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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505
9월1일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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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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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gMNYpj8TcH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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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올바른 권위 사용법>
‘권위!’하면 일단 드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약간은 부정적이고 답답하고 억압적인 느낌입니다. 너무 오랜 세월 일인독재 치하에서 갖은 고난을 겪은 우리 민족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릇된 권위를 밥 먹듯이 남발한 일부몰지각한 지도층 인사들로 인해 그런지 ‘권위!’하면 우선 와 닿은 느낌은 강한 거부감입니다.
이런 권위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많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사회, 균형 잡힌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올바른 권위의 사용은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고 꼭 필요한 것입니다.
관건은 참된 권위와 그릇된 권위를 식별하는 노력이며, 권위의 올바른 사용 문제입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참된 권위인지 아닌지 식별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기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서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권위의 사용방법을 바라보면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권위는 종래 종교지도자들이 보여주었던 권위와는 본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권위였습니다. 예수님 권위의 원천은 인간이나 법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권위의 원천은 사랑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으로부터 왔습니다.
한없는 측은지심, 연민과 자비의 하느님이 그 원천입니다. 우리 죄인의 구원을 위해 한없이 자신을 낮추신 겸손하신 하느님이 예수님 권위의 원천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참된 권위와 그릇된 권위의 식별 기준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권위가 안 인간을 살리는 권위인가 죽이는 권위인가 하는 것입니다
강자들의 이익을 위해 약자들을 억압하고 힘으로 내리누르는 권위라면 그릇된 권위입니다. 자신들의 목적 추구를 위해 무지막지하게 폭력을 사용하고 있다면 그릇된 권위입니다. 이웃을 힘들게 하고 분노하고 좌절하게 만들며 고통으로 몰고 가고 있다면 분명히 그릇된 권위입니다.
이웃의 얼굴에 미소를 돌게 하고 충만한 기쁨을 주는 권위라면 올바른 권위입니다. 가난한 이웃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잘 살게 해주는 권위는 참된 권위입니다.
인간 사이에 생겨나는 다툼이나 분쟁들을 지혜롭게 중재하고 풀어나가는 권위라면 참된 권위입니다. 결국 공동선에 이바지하고 있는 권위하면 올바른 권위입니다.
방한 중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참된 권위의 사용법에 대해서 너무나 상세하고 명확하게 온 몸으로 보여주고 가셨습니다.
사회의 지도자, 교회의 봉사자, 한 조직의 책임자, 가정의 리더로 참된 권위를 실천하고 싶다면 교황님께서 방한하신 후 출국하시기 전까지의 4박 5일간의 행보와 우리에게 건네신 말씀을 하나 하나 반추하다보면 즉시 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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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땀이 섞이지 않은 망치로는 달걀도 깰 수 없다>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VjhrrBbAb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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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좋은 말을 해 준 부모가 있고, 나쁜 사람에게는 나쁜 말을 해 준 부모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어떻게 나쁜 말을 해 줄 수 있을까요? 말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권위’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분명 하느님의 계명을 가르쳤기 때문에 좋은 내용의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엔 권위가 없었습니다. 사람을 좋은 길로 나가게 할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말에 권위가 있어야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데, 우리는 그 권위가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심리학자로 꼽히는 ‘아른힐 레우뱅’은 10대 시절, 심리학자를 꿈꾸던 우등생이었던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환각과 환청을 겪기 시작했고, 그녀의 세상은 온통 회색빛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처음엔 귀가 이상해졌습니다. 친구가 말하는 소리보다 자신의 신발 끄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습니다. 다음엔 눈이 이상해졌습니다. 보도블록에서 떨어져 다칠까 봐 건널목을 건너지 못했습니다. 다음엔 자신 안에서 선장을 만납니다. 처음엔 친절한 것 같았지만 갈수록 잔혹하게 아른힐을 몰아쳤습니다. 그러나 친구라고는 내면의 선장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자아에 묶이게 된 것입니다.
정신병원 독방 침대에 묶여 가장 절실하게 느낀 것은 ‘배고픔’이었습니다. 공허함만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장은 밥을 먹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밥 대신 벽지를 뜯어먹었습니다. 정신병원을 몇 번을 들락거리며 수없이 자해하기도 하고 응급실에 실려 갔습니다. 자해와 소리를 지르는 것 외에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어서 10여 년 만에 정상으로 돌아왔고 공부를 다시 시작하여 그 원하던 심리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책에서 명확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녀를 치유해 준 것은 당시 의사와 간호사들이 아니었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조현병은 고질병이니 나을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거나 TV를 보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 보라고 충고했습니다. 맞는 말이었지만 그런 말들은 그녀를 변화시킬 어떤 힘도 주지 못했습니다.
어떤 치료사가 그녀의 두꺼운 기록철을 보더니 “이런 상태라면, 시간이 꽤 걸리겠네요”라고 한 말이 위로가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치료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건널목을 건너지 못하고 웅크리고 앉아있을 때 어떤 사람이 차에서 내려 “괜찮아, 좋아질 거야!”라고 하며 그녀를 차로 태워주었습니다. 다른 때는 소리를 질렀겠지만, 그때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것은 사람들의 작은 친절함이었습니다. 나머지 모든 말들은 강요에 불과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말 자체가 아니라 따듯함이라고.[참조: 『나는 자주 죽고 싶었고 가끔 정말 살고 싶었다』, 아른힐 레우뱅, 책읽는 다락방 J, 유튜브]
오늘 복음에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다고 나옵니다. 말의 권위는 말의 힘입니다. 그러며 마귀를 쫓아내시는 모습이 나오고 그다음에 사람들이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라고 말합니다. 말의 권위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도 가리옷 유다 한 명의 마음도 바꾸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니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말보다 권위가 있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희망과 믿음을 주는 말씀이었다는 뜻입니다. 당신 말씀 안에 ‘따듯함’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따듯함은 무엇일까요? 바로 당신의 ‘피’입니다. 피가 섞이지 않은 말은 어떠한 힘도 없습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에서도 한 병사를 구하기 위해 많은 베테랑 군인들이 희생을 치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밀러 대위는 죽어가면서도 라이언 일병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입니다.
