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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방향으로 맨발의 청춘, 청춘극장, 청일전쟁과 여걸민, 하녀, 청춘극장 |
한국의 영화 산업은 세계 영화사에 비해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비약적인 성장을 일궈냈다. 그 굴곡진 희로애락 속에 정점을 이뤘던 첫 번째 시기는 '한국 영화의 황금기'라 일컫는 1960년대라 하겠다.
이후 1970년대 들어 침체에 빠졌던 영화계는 1990년대 후반 도약하기 시작했다. 1998년 '쉬리'에 이어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 등 관객의 호평과 함께 한국 영화의 가능성을 새롭게 보여준 작품들이 제작됐다. '태극기 휘날리며'(2003년)와 '실미도(2003년)', '왕의 남자(2005년)', '괴물(2006년)'등 새로운 시도의 영화들이 급기야 천만 관객을 동원하며 2000년대를 '한국 영화의 르네상르기'로 만들었다.
'르네상스'라는 단어 자체가 '부활, 재생'의 의미를 담고 있다. 겹겹으로 쌓여진 시간 속에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순간이 없지만 오늘을 있게 한 것은 본보기가 되는 과거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을 겪고 억압과 검열로 까다로운 제작여건 속에서도 영화에 대한 부단한 노력과 열정이 돋보이는 1960년대 영화와 영화인들이 우리 영화사에 큰 의미로 아로새겨져 있다.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작품활동으로 다작의 시대로 기억되는 1960년대는 한 해 평균 200편에 가까운 영화가 제작됐다. 제작 편수가 그정도 되다보니 그 속에 코미디, 멜로, 청춘, 액션물 등 전 장르가 모두 동원됐고 최초로 시도하는 재미있는 기록들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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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부 |
예를 들어 최초의 컬러 시네마스코프 영화인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이 1961년에 제작됐고, 제11회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에 빛나는 강대진 감독의 '마부'가 그해 제작됐다. 이듬해 1962년에는 영화법이 제정됐고, 대종상 영화제가 탄생했다. 1963년에는 당시 국민배우 김승호가 '로맨스 그레이'로 제10회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거머쥐기도 했다. 1967년 최초의 극장용 장편 에니메이션 '홍길동전'이 신동헌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이 해 한국 최초의 클레이 애니메이션인 '흥부와 놀부'를 강태웅 감독이 세상에 내놓기도 했다.
또 '서편제' '취화선'으로 잘 알려져 있는 임권택 감독 역시 한국 영화의 황금기인 1960년대부터 활동하던 감독이고, 국민배우 안성기는 1952년 생으로 1957년 '황혼열차'라는 영화로 시작해 1960년대 많은 작품에 아역으로 출연, 지금까지 연기생활을 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한국 영화의 황금기와 르네상스기를 다 지내 본 이들로 우리 영화의 산 증인인 셈이다.
학벌과 명예, 가족을 버리고 영화판에 뛰어든 다양한 경력의 사람들이 충무로로 속속 몰려와 당시 영화인들의 아지트였던 '영화회관' '동방살롱' '스타다방' '청맥다방' '애플다방' 등을 집 삼아, 사무실 삼아 지냈던 이야기는 전설이 돼버렸다. 밤을 새 네가 필름(Nega Film)을 편집하고 오리지널 필름(Original Film)에 흠집 하나 날까 노심초사 작업하던 모습 등은 지금의 디지털 세대에게는 너무 생소한 옛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아날로그적이어서 원시적이기까지 한 그 때의 영화들을 보고 있으면 시대와 상관없이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다소 투박하고 촌스럽고 감정이 오버되는 면도 있지만 그런 모습까지도 순수하게 느껴지는 1960년대의 영화는 주인공이 바로 우리 자신인 것처럼 친근하다.
빠른 전개, 뛰어난 테크닉, 화려한 카메라 워크와 탁월한 C.G.(컴퓨터 그래픽)와는 멀어도 한참 먼 1960년대의 영화. 그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열정을 추억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 자신의 군더더기를 걷어내는 정화의 과정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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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어리 삼룡이 |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지만 적당히 비껴가고 적당히 미화한다. 그래서 관객들은 현실이 어려울 때는 영화를 통해 위안을 얻고 심리적으로 안정됐을 때는 영화를 보며 아름다운 미래를 꿈꾼다.
