데 조급하기는."
흥분하지 않기로 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인데 흥분하여 한꺼번에 없애버리면 너무 싱겁다. 조금이라도 더 잔인하게 더 길게 놈의 분노를 자극하여 그 기쁨을 누려야 한다.
"이 새끼는 네놈의 피와 가장 비슷한 놈일 테니……."
찌이익! 우두둑!
담운천을 향해 차갑게 말함과 동시에 담진룡의 오른팔을 뜯어냈다. 가장 먼저 옷이 찢어지고, 그 다음은 팔이 길게 늘어나는 것 같더니 선명한 피가 솟구쳤다.
순식간에 담진룡의 온몸에 선혈이 낭자했다. 고깃덩어리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백산의 행동은 그에 그치지 않았다. 재빨리 담진룡의 혈도를 집으며 지혈을 시키는 것이었다.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피도 똑같이 붉은색……. 이 새끼도 한번 걸어봐야 하겠어. 팔이 나오려면 시간이 좀 걸리려나보네."
뒤쪽에 있는, 가장 커 보이는 노송 앞으로 다가간 백산이 자신의 팔뚝만 한 가지 하나를 부러뜨렸다.
이어 담진룡의 몸을 그곳에 대고는 위치를 맞추어보는 것 같더니 사정없이 박아버린다. 살점이 가득 묻어 있는 나뭇가지 끝이 어깨 쪽으로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백산의 악마적인 광기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오십여 명의 천신가 인물들을 전부 이런 식으로 걸어두었다. 피가 빠져나가면서 한 명씩 죽어가도록 방치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러나 백산의 얼굴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화상에 의해 별다른 표정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약간의 미소마저 머금고 있는 그의 얼굴은 지금의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음속에 남아 있던 따스함은 이미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지막을 생각하면 지금보다 더 잔인해질 수 없는 자신에게 화가 날 뿐이었다.
이보다 더한 방법이 있을 터인데, 멍청한 자신의 머리로는 이 정도밖에 생각해내지 못한다는 게 더욱 못마땅했다.
"죽여버리겠다, 이놈!"
더 이상 인내할 수 없었는지 거친 고함을 토해내며 담운천이 달려들었다. 증손자인 담진룡이 걱정되었기에, 사지가 잘린 채 나무에 매달려 있는 가솔들을 보고도 참았다.
그런데 저 하찮은 놈이, 버러지만도 못한 놈이, 자신이 보고 있는 데서 증손자의 팔을 뜯어내 버렸다. 천신가의 유일한 적통후계자를 나무에 박아버렸다.
"천검천무류!"
담운천의 외침소리와 함께 그의 몸에서 혼탁한 색의 검강이 솟구쳐나오기 시작했다. 과거 철목승과 싸울 때와는 또 다른 현상이었다.
비슷한 수준에 있던 철목승과의 싸움은 그에게 또 다른 깨달음을 주었다. 천신검으로 시전하던 것보다 더 강한 무공을 창안해냈던 거였다.
그의 몸에서 쏟아져나온 수십 개의 검들이 백산을 향해 거세게 밀려왔다.
그러나.
절대적인 담운천의 무공을 막아가는 것은 비도가 아니었다.
처음엔 담진룡의 몸을 뽑아 방어하더니 그의 다리가 잘려나가자 바닥에 떨어져 있던 두 팔을 끌어당겨 이기어도를 펼쳐버렸다.
아무리 강한 힘을 싣는다 할지라도 인간의 피륙일 뿐 무기가 아니었기에 금방 조각조각 잘리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일부러 한 행동이었다. 담운천의 무공에 가루가 되지 않을 정도의 힘만을 담진룡의 팔에 실었던 거였다. 그에게 혈육을 잘라내는 기분을 맛보게 해주기 위해.
"크엉!"
냉철한 이성도, 신이라는 생각도 이미 사라졌다. 담운천의 입에서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괴성이 흘러나왔다.
친 혈육의 다리를 잘라버리게 만든 놈에 대한 분노였다.
백산을 향해 빛살처럼 몸을 날리며 담운천이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무상신법을 펼치며 피하고 있는 백산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 담운천의 손끝에 걸려든 것은 고통스런 얼굴에 나뭇가지에 박혀 있던 가솔들의 몸뚱이였다..
담운천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사지가 없는 채로 죽어가고 있던 그들의 몸이 터져나갔다.
그나마 얼마 남아 있지 않은 피를 흘리며.
"저 사람도 인간인 것 같지 않소?"
자신의 처지도 잊고 백산을 쫓는 담운천을 주시하고 있던 각인대사의 귓가에 나지막한 철목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이라……. 어쩌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 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던 그는 신이 아니었다. 혈육의 죽음에 고통 받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다.
요몽을 가문의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는데, 요몽이 구했던 아이를 스스로 죽이게 함으로써 인간의 정을 버리도록 하였는데 담운천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팔아 혈육을 구하려 했었다.
배신감이 밀려왔다. 신이 아닌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자신은 뭐란 말인가.
신이 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신의 마음을 얻었다고 여겼었는데, 인간의 범주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자식을 죽인 패륜을 일삼는 비정한 인간이었다.
인간이면서 신처럼 행동했을 뿐이었다. 꿈이었던 것이다. 신처럼 군림하고 싶어 했던 꿈.
"확인을 해봐야 해, 확인을……."
혼자 중얼거리던 각인대사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흘러나오고, 곧이어 그의 몸이 빛살처럼 날았다. 백산과 담운천이 있는 방향이었다.
"사사지옥혈공!"
"안 돼!"
배신당한 인간의 처절한 고함소리가 터져나오고, 각인대사의 그런 공격에 흠칫 놀란 백산의 몸이 담운천이 있을 곳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폭사되었다.
극성의 무상신법을 펼친 것이었다.
"커억! 크윽!"
담운천이 경악스런 표정을 지으며 비명을 토했다.
뒤쪽에서 다가서는 기운이 사사지옥혈공이란 걸 그도 알았다. 파멸안이 뛰어들고 있었기에 그놈을 공격하기 위해 나선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자신의 앞가슴 쪽에 선명하게 튀어나와 있는 손가락은, 지난 세월 자신의 수족이었던 각인대사의 손이었다.
"이 새끼야, 내 것인데 왜 네놈이 공격을 해!"
백산이 뛰어들었던 이유였다.
자신의 밥을 각인대사가 공격하기에,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뛰어들었는데 그런 그의 행동 때문에 담운천이 자기 방어를 더욱 소홀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거였다.
그 결과 담운천의 등에 각인대사의 한 손이 파고들었고, 이어지는 백산의 공격에 그 팔이 잘린 거였다. 결국 각인대사의 양팔은 팽무도와 백산 두 사제가 하나씩 잘라버린 셈이었다.
"우웩! ……왜?"
가슴속에서 시작된 울렁거림이 급기야 목을 타고 넘어와 세상을 보았다. 연거푸 피를 토해내던 담운천이 고개를 돌려 각인대사를 쳐다보았다.
"당신도 신은 아니었구려. 인간일 뿐이었어. 붉은 피를 흘리는 인간……."
담운천을 향해 기묘한 미소를 짓던 각인대사의 몸에서 검붉은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끝났음이다. 파멸안을 잡을 실력도 되지 않았지만, 설사 잡는다 한들 신이 되는 게 아닌 것이다.
