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미 새
윤 종 희
토끼 같은 새하얀 앞니 두 개를 내놓고 까르륵 까르륵이다. 여린 잇몸을 뚫고 솟아 나온 앞니는 개선장군이라도 된 양 우리를 환호케 했다.
녀석은 이미 우리에게로 온 날부터 우리 마음밭을 놀란흙*으로 만들었다. 비어있는 의정부 집을 오가며 농사를 짓고 있어 책상 앞에 앉을 시간조차 없다. 그런 내게 한 번 파놓은 마음밭은 호출하지 않아도 녀석에게로 달려가게 한다. 작고 여려서 안으면 으스러질 것 같은 어린 것이 어느새 생애 첫 성장통을 앓더니 두 개의 앞니를 자랑하며 우리가 무얼 먹으면 저도 달라고 가만있질 않는다.
뿐이랴, 무에 그리 좋은지 펄쩍펄쩍 제 어미 품에서 몸을 들썩이며 야단이다. 떠 주는 이유식을 작은 입을 벌려 제비 새끼처럼 잘도 받아먹는다. 산후 몸이 좋지 않음에도 신선한 채소며 먹거리를 공수해 각가지 이유식을 만들어 제 자식은 먹이고 저는 굶을 때가 많은 딸아이다. 인대가 늘어나 몇 개월째 병원 다니며 불편한 손목으로 하루에도 대여섯 번 ‘응아’를 한 녀석을 안고 화장실로 냅다 뛰어가는 순간엔 아픈 걸 잊는 것 같다. 엄마니까. 결혼하기 전에는 제 몸 하나도 추스르지 못했던 걸 생각하면 참 엄마라는 존재의 위대함이다.
발등에 있는 화상의 흔적이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직전 겨울, 엄마는 내 머리를 감기려고 들통에 물을 올려놓고 잠시 자리를 비우셨다. 그런데 난 펄펄 끓는 물을 들어 올릴 수 있을 것 같아서 들다 부뚜막에 걸려 내 발등에 그대로 부은 일이다. 엄마는 나를 업고 십 리나 떨어진 읍내로 뛰었다.
그때, 아픈 것도 아팠지만 등에 업혀서 엄마가 넘어질까 봐서 겁이 났던 일이다. 생각해 보면 고추같이 매서운 정월 겨울밤 가녀린 오 척 단신의 몸으로 엄마 덩치만 한 나를 업고 어떻게 십 리를 뛰었을까. 그 밤 당신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삼도 화상을 입었고 치료를 위해 다음 해에 입학했다. 평생을 가슴 아파하시며 당신을 죄인처럼 여기며 사셨다.
어린 손자가 더러는 이유 없이 보채거나 제 어미를 힘들게 하면 가만히 녀석을 안고 ‘너는 엄마 강아지 엄마는 할머니 강아지 엄마 힘들게 하지 마래이’ 하면 알아듣는지 조용해진다.
올봄 정원 회화나무 중 가슴까지 오는 탐스럽고 풍성한 나무 근처에서 작은 새가 ‘짹짹~짹 포르르’ 유난하게 곁을 떠나지 않고 울었다. 참새보다 작은 새 두어 마리가 나무 곁에서 나무 위에서 분주하다. 땅과 나뭇가지를 드나들며 우는 새를 바라보며 유별나다 싶었다. 입춘도 지나 우수가 가까워 큰 회화나무를 전지하는데 가운데 아늑한 곳 작은 빈 둥지 하나.
그랬구나, 제 새끼들을 거기에 두고 어떻게 할까 봐 그리도 들락거리며 울었던 게다. 그것도 우리가 항상 앞 밭으로 지나다니는 길목이다. 봄 농사로 자주 다녔는데 그곳에 둥지를 튼 어미가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까. 혹시 새끼들 소리를 인간이 알아차릴까 봐 그리도 사람이 지날 때면 더 울었던 모양이다. 앞마당 정원에서 쉼 없이 지저귀던 그 작은 새도 봄이 한껏 부풀 즈음엔 제 식구들 데리고 떠나고 그곳 사철나무 우듬지엔 또 다른 새들의 천국이 됐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제 새끼를 해롭게 하는 자 앞에 선 무서울 게 없다. 어느 전시회에서 봤던 해학적인 조각상이 생각난다. 내 새끼를 해코지하는 것을 향해 험악한 표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해서 웃음도 나고 진심이라 공감했던 일이다. 가끔은 이 본능이 지나쳐 사회적 공분을 사기도 하지만 엄마의 무조건적인 그냥 본능이다.
이게 부모다. 제 새끼 입에 들어가는 거 아깝지 않고 자식에게 무슨 일이 나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불나방이다. 자식이 짜증을 내도 ‘니 밥은 묵고 다니나?’를 아침저녁으로 물어보는 존재다.
오늘도 딸아이는 어린 게 고 작은 입을 짝짝 벌릴 때마다 ‘아유 잘 먹네’를 연발하며 제 새끼를 먹이고 있는 어린 것 속에 제 어미가 있다.
*한 번 파서 손댄 흙. 마경덕의 「놀란흙」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