1960년대는 자유당 말기 혼란스러운 상황에 이어 찾아온 군사정권시절로 나라가 몹시 궁핍한 시기였다. 그렇기에 어려운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기 위한 소박한 대안이 바로 극장을 찾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동네에서 텔레비전을 가진 집이 몇 안 될 정도로 텔레비전 수상기의 보급은 미미했고 특별한 취미생활 같은 것도 없던 때라 극장을 찾는 것이 유일한 취미이자 사치였다.
'한국 영화의 황금기'로 일컬어지는 1960년대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엄청난 제작편수를 자랑한다. 1960년대 초반에는 불과 87편 정도 제작되었던 것에 비해 중반에 이르면 100편을 넘어서게 되고 그러다 1969년에는 한국 영화사상 처음으로 200편 선을 돌파한다.
영화진흥공사의 통계자료를 보면 2010년 한 해 동안 제작된 영화 편수가 152편으로 1960년 후반보다 적다. 당시의 열악한 환경과 비전문적 인력이 태반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다. 게다가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메이저 투자사나 영화사가 없었던 시기로 순전히 개인 투자자와 군소 제작자들에 의해 작품이 만들어졌던 시기로 극장에 걸어 보기도 전에 제작 중단되는 사태를 맞는 불운한 영화들의 수도 상당했다. 따라서 그 영화들이 실제 완성됐다고 가정하면 한해 제작 편수가 300편은 족히 됐을 것이다. 이 같은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의 감독과 배우들의 살인적인 스케줄 덕이 크다. 감독은 일년에 3, 4편 연출을 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일례로 김수용 감독은 한 해에 10편의 작품을 연출한 적도 있다고 한다.
배우들의 경우는 더 심했다. 신성일, 최무룡, 박노식,김지미, 엄앵란, 남정임, 윤정희, 문희 등은 일년에 10편 이상은 기본이었고 남정임의 경우 1967년 한해에 27편의 영화에 출연했다는 거짓말 같은 사실도 있다.
1960년대는 신상옥, 유현목, 김기영, 김수용, 김기덕, 이만희, 강대진 등 걸출한 감독들이 대거 활동하던 시기로 본격적인 컬러 영화시대로 접어든 때이기도 하다. 또 1962년 대종상 영화제가 처음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참고로 제1회 대종상 영화제는 신상옥 감독의 '연산군'이 작품상과 남우주연상 외에 여우조연상, 촬영상, 조명상, 녹음상 등 전 부문을 석권했다.
마치 일반 제조공장에서 영화를 찍어내는 듯한 감독과 배우들의 다작이 작품의 질을 훼손했다는 일면도 있지만 그 속에서도 빛나는 작품들도 상당히 많았다. 최근 전도연을 또 다시 칸으로 날아가게 한 임상수 감독의 '하녀(2010년)'는 1960년에 제작된 김기영 감독의 작품을 리메이크 한 영화다. 김기영 감독은 '하녀' 외에 '현해탄은 알고 있다' '고려장' 등을 통해 인간 내면의 잔혹성과 휴머니즘을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인 감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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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 |
또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많이 리메이크 된 영화 중 하나인 이만희 감독의 '만추'(1966년)는 위조 지폐범으로 쫓기는 신세인 남자(신성일 분)와 모범수로 외출을 나온 여자(문정숙 분)의 짧지만 강렬한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2010년 김태용 감독에 의해 재탄생 된 '만추'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다 해병대에 입대한 현빈이 마지막 선택한 영화이자 중국의 여배우 탕웨이와 함께 출연한 것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앞서 1982년 김수용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 된 바도 있다. 김수용 감독의 '만추'는 당시 주인공이었던 김혜자에게 제 2회 마닐라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안겨줬다. 좋은 작품은 세대의 벽을 뛰어넘는 것인가 보다.
또 하나 1960년대 배우들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윤정희, 남정임, 문희로 대표되는 여배우 트로이카다. 물론 그 이전부터 활동하던 김지미, 엄앵란, 최은희 등이 있었지만 이들의 등장은 여배우 기근으로 어려웠던 영화계에 활력소가 되기에 충분했다.