단지 남들보다 좀더 강한 무공을 가지고 있었던 것뿐. 그것을 가지고 착각하고 살았던 거였다.
몸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기운과 함께 담운천에게로 몸을 날렸다.
"어리석은 놈, 네놈 역시 어리석은 인간일 뿐이었어!"
담운천의 몸에서도 가공할 기운이 흘러나와 자신을 향해 뛰어 들어오는 각인대사를 향했다.
"천검신무류!"
천검무극류의 마지막 초식. 철목승에게조차 펼치지 않았던 최후 절초를 수십 년간 동료였고 부하였던 각인대사를 향해 펼쳤다.
놀라운 광경이 일어났다. 담운천의 주변 십여 장이 온통 혼탁한 기운으로 들어찼다.
증손자의 죽음과 가솔들의 죽음에 의해 냉철했던 이성은 이미 사라졌고, 백산과 철목승의 존재 자체도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등을 보이고 있는 담운천을 쳐다보던 백산의 입매가 슬쩍 치켜 올라갔고, 그의 몸이 움직였다. 다시 한 번 소림의 무상신법이 펼쳐졌다. 공간을 없애버리는 신공이.
"캬악!"
백산에게서 커다란 외침이 흘러나왔다.
뒤틀릴 때마다 뱉어냈던 고함소리와 함께 열두 자루의 비도가 세 개씩 한 무더기가 되어 담운천의 등을 향해 밀려갔다.
"크윽! 크악!"
각인대사와 담운천의 동체가 동시에 같은 곳으로 나뒹굴었다.
담운천의 천검신무류를 몸으로 받아낸 각인대사의 몸은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백산의 공격에 의해 담운천은 사지가 잘려버렸다.
"나는 말이야. 비겁한 인간이야. 기회가 생기면 절대 안 놓치는 인간 말이야."
"아미타불!"
어깨를 움찔거리는 각인대사의 나지막한 불호를 끝으로,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야망의 끝이었다.
지금까지의 세월이 담운천의 의지였는지, 아니면 자신의 의지였는지도 모른 채 쉬지 않고 달려왔던 세월이 막을 내렸다.
부인을 죽이고 자식마저도 이용해 야망을 성취하고자 했던 그에게도 아직 불심이란 게 남아 있었는지,
합장을 하기 위해 어깨를 움찔거렸던 행동과 불호를 읊조리던 마지막 모습은 왠지 애처로워 보였다.
"죽여라! 나를 죽여 복수를 해라. 네놈이 태어났던 그 더러운 마을을 몰살시켰고, 네놈의 부인들을 죽였다. 죽이란 말이다."
번들거리는 눈빛을 쏟아내며 고함을 질러댔다. 차라리 죽기를 바랐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은지 잘린 사지로부터 고통만 밀려왔다.
"에이, 그럼 너무 쉽잖아. 너무 간단하고. 우선은 지혈부터 해야겠지? 우린 갈 곳이 있거든.
그런데 대단한 가문은 맞나보다. 아직 네 핏줄이 살아 있어. 기쁘지? 이제 팔다리만 새로 나면 되겠구나."
새하얀 미소를 머금은 백산이 담운천의 몸을 꼼꼼히 점검했다. 마치 죽어가는 환자를 살피는 의원의 손길처럼 세심했다.
이윽고 모든 조치를 끝냈는지 만족스런 표정을 지은 백산이 바닥에 뒹굴고 있는 담운천의 사지와 두 사람의 몸을 주워들었다.
"살아 있어야 해. 죽으면 안 돼! 절대로……. 장인어른!"
망연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철목승에게 담진룡이 들어 있는 보퉁이를 건네더니 햇빛이 들어오는 절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 * *
백산과 철목승이 천오백 년 동안이나 그 명맥을 유지해왔던 천신가의 숨통을 끊어놓고 있는 그 시간, 제천맹이 있는 태실봉에는 암울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 암울한 기운의 근원지는 제갈수연의 처소였다.
소림과 무당파의 질시 때문에 제천맹의 위기상황이 왔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맹의 무사들을 안정시켰고,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던 그녀가 왜 이렇게 침통한 표정인가.
"모든 연락이 두절되었다고?"
"네, 맹주님."
바로 이 때문이었다. 외부에서 활동 중이던 밀천각의 밀정들, 제천맹의 눈과 귀가 되었던 그들로부터 모든 연락이 두절되어버린 것이었다.
결국 제천맹 내부 상황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세가로 보냈던 인원은?"
이번 질문에 대한 일비의 대답은 침묵이었다. 밖으로 나갔던 부하들에게서 도착했다는 연락도, 다시 돌아왔다는 보고도 없었다. 모두 당했다는 의미인 게다.
"어쩔 건가, 연매."
백무천의 얼굴 또한 당혹스럽게 변했다.
실제 전쟁이 일어나면 제천맹이 승리할 것으로 보았는데 돌아가는 상황이 결코 유리한 상황이 아니었다. 점점 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거였다.
"기다리는 수밖에요, 그들을 전부 합쳐도 우리의 절반입니다."
그녀라 해서 별다른 대응방법이 없었다. 지금 제천맹에 남아 있는 무림인들의 수는 칠천, 그들과 정면으로 싸운다면 결코 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수성에 한해서였다. 지금 부하들의 심리 상태로는 성문을 열고 나가질 못한다. 조금만 더 기다려야 함이다. 부하들이 제천맹과 옥쇄할 각오가 설 때까지.
"맹주님!"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나와보셔야 하겠습니다."
부하들의 얼굴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음을 직감한 제갈수연과 백무천이 서둘러 나섰다.
"저럴 수가……."
밖으로 나온 제갈수연과 백무천, 그리고 지청인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고 말았다.
부하가 끌고 온 말 위에 실려온 인간. 바구니 두 개를 나란히 묶어서 고정시킨 뒤 두 사람을 담아서 보냈던 것이다.
커다란 바구니에 따로 담고, 가운데 구멍을 뚫은 뚜껑에 얼굴만 나오도록 해두었던 거였다.
"꺼내라!"
"우욱!"
뚜껑을 제거하고 두 사람의 몸을 꺼내던 무사들이 입을 틀어막으며 고개를 돌렸다.
담운천과 담진룡의 몸 때문이었다. 두 팔과 다리가 잘린 몸통이 여름 더위에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더하여 그들의 썩어간 부위에서 꿈틀거리는 수많은 알맹이들, 측간에서나 볼 수 있는 구더기들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은 담운천과 담진룡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혈이 파괴되었고 혀마저 잘린, 시체보다 더 험한 몰골을 가지고도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그놈이 살아 있단 말이냐. 그놈이…….'
갑자기 밀려온 오한에 제갈수연이 부르르 떨었다. 담운천이나 담진룡의 처참함 때문이 아니었다. 파괴된 아혈 때문이었다.
사 년 전 자신이 행했던 일, 놈의 두 부인의 아혈을 파괴해서 그 속에 광천뢰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게 했었다.
그런데 놈이 똑같은 방법을 이용하여 선물을 보냈다.
자신은 사지를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두었는데, 놈은 사지를 잘라서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자신은 아혈만 파괴했는데, 놈은 혀까지 잘라버렸다.