“라이언, 값지게 살아. 값지게 ... ”
시간이 흘러 할아버지가 된 라이언이 밀러 대위의 무덤 앞에서 아내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여보, 나 부끄럽지 않게 살았지?"
라이언 부인이 대답합니다.
“그럼요!”
밀러 대위의 한 마디는 라이언의 평생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말에 피가 섞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권위가 있다면 그 이유는 그 말씀에 피가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 피를 마귀들은 견뎌내지 못합니다. 피가 섞인 말만이 내 안 마귀의 본성을 죽입니다. 하느님의 피가 곧 성령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힘이 든 말씀은 권위가 있고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땀을 흘리게 만들지 않는 망치는 달걀도 깰 수 없습니다. 땀과 함께 휘둘러지는 망치만이 권위를 가집니다. 말에도 온도가 있다고 합니다. 말이 따듯해지려면 그 말에 나의 따듯한 피가 섞여야 합니다. 각자의 피는 십자가에서 흘려집니다. 따라서 자기를 살리려고 이웃을 죽이는 사람의 말엔 권위가 없고, 자신을 죽이며 이웃을 살리려는 말엔 권위가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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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4,31-37 : 정말 그 말씀은 신기하구나.
나자렛에서 설교하신 다음 예수님은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안식일에 가르치셨다. 새로운 창조는 옛 창조가 끝나는 때인 안식일에 시작되는 것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 주심으로 당신의 ‘말씀’에 ‘권위’가 있음을 나타내셨다. 마귀들이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34절)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하라고 꾸짖으신다. 그것은 마귀가 진실을 말해도 거기에 귀 기울이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더러운 마귀가 들린 사람을 완쾌시켜 주신다. 그 마귀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즉시 알아본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함께 계시다는 것을 견디지를 못한다. 예수님께서 가지신 능력은 인간뿐 아니라 마귀의 힘을 능가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느님을 거역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을 멀리하려는 그 악의 세력은 하느님의 권능을 견디어낼 수 없다.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 앞에 마귀들도 예수님의 명령에 꼼짝 못하고 떨어져 나갔던 것이다. 이것을 본 군중들은 그것을 새로운 가르침,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새로운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놀란 것은 조용하고 간단한 말 한 마디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다는 것이다. 여기에 그들이 생각하는 지도자들 즉 그들의 스승들과 다른 크나큰 차이가 있음을 보았고 놀랐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면에 있어서도 새로운 권위 있는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전파되었다.
예수님은 여기서 볼 때,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보내신 당신의 아들임을 이러한 권능을 보여주심으로서 계시하신다. 그러나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마귀들이 그분을 알아보는데도 말이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신앙인이면서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과 같이 되지 않도록 살아가야 하겠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은 항상 우리에게 베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보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눈이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느끼기 위해서는 우리가 항상 하느님 안에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즉 깨어있는 삶이 될 때에 언제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될 때에 우리는 하느님 안에 한 형제자매인 우리의 이웃들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자세로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보면서 또한 우리 이웃 안에서 주님을 알아 뵙고 사랑해 드릴 수 있는 우리 되도록 기도하면서 주님께 은총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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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님]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다고 합니다. 더러운 영을 내쫓으신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그분의 권위를 언급합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과 뒷부분에 연거푸 두 번 나타나는 예수님의 권위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더러운 영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만 예수님과는 거리를 두지요. ‘무슨 상관’이냐며 예수님을 멀리합니다. 더러운 영은 제 이익과 제 삶의 안위를 행여 잃어버릴까 노심초사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더러운 영은 자신의 삶이 다른 이와 어떻게 다른지 구별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의 자리를 제 삶의 자리라고 우기는 것이 더러운 영입니다. 타인의 자리를 맴돌다 그것이 제 것인 양 여기며 기생하는 삶이 더러운 영의 삶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제대로 안다고 하여도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방해꾼일 뿐이며 낯설고 불편한, 그야말로 ‘타인’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과 더러운 영을 구별하십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는 데서 시작됩니다. 아픈 이를 아픈 이로 보고, 슬픈 이를 슬픈 이로 보며 순수한 눈으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바라보는 데 예수님의 권위가 있습니다. 제 것과 남의 것을 구별하지 못하여 본래의 모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에 질서와 고유성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예수님의 권위입니다.
모든 피조물을 사유하고 존중하며 기념하는 오늘,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움켜쥐기보다, 우리 각자의 눈에 틀어박힌 들보를 빼내고 제 삶의 자리가 어디인지, 우리의 눈이 자기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타인의 모습을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지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예.’ 할 것은 ‘예.’라고만 할 수 있는 순수함과 순박함이 예수님의 참된 권위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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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는 말씀>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이신 분이고, ‘하느님’이신 분입니다(요한 1,1).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고,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그 ‘힘’은 모든 피조물이 복종할 수밖에 없는 힘입니다. 특히 마귀들은 그 힘의 위력을 잘 알고 있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서 나가라고 명령하시면 그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마귀들이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쫓겨나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것들이 저항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루카 4,41) 만일에 마귀들이 예수님의 명령에 불복종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그것들은 곧바로 지옥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단호한 태도를 취하시지만,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십니다. 그래서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명령이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고’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에게는 명령을 하시기도 했는데, 그러나 제자들이 자유의지 없이 기계적으로 복종하는 것은 바라지 않으셨고, 제자들이(신자들이) 스스로 원해서 실천하기를 바라십니다. 물론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각자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의 계명들을(말씀들을) 받아들여서 실천하면 생명을 얻을 것이고, 거부하면 멸망을 향해서 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루카 4,31-32)
여기서 ‘권위’ 라는 말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 권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아직 예수님을 안 믿었고, 또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서 자기들을 압도하는 ‘하느님의 힘’을 느끼자 몹시 놀랍니다. (만일에 그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있었다면, 그 힘을 느꼈을 때 당연한 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2)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가르침에는 ‘힘’이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힘이(생명력이) 들어 있습니다.
