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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지맥 1구간
2011.12.25 (일)
산길 : 진도대교~챙재
거리 : 8.9km
구간거리
진도대교~0.3~망금산~2.5~도암산(-1.2)~1.4~금골산~2.3~고두산(-1.4)~2.4~챙재 / 8.9km
Cartographic Length 10.8km Total Time: 04:30
거제지맥이나 남해지맥과 같이 지맥의 개념으로 봤을 때, 진도지맥은 진도대교에서 시작하게 된다. 이는 모든 산은 백두산으로 통한다는 산경표의 개념으로, 백두대간-호남정맥-땅끝기맥-화원지맥으로 이어오고, 그 맥이 명량해협을 통해 진도로 이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지맥 이름 대신 ‘진도산줄기’라 한다면 섬 안에 있는 이름있는 봉우리를 모두 연결하고 또 가장 길게 이어 볼 수도 있겠지만 ‘지맥’이라는 명칭을 붙일 바에야 산경표의 원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순전히 내 개인적인 관점일 뿐이고 다른 이들의 관점에 내 생각을 보탤 생각은 전혀 없다.
이러한 논리로 진도대교에서 시작을 해서 남서쪽 백미도를 마주보는 끝단에서 마감을 한다. 희여산에서 북서쪽 지력산으로 더 길게 이을 수도 있겠지만 바다로 향하는 방향으로 주된 산줄기를 삼았다.
강원도의 심설을 피해서 남쪽으로 향한 것이 섬 지맥을 찾은 이유이기도 하다. 전체 47km를 당일산행 네 번으로 나누면 될 듯도 하나 막상 1차를 하고 보니 다섯 번이 될는지 그 이상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남도 산의 특성이 그대로 나타난다. 청미래덩굴(명감, 망개)이 주종을 이루며 그 사돈에 팔촌까지 친인척뻘 되는 가시를 달고 있는 덩굴줄기는 다 모인거 같다.
강원도 지맥팀 십여명 타고 다니던 25인승이 대형버스로 바뀌었다. 진도라는 이름에 따라나선 사람이 또 십여명이다. 덕분에 28인승으로 개조한 큰 버스에 두 다리 쫙 뻗고 누워서 간다. 앞서 승차한 희중아우가 맨 뒷자리를 잡아놔서 앉아보니 의자도 크고 한 단 높아 버스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멋진 조망대다. 장거리 전문인지 담요도 제공이 된다.
머리털 나고 가본 적이 없는 동네니 만치 시간도 많이 걸린다. 부산출발 4시간 반이라. 순천부터는 국도라서 그런가본데 여기도 고속도로가 계획되어 있단다. 오십 +반십년을 살면서 처음 와보는 동네이니 또 언제 다시 오겠나. 구석구석 세세히 살펴보고 가야겠다.
진도대교와 울돌목
10:50 진도대교
11:06 망금산
11:18 18번국도 (공사중)
12:03 송전철탑
12:15 140봉(암봉)
12:35 금골산(金骨山 ×198m)
13:10 해언사
13:30 18번국도 굴다리
14:09 ×237m
14:46 ×222
15:20 챙재
진도대교
우리나라 최초의 사장교(斜張橋)라는데, 울돌목은 11노트(초속 6m)의 빠른 조수가 흐르기 때문에 물속에 교각을 세우기 힘들어 해안 양쪽에 높이 69m의 강철교탑(鋼鐵橋塔)을 세우고 강철케이블로 다리를 묶어 지탱하는 방식의 다리를 말한다. 1984년에 2차선으로 개통이 되었다가 교통량의 증가로 2005년에 2차선 다리를 하나 덧대어 현재는 2차선(도로) 다리 두 개가 나란히 붙은 쌍둥이 다리 형태다. 왼쪽(서)이 헌 다리이고 오른쪽(동)이 새 다리다.
