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요약)
(진성여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51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887~897년이다. 즉위 초에는 조세를 면제하고 황룡사에 백좌강경을 설치하는 등 민심수습에 노력했다. 그러나 숙부이자 남편이던 상대등 위홍이 죽자 정치기강이 갑자기 문란해졌고 사방에서 도적이 봉기했다. 원종과 애노의 난도 평정하지 못했고 북원의 양길은 궁예를 시켜 명주를 함락시켰으며, 완산주에서는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했다. 894년 당에서 돌아온 최치원이 시무10조를 올렸지만 시행되지 못했다. 897년 헌강왕의 아들 요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 해에 죽었다.)
신라에는 선덕(善德)·진덕(眞德)·진성(眞聖)의 세 여왕이 있었다. 그중에서 진성여왕만 역사적으로 홀대를 받고 있다. 우리나라 고대 역사서를 대표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이 모두 진성여왕을 음녀(淫女)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성왕조 2년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소량리(小梁里 혹은 沙梁里)의 돌이 저절로 움직였다. 왕이 전부터 각간(角干) 위홍(魏弘)과 좋아지내더니, 이때에 이르러 항상 입내(入內)하여 용사(用事)케 하고 이내 그에게 명하여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鄕歌)를 수집하도록 시켜 《삼대목(三代目)》이라 이름하였다. 위홍이 죽으니 그를 추시(追諡)하여 혜성대왕(惠成大王)이라 하였다. 왕은 이후로 비밀히 2, 3명의 소년 미장부(美丈夫)를 불러 음란(淫亂)을 하고 이내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국정을 맡기기까지 하였다.〉
또한 《삼국유사》 기이편 ‘진성여대왕 거타지’ 기록에는 처음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소개된다.
〈제51대 진성여왕이 임금이 된 지 몇 해 만에, 유모 부호부인(鳧好夫人)과 그의 남편 위홍(魏弘) 잡간(迊干) 등 서너 명의 총신이 권력을 마음대로 하여, 정사(政事)를 문란하게 하니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나라 사람이 이를 근심하여 다라니(陀羅尼)의 은어(隱語)를 지어 써서 길에 던졌다. 왕과 권신들이 이를 얻어 보고 말했다. “이것은 왕거인(王居仁)이 아니면 누가 지었겠느냐?” 이에 거인을 옥에 가두었다. 거인은 시를 지어 하늘에 호소하니, 하늘이 그 옥에 벼락을 쳐서 그를 놓아주었다.〉
이처럼 두 기록 모두 대놓고 진성여왕을 ‘음란한 여인’으로 몰아가고 있는 형국이다. ‘다라니의 은어’란 진성여왕을 ‘음란한 여인’으로 비방하는 전단 같은 것임이 분명하다. 아무튼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이고,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금욕(禁慾)을 불도(佛道)의 기본 도리로 알고 있는 승려라는 점에서 글을 쓸 때의 내면심리를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당시 신라 사회, 특히 왕실의 골품제를 이해한다면 진성여왕을 ‘음란한 여인’으로 몰아세우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골상이 장부와 같으니…”
진성여왕이 신라 세 번째 여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윗대인 제50대 정강왕(定康王)이 즉위한 지 2년 만에 병으로 죽게 되었을 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왕이 질병에 걸려 시중(侍中) 준흥(俊興)에게 말하기를, “내 병이 위급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불행히 사자(嗣子)가 없으나 나의 누이 만(曼)은 천자(天資)가 명예(明銳·명민)하고 골상이 장부(丈夫)와 같으니 경(卿) 등은 옛날 선덕(善德)·진덕(眞德)의 고사를 의방(依倣)하여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기록에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정강왕에게는 후사(後嗣)가 없었다. 신라 제48대 경문왕은 태자 정(晸)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헌강왕이 되었고, 헌강왕은 후사가 없어 동생 황(晃)이 그 뒤를 이어 정강왕이 된 것이다. 정강왕 역시 누이 만에게 왕위를 이어주었으니, 경문왕의 두 아들과 딸이 모두 대(代)를 이어 왕이 되었던 것이다.
정강왕의 유언처럼 진성여왕은 하늘이 내린 자질을 갖고 태어나 총명하고 사내 대장부처럼 기골이 장대했던 모양이다. 대체로 왕의 시호(諡號)는 죽은 다음에, 그 왕이 재위 시절 펼친 정사의 공력을 높이 기려 결정한다. ‘진성(眞聖)’이란 시호 역시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김부식이나 일연이 기록한 것처럼 ‘음란한 여인’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선덕과 진덕처럼 성군 느낌이 드는 시호라고 생각된다. ‘성(聖)’ 자는 아무 군주에게나 붙여주는 시호가 아니다. 만약 당시 진성여왕 덕에 부귀와 권세를 누린 신하들이 그와 같은 시호를 지어 올렸다 하더라도, 그 이후 여전히 왕의 흠결이 문제시될 경우 정쟁(政爭) 도구로 대신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진성여왕 사후(死後) 역사 기록에서 그러한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진성여왕은 음란한 여인이었나?"
그런데 어찌하여 진성여왕은 신라시대를 대표하는 ‘음란한 여인’의 표상처럼 되어버린 것인지 모를 일이다. 진성여왕과 궁궐에서 자주 성적(性的) 관계를 가졌다고 알려진 각간 위홍은,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에 보면 당시 구층목탑 중수 책임자며 경문왕의 친동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문왕이 진성여왕의 친부(親父)이므로, 위홍은 숙부가 되는 셈이다.