"가져와라!"
담운천의 가슴에 걸려 있는 서찰인 듯한 종이를 두고 한 말이었다. 그 서찰을 잡아가던 부하의 표정이 다시 한 번 굳어지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가슴을 뚫고 나와 있는 하나의 손, 그 손에 서찰이 걸려 있었던 거였다.
더구나 그 뒤쪽에 깨끗하게 잘려진 모양은 마치 손을 잘라 가슴 쪽으로 밀어 넣어버린 듯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검게 죽어버린 상태이고 썩어가고 있으니 그 손이 각인대사의 손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서찰을 집어든 제갈수연이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제갈소저. 세가가 위험합니다. 불타고 있습니다.
빨리 오셔야 하겠습니다. 백무천과 두 분만 오세요, 꼭.
배를 타야 합니다. 지옥으로 가는 배를.
전부 알려도 상관없습니다.'
서찰을 읽어가던 제갈수연이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사 년 전 자신이 썼던 서신과 똑같은 필체였고, 내용도 비슷했다.
제갈세가가 끝장나고 있다는 말이었다. 야망을 성취했다는 상징이었던 제갈세가. 사 년간 천하제일세가였던 그곳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신 차리시오, 연매!"
백무천이 제갈수연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아직은 무너질 때가 아닌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제천맹만 남아 있으면 겁날 게 없다. 칠천이나 되는 병력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것은 백무천의 오판이었다.
그 다음 날부터 계속해서 시체를 담은 바구니를 걸친 말이 제천맹으로 들어왔다.
똑같은 바구니에 똑같은 형태로 담겨진 자들. 천하제일가가 되었던 제갈세가의 인물들이었다. 아혈이 파괴되고, 혀가 잘리고, 사지가 없는 제갈세가 인물들.
담운천이니 담진룡과 마찬가지로 숨은 붙어 있었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있는 거였다.
거의 한 달간이나 지속된 말들의 행렬은 새롭게 결속되어 있던 제천맹 인물들을 걷잡을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한두 명씩 도망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 또한 바구니에 담겨 들어오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한쪽은 제갈세가의 인물들, 다른 한쪽은 제천맹에서 도망친 인물들의 몸통이 실려 있었던 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자는 끊이질 않았다. 온몸을 적셔오는 공포 때문이었다.
그런데 제갈수연의 대응 또한 기이했다. 한 명이라도 도망자를 줄여야 할 판인데 무슨 생각인지 맹을 이탈해가는 자들을 방치하고 있었다. 마치 전쟁을 포기한 사람 같았다.
"연매, 공격을 해야 하지 않겠소?"
연일 도망자가 생기자 백무천이 제갈수연을 향해 다그쳤다.
이 상태로 나가다간 제천맹의 모든 무인들이 죽어나가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병력이 남아 있을 때 싸워보는 게 낫지 싶었다.
"기다리십시오. 더 이상 도망자는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나가봐야 죽음뿐이니까요."
다시 이성을 찾았는지 제갈수연의 얼굴이 차분하게 변해 있었다.
놈들의 행동을 보았을 때 도망치는 자들이라 해서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고,
밖으로 나가는 게 탈출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면 맹 내에 있는 무인들은 더욱 결속될 수밖에 없다.
그녀가 가장 바라는 상황이었다.
결국 자신을 중심으로 뭉쳐야 살아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높아진다고 생각할 터이기에, 제천맹을 위해 목숨을 걸게 될 것이다. 그래야 자신들의 삶이 보장되기에.
"어리석은 자들……."
바보 같은 자들이 아닐 수 없었다. 도망치는 자들을 내버려두면 더 빠른 속도로 제천맹이 와해될 터인데 복수에 눈이 멀어 그 점을 간과하고 있다.
도망자가 천여 명이 생긴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남아 있는 자들이 그들보다 더한 몫을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나갈 때입니다."
부하들이 전부 안정되었다고 느낀 제갈수연이 드디어 출정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 또한 싸우기 위해 내보내는 게 아니었다.
"적들은 우리와 정면으로 싸우지 못합니다. 대충 쫓기만 하십시오."
"왜?"
백무천의 의아해하는 얼굴이 제갈수연을 향했다. 지금 출정이 전쟁을 위한 출전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냥 나가서 시위하듯 한 바퀴 돌고 오라는 의미였던 까닭이었다.
"일단 한 달 정도만 있다가 들어오시면 됩니다."
백무천의 물음에 빙긋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둥! 둥! 둥! 둥!
진군을 알리는 전고가 울려 퍼지고 제천맹 무인들의 발놀림이 빨라졌다.
드디어 시작되었다. 그동안 공포에 떨며 맹 안에 있던 모든 무인들이, 거친 숨을 내쉬며 자신의 검을 다잡았다. 그들의 온몸으로부터 투기가 발산되기 시작했다.
지금껏 제천맹을 불안에 떨게 했던 자들을 처단하겠다는 의지.
"산아, 너의 작전이 저들을 더욱 결속시켜주었다는 걸 알고 있느냐?"
제천맹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기슭, 광풍대원들이 전부 모여 있는 곳에서 남궁세우가 백산을 쳐다보며 말했다.
전쟁의 북소리가 울리는 것으로 보았을 때 이미 제천맹은 완전하게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인 게다.
여태껏 제갈수연이 기다리고 있던 게 지금의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인 것이다. 제천맹에 있는 육천의 무인들이 전부 충성스런 부하가 될 시기를.
"저들과 정면으로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전부 피하라 하십시오. 간혹 한 번 정도 공격이나 해주고요."
석두와 백산의 작전은 간단했다. 결코 함께 섞이는 전면전을 원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제천맹의 인원은 이곳 숭산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마냥 피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한 달이 안돼서 저들은 전부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병력을 끌고 밖으로 나와봐야 싸울 상대가 없는데 뭘 어찌하겠는가. 그냥 헤매고 돌아다니다 다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육천이나 되는 병력을 이끌고 남궁세가나 팽가의 인물들을 치겠다고 쫓아올 수도 없는 일이기에. 오직 제천맹의 터전은 이곳 숭산이 전부일 뿐인 것이다.
석두와 백산의 예상대로였다.
제천맹 진영에서 백무천과 지청인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건 도대체 상대가 있어야 싸울 게 아닌가.
언제나 자신들과 오 리 정도를 떨어진 채 도망을 치고 있다. 아예 싸울 의사가 없는 자들이었다.
벌써 한 달간을 적을 쫓아 헤맸지만, 사소한 충돌을 제외하고 전투다운 전투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결국 다시 맹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제132장
"자, 이제 어떻게 할 거냐."
남궁세우가 맹으로 들어가는 제천맹 무인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백산이 원하는 게 제천맹 안에 있는 자들의 전원몰살이란 걸 알지만, 그 방법이 묘연했다.
지금 들어가고 있는 저들만 보더라도 한 달 전과는 천양지차다. 모든 제천맹 인물들의 얼굴에 자신감이 넘쳐나고 있었던 터였다.
혈광마겁이나 귀마겁을 일으켰던 자들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었다.
갈수록 이쪽이 불리해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세가의 인원이나 무욕인은 필요 없습니다. 우리만 있으면 됩니다, 우리만."