버스는 다리를 건너 우로 90도 꺾이는 지점에 섰다. 진도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진도 주동맥인 18번국도로 현재는 진도 동부 해안을 따라 연결이 되어 있지만 4차선으로 새로 뚫고 있는 국도는 진도 한가운데를 가로지른다. 망금산 우측으로 곧게 뻗는 도로 기초공사는 거의 다 된듯하다.
지맥 마루금은 망금산에 오르자 말자 되돌아 내려와야 하지만 어찌 첫 봉우리부터 빼먹겠노. 또 저 봉우리에 올라야 울돌목과 진도대교를 제대로 볼 수 있을거 같다.
전남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길가에 수준점이 있다. 해발고도 14m. [울돌목 시험 조류발전소 1km]를 가리키는 방향으로 휴게소 같은 넓은 마당은 녹진관광단지다. 관광안내소와 식당이 있고 진도대교준공기념탑이 있는데 현재 확장중이다. ‘호국무공수훈자공적비’ 뒤로 올라간다.
관광단지 조성공사중이라 그런지 나무는 전부 벌목이 되었으나 바짝마른 가시줄기는 거세다. 조감도를 보면 조성이 완료되면 아래쪽 주차장에서 망금산 전망대까지 길이 열리겠다. 길이 없는 비탈에 눈이 살짝 덮혀있고 가시줄기를 이리저리 타넘느라 성가시지만 돌아보는 울돌목 조망이 더 크게 열린다. 울돌목하면 명량해전에, 이순신장군을 떠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울돌목
바다가 운다고 명량(鳴梁)이고, 돌이 운다고 울돌목이라. 해남군 우수영과 진도군 녹진 사이를 잇는 가장 협소한 해협으로 넓이가 325m,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이 20m, 유속이 11.5노트에 달해 굴곡이 심한 암초사이를 소용돌이치는 급류가 흐른다. 이러한 빠른 물길이 암초에 부딪쳐 튕겨져 나오는 소리가 20리 밖까지도 들린다고 한다. 뻥이 좀 들어간거 같지만 실제로 에전에는 그랬는데 대교 다리를 놓으면서 해저 바닥의 돌을 쇠그물망에 담아 석축공사를 하고 난 후로는 소리가 크게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명량대첩
원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정유년(1597년) 7월에 거제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 수군에 패하여 거의 괴멸됨으로써 서해안으로 일본 수군의 노도와 같은 진격이 시작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조선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직면함. 백의종군 중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은 장흥땅 회령포에서 패잔 전선 12척을 수습하여 후퇴하면서, 한편으로 명량에서 일본 수군과 결전을 모색함.
1597년 9월 16일 이순신이 거느리는 조선수군 13척은 울돌목에서 일본 수군 133척과 접전을 벌여 그 중 31척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둠.
명량대첩은 조선 수군이 칠천량 해전 이후 수륙병진 전략으로 호남을 석권하고 한성으로 진격하려는 일본군의 의도를 좌절시킴으로써 정유재란의 흐름을 뒤바꾸었는데, 명량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막지 못했다면 일본 수군은 서해안을 무인지경으로 거슬러 올라가 한강과 대동강, 압록강까지 도달하게 되어 명의 지원을 단절시키고 조선을 점령할 수 있는 상황에 이를 수 있었기 때문에 명량해전 승리는 정유재란의 전환점을 마련함.
이순신이 불과 13척으로 133척이나 되는 일본의 함대를 격멸한 것은 그의 뛰어난 전쟁 지휘 통솔력을 보여주는 것이며 세계 해전사에서도 전무후무한 사례이며 의로운 전라도민들의 구국정신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됨
망금산 (望金山 △112m)
정상부는 하얀 눈이 덮혀 있지만 바닥을 보면 다 깎아낸 상태다. 종전에는 2층으로 된 팔각정이 있는 그림을 봤었는데 흔적도 없고 화원314 삼각점도 어디로 파 묻혔는지 보이지 않는다. 바로 아래 ‘이순신 명량대첩 승전광장 조성공사’ 간판 내용을 보면 지하1층 지상 7층의 전망대를 겸비한 관광휴게시설을 조성한다는데 그림을 보니 그야말로 비까번쩍한 현대식 건물이 들어설 모양이다.