진성여왕과 위홍이 질녀와 숙부 사이로 근친상간(近親相姦)을 했다는 이유로 두 사람은 역사적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것이다. 당시 골품제를 중요시한 왕실에서 조카딸과 삼촌 사이의 성적 관계는 크게 흠이 될 일이 아니었다.
위홍 이외에도 진성여왕은 2, 3명의 소년 미장부를 곁에 두었다고 하는데, 이 또한 당시 신라 왕실에선 관례처럼 행해지던 일이었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보면 선덕여왕이 ‘삼서지제(三壻之制)’의 관례에 따라 용춘(龍春)·흠반(欽飯)·을제(乙祭) 세 남자와 관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삼서지제란 후사가 없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세 명의 남편을 둘 수 있는 제도를 말한다. 용춘은 진지왕(眞智王)의 아들이며 태종 무열왕의 친부로, 선덕여왕의 숙부이기도 하다. 이러한 당시 신라 사회의 관행으로 볼 때 진성여왕은 결코 ‘음란한 여자’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선덕여왕과 진성여왕의 역사적 해석은 천양지차로 달리 표현되고 있다.
"나라 위기 극복하려 최치원 등용"
진성여왕이 ‘음란한 여인’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것은 당시 시대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는 신라가 망국의 길로 들어선 것을 진성여왕 시대부터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때는 도처에서 도적 떼가 일어나고 무장 세력들이 무리 지어 각 지역을 점거하여 이른바 ‘후삼국(後三國)’의 시초가 되는 반란을 일으키던 시기였다.
진성여왕 재위 5년에는 북원(北原·지금의 원주)에서 양길(梁吉)이 반란군을 결집해 일어났고, 휘하 부장(部將) 궁예(弓裔)로 하여금 명주(溟州·지금의 강릉) 관할 내의 10여 군현(郡縣)을 급습하게 하였다. 이듬해인 재위 6년에는 완산(完山·지금의 전주)에서 견훤(甄萱)이 ‘후백제(後百濟)’를 지칭하고 반기를 들어 무장 세력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이때 당대 최고 학자인 문신 최치원(崔致遠)은 나라를 크게 걱정하여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써서 진성여왕에게 진언하였다. 그러자 여왕은 이를 받아들여 그에게 아찬(阿飡)의 벼슬을 하사하고, 그의 지혜를 정사에 반영코자 하였다. 아찬은 육두품(六頭品)인 최치원에게 내릴 수 있는 최고 관직이었다. 신라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자기 잇속만 챙기는 지방호족들의 득세로 인해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도둑이나 산적이 되는 등 혼란이 더욱 가중되자, 최치원은 진성여왕과 함께 나라를 바로잡는 개혁정치를 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신라는 이미 국력이 크게 약화되어 되돌릴 수 없는 길로 들어선 뒤였다. 결국 진성여왕은 헌강왕의 서자(庶子) 요(嶢)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전하지는 않지만, 각간 위홍과 대구화상으로 하여금 향가를 수집하여 《삼대목》을 편찬케 한 일이나, 최치원의 ‘시무십여조’를 받아들여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보려고 노력한 점 등은 진성여왕을 후대의 역사가들이 논한 것처럼 ‘음란한 여인’으로 폄하할 수만은 없는 대목이다. 최치원도 진성여왕이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진성여왕을 도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자 힘썼으나, 중앙 귀족들의 반발로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진성여왕이 세상을 떠나고 그 뒤를 이어 효공왕(孝恭王)이 제52대 왕위에 오르자, 최치원은 관직을 떠나 각지를 유랑하다 가야산 해인사에 이르러 머물며 학문 도야에 힘썼다.
"최치원이 본 진성여왕"
진성여왕과 함께 개혁정치를 펴려고 했던 최치원은 ‘사사위표(謝嗣位表)’라는 글에서 진성여왕에 대해 ‘사심이 없고, 욕심이 적으며, 다병(多病)한 몸으로 한가함을 사랑하고, 말해야 할 때를 기다렸다 말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성여왕에 대한 극찬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진성여왕 당대에 세워진 성주사의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문’을 통하여 ‘은혜가 바다와 같이 넘쳤다’고 하였다. 최치원은 진성여왕의 인품을 ‘바다’로 표현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처럼 신라 당대의 최고 학자이자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진성여왕을 매우 긍정적으로 표현한 것을 보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는 ‘음란한 여인’의 기록은 신라 당대의 풍속을 모르고 저자가 임의적으로 해석해 문장화했을 수 있다. 진성여왕의 ‘진성(眞聖)’이란 시호가 그냥 부르기 좋아 붙여진 것만은 아닐 것이다.
[해인사의 쌍둥이 비로자나불. 서기 883년 조성된 국내 최고(最古) 목불(木佛)이다. 이 두 불상의 규모가 똑같다는 사실은 최근 실측 결과 밝혀지게 됐고, 처음부터 쌍둥이 불상으로 만들졌다는 사실이 확인됐다<조선일보 2005년 7월 11일자 A2면 보도>.불상 안에서는 "대각간과 두 부인의 등신불을 만들었다"는 글자도 발견됐다. 이 때문에 이 쌍둥이 불상이 각간 위홍과 그 정부(情婦)인 진성여왕을 형상화한 것일 수 있다는 얘기가 한때 나오기도 했다. 해인사는 진성여왕이 왕위에서 물러난 뒤 거처했다는 북궁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다/해인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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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숙제주셔서요..
감사합니다 !!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별빛님
쉽게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
저도 많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