남궁세우의 그런 마음을 읽었는지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들 있었구먼."
"자네가 여기 웬일일가?"
북경에 있어야 할 석숭이 이곳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것도 수백의 금의위와 함께…….
"내려놓아라."
"뭔가, 저게. 설마……."
금의위가 내려놓은 상자들을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팽무도와 남궁세우가 경악스런 표정을 지으며 백산을 돌아보았다.
저것이었다.
녀석이 제천맹의 모든 인원을 맹 안으로 몰아넣은 이유, 화약이었던 것이다.
과거 만상투인루에서 썼던 화약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난 분량의 화약. 이곳 태실봉을 완전하게 날려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황제가 주던가!"
"샀습니다, 돈 주고."
만상투인루에서 벌었던 모든 돈을 주고 샀다는 거였다.
단지 화약만 있는 게 아니었다. 군에서만 쓰는 진천뢰도 이천여 개나 되었다. 일국과 전쟁을 치러도 될 만큼 엄청난 분량이었다.
"그만둔 겐가?"
황실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팽무도가 석숭에게 물었다.
돈만 가지고 이 화약을 내주었을 리가 없다. 석숭의 권력을 걱정하는 유량과 황제인 선덕제가 그의 퇴진을 조건으로 들어주었을 것이다.
황실에 남아 있는 마지막 공신이 석숭 아닌가. 선덕제의 입장에서도 조부인 영락제의 그늘에서 완전하게 벗어나기 위해서는 석숭이 떠나야 한다.
그런데 그가 쥐고 있는 자금줄 때문에 내치지 못하고 있었는데, 엄청난 거금을 쥐어주면 스스로 나간다 하니 환영할 일이 아니었겠는가.
팽무도의 물음에 석숭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황제라는 놈, 목을 따버릴까?"
순간 화약을 들고 있던 금의위들의 몸에서 백산을 향해 살기가 밀려들었다.
그러나 과거에도 이런 일을 경험했던 금령이 전음으로 뭐라 했는지 백산의 전신으로 밀려들었던 살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이 사람도 괜찮은 황제인가보네?"
금의위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사람을 판단하는 그만의 방법이었다. 부하들에게 얼마나 신뢰를 얻고 있느냐에 따라 됨됨이를 판단하는 기준.
"어라? 복면을 벗었네요?"
금의위에게 전음을 보내느라 입술을 딸싹거리는 인물을 쳐다보던 백산이 놀라며 물었다.
"그렇게 되었소이다, 백공자. 그런데 그 돈 아까워서 어쩌우."
"원래 쓸 줄도 모르는 놈인데요, 뭘."
백산이 금령을 향해 빙긋 미소를 지었다. 더 이상 쓸 일도, 쓸 곳도 없다.
주고 싶었던 녀석들이 전부 떠났는데 돈이 있으면 뭘 할 것인가. 차라리 이렇게라도 쓰이는 게 더 나은 일이지 싶었다.
"자네, 저들을 전부 태워 죽일 참인가?"
"그러려고 화약 가지고 온 것 아니었소?"
석숭의 물음에 백산의 표정이 더 의아하게 변했다. 화약을 가지고 온 사람이 이상한 걸 묻는다는 얼굴이었다.
"진정인가."
화약을 가지고 오기는 했지만 맹 안에 있는 전부를 없애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백산이 준비하고 있는 상황은 전부 몰살을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단지 화약이 있어서 좀더 편하다는 생각을 할 뿐 저들의 죽음은 정해진 사실이었던 것이다.
"제대로 복수를 할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맙소. 내심 어떻게 태워 죽일까 많은 고민을 했는데."
"허! 그럼 겨울까지 기다려야 하겠구먼."
이제야 백산이 하려는 의도를 정확하게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똑같은 복수를 원하고 있는 게다. 부인들이 죽었을 때와 똑같은 상황을 만들고 있다.
부인들의 아혈과 사지, 그리고 광천뢰에 의해 당했으니 제천맹도 화약으로 끝장을 내려 한다. 그리고 소령이 얼어 죽었으니 겨울이 되도록 기다리려 함이다.
"나머지 분들은 혹시라도 나오는 놈들이 있으면 그대로 두십시오. 단 벌판을 벗어나면 전부 죽이십시오."
백산이 세가인들과 무욕인들에게 원하는 바였다.
제천맹의 담벼락이 있는 곳에서 오 리 정도의 벌판, 그곳만 놈들에게 허락된 장소이고 그 외에는 전부 죽음의 장소라는 말이었다.
"석두야 작업하러 가자. 말을 보내는 작업은 계속해라. 그리고 숯 검둥이, 너희 둘은 따로 할 일이 있다."
과거 만상투인루에서 했던 작업을 이곳 하남성의 제천맹에서 재현하고 있었다.
불꽃놀이.
오랜 기간 동안의 작업이 될 것이다. 만상투인루야 하나의 건물이었지만, 이곳은 수백 채의 건물이 있는 곳이기에. 겨울까지 세월을 보내기에는 알맞은 시간이기도 했다.
"알지? 제갈수연, 그년이 있는 곳은 그냥 두어야 한다."
"그런데 바깥쪽은 그런다 치고 안쪽은 어찌할 텐가."
"두고 보면 압니다."
대통진을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새롭게 만들어진 대통진은 누구도 발견할 수 없다. 적어도 석두와 일휘 수준에 근접한 자만이 감지해낼 수 있는 엄청난 진(陣)인 것이다.
밖에서 자신들을 몰살시켜버리려는 엄청난 계획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제갈수연과 부맹주 두 사람은 오랜만에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신들의 예상이 적중했다는 것에 대한 만족감이었다. 전투 한 번 없이 맹 내 무인들의 사기가 최고조에 달해 있다. 싸워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팽배해 있는 것이다.
한 번의 출정이 가져다준 효과였다. 이제는 정문을 통해 들어오는 말도 별로 겁내지 않고, 보고도 없이 알아서 치워버린다.
오늘도 검게 변해버린 시체 두 구가 말에 실려 들어왔으나 평소에 하던 대로 시체 버리는 곳으로 가져다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두다가 일정 분량이 되면 전부 소각하는 식으로 처리를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검게 죽어 있는 줄로만 알았던 것이 시체가 아닌 살아 있는 사람이었음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섯다야, 우물이 어디 있을까?"
"한 놈을 잡아서 조져보지, 뭐."
섯다와 모사였다. 검게 변해버린 얼굴로 시체처럼 위장하여 제천맹 내부까지 잠입해들었던 터였다.
"독을 확 풀어버리면 좋겠구먼, 이까짓 것 풀어서 뭘 어쩐다고."
백산의 지시사항이 불만인 듯 섯다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죽을 정도가 아닌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마치 돌림병이 돈 것처럼 미약하게 독을 풀라 하였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이 밖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그 시간 동안, 섯다와 모사는 제천맹의 안쪽에서 독을 퍼뜨리라고 시킨 것이었다.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주의가 산만해질 정도만이 백산의 요구사항이었다.
"이제 다 된 것 아닌가?"
벌써 삼 일째 작업을 하고 있던 두 사람이 다시 시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쉬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수고했다."
"허걱! 왔으면 왔다고 할 일이지……."