마침 그 회당에 마귀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을 붙잡고 있는 마귀는 자기가 쫓겨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예수님께 반항하려고 시도합니다. 그 마귀가 선택한 방법은 예수님의 신원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4,34)라는 마귀의 말을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존경심을 표현한 말처럼 보이지만, 그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려는 의도로 한 말입니다. <마귀는 거짓말만 하는 존재입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악한 의도로 하는 말이기 때문에, 그 말은 진실이 되지 않습니다. 또 듣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마귀가 예수님에 대해서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대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마귀는 원래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의 일을 방해하기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항상 마귀들에게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하시는 것은 그것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루카 4,35-37)
마귀에게는 예수님의 명령을 거역할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서 나갈 수밖에 없는데, 그냥 나가지는 않고 그 사람을 내동댕이칩니다. (예수님께 직접 달려들 수는 없으니 힘없는 그 사람에게 분풀이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바로 옆에 계셨기 때문에 마귀는 그 사람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마귀의 억압에서 구출하셨을 뿐만 아니라, 마귀의 괴롭힘에서 지켜 주셨습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또다시 몹시 놀라게 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의 힘’을 느꼈기 때문에 놀랐고, 두 번째는 예수님의 명령에 마귀가 복종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마귀가 꼼짝도 못하고 복종한 것은, 그 명령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나타냅니다. 즉 예수님의 명령은 곧 하느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놀란 것입니다.) 마귀들은 하느님의 명령에만 복종하고 사람의 명령에는 복종하지 않는 존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마귀를 쫓아내려면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냅니다. 마귀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하시는 명령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명령은,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같은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주셨습니다.(루카 9,1) 그 권한은 사도들의 후계자들, 즉 주교들에게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려면,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만일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한다면,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바오로가 선포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명령한다.” 하면서 마귀를 쫓아내려고 시도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마귀는 “나는 예수도 알고 바오로도 아는데 너희는 누구냐?” 하면서 그들에게 달려들었고, 결국 그들은 마귀를 쫓아내기는커녕 그들 자신들이 쫓겨 달아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사도 19,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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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92년 부라질의 리우에서 리우환경회의가 있었습니다. 정식 명칭은 환경 및 개발에 관한 유엔 회의(United Nations Conference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입니다. 28년 전의 일입니다. 전 세계의 정상들이 모였고, 단체들의 대표가 모였습니다. 주제는 지구의 환경을 보존하고, 생명을 보존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무분별한 개발과 에너지의 급격한 소비로 지구는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함께 살던 많은 생명이 멸종하였고, 멸종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지구를 보호하던 오존층에 구멍이 났고, 북극의 얼음이 녹아서 북극곰이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지구 온난화는 기상이변이 되어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바다와 공기가 오염되고 있으며, 지구의 허파인 밀림은 점점 파괴되고 있습니다.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도 환경파괴가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피조물을 보호하고 함께 살도록 하셨는데 인간은 피조물을 파괴하고 있으며 우주에서 하나뿐인 푸른 별 지구를 어둠의 별로 만들고 있습니다. 제가 12살 때는 동네에 우물이 있었고 언제든지 두레박으로 마실 수 있었습니다. 논에는 미꾸라지가 있었고, 메뚜기도 있었습니다. 동네 하천에서 수영도 하였고, 어머니가 부를 때까지 동네 마당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놀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수돗물도 믿지 못해서 물을 사먹고 있습니다. 저는 28년 전에 환경회의가 있었는지 잘 몰랐습니다. 며칠 전 우연히 당시 회의에서 발표하였던 어린이의 연설을 들었습니다. 어린이의 연설은 다른 학술 논문보다 호소력이 있었고, 회의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 어린이도 40살의 어른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교회가 정한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어린이의 발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캐나다 밴쿠버에서 8000킬로를 달려 여기에 왔습니다. 저는 어린이 환경단체의 대표로 왔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낚시를 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낚시에 잡힌 물고기가 암에 걸려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지구의 환경을 보호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존의 밀림이 파괴되고, 오존층이 파괴되고, 공기와 바다가 오염되고 있습니다. 저의 아이들에게 지금의 지구를 보여 줄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저는 해결책을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에 있는 어른들도 해결책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오존층에 난 구멍을 수리하는 방법, 죽은 강으로 연어를 다시 돌아오게 하는 방법, 사라져 버린 동물을 되살려 놓는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미 사막이 된 곳을 푸른 숲으로 되살려 놓을 능력도 없습니다.
저는 한 가지는 알고 있습니다. 전쟁을 위해서,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 사용하는 돈을 환경을 보존하고, 가난한 이를 돕고, 아픈 사람을 돕는데 사용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아름다운 지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제가 리우의 빈민촌에서 태어났다면, 제가 중동의 마을에서 태어났다면, 제가 소말리아에서 태어났다면 저는 굶주리고, 병들고, 전쟁을 경험했을 겁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가르칩니다. 약한 사람을 돕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환경을 보존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왜 어른들은 가르치는 대로 행동하지 않나요? 아버지가 제게 말하였습니다. 너의 말이 아니라, 너희 행동이 너를 만든단다. 여러분도 행동으로 지구를 보호해 주십시오.” 12살 어린 소녀의 말이지만 놀라운 성찰이 있었고, 우리가 가야할 방향을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악의 세력도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악의 세력도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하느님의 능력을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과 악의 세력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신앙인은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따라 갑니다. 하지만 악의 세력은 하느님의 뜻을 알고 하느님의 능력을 알면서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반대 방향으로 향합니다. 이것이 신앙인과 악의 세력이 하느님을 알지만 서로 다는 점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이 누구인지, 예수님께서 누구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삶은 어떠한가요? 참된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는지요? 아니면 하느님을 알면서도, 예수님을 알면서도 악의 세력처럼 정 반대의 길을 걷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는 세속의 유혹 앞에, 돈과 명예 앞에, 자존심과 욕심 앞에 눈이 멀어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참된 식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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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악령아, 사람에게서 나가라>
루카 4,31-37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악령아, 사람에게서 나가라>
옆에서 죽든 말든
제 살길만을 찾으라는
무관심의 악령이 따집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게걸스럽게 집어삼키라는
탐욕의 악령이 따집니다
하느님의 이름 걸고
제멋대로 날뛰라는
불경의 악령이 따집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예수를 따르는 그대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주저함 없이 단호하게 거침없이
꾸짖어야 합니다
조용히 하여라
이 더러운 악령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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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더 좋은 교육의 원천>
+찬미예수님
안타깝게도 여름이 지나 새 학기가 밝았습니다. 여름 행사들이 없었기에 여느 여름보다 한가롭게 지냈을 것 같은데 뒤돌아보면 여전히 바쁘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학생들의 성적 평가를 마치고 좋아한 게 엊그제 같은데 바로 오늘, 2학기 수업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그런데 지난 학기보다도 2학기를 준비하는 제 마음은 더욱 무겁고 부담스럽습니다. 그 이유는, <가톨릭 사회교리>라는 수업을 한 과목 더 맡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르쳐야 할 과목이 더 늘었다는 양적 부담 때문에 마음이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사회교리>라는 과목명이 제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이들이 있고 고달프게 살아가는 비참한 이들도 있습니다. 과거로부터 이어져 오는 사회적 병폐가 있기도 하고 새로운 시대 안에서 생겨나는 문제들도 있습니다.