조망은 사방팔방 막힘이 없다. 진도대교 너머로 화원지맥의 산줄기가 나지막히 흘러가고 그 왼쪽으로 군내면 나리쪽으로 가는 산줄기가 언뜻 지맥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 왼쪽에 저 혼자 볼록 솟은 암봉은 도암산(×122)인데 덩치는 콩만 해도 빼어난 자태가 어느 유명산 못지않아 보인다. 진행중에도 계속 시야에 들어오면서 눈길을 끈다.
아래에 보이는 도로에 내려서고 길 따라 내려가니 진도대교가 바로 우측에 있다. 그냥 바로 질러 왔으면 2분 거리밖에 안되는데 망금산 올랐다 내려오니 20분이다.
망금산은 수리중...
망금산에 새로 설치될 조망대
신설 공사중인 18번국도
넓이가 왕복 4차선은 될 듯 한데 아직은 터만 닦은 비포장 흙길이지만 언 상태라 질퍽거리지는 않는다. 도로 양쪽은 넓은 밭인데 대파와 배추가 심어져 있고 배추는 하얀 눈을 덮어쓴 채다. 진도 배추는 눈에 묻혀도 얼지 않는다던가.
쪼개진 ×48봉
지형도의 ×48봉을 둘로 쪼개놓고 한가운데로 도로가 관통한다. 비행장 활주로 같이 넓은 광장을 지나 서쪽 도암산(대사마을)에서 나오는 교차로를 지나고 비로소 산길로 붙는다. 20분간 도로를 따라왔다.
봉우리쪽으로 올라서자말자 빡빡한 덤불이 길을 막는다. 왼쪽으로 휘돌아 겨우 벌어진 틈새로 들어간다만 길 흔적은 없다. 나뭇가지마다 하얀 눈이 솜뭉치처럼 달려있고, 키 큰 나무 잘못 건드리면 눈이 우수수 쏟아진다. 그리고 보니 오늘이 크리스마스인가. 올해 화이트 크리스마스 제대로 맞는구만.
가시밭길 험난해도...♪ 당신만을 따르겠어요~ ♬
도암산 갈림
잔솔가지 헤치며 나아가니 그물망이 앞을 막는다. 안쪽은 밭이다. 여기서 우측으로 가면 여지껏 서쪽에 눈길을 끌던 도암산(×122)으로 가게 되고 지맥은 왼쪽이다. 그물망 바깥 왼쪽으로 돌아가면 밭 진입로인지 수렛길이 나온다. 이어지는 수렛길은 송전철탑까지 올라가는데 한전에서 낸 길인가보다.
송전철탑
송전철탑 아래를 지나면서 서쪽으로 보이는 도암산이 한 장의 그림이다. 봉우리 전체가 하나의 바윗덩어리로 보이고 아래로 넓은 대야지(저수지)와 어우러져 배산임수(背山臨水)라는 단어가 딱 들어맞는다.
도암산
금골산
금골산에서 내려가는 마루금
아래 해언사, 금성초등학교 운동장
금골산 정상
금골산(金骨山 ×198m)
정상부에 이르러서야 조은 길이 나온다. 금골산 등산로는 남쪽으로 나있고 뒤(북)로는 우리같은 지맥꾼만 다니는 길인 모양이다. 눈이 깔려 있지만 바위에 파이프를 박아 안전난간을 설치해 어려움없이 올라선다. 올라서는 입구에 우측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데, 정상에 올랐다가 이 길로 내려가게 된다.
겨우 두어평 되는 넓지 않은 정상부에 체육시설 몇 개 있고 바로 아래 절벽으로 난간이 설치되어 내려가는 길이 있는데 이 길은 마애불상 가는 길이고 더 이상 내려가는 길이 없어 도로 올라와야 된다.