자신들의 옆에서 들려오는 갑작스런 백산의 말에 화들짝 놀란 섯다와 모사가 이내 표정을 풀며 이죽거렸다.
"빨리 기어 들어와, 임마. 일해야지."
갈수록 진에 완숙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섯다와 모사마저도 그 기척을 감지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한 진을 제천맹의 인물들이 감지해내지 못하는 것이야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더군다나 독까지 뿌려두어 주의까지 산만해졌으니.
그날부터 내부에 화약을 매설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환상미로진과 대통진을 동원하여 모든 건물에 천천히 작업을 해나갔다.
"이 전쟁은 인내력 싸움입니다. 기다리는 쪽이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벌써 두 달, 초조해하고 있는 부맹주 두 사람을 향해 제갈수연이 말했다. 적이 근처에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공격해나갈 수가 없다.
아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쪽에서 성문을 열고 나가면 적은 어느새 사라지고 만다.
결국 헛되이 심력만 낭비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한 번의 출정은 부하들의 사기를 올려주는 효과를 가져오지만 그 또한 여러 번 지속되면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뿐이다.
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적이 전면전을 원하는 그때를.
기다리는 가운데 시간은 자꾸 흘러 어느덧 한 해의 마지막인 동짓달을 한 달 남겨두고 있었다. 드디어 백산이 기다리는 겨울이 왔다.
혈광마인이 나타난 지 거의 일 년의 세월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제천맹 인물들이 비교적 여유 있는 시선으로 밖을 주시하고 있는 그 시간, 백산 일행은 그들과 다른 곳에서 과거의 형제들과 조우하고 있었다.
무림공적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장소.
지난 세월 제천맹의 인물들에게 당했던 형제들과 낙양 청루에 있던 그들의 목이 따로 보관되어 있는 곳이었다.
별도의 약품처리를 했는지 지금까지도 부릅뜬 눈을 하고 전방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들을 쳐다보고 있는 백산과 일행들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더 이상 울어줄 눈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들의 모습을 다시 보니 슬픔이 북받쳐 올랐다.
모두들 힘들어하는 표정들이다. 모든 내공을 전부 썼고 마지막 생명수라는 진원지기까지 써버렸기에. 그래서 스스로 자폭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이곳에서 제천맹 놈들의 노리개가 되어 지난 사 년의 세월을 보냈다. 아무런 죄도 없이.
"오랫동안 기다렸다. 이젠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형제들의 얼굴을 하나씩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형님, 다 묻었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이곳에 가장 많은 화약을 묻었다. 가장 먼저 녀석들을 보내줄 것이다. 먼저 가서 적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쳐다볼 수 있도록.
그래서 가장 마지막으로 작업할 장소를 이곳으로 정했던 거였다.
"섯다와 모사, 너희들은 나를 따라와라."
두 사람을 데리고 백산이 간 곳은 제천맹 인물들의 식량 창고로 쓰이는 곳이었다. 제갈수연도 제법 준비를 했는지 아직 엄청난 분량의 식량이 가득 들어 있었다.
"나는 저놈들에게 독을 풀 테니 너희들은 우물에 풀어라. 최고의 극독을. 단지 살을 녹일 정도는 안 된다. 시체를 보존하게 해야 해."
이제부터 고통을 줄 차례인 것이다. 형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적들이 고통 받는 모습을 즐겨야 하기에.
모든 일을 마친 백산 일행이 조용히 떠났다.
이제는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흰 눈이 내리는 그날을.
"커억! 크윽! 독, 독이다."
다음 날부터 제천맹 곳곳에서 중독되어 쓰러지는 무인들이 무더기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제천맹의 모든 식량에 전부 독이 들어 있었고 우물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시 공포가 되살아났다. 더 이상 정문을 통해 말이 들어오지 않아 안도하고 있던 제천맹 무인들의 얼굴이 급속하게 공포에 물들어갔다.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음식 하나, 물 한 방울에도 전부 독이 들어 있었다.
"맹주, 나갑시다. 나가서 다시 적을 치잔 말이오."
철마 지청인이 견디지 못하고 선공을 주장했다. 더 이상 맹에 있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먹을 음식마저도 바닥이 나버렸다.
모든 식량 창고에 독이 가득 찼고, 그곳 근처에만 접근해도 전부 중독되어버렸다. 맹 내에 시체 썩는 냄새가 가득했다.
또다시 저번처럼 시체를 태워야 했으나 그나마도 쉽지가 않았다. 태워도 독연이 피어오르는 시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가봐야 싸울 상대가 없지 않습니까. 더구나 너무 깊숙하게 쫓아갔다가 기련산처럼 기습을 당하면 그걸로 끝입니다."
"이곳에 있다고 하여 뾰족한 수가 생기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나가서 한번 보십시오.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단 말입니다."
"무슨 소립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삼천의 병력이 포위하고 있었는데요."
제갈수연이 깜짝 놀란 얼굴로 지청인을 쳐다보았다.
"하도 답답해서 제가 나갔다 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텅 비어 있더란 말입니다."
밖으로 나온 세 사람이 서둘러 성벽 위로 올랐다. 그곳에서 보면 거의 십 리 이상의 거리가 보인다. 지금껏 적을 감시해왔던 방법이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수백의 군막이 있었는데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듯 텅 빈 벌판이 전부였다.
"무슨 뜻인가. 왜 사라졌는가."
유독 차갑고 황량해 보이는 벌판을 쳐다보던 제갈수연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점점이 떨어지는 눈발에 의해 아름답게 보여야 하건만 왠지 모를 불안감이 밀려왔다.
차가운 눈과 함께 무엇인가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 썩 명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눈이 와서 물러갔을지도 모르겠군요. 아무리 무인이라지만 추위는 견디기 힘들 테니까요."
"아니에요. 너무 일러요."
제갈수연의 얼굴이 잔뜩 찡그려졌다.
그녀가 기다리던 겨울이었지만 지금의 경우는 결코 아니었다. 조금 더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적이 사라졌다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저건 또 뭔가."
백무천이 깜짝 놀라며 아래쪽을 가리켰다. 지금껏 거의 두 달 이상을 보내지 않았던 말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여전히 바구니 두 개를 달고서. 그런데 이번에는 시체가 들어 있지 않았다. 단지 뚜껑만 덮여 있었을 뿐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아래쪽에 있던 부하들의 처리를 묻는 말이었다.
"이쪽으로 가져와라."
적이 물러간 원인이 저곳에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개의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확인한 제갈수연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서찰 한 장과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검은 구(球) 하나가 들어 있었다.
진천뢰(震天雷). 백무천도 본 적이 있는 진천뢰와 '콰앙!'이라 써진 서찰이 전부였다.
"눈?"
그 말밖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놈이 기다리던 것이 무엇인가를 이제야 알았다. 그놈의 어린 자식이 죽어가던 그날도 첫눈이 왔었다.
온 세상을 덮어버릴 듯 펑펑 쏟아지는 눈 속에서 얼어 죽지 않았던가.
그래서 지금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그리고 화약까지. 힘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몰살을 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도망치는 자들을 살해했던 거였다. 누구도 빠져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네 방으로 돌아가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전음과 함께 하늘에서부터 검은 구(球)들이 쏟아져 내렸다. 마치 철포로부터 포탄이 날아오는 것처럼 보였다.