<사회교리>란,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예수님의 시선에서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치는 학문입니다.
문제는 고학년들의 수업인 만큼 저의 시선과 생각이 사제가 되기 직전의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수업은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수업 중 하나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만큼 가르치기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응당 사회 안에서 고민하며 살아가는 사제로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 연대성의 원리 등 당연한 논리들만 가르치고 싶지 않습니다. 더욱 더 사회의 움직임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양심에 따라서 투신할 수 있는 뜨거운 마음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물론 이것은 저의 과도한 욕심일 수 있겠지만 그래도 최선은 다 하고 싶으니 커다란 책임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다행히도 오늘의 복음은 제가 앞으로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치면 될지 그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유다인들의 ‘회당’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와는 다른 장소입니다. 회당은 주로 교육적인 시설물이었고 종교를 첫째가는 교육으로 여겼던 유다인들은 이곳에서 하느님 말씀의 낭독과 그에 대한 해설을 행했습니다. 성전이 예배를 드리고 희생제물을 바쳤던 장소였다면 회당은 그야말로 훈육의 장소였던 것입니다.
이 교육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다름 아닌 모세의 율법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께서 직접 모세에게 전해주신 이 율법을 가장 거룩한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이를 절대적인 구속력을 가지는 규율로 여겼고 조금도 어기지 않기 위해 수만 가지 법규를 만들어 가르쳤습니다. 이 가르침은 도덕적인 율법에서 시작해서 무한한 규율과 규칙으로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복음말씀에서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마귀를 쫒아내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라며 경탄합니다. 이들이 놀라는 이유는 단순히 예수님이 더러운 영을 쫒아내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와 힘”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문제의 답은 마귀의 영이 하는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예수님께 소리를 지르고 도망칩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 간단한 말에서 두 가지 예수님의 권위의 원천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중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함을 기반으로 행동하신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인간을 죄와 약점에서 해방시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당시 회당에서 율법을 가르치던 학자들과 예수님의 차이점이 드러납니다.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의 거룩함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 율법의 글자 자체만을 객관적으로 세분화시켜 가르치던 이들입니다.
그 안에는 하느님의 사랑도 자비도 결여되어 있으니 당연히 거룩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또한 율법에 얽매이다 보니 인간을 해방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구속하곤 했습니다.
진정으로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은 사랑을 기반으로 해야 하는데 이들은 오히려 구속하고 있으니 그 말에 권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일상 생활 속에서 어려움을 느낄 때, 하느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내버려 둔다고 원망하며 쉽게 등을 돌려버리곤 합니다.
우리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돌보아 주시며 당신만의 방법으로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시는 분, 우리의 삶을 생명으로 이끄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느님임을 쉽게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또한 일상생활 속에서 율법주의에 쉽게 빠져들곤 합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내 관점에서 해석하고 저것은 제대로 된 것이 아닌데라고 생각하며 미워합니다.
또한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다는 이유로 타인을 마음 속으로 단죄하고 알게 모르게 무언의 폭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가 믿는 생명의 하느님, 구원의 하느님은 종종 잊혀집니다.
오늘 성체를 받아 모시며 우리의 신앙이 참으로 선행과 사랑, 하느님께 나아가는 소신있는 기쁨을 가지고 있는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자녀로써 복음말씀을 듣는 우리들은 예수님을 굳건히 믿고 따름으로써 세상 안에 우리의 사랑을 드러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오늘의 복음을 묵상하다 보니 저 역시 이번 학기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마음을 다 잡게 됩니다. 글자와 교재의 내용에 집착하기 보다는 크나 큰 하느님의 거룩함을 기반으로 모든 인류를 자유롭게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열정을 담아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물론 여러모로 부족한 것이 있겠지만 제가 최선을 다 한다면 하느님이 알아서 채워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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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강영구 루치오 신부님]
<사랑은 권위>
대한민국에서 제일 높고 권위 있는 사람은 대통령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대통령은 권위를 잃고 고민에 빠져있습니다. 그가 권력욕에 휘둘리지 않고 사심 없이 나라와 국민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권위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권위는 힘입니다. 사람의 몸만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재력, 폭력, 무력, 권력 따위입니다. 사람들은 돈의 힘이나 주먹의 힘, 권력의 힘 때문에 마지못해 움직입니다. 사람의 머리를 움직일 수 있는 힘도 있습니다. 지식이나 학력 따위입니다. 선후를 조리 있게 설명하여 설득하면 사람의 머리와 몸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몸과 머리와 마음을 다함께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사랑은 힘으로 강제하거나 합리적으로 설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과 머리와 몸을 한꺼번에 움직일 수 있습니다. 참 권위는 사랑에서 나옵니다. 마귀들도 사랑 앞에서는 꼼짝하지 못하고 물러갑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요한4,16)
하느님께 귀의하고 하느님 안에 뿌리내린 나자렛 예수는 사랑의 사람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사랑이자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분 말씀 안에는 구원할 수 있는 능력과 해방의 권위가 있습니다. 당신도 사랑하는 사람이 되면 참 권위를 가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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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최종수 요셉 신부님]
<권위>
가정에서는 부모의 권위가 학교에서는 스승의 권위가 사라진다고 걱정입니다. 어른이기 때문에 주어진 맹목적이고 봉건적인 권위는 물론이고, 올바른 권위마저 사라져가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지난 겨울에 사제관에서 신학교 동아리 모임이 있었습니다. 제주도에서 후배 신학생이 도착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황당한 일이 있었어요. 익산 부근의 초등학교 아이들이었어요. 비행기를 처음 탔다며 창가에 앉고 싶다고 해서 자리를 바꾸어주었더니 얼마나 시끄럽게 떠드는지요.
