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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편에서 계속>
국군의 자부심 그렇게 침략자는 춘천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였다. 5대 1이상의 압도적인 전력을 동원하고도 작전을 실패한 치욕적인 결과에 대하여 김일성이 2군단장 김광협을 비롯한 예하 사단장들을 개전 일주일도 되지 않아 경질하여 버리는 초강경 문책 인사를 단행하였을 만큼 분노하였다. 그것은 그만큼 개전 초기에 2군단의 역할에 대해서 기대했던 것이 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아군이 낙동강까지 후퇴하였을 때 편제를 유지한 부대가 제1, 6, 8사단과 (급편)수도사단이었는데, 춘천대첩으로 인하여 1, 수도사단이 포위당하지 않고 후퇴할 수 있었고, 퇴로가 차단되었던 8사단이 태백산맥을 넘어와 전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결국 6사단의 분전은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이후 충주축선을 따라 일사불란하게 후퇴를 한 6사단은 충주, 수안보, 음성 등에서 수시로 반격을 가하여 북한군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음성 전투 승전 기념 충혼탑. 대승을 거둔 6사단 예하 7연대는 전 장병이 일계급 특진하였다. /국가보훈처 제공](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age.chosun.com%2Fsitedata%2Fimage%2F201510%2F25%2F2015102500707_0.jpg)
- 음성 전투 승전 기념 충혼탑. 대승을 거둔 6사단 예하 7연대는 전 장병이 일계급 특진하였다. /국가보훈처 제공
특히 음성에서 북한군 15사단을 기습하여 2,186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어 전선 중앙을 순식간에 공백 상태로 만들기도 했다. 한마디로 김종오의 6사단은 후퇴는 있어도 패배를 모르는 국군의 자부심이었다. 신임 북한군 2군단장 김무정(金武亭)이 "6사단을 박살내어야 한다. 남조선 사단은 그것 하나다. 그것만 잡아 족치면 우린 중부 이남을 확 쓸어버릴 수 있다. 밀어 족쳐서 6사단을 격멸하고 사단장을 포로로 잡아 오라"고 하였을 정도였다.
그리고 낙동강에 최후의 방어선이 구축되었을 무렵 6사단은 신령을 중심으로 하는 돌출부를 담당하였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북한군은 청성부대를 넘을 수는 없었다. 음성에서 굴욕을 겪으며 이를 갈던 북한군 15사단은 물론 함께 협공에 나섰던 북한군 8사단은 6사단의 강력한 방어망에 걸려 신령에서 하염없이 녹아내렸고 그렇게 1950년의 뜨거웠던 여름은 지나갔다.
![준장으로 진급하여 낙동강 방어전을 이끌던 1950년 7월 당시의 김종오. /백마고지 전투 기념관 제공](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age.chosun.com%2Fsitedata%2Fimage%2F201510%2F25%2F2015102500707_1.jpg)
- 준장으로 진급하여 낙동강 방어전을 이끌던 1950년 7월 당시의 김종오. /백마고지 전투 기념관 제공
1950년 9월 15일, 6·25전쟁의 향배를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 인천에서 벌어졌다. 피로써 낙동강을 막아내던 위기의 순간에 적의 뒤통수를 강타하여 순식간 전세를 역전시켜 버린 거대한 작전이 성공한 것이었다. 바로 인천상륙작전이었는데, 이와 동시에 낙동강가에서 분전하던 방어부대도 진지를 박차고 나와 반격을 개시하였다. 김종오가 지휘하는 6사단도 앞으로 나가기 시작하였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