"백랑! 어서 우리들 처소로!"
왜 그런 소리를 했는지도 알 수 없다. 단지 귓가에 들여온 그 소리, 방으로 가면 살 수 있다는 소리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외쳤던 것이다.
과과광! 과앙! 과과광!
끊임없이 광음이 터져나오며 제천맹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가장 먼저 무림공적관이라는 건물이 날아가고, 그 다음부터는 제천맹의 다른 건물들과 부하들이 허공으로 산화해 갔다.
비명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폭발음 속에 모든 것들이 묻혀버렸다.
지난 백 년간 정도의 핵심이었고 담운천이 야망을 꿈꾸었던 곳, 구파일방이, 화진악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갈수연이 야망을 성취했던 모든 건물이 터져나갔다.
그들의 꿈과 희망이 사라지는 것처럼 그렇게 사라져갔다. 무림역사가 시작된 이래 처음 있는 대 폭발이었다.
화기를 다루는 무림세가도 있었고 벽력탄과 광천뢰라는 포탄이 사용되는 곳이 무림이기도 했지만 천하 제일세력을, 수백 채가 넘는 건물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경우는 일찍이 없었다.
무너지지 않고 있던 모든 건물은 불탔고, 뜨거움을 피해 밖으로 나간 제천맹 무인들은 대기하고 있던 팽가, 남궁세가, 개방, 그리고 무욕인들에 의해 척살되었다.
서로 검을 들이대고 싸우는 개념이 아니었다. 일방적인 도살에 불과했다. 도망도 칠 수 없었다. 스스로 무공을 패하고 검을 버린 자들만 살아남았다.
완전하게 폐허로 변한 제천맹의 건물은 쏟아지는 눈발을 맞으며 며칠 동안을 타올랐다.
제천맹에 가담했던 대부분의 무인들이 삶을 포기하고 죽어가는 그 순간, 여전히 한 가닥 생을 위해 움직이는 자들이 있었다.
"헉! 헉!"
"연매, 힘을 내!"
검게 그을린 두 사람이 산발한 머리를 휘날리며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벌써 얼마나 달렸는지 한겨울임에도, 입고 있는 의복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백무천과 제갈수연, 사 년간 천하를 지배했던 두 사람이 몸의 이곳저곳에 화살이 박힌 채 정신없이 내달리고 있는 것이다.
"백랑! 그만 죽게 해주세요. 더 이상 갈 힘도, 살 힘도 없어요."
제갈수연이 처연한 음성으로 백무천에게 부탁했다. 그 폭발 속에서 그녀의 몸을 보호한 사람이 백무천이었다.
덕분에 그도 대부분의 내공을 잃었고 대항 한 번 변변히 하지 못한 채 마냥 도망을 쳐야 했다.
"안 돼, 연매. 깊은 산속에 숨어버리면, 그러면 돼. 지금은 놈도 쫓아오지 않고 있어. 힘을 내."
"아니에요, 백랑!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세요? 바로 그곳이에요."
"벽하곡?"
주변을 둘러보던 백무천이 나지막이 부르짖었다. 정신없이 쫓겼을 뿐 지역을 확인할 길이 없었는데 지금 자신들이 와 있는 곳은 너무 눈에 익었다.
그랬다. 사 년 전 그날, 놈의 이빨을 없애버린 곳이기도 했고, 그들이 가져왔던 광천뢰로 놈의 모든 것을 날려버린 벽하곡이었다.
놈이 모든 것을 잃었던 장소였고, 제갈수연과 자신은 천하를 얻었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다.
"확실히 머리가 좋아서 그런지 바로 알아보는군. 옛날의 연동립이란 놈과는 달라."
백산이었다. 만상투인루에서 연동립과 종천수를 쫓을 때와 똑같이 활을 들고 두 사람을 사냥했다.
천영과 추렴이 죽어간 곳에서 그녀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복수를 마무리 짓고 싶었다.
"버러지 놈, 결국에는 왔구나."
백무천이 살기를 흘리며 앞으로 나섰다. 지금 상태로는 한순간도 견디지 못할 터이지만 살려달라고 빌고 싶지는 않았다.
싸우다 죽고 싶었다. 최고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사랑하는 여인인 수연이 그 자리에 올랐지만 자신이 있었던 거나 마찬가지였다. 결코 후회하는 그런 삶이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원하는 바를 얻었지 않았는가.
"쉽게 죽어주지는 않을 거다. 덤벼라, 버리지!"
살기를 흘리며 다가서던 백무천의 몸에서 전율적인 기운이 흘러나왔다.
죽음을 결심하고 생명수라 할 수 있는 진원지기(眞元之氣)까지 몽땅 끌어올리자 과거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절반 정도의 힘을 회복할 수 있었다.
"화룡지천무(火龍地天舞)!"
비록 절반의 내공밖에 남지 않았지만 신가의 무공답게 백무천의 몸에서 펼쳐진 화룡파천비공의 일 초는 가공했다.
붉은 화염의 기운을 간직한 열두 마리의 화룡(火龍)이 백산의 전신을 노리고 무섭게 지쳐들었다.
그러나 몸이 완전했을 때도 상대가 되지 않았던 백무천이었는데, 하물며 파멸안의 마지막 단계인 광혈지안 상대인 백산이었으니.
굳이 머리를 굴릴 필요조차 없었다. 화염의 기운을 감지한 빙천비가 백무천의 화룡들을 향해 빙정의 기운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빙천비와 풍천비, 그리고 금천비에 의해 생성된 하늘의 기운이 열두 마리의 화룡을 파괴시켜버렸다.
"이건 갈노인의 몫이다."
무상신법을 이용하여 순식간에 거리를 단축한 백산이 오른손 정권을 백무천의 얼굴에 박아 넣었다.
"커억!"
나직한 비명소리와 함께 백무천의 입 주위가 피범벅으로 변했다.
그러나 한 방에 끝낼 수 있는 상황임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과거에 당했던 것만큼 철저하게 돌려주기로 결심했다. 하나씩 하나씩.
"놈! 이 백무천을 우롱하는 것이냐? 화룡사멸무(火龍死滅舞)!"
꾸아악!
뒤로 밀리던 자세를 바로잡은 백무천이 기습적으로 화룡파천비공 이 초식을 펼쳤다.
순식간에 그의 몸을 떠난 수십 마리의 화룡들이 백산의 전신을 향해 달려들었다. 백산을 잡아보고자 이겨보고자 펼치는 무공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죽는 건 싫었다.
"우롱? 착각하지 마라, 백무천. 나는 네놈을 우롱할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야. 단지 빚을 받고 싶다. 네놈과 저년에게 졌던 빚을 말이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화룡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오직 백무천을 노려보며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열두 자루의 천비에 의해 형성된 붉은 기운이 조그마한 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백무천에 의해서 만들어졌던 화룡들이 하나씩 소멸되어갔다.
"이건 소령이 몫이다."
백무천의 면전까지 다가간 백산이 고함을 내지르며 왼 주먹을 날렸다. 소령,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련해지는 이름이다.
어떻게 하면 예쁘게 키울까,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키울까, 그런 생각으로 밤을 지새운 적도 있었다.
녀석의 얼굴만 쳐다보아도 마냥 행복했었다.