두 녀석의 사이에 앉아 있던 제가 참다참다 못해 물었어요”
“어디에서 왔지?”
“○○초등학교요.”
“무슨 일로 왔다 가는 거야?”
“아람단에서 왔어요.”
“아람단에서 왔으면 공중질서를 잘 지켜야지 왜 이렇게 떠드는 거지?”
“우리 교육의 현주소를 보여주려고요. 으하하!”
(갑자기 터져 나온 어이 없는 웃음소리) …
더 이상 할말이 없었어요. 계속해서 떠들면 너희 부모님과 선생님이 욕을 얻어먹게 된다고 했더니 뭐라고 대꾸한 줄 아세요?”
“부모님은 우리의 거울이지요. 선생님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일부러 선생님이 들으시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부모님이 가정에서 교육을 잘 시켰다면, 자녀들에게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모범을 보였다면, 선생님이 학교에서 언행일치의 모범을 보였다면 부모와 스승의 권위는 바로 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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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이종진 토마스모어 신부님]
<생명의 날숨에 실린 말씀>
수도공동체의 삶이 내게 의미가 있는 것은 존경할 만한 동료나 선배들이 늘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닮은 분들, 곧 살아 숨 쉬고 있는 하느님의 표징을 보는 것은 자신을 작게 만들기는커녕 나의 내면을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
사실 존경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영혼은 그 내면이 얼마나 빈곤하겠는가? ‘내적인 권위’를 지니고 사람들 사이에서 존경받는 분들을 관찰하노라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그분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생명력’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그분들의 말은 한 마디로 듣는 이들의 ‘기’를 북돋아 준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이 권위가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마귀의 영마저 몰아내는 그 힘이야말로 예수님의 말씀이 생명을 담은 것임을 입증해 준다.
창세기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사람의 생명은 하느님의 호흡, 그분의 날숨에서 비롯된 것이다. 들숨을 통해서 이 생명을 선사받은 영혼은 이제 날숨을 통해서 그것을 전달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인간의 말들이 날숨과 함께 나오는 것이라면 그것 역시 생명을 중재하는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권위’를 가지는 것은 이렇게 듣는 이에게 용기와 격려, 내적 생명을 선사할 때다.
우리 시대에도 이런 참된 권위를 발휘하는 말씀이 있다. 생명권을 지키려는 국민 편에 서서 침묵하지 않고 ‘발언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이 한 본보기다.
그리고 그분들의 말씀은 곧바로 단식이라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에 비해서 그저 체면과 직무를 유지하는 데만 골몰해 있거나 힘에 기대는 사람들의 말은 아무런 권위도 없다.
힘에 기대고 하는 말은 하나의 위협으로 사람들의 심리적 생명을 해칠 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 자신의 말을 돌아보게 된다. 정작 중요한 것은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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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랑의 유효 기간은 어떻게 될까요? 사랑이니까 영원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싶겠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사랑도 유효 기간이 있을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사랑한다면서 뜨거운 만남을 가졌던 연인이 어느 순간에 헤어졌다면서 어색한 미소를 짓는 경우를 많이 봤거든요.미국의 코넬 대학교 인간행동연구소에서는 2년간 5,000명의 미국인을 대상으로 사랑의 유효 기간을 조사했습니다.
연구 결과 18개월에서 30개월이면 뜨겁던 사랑이 식는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사랑에 빠진 후 1년이 지나면 사랑의 감정은 50%가 사라지게 되고, 이후 계속해서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권태’라는 달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는 주님께 대한 사랑이 뜨겁습니다. 그러나 영세 후에 곧바로 ‘권태’를 맞이하면서 점점 주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권태를 변화를 위한 서곡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강사들은 매번 재미있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지루할 만한 시간을 알고 그 시간에 변화를 주면서 계속해서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처럼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그리고 이웃과 맺는 사랑의 관계가 식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바로 새로운 변화의 시작점이 되었으면 합니다. 다시 사랑을 키울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회당에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회당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겠다고 선언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자진 신고를 하면서 예수님께 항의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께서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을 아셨고, 사랑하는 인간을 위해 자기를 쫓아낼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미리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이런 말도 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마귀는 거짓말을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진실을 말합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이 예수님께 대한 의심을 하게끔 하였고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랑을 위해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될 때가 주님께 적극적으로 다가서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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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선택?>
얼마 전에 특수 청소를 직업으로 하는 분이 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특수 청소라는 것은 대부분 ‘죽은 자’의 집 청소였습니다. 이 책 안에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어느 날, 모르는 사람의 전화 한 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상대방은 “인터넷에 착화탄 자살을 하면 괴롭다고 쓰셨던데 진짜인가요?”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착화탄 자살자의 집을 청소하면서 그들이 얼마나 괴로운지를 알게 되었다는 글을 보고 전화했다는 것입니다.