동쪽으로 나가면 조금 더 높아 보이는 암봉이다. 소나무에 [금골산198m] 팻말이 걸려있는데 준희님 작품 같은데 여영님 명의다. 더 동쪽으로는 벼랑이라 나갈 수 없어 되돌아가니 모두들 점심상을 펴고 있다. 빼어난 봉우리 만큼이나 조망도 빼어나다. 흰 눈이 덮힌 둔전, 덕병 벌판이 끝없이 펼쳐지고 멀리 첨찰산도 뚜렷하다. 첨찰산은 직선거리로 8km 정도라.
첨찰산
진도의 금수강산’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한다. 금골산은 뒤쪽에서 보면 평범한 산이나 정면과 옆면에서 바라보면, 보는 위치에 따라 여러 가지 모양이 나타난다. 사람의 얼굴 모습, 커다란 짐승을 연상시키는 모양 등 다양하다. 금골산 정면에는 크고 작은 석굴(타포니)들을 비롯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구멍들이, 그것도 각각 모양과 크기가 다르게 뚫어져 있다. 특히 산 정상 부근과 중간 부근에 파여 있는 커다란 석굴 3개는 산의 신비감을 더해준다. 그 가운데 산 정상 부근 석굴에는 좌우 3.5m 크기의 금골산 마애여래좌상(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10호)이 있다. 이 좌상은 1470년경 새겨진 것으로 보인다.
바위벽에 새겨진 마애여래불의 배꼽부위에 있는 구멍에서 쌀이 나왔는데 욕심을 부려 구멍을 더 넓게 뚫으니 더 이상 쌀이 나오지 않더라는 가지산 쌀바위 전설과 이하동문이다.
올라온 입구로 나가 우측으로 휘돌아 내려간다. 마루금에서 벗어난다만 정면은 오금 저리는 천길벼랑이다. 아래 금골산 주차장에서 올라오는 일반등산로를 따라 내려가면 도중에 [마애여래좌상] 이정표가 있는데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에 헛갈려 그냥 내려왔는데, 평소 관념대로 이정표의 끝부분이 가리키는 방향이 아니라 들어가는 길목을 표시한 이정표다. 즉, 이정표 뒤 희미한 길로 들어가면 된다는 말씀인데, 안 가봐서 모르겠다.
해언사
해언사 (海堰寺)
바다 해(海)에 방죽 언(堰), 해언사다.
예전에는 금골사였다가 현재의 주지스님이 옛 이름을 되찾는 차원에서 해언사로 바꿨단다. 그래서 현 지형도에는 금골사로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관련자료를 보면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옛 해언사(海堰寺) (또는 해안사(海岸寺)·해월사(海月寺))는 바로 아래 있는 현재의 금성초등학교 자리다. 학교 교정에 금골산5층석탑(보물제529호)이 있는데, 주지스님 끗발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다만 학교로 변한 예전의 해원사지(海院寺址)까지 되찾을 수 있을까?
불이문을 지나 내려오면 절 입구 갈림길이고, 여기서 지맥 마루금은 우측 능선으로 붙어야 되는데, 꼴을 보아하니 양반이 댕길만한 길은 아닌거 같아 (사실은 마을길을 따라가면 그리 멀지않게, 또는 더 빠를거 같다) 외면하고 금골마을로 내려간다. 새파란 잎이 무성한 유자밭 아래 등산안내도와 화장실이 있는 넓은 주차장이다. 금성초등학교의 오층석탑이 보인다.
우측으로 이동통신탑이 보이는 ×63봉 능선은 눈짓으로 훑으며 벽진이공 둘이는 양반행세를 하며 대로를 따른다. 용감무쌍한 선두그룹은 이미 능선으로 붙었고, 후미 그룹은 영문도 모른채 우리 뒤를 따라온다. 2차선 도로가 있는 연산삼거리에 있는 아주 오래된 점빵(구멍가게)에서 젊은 총각 하나가 소주를 사들고 품에 감추며 나온다. 대낮부터 술을 마실 아픈 사연이 있는가 모르겠다.