먼저 문희는 KBS 탤랜트 선발을 통해 1965년 '흑맥'으로 데뷔하게 된다. 당대 내로라 하는 감독들과 쉴새없이 작품활동을 하던 중 1971년 결혼과 동시에 은퇴를 발표한 문희는 6년이라는 짧은 배우 생활을 마감했다.
남정임은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 신인여배우 공모에 당선돼 김수영 감독의 '유정'으로 은막에 얼굴을 내밀었다. 대표작 '봄봄'으로 서울에서만 32만 관객을 동원한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스타배우로 우뚝서게 된다. 1966년 한해에 12편의 주연을 맡아 당시 일년에 가장 많은 주연을 맡은 배우로 기록되기도 한 남정임은 '상궁나인', '학사와 기생', '어느 여배우의 고백' 등 300여 편의 작품에 출연한 기록을 남겼다.
세 여배우 중 제일 뒤에 '청춘극장'(1967년)으로 은막에 데뷔한 윤정희는 1966년 1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신인 배우 오디션에 합격하며 충무로에 입성했다. 이듬해 그는 '감자' '무녀도' 등을 통해 명실상부 최고의 여배우로 자리매김하며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게 된다.
1960년대는 관객수도 반세기가 지난 지금 상상 이상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96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전국에 극장이 늘어나면서 관람객 수도 급증, 극장들이 호황을 누렸다. 1960년대 이전에는 극장수가 200개, 연간 관람객 수가 1000만 명에 미치지 못한 것이 후반에 이르면서 600개의 극장에 연간 1억7000만 명의 관객이 찾았다. 이러니 일부 인기 영화의 경우 극장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당시 극장은 지금의 극장과 배급 방식이 달랐다. 지금은 한 편의 영화를 전국의 3400개 극장에서 동시 개봉을 하지만 당시에는 개봉관 하나에서 영화가 상영되는 단일관 시스템이었다.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하자면 당시 극장은 1관, 2관, 3관이라는 등급이 있었다.
오리지널 프린트가 몇 벌 없었기 때문에 전국을 서너 개 지역으로 묶어 그 중 개봉관(1번관)에서 최초로 영화를 상영했다. 제1관에서 상영이 끝나면 조금 더 저렴한 극장(2번관)으로 내려가고 또 그 곳에서 상영이 끝나면 가장 관람료가 저렴한 3번관으로 필름이 내려갔다. 프랑스의 쥬세페 페로나토레 감독의 영화 '시네마 천국'(1988년)에서 필름통을 자전거에 싣고 다른 마을 극장으로 배달가는 장면을 보았다면 당시의 영화 관람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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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청춘 |
한 영화를 단일관에서 상영하는 관계로 영화가 소위 대박나면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 앞에 줄을 선 사람들의 행렬을 몇 날 며칠씩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맨발의 청춘'은 엄앵란 신성일이 출연한 멜로 영화로 당시 30만 명이라는 경이적인 스코어를 기록한 작품이었다. "극장 앞에 줄을 늘어선 사람들의 행렬이 40일 가까이 이어졌다"고 연출자인 김기덕 감독은 당시를 회상했다.
덧붙여 그는 "그렇게 매진이 된 날에는 매번 해당 영화의 스태프들에게 극장 측에서'매진사례'라고 쓰여진 작은 봉투에 한끼 밥값 정도를 넣어서 주었다"고 일화를 들려줬다. 돈의 액수를 떠나 당시의 인심과 영화계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미담이다.
1960년대 A급 감독의 연출료는 150만 원 정도로 당시 서울에 집 한채를 살 수 있는 정도의 금액이었다. 그러나 다른 스태프들을 챙기고 작품 활동을 하는 동안 여기저기 진 빚을 갚고 나면 별로 남는 게 없었다고 하니 당시 영화인들도 지금의 영화인들의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한국 영화사에 반짝반짝 빛나는 황금 같은 기억과 작품을 남겨준 1960대 우리 영화인들의 희생과 노력을 기억하며 옛날 낡은 영화를 들쳐보는 여유를 가지는 것도 저무는 가을에 좋은 시간여행이지 싶다.
기사출처;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