착화탄 세 개를 샀다는 말을 듣고는, 저자는 여러 방법을 동원해서 경찰을 자살하려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보내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람으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어떤 문자일까요? 물론 좋은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나쁜 시키’
이 문자를 받고서 저자는 너무나 기뻤다고 적습니다. 좋은 내용은 아니지만, 이 사람이 살아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 욕 섞인 문자가 오히려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은 생명을 살렸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욕을 먹더라도 생명을 살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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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권위의 삶>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
어제 ‘홀로와 더불어’라는 시인 구상 추모 문집의 단아하고 품위있는 글들을 읽으며 참 권위의 힘을 실감했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닮은 거룩한 사랑의 권위가 사람들을 감화感化하고 덕화德化하고 정화淨化하고 성화聖化하고 위로慰勞하고 격려激勵하고 치유治癒하며 기쁨과 평화를 준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으로부터 기원하는 참 권위가 이웃을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 수도원의 반려견 다섯을 돌보는 일명 ‘문보물’이라 부르는 수사의 예도 소개하고 싶습니다. 저는 문보물 수사를 반려견들의 ‘수련장’이자 ‘수호성인’이라 부릅니다. 반려견들이 수사님을 따르는 모습에서 사랑의 권위를 느끼기 때문이며 엊저녁은 반려견들의 집에 모기향을 켜놓으며 잠자리를 마련해 주는 모습도 사진에 담았습니다.
참 권위가, 진정한 권위가 참으로 절실한 시대입니다. 신뢰가 무너지면 회복이 참 힘들 듯 권위도 무너지면 회복이 참 힘듭니다. 권위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참으로 살기 위해 참 권위는 필수입니다. 교회 역시 생생한 전통과 참 권위를 지닐 때 소금과 빛의 사명에 충실한 참 권위의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부라지만 대면예배 고집, ‘공공의 적’이 된 개신교, 목숨과 바꿀수 없는 종교의 자유?”란 기사를 보며, 이래서는 교회의 권위도 보장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 권위도 지녀야 하겠지만 서로의 권위를 존중하고 지켜주는 일도 기본에 속합니다. 참 권위는 각자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닮아 책임을 다하며 ‘답게’ 살 때 옵니다. ‘스승답게’ ‘부모답게’ ‘책임자 답게’ 궁극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품위 있게 살 때 옵니다. 비상한 권위가 아니라 평범하면서 꼭 지녀야 할 하느님의 선물같은 권위입니다. 죽이는 권위가 아니라, 살리는 권위 사랑의 권위입니다.
오늘은 9월 순교자 성월의 첫날이자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공동의 집인 지구를 돌보는 것에 관한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반포하면서 해마다 9월1일을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했습니다. 특히 교회는 오늘부터 성 프란치스코 축일인 10월4일 까지 ‘피조물의 계절’, ‘지구를 위한 희년’으로 정해 피조물 보호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일 것을 촉구합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 위원장 강우일 주교님의 ‘2020년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담화’도 참으로 시의적절한 주옥같은 말씀으로 가득했습니다. 근본적이 전환이 필요하다는 진정성 가득 담긴 절박한 호소였습니다. 한 마디로 피조물 보호에 생태적 회개를 통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참 권위의 삶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시간되면 시대의 표징같은 예언적 담화를 꼭 정독하시길 권합니다.
수십년전 희랍어 시간, 희랍어 ‘권위(ex-ousia)’에 대한 어원을 통한 명쾌한 설명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권위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체로부터 나오는 것이란 해설입니다. 외적인 지위에서, 옷에서, 외모에서, 권력에서, 재물에서 오는 참 권위가 아니라 사람됨됨이의 안의 존재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존재자체이신 하느님을 닮아갈수록 참으로 권위있는 삶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그 생생한 본보기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랍니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참 권위는 알아 채는 법이며 그 권위 앞에는 저절로 승복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참 권위를 한 눈에 알아 본 더러운 마귀의 영입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권워는 거룩하신 하느님으로부터 기원함을 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닮을 때 반영되는 거룩한 권위입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하고 명령하시자 더러운 영은 혼비백산 그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갑니다.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사람들의 즉각적인 경탄의 반응입니다. 모 정당의 이름이 ‘국민의 힘’으로 정해졌다는 뉴스가 생각납니다. 참 권위의 힘은 하느님의 힘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닮아가면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때 하느님의 힘은 사랑의 힘, 겸손의 힘, 섬김의 힘으로 표현될 것입니다.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입니다. 참으로 ‘국민의 힘’이 ‘하느님의 힘’임을 깨닫는 겸손한 삶이라면 저절로 참 권위를 지닌 정당이 될 것입니다.
참 권위를 지닌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제 어느 자매님께 “자매님은 자매님 고유의 매력을, 아름다움과 향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드린 격려말이 생각납니다. 각자 제 삶의 자리에서 제모습, 제색깔, 제향기를 지니고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때 바로 참 권위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하느님의 지혜에 대한, 하느님의 영을 통한 깨달음에 대한 말씀도 참 권위의 삶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을, 하느님의 영을 받은 영적 인간인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지와 교만의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세례 받아 하느님의 영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영적 인간인 우리는 참 권위를 지닌 삶을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1독서의 결론같은 말씀이 참 권위의 소재를 밝힙니다. 참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그리스도와 일치가 깊어질 때 비로소 참 권위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닮의 여정과 함께 가는 참 권위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프란치스쿄 교황님의 말씀도 잊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애덕은 박애가 아니라, 매사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는 것이며 각자의 얼굴에서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일치되어갈 때 참 권위를 지닌 애덕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페인트칠같은 얼마 못가 들통나는 외적 가짜 권위가 아니라 저절로 안의 하느님으로부터 배어나와 빛을 발하는 참 권위임을 깨닫습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일치를 권하는 것입니다. 화장하지 않아도, 곱게 꾸미지 않아도, 성형수술 안해도 내면의 아름다움이 저절로 빛을 발하면서 참 권위를 지니게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해부터 출판계에서는 얼짱이 아닌 몸짱에 대한, 예쁜 얼굴이나 몸이 아닌 강한 몸을 지향하며 운동하는 여성에 대한 책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합니다. 아주 바람직한 좋은 현상입니다. 여기에다 몸뿐 아니라 영적 삶에도 힘을 쏟는 다면 금상첨화의 참 권위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자비하신 주님을 닮아 참 권위의 사람이 되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시편145,8-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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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 능력의 소유자>
“등불 하나가 천년 어둠을 물리친다.” 는 옛 말이 있습니다. 빛을 가지고 있으면 어둠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빛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어둠에 대처할 수 없습니다. 물론 빛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 악의 세력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권능으로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지녔으면서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이고 그분의 모든 것은 우리 안에 숨어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숨 쉬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생명의 숨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빛을 선택하면 어둠이 물러나고 어둠을 선택하면 빛이 물러납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빛은 어둠이 짙을수록 더 큰 빛을 발하게 됩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며 대항을 시도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주신 권위를 가지고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4,34. 35). 하시며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 내셨습니다.