배추
길 옆 닭장같은 울타리 안에 개들이 요란스럽다. 들은 바로 진도에는 진돗개 밖에 없고 볼품없거나 잡종개는 섬 밖으로 퇴출시킨다고 했는데, 여기 닭장 안에서 무질서하게 짖어대는 개들은 아무리 봐도 순종으로 보이지 않는다.
새로 난 18번국도 아래로 뚫린 굴다리를 지난다. 위로 보이는 도로 이정표는 [진도터널 500m]인데, 진도터널 위 능선은 지맥이 아니고 도로 건너편 능선이 지맥이다. 굴다리를 통과하면 6.25참전 위령비가 있고, 왼쪽은 둔전마을이고 오른쪽이 간재로 가는 임도다. 간재까지 오르려다가 질러가는 묫길을 보고 묘터로 올라간다.
묘터에서 돌아보는 금골산이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덩치만 작았지 진도의 금강산이라 할만큼 빼어난 자태다. 배낭 내리고 한참을 기다리니 해언사에서 능선따라 갔던 용감무쌍 선두조가 올라온다. 그들이 걸린 시간이나 찢어진 자켓이 능선길의 상태를 말해준다.
이 비탈에 묘가 많이 모여있다. 십자가 그려진 비석도 있고 거의 공동묘지 수준이다. 묘 상단에서 간재로 오르던 임도에서 올라 온 마루금을 만난다. 벌목으로 덤성덤성한 숲길이지만 가시줄기는 여전하다. 15분 오르면 간재 거쳐 고두산(△252.2)으로 가는 능선이 분기하고, 왼쪽으로 꺾어 더 오르면 설매봉이다.
설매봉
×237m
5만지도에 ‘설매봉’으로 표기되어 있는 봉이나 잡목만 무질서할 뿐 볼게없다. 준희님표 하얀 팻말에 [×237m 황소]라 적혀있어 심총이 이를 보더니 “황소가 누고?” 한다.
“암소 남편 아이가?”
아마도 내 생각에 준희님과 함께 진행한 춘천의 김우항님을 말하지 싶다. 그 어르신들 끼리 정병훈님은 '남해 곰'으로 불리고, 김우항님은 그 덩치에서 황소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박성태님과 여영님 별명은 뭘까...?
조금 나가면 바위가 있고 먼데까지 조망이 트인다. 진도읍에 있는 철마산(×304)과 그 옆에 방송 시설물이 있는 봉우리는 북산(×360)이다.
×237봉 다음 봉이 더 높다. 지도를 봐도 10m 등고선이 한 줄 더 있는데 표고표시는 없다. 245쯤 되는 봉을 내려서니 무덤 하나가 잡목에 파묻혀 있다. 앞쪽에 선 비석이 아니면 묘인지도 모를 지경인데 비석의 글씨체가 특이하다. 둥글둥글한 상형문자 형태인데 가만히 살펴보니 현풍곽공(玄風郭公)이라.
현풍곽공 & 창녕조씨
첨찰산
갈수록 덤불의 저항이 심하고 줄기마다 가시를 달고 있다. 밟은 흔적이 있다싶어 따라가면 금방 없어지고, 저긴가 싶어 가보면 아니고, 이런지경 이다보니 한 줄로 따라가는 산행이 아니라 각자 나름대로 덤불이 성긴데를 찾아 나가면서도 서로 상대방쪽을 향해 길이 있냐고 묻는다.
마주보이는 222봉은 숲이 없어 좀 나으려나 싶었는데, 안부를 지나 막상 붙고보니 나무만 없지 줄기의 세력은 조금도 수그러듦이 없다. 가시줄기 밀어내며 자빠진 나무둥치까지 피하고 타넘으려니 뻔한 비탈인데도 여간 고역이 아니다.
고난의 길
×222봉 역시 잡목만 듬성듬성한 볼 일없는 봉우리에 준희님의 팻말만 걸려있다. 몇발 나가니 빽빽한 억새밭인데 어디가 길인지, 길이 있기나 한지 도무지 갈피를 못잡고 우왕좌왕 내려간다.