녀석이 웃는 모습만 보아도 배가 불렀었다. 그랬던 녀석이었는데, 소운과 천영이의 이름자를 따서 소령이라 지었는데, 전부가 떠났다.
소령을 생각하자 갑작스레 얼굴이 확 달았다. 가슴속에서 울컥하니 무엇인가 치밀어 올라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이건 천영이 몫이고, 이건 추렴이……."
갑작스레 솟구친 분노에 자신도 모르게 손과 발을 뻗어냈다. 한 번 터져버린 분노는 겉잡을 수 없었다. 백무천의 전신을 향해 백산의 사지가 작렬해들었다.
코가 내려앉고 턱이 깨지고 눈두덩이 터졌다. 순식간에 얼굴 이곳저곳에는 선혈이 낭자했다.
"죽여라, 버러지! 죽이란 말이다."
"아냐, 조금만 더 기다려. 저년을 먼저 해결하고 난 후에 보내줄 테니까."
백무천의 고함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린 백산이 한 발 물러났다.
아직 죽여서는 안 된다. 받은 만큼 돌려주려면 아직 멀었다. 백무천을 노려보던 백산이 그의 아혈을 파괴시켜버린 후 제갈수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냉정하군. 서방님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쳐다보고만 있으니 말이야."
초연한 눈으로 자신과 백무천을 쳐다보고 있는 제갈수연을 향해 살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흥! 그럼 살려달라고 빌 줄 알았나?"
더 이상 여한이 없음이다.
최고가 되고 싶었고, 그 꿈을 이루었다.
사 년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제천맹주 제갈수연은 영원히 역사에 남을 것이다. 언젠가 누군가가 기억해주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걸로 되었다, 그것으로.
"죽여라!"
"말은 잘하는군. 나는 말이야. 세상에 크게 바라는 게 없었다.
단지 한 가지, 네년이 묻어버린 그녀들과 오래오래 같이 살고 싶은 한 가지 꿈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네년이 그 모든 꿈을 날려버렸어. 부족한 게 하나도 없던 네년이……."
백산의 몸에서 조금씩 살기가 넘실대기 시작했다. 끝까지 당당한 제갈수연의 모습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저들은 뭔데 저리도 잘났는가. 자신들의 야망을 위해, 아무 죄책감도 없이 타인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지 않은가.
적어도, 적어도 마지막에는 회개할 줄 알았다. 자신의 죄를 인정할 줄 알았다.
그러나.
"꿈이라 했나? 착각하지 마라. 꿈은 너희같이 하찮은 자들도 꾸지만, 너희들이 다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우리도 꾼다.
왠지 아나? 꿈이 없다면 살아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야.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해, 내 자신의 존재감을 잊지 않기 위해 더 큰 것을 원하는 거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숨쉬는 인간."
"역시 많이 배운 사람이라 다르군. 좋다. 너의 꿈이 무엇이든 상관없어.
이 나라의 황제가 되든지, 아니면 신이 되든지……. 하지만 남을 짓밟고 올라서는 꿈이라면 처음부터 꾸질 말았어야 해.
네가 하찮게 여기는 것들이 화를 낼 수도 있으니까. 이렇게 말이야."
백산의 손에서 붉은 기운이 번쩍이더니 제갈수연의 오른팔을 잘라나갔다.
그러나 백산의 행동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재빨리 몸을 움직여 그녀의 피를 지혈시켰다. 담운천과 똑같은 상태를 만들고자 함이었다.
"네년이 죽인 그녀들의 꿈은 무엇이었는지 아나?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소령이었다. 그 애가 웃는 모습을 보는 게 꿈이었다고."
다시 한 번 천비가 휘둘러지고 이번에는 왼팔이 잘려나갔다.
그러나 제갈수연의 얼굴에는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이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백산의 행동을 비웃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나를 죽이면 지금 너의 꿈은 이루어지겠지, 복수의 꿈 말이야. 그런 다음엔, 그런 다음엔 뭐 할 건가. 또다시 복수할 대상을 찾을 건가?"
"그녀는 죽어가면서도 자식을 안아보지 못했다. 일 년도 안 된 자식이었는데 말이다."
이번엔 제갈수연의 오른쪽 다리가 잘려나갔다.
그녀의 비아냥거림에도 백산의 행동은 변함이 없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면서 제갈수연의 사지를 잘라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마지막 남은 소운은 어찌 되었는지 아나? 네년을 죽일 수 있는 힘을 주기 위해 가슴에 칼을 박고, 그리고 나를 업고 삼 년을 넘게 살았단 말이다.
온몸에서 피가 사라질 때까지."
제갈수연의 사지가 전부 사라졌다. 쓰러져 있는 제갈수연 앞으로 다가간 백산이 품속에서 조그마한 구슬 두 개를 꺼냈다.
얼마 전에 섯다와 모사가 주었던 광천뢰 두 개. 아마 이 순간에 쓰라고 주었던 것일 게다. 제갈수연에게 선물을 하라고.
"자, 똑바로 앉아라. 그리고 저놈이 죽어가는 것을 먼저 지켜봐라. 설마 자결하지는 않겠지?"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군. 우리같이 가진 자들은 말이다. 너희처럼 하찮은 것들이 무서워서 자결 같은 건 안 해. 담운천을 보고도 못 느꼈나?"
"고마워. 그래도 방지해야 하겠어."
순식간에 붉게 변한 주먹을 제갈수연의 입 안으로 박아버렸다.
우두둑!
잇몸부터 시작해서 텅 빈 공간이 생겨났다.
그곳을 향해 광천뢰 하나를 밀어 넣은 백산이, 이번에는 백무천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이내 실소를 머금으며 몸을 돌렸다.
백무천은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던 거였다.
제갈수연이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가 더 이상 견디질 못하고, 마지막 남은 내공을 쥐어짜서 심맥을 끊어버렸다.
"저놈은 태생이 비천한 놈인가보네? 버러지 앞에서 자결했어.
그리고 이건, 죽고 싶으면 고개를 숙여 부딪치면 될 거야. 너무 늦으면 몸에 구더기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아니, 겨울이라서 상관없을라나?"
마지막 하나 남은 광천뢰를 제갈수연 앞에 고정시켜준 백산이 그녀의 혈도를 풀어주며 몸을 돌렸다.
"참, 네가 죽으면 뭐 할 거냐고 물었지? 그녀들에게 갈 거야. 그게 내 마지막 꿈이야. 한 가지만 더 말해줄까?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들과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떠나는 백산이 마지막 남긴 말이었다.
'놈! 내가 눈물을 흘릴 줄 알았더냐? 적어도 너 같은 놈이 있는 데서는 울지 않는다. 울 수가 없단 말이다.
눈을 감지 않았다고? 그 정돈 나도 할 수 있다. 얼마든지 눈을 뜨고 할 수 있단 말이다.'
급기야 제갈수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자신이 했던 모든 일에 당당하고 싶었다. 이 정도에서 멈췄다 하여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시 태어나서, 이런 선택의 기회가 또 온다면 주저 없이 지금의 길을 택할 것이다. 이십여 년의 세월보다 지난 사 년의 세월이 더욱 값진 인생이었기에.
'네놈이 했다면 나도 할 수 있다. 제천맹주인 나도 할 수 있단 말이다.'