그리고 분명 그 능력을 사도들을 비롯한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루카10장 17이하에 보면 제자들이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인정하고 잘 관리하고 성장시켜야 합니다. 이미 주어졌는데도 알지 못하는 것은 내가 깨어있지 못한 탓입니다. 참 신앙인은 예수님의 권위에 힘입어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권위를 전합니다.
오늘날의 시대는 너무나 시끄럽고 번잡하고 자극적입니다. 마귀들이 더는 일할 데가 없을 정도로 모든 삶의 자리를 점령했다고도 합니다. 유혹이 많고 번잡한 시대에 하느님의 권능을 잘 사용하기 위해서 먼저 침묵과 고독으로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침묵 속에서 절망과 혼란을 이겨내는 능력을 드러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그러면 악마가 여러분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야고 4,7-8) 하고 말하였습니다.
알게 모르게 다가오는 어둠의 세력, 곧 하느님보다는 인간의 욕심을 부추기는 마음에서 자유롭기를 희망합니다. 세상에서 자유로운 힘이 바로 신앙에서 나옵니다. 20세기의 영성가 토마스 머튼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자신을 채울수록 텅 비어가니. 많은 것을 움켜쥐면서 나는 오히려 모든 것을 잃었다. 쾌락과 즐거움에 사로잡히면서 나는 오히려 실망과 분노와 두려움을 느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은 달콤하지만 세상 것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결국 그 끝은 파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6-8) 우리가 하느님의 숨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고 결코 인간적인 욕심이나 인정에 매달리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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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의 영과 마귀의 영 사이의 긴장을 보여 주십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 카파르나움 고을의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그 안에 있던 한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큰 소리를 지릅니다. 유다인 안식일 관습대로 하느님을 찬양하기 위해 회당 안에까지 들어왔으나, 예수님의 말씀이 많이 거슬렸던 모양입니다. 자신의 성정이나 분위기와는 계속 마찰을 일으켰을 테니까요.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루카 4,32)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에서 희열을 느낍니다. 그동안 들어온 종교 지도자들의 설교와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분 말씀에서 해방감을 느끼고 위로를 받으며 희망을 엿봅니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신"(복음 환호송)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넘어지는 누구라도 붙드시고 꺾인 이는 누구라도 일으켜 세우시는"(화답송) 분이십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 권위가 어디서 오는지 단초를 제공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습니다."(1코린 2,12)
하느님의 영, 곧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생각을 통찰하십니다. 세속의 영, 더러운 마귀의 영과는 섞일 수 없는 거룩하고 순수한 영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하시는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과 일치의 유대이십니다. 성 삼위 하느님에게서 흘러 나오는 말씀은 그래서 사랑의 권위를 지니지요.
"자비, 어짊, 용서, 자애, 너그러움, 모두에게 좋으심, 참됨, 진실, 선하심"
오늘 미사의 입당송과 화답송, 영성체송 때 불리우는 시편들에서 예수님께서 지니신 권위를 노래합니다. 주님 말씀의 힘은 세속적 힘 자랑이나 더러운 마귀의 영이 과시하는 거칠고 폭력적이며 파괴적인 힘과는 다릅니다. 위로하고 존중하며, 격려하고 믿어 주는 권위, 용서하고 희생하고 속량해 주는 권위입니다.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루카 4,35)
예수님께서 한 사람의 인격과 존엄성을 짓밟는 더러운 마귀의 영을 단호히 꾸짖으시니 마귀는 쫓겨 나갑니다. 그 사람 안에 있을 때와 다를 바 없이 거칠고 폭력적으로 요동치며 떠나지만, 다행히 그는 아무 해도 입지 않았습니다. 사실 더러운 영은 거룩한 주님의 영 앞에서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영성 생활의 여정 안에서, 우리의 영혼에 어둡고 음습하고 파괴적인 힘이 밀려들 때도 있고, 헤어날 수 없을 듯한 두려움의 그림자가 드리우기도 합니다. 하느님 현존의 기억을 까마득히 잊고 슬픔과 절망에 무너져 버릴 때도 있지요. 악한 영은 한 영혼이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는 것을 원치 않기에 호시탐탐 그 사랑의 유대를 약화시키거나 끊어낼 기회를 엿보다가 작은 틈새라도 생길라치면 당장 치고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우리 힘으로 세상의 악을 퇴치할 수는 없어도, 우리에게서 악을 떼어내시는 예수님 곁에 머무른다면, 그분 말씀이 지니신 사랑의 권위가 그 악을 물리치고 우리를 다시 온전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설령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쳐지더라도 아무 해조차 입지 않고 다시 일으켜 세워져, 처음처럼 그분의 온전한 소유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하느님의 영을 받은 이들입니다. 현세의 눈에는 "어리석음"으로 비치겠지만 "권위와 힘을 가지신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고 이끄시는 대로 내어맡깁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1코린 2,16)으니 두려워 말고 주님께 의지해 남은 사랑의 길을 완성해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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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자기 인생관은 ‘그저 배움의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하세요.’
인생을 ‘배움의 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덜 불행하게 만드는 이유는, 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삶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훈련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태도가 몸에 습득된 사람들은 삶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심리적으로 즐길 줄 알게 됩니다. 인생을 무엇을 이뤄야 하기 보다는 무언가를 배워 나가는 배움의 장으로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은 좀 더 편안해지며 안정됩니다.