×222봉에서 15분 가량 내려서고 잠시 평탄하다가 다시 내려가면서 희미한 흔적있는 길을 따르다보니 방향이 송산마을쪽이다.
덤불과의 전쟁
챙재 직전 끝능선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 급히 왼쪽으로 방향을 고쳐 잡았으나 길이 없다. 그래도 챙재가 코앞이라 마구잡이로 뚫으며 내려간다. 키 작은 편백나무 숲을 뚫고 나오니 희미한 길이 나타나고 현풍곽공 묘터로 나갔다. 아래로는 묫길인지 수렛길 정도로 나있어 바른 자세로 걸어 내려갈 수 있다.
챙재
크리스마스날 공 치는 진도전원교회
수돗물 좀 틀었다고 깨갱대니... 손님이 오겄나.
챙재 (56m)
주유소 옆 식당같은 건물은 ‘진도전원교회’인데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전혀없는 적막한 교회다. 선두조는 수돗물 호스에 대고 신발을 씻고, 배낭 내리고 퍼질러 앉는 폼이 파장 분위기다. 오막재까지 가기로 한 계획은 이심전심으로 자연스레 물 건너 간다.
2차선도로가 지나는 챙재에는 송산버스정류장이 있고, 주유소 뒤로 [벽파항5km 용장산성2.3km] 이정표가 보인다.
‘챙재’의 유래는 찾지 못하고, 남쪽 아랫마을이 ‘오일시’로 마을이름 특이하다.
1437년(세종19)에 왜적의 침입을 피하여 남해현으로 옮겼던 진도 고을을 이곳으로 옮기고 새성(新城)이라 하였다. 그 뒤 ‘무냄기’, ‘무넘기’, ‘무내기’로 변천되어오다가 오일시장이 열리면서 무내미는 사라지고 ‘닷새장터’로 불리다가 ‘오일시리’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러니까 왜적의 침입 때 남해로 피난 갔다가 다시 들어오면서 이 마을에다 읍성을 새로 설치했다. 옛 진도읍성이 있었다고 古城里가 되었고, 고성리에 속한 부락으로 ‘오일시’라... 새 도로가 뚫리기전의 챙재는 진도읍으로 들어가는 길목으로서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하면서 자연스레 시장이 섰고, 한 때는 꽤나 번성했으나 진도읍으로 곧장 들어가는 신작로가 뚫리면서 변두리 마을로 쇠락하게 된 것 이었던 것이니...
10.8km에 네시간 반...
허벌라게 맛있어라~
진도홍주 '아라리' 1병 6,000원
홍주 (紅酒)
세조 때 경상도 절도사 허종(許綜)의 부인이 홍주를 만드는 비결을 알고 있어 후손에게 전했다는데, 허종은 이 술을 마시고 취해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윤비 폐출을 위한 어전회의에 참석치 못해 연산군의 갑자사화(甲子士禍)때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이후 허종의 후손이 소줏고리를 갖고 진도로 낙향하여 진도 홍주를 만들었다.
소주를 내릴 때 지초(芝草)를 통과한다 하여 ‘지초주’라고도 하고, 그 색이 홍옥과 같이 붉다하여 홍주라고도 한다. 소주 특유의 은은한 향기가 나며 알콜 농도는 45~48도 정도된다.
달마대사의 환생인가~?
허달마님.
벌교 꼬막무침
보성으로 넘어 오다가 벌교역 앞에 잠깐 멈추더니, 심총이 꼬막 무침을 한통 들고 온다
미리 전화로 주문해 놓고 바로 받아 오는 것이다
사람이 많으니 다양한 메뉴에, 얘깃거리 또한 풍성하다
조은블로그 : http://blog.paran.com/hanse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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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 많았습니다.
벌교 꼬막 또 먹고 싶네요
잘 보고 감미다...
세세한 설명이 깃들인 진도 산행기~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