모든 기력을 다 짜내어 바닥에 있는 광천뢰를 향해 고개를 찍었다. 입 안에 있는 것과 부딪혀야 터질 것이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마침내 제갈수연의 얼굴에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꿈을 성취한 자의 눈빛이었다.
'가진 자나 가지지 못한 자나, 인간은 언제나 새로운 꿈을 만든다.
이루고 싶어 하는 새로운 꿈을. 그 꿈속에 타인이 들어 있는가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꿈보다 소중한 것은 없기에.'
콰앙!
"천영, 추렴, 소운, 소령아. 편히 잠들어라. 그리고 할아버지도……."
천천히 걷고 있던 백산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복수를 한다 해서 그녀들이, 떠났던 광풍대원들이 살아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욱 사무치게 보고 싶을 뿐이었다.
막연한 눈으로 벽하곡을 쳐다보던 백산의 몸에서 붉은 광풍이 일더니 천천히 솟구쳐 올랐다.
"조금만 기다려줘……."
허공에 몸을 멈춘 백산이 두 부인과 소령, 그리고 갈태독이 묻혀 있는 벽하곡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화사하게 웃고 있는 그녀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치 서둘러 오라는 듯했다.
벽하곡을 쳐다보던 백산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졌다. 이제 마지막 여인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그곳에서 모든 것을 결정할 터였다.
그가 가는 곳은 뇌룡현 쪽이었다.
소운의 시신이 있는 곳.
"산이는 어디 갔느냐. 빨리 산이를 찾아봐라."
팽무도가 다급한 얼굴로 백산을 찾고 있었다.
벽하곡에서 죽어 있는 두 사람의 시신을 발견한 지 이틀이 지났는데도 백산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문득 불안감이 밀려왔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있는데……."
팽무도가 거세게 고개를 흔들었다. 마지막이었다면 제천맹주를 처치하러 떠날 때 자신의 얼굴을 보고 갔을 것이다.
다시 돌아올 마음이 있었기에, 아직은 죽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기에 말없이 갔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못내 불안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녀석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형님! 뇌룡현입니다. 소운이에게 갔어요."
"그래, 맞네. 어서 가세."
팽무도와 광풍대원들의 몸이 빛살처럼 날기 시작했다.
천하제일인들이었다. 단 열한 명의 인원으로 일 년 만에 제천맹이라는 강호제일의 세력을 없애버린 초인(超人)들. 강호무림의 전설(傳說)이 되어버린 자들이었다.
"소운, 내가 다시 왔소. 언니들과 소령이 묻힌 곳에 다녀왔소."
자신이 사 년간이나 잠을 잤던 곳이고 지금은 소운이 잠들어 있는 이곳에 백산이 와 있었다.
그녀라도 보아야 기분이 풀릴 것 같았다. 빙천비를 이용하여 그녀의 몸을 얼려두었기에 처음 떠날 때와 변함이 없었다. 마치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날 것만 같았다.
"소운, 날 용서해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있다 갈게. 기다릴 수 있지?"
지난 이틀간 그녀를 바라보며 내린 결론이었다.
결코 삶에 미련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팽무도와 남궁세우 때문이었다. 그분들이 살아 계실 동안만 견뎌볼 작정이었다.
소운의 몸에 입맞춤을 한 백산이 화천비를 뽑아내어 그녀의 몸을 녹이기 시작했다.
뜨거운 김이 올라오고 그녀의 몸이 점점 타들어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뼈만 남았다. 그녀의 몸을 태울 때 조천영과 냉추렴의 마지막 흔적도 같이 태웠다.
이어 조그마한 그릇을 하나 만든 백산이 자신의 손으로 소운의 뼈를 가루로 만들어 물이 들어가지 않게 밀봉한 후 품속에 집어넣었다.
"이젠 이것도 벗을게."
양손과 다리에 있던 천목환을 벗어서 혈가의 후예가 잠들어 있는 관 속에 집어넣고 뚜껑을 닫았다.
"한 번은 힘을 더 쓸 수가 있겠네."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인 백산의 몸이 허공으로 솟아오르더니 그의 입에서 거대한 외침소리가 흘러나왔다.
"혈극참폭멸!"
순간, 엄청나게 붉은 기운이 사방으로 밀려 올라가고 절벽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구르릉!
천오백 년 전, 혈가의 후예와 그가 사랑했던 여인의 무덤이 만들어졌다.
아늑한 무덤이 될 터이다. 철가의 한(恨)이었고 자신의 운명이었던 광혈지옥비와 함께 영원히 묻힌 것이다.
"푸후!"
용미폭포로 백산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들의 무덤을 만들어주고 자신은 연못을 향해 몸을 던졌던 것이다.
품속에 넣고 왔던 소운의 유골을 꺼낸 백산이 못 위에 천천히 뿌려댔다.
"거지는 넓은 곳에서 살아야 돼. 그곳은 너무 답답하잖아."
"형님! 산아!"
살아남은 자들, 광풍대원 전원이 날아 내렸다. 그들 또한 얼마나 달려왔는지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가장 안도한 사람은 팽무도였다. 재빠르게 백산 옆으로 다가온 팽무도가 그의 팔목을 덥석 잡았다.
"너?"
없었다. 녀석이 자신의 생명 줄을 벗어버린 것이다.
"이제는 필요 없지 않습니까. 더 이상 피를 부를 일도 없고."
백산이 희미하게 웃으며 팽무도를 쳐다보았다. 이 사람들 때문에 그녀들 곁으로 가지 못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이 더 힘들어할 것이기에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시간만큼만, 하늘이 부여한 만큼만 더 견디기로 하였다.
"형님, 이제 뭐 할 거요?"
"글쎄. 돈도 없고, 갈 데도 없고 참 난감하다야."
"우리 소림사에 갑시다."
"거긴 왜?"
"밥은 공짜 아니요. 또 혹시 보약이라도 있으면 달라지, 뭐."
"보약은 어디에 쓰게, 너도 장가가냐?"
"아, 형님 몸이 약하지 않소. 이도 없고."
소살우의 목소리도 약간 떨려나왔다. 팽무도의 표정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바로 알아차린 것이었다.
"사부! 팽가랑 남궁세가랑 빨리 지으쇼. 한 번씩 가보게."
"그래, 이놈아. 지금 당장 가서 닦달해야겠다. 최대한 빨리 지으라고. 바로 와야 한다. 네가 하북에 도착할 즈음이면 다 만들어져 있을 거다."
"알았소."
백산을 포함한 여섯 명, 뇌룡현에서 인연을 맺었던 그들의 신형이 천천히 멀어져갔다. 아마 뇌룡현에 있는 홍루로 가고 있을 것이다.
자신들의 과거를 하나씩 둘러보고자 함이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보게 될지도 모르는 곳이기에.
"가세! 아우. 자식이 찾아오는데 집이 없으면 되겠나."
"네! 형님!"
팽무도와 남궁세우의 몸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아버지들이 하셨던 것처럼 자신들도 백산을 맞이해야 한다. 아비로서의 역할을 해야 함이다.
쿠르릉!
수면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저 폭포수는 무슨 꿈을 가지고 있는지…….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의 성원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가정에는 행복하시고 한분 한분 건강하시고 날마다 즐거움이 함께하시길 소원합니다.
완 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