♣실수나 실패를 했을 때에 심하게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영성가는 “우리는 저마다 배움을 얻기 위해 이 세상에 왔습니다.” 내가 배워야 할 것은 누가 가르쳐 주는 게 아니고, 오로지 내 인생이기에 나 혼자만의 인생여정인 것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행복해지고 부자가 되거나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고 자기 자신과 더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 채 잘못된 길을 따르다 보면 삶의 의미 따위는 없어지고 행복은 그저 환상에 불과하다고 여기게 됩니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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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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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희년선포”에 이어, 메시아로서의 당신 “권위”를 드러내십니다. 곧 갈릴래아의 가파르나움에서 안식일에 가르침과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의 치유를 통해서 ‘메시아의 권위’를 드러내십니다. 그들이 놀란 것은 구마치유가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곧 그분의 말씀의 권위였습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루카 4,34)
한 마디 권위 있는 “말씀”, 곧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 4,35)라는 말씀에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 내동댕이쳤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습니다.”(루카 4,35).
여기서 우리는 “한가운데”라는 부사는 우리를 하느님의 현존에로 데려다 줍니다. 이사야와 즈카리아 예언자는 말합니다.
“너희 한가운데 계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는 위대하시다.”(이사 22,6)
“정녕 이제 내가 가서, 너 한가운데 머무르리라.”(즈카 2,14)
이미, 예수님께서는 앞의 희년선포 장면의 마지막 구절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30)하시며 당신의 현존을 그들 가운데 드러내셨습니다.
사실, 인간은 범죄 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악의 지배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악마가 혀로 하와를 속인 것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와를 속였던 악마의 그 혀 놀림을 중지시고 그에게서 쫓아내십니다. 곧 당신의 현존에로 회복시키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첫 번째 기적인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치유는 악마의 지배로부터 인간에게 자유를 되찾아 주는 구원의 표징이 됩니다. 희년선포와 마찬가지로 원죄 이전의 에덴으로의 복귀를 드러내줍니다. 곧 생명이 충만한 상태로 되돌림입니다.
사실, 악마를 쫓아내는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 구마자들도 그러한 일은 해 왔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워했던 것은 단지 악마를 쫓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몹시 놀라” 한 말은 이렇습니다.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이 나가지 않는가?”(루카 4,36)
그렇습니다. 그들이 몹시 놀랐던 것은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이 이루어지는 권능과 힘을 지니고 있었기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사실, “권위”(exusia)라는 말은 ‘힘’이란 뜻으로 하느님께만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것은 발설된 말씀이 말씀한대로 이루어지는 힘입니다. 선포된 말씀이 허황되지 않고 곧 실재가 되기에 그 말씀이 “권위”를 지니게 됩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힘이 실려 있어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드러낸 것입니다. 곧 “말씀”이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면서, 당신 스스로의 “말씀”으로 명령하실 뿐, 다른 누구의 이름을 빌어 쫓아내지 않으셨습니다. 당신 말씀이 “권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당신이 바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구마자들은 자신의 권능이 아니라 누군가의 힘을 빌려 쫓아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교란시키고 분열시키는 온갖 거짓의 혀 놀림을 멈추고, 어둠을 몰아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을 다름 아닌, 우리 주님의 “권위 있는 말씀”의 힘으로 하는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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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루카 4,34)
주님!
진리를 알게 하소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자 되게 하소서.
진리를 따르며 받드는 제자 되게 하소서.
거룩함 안에서 제가 새로 나게 하소서.
제가 관계 맺는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 빛나게 하소서!
주님이신 당신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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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루카4,34)
<하느님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9월의 첫 날인 오늘은 2015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공동의 집인 지구를 살리자'는 두 번째 회칙인 '찬미받으소서'를 반포하시면서,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하신 날입니다.
교황님은 이 회칙에서 생태계의 주보성인이신 성 프란치스코를 언급하시면서 자연재해나 이상기온 등으로 인한 '지구의 문제'는 인간의 욕심이 빚어낸 생태계의 무분별한 파괴에서 시작되었다고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교황님은 2020년 오늘부터 성 프란치스코의 축일인 10월4일까지를 '창조시기'로 정하셔서 '원창조 질서 회복'을 위한 특별한 기도를 요청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악마가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악마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한 분으로 고백합니다.
'우리는?'
오늘 독서(1코린2,10-16)는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알수 있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하느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1코린2,10.11)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영, 곧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을 알 수 있다고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성령!'
우리는 이 성령을 받기 위해서 '고요함'이라는 '멈춤의 시간' 안에 머뭅니다. 그래서 미사하고, 기도하고,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피조물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고, 그래서 기뻐했습니다.
그것을 노래한 것이 바로 '피조물의 찬가'인 '태양의 찬가'입니다.
맑은 영, 깨끗한 영, 하느님의 영인 성령을 청하고, 우리도 이 영의 힘으로 모든 피조물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보고, 만나 뵈옵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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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M790jLwiF1o&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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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루카 4, 34)
계절은
어김없이
오고갑니다.
가을에는
더 좋아지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이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는
주님의 빛을
믿습니다.
어둡고 뒤틀린
우리의
현실 안으로
주님께서
오십니다.
알고 있지만
돌아가지 않고
알고 있지만
믿지 않는
우리들 안으로
직접
들어오십니다.
의심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피조물을
아프게
찌르는 것은
언제나
피조물이듯
피조물을
더럽히는 것 또한
피조물이었습니다.
죄로 얼룩진
우리 삶을
깨끗이 하시는
피조물의
주님이십니다.
피조물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근원적인
사랑입니다.
일방적인 사랑
일방적인 믿음은
나가야 할
피조물의 길을
혼돈에 빠뜨립니다.
보호하고
보호받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우리 시대의
이 어려움을
이겨내는 길은
아는 것이 아닌
아는 것을 올바로
믿고 올바로
실천하는 것이
피조물 보호를
위한 참된
기도일 것입니다.
피조물의
보호자이신
주님께
이 어려움을
기도로
의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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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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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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