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 대하여 / 박현수
태초에
혼돈을 정리한 것은 길이다
돌도끼를 굴리며
하루 종일 들판에서 헝클어지던
길은 집으로 들고
모든 길은 문지방을 베고 쉬었다
실핏줄처럼
파생되는 길에
길을 잃은 것은 길이다
푸른 들을 가르며
모여드는 길이 두려워
사람들은
나무에 오르고
바다 속에 들기도 하였다
길을
만들고 길을 잊고
길을 묻고
길을 잃는다
집과 무덤까지의
가장 우회한 길이 삶이라면
잃은 길 위에
다시 잃은 길이 시라는 것이다
- 박현수 시집 <위험한 독서> 2006
고인돌 / 박현수
1
거대한 바위로
상상력을 포석하던 시대를 경배하라
2
신이 사물들 사이로 사라지고
인간의 마을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바람도 구름도
어제의 것이 아니다
인간의 망막에 비친 사물들은
신으로 가는 통로를 알지 못한다
모든 길은 폐쇠되었다
폭우에 잘려나간 길처럼
다시 끌어올릴 수 없다
마을은 고립되었다
새들도 제 이웃을 잊어버렸다
3
언덕 위엔
무거운 구름이 들어 올려지기 시작하였다
반쯤 땅에 박히고 땅 속에
묻혀버리고
언덕 위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한때 하늘을 떠다니다가
지상에 가라앉은
거대한 빵들이 공중부양을 시작하였다
등뼈 곧은 꿈들이
지상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개미 떼 위에 떠다니는 장수풍뎅이처럼
무거울 대로 무거워진
지상의 구름은 언덕으로 옮겨지고
그 아래 수많은 욕망의
척추들이 지네발처럼 분주하였다
4
동트는 언덕에
기단부로만 세운 원형의 탑
정결한 식탁에
올린 한 덩이의 솜사탕
거대한 주제일수록
수사학은 가난해지고
오래 다듬을수록 구도는 단순해진다
하늘로 쏘아올린 화살촉은
기도처럼 돌아왔으나
하늘로 오르는 향연의 길은 열렸다
묵직한 단어
몇 개로 건축한
최초의 시가 봉헌되었다
숭고의 문이 세워졌다
초월로 가는 경전이 완성되었다
5
에드벌룬처럼
맛있게 허공에 들린 빵
엄청남 무게의 구름
이것을 공중에 올려놓은 것은
거인이 아니다
심연 속에 유동하는, 피할 수 없는
가는 등뼈들의 욕망이다
키 작은 검은모루동굴 사람들로부터
내려온 은밀한 꿈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욕망
6
저 거대한 바위 아래
미세한 돌촉,
정교한 칼날이 없는 건 아니다
그것들은
거대함 아래 눌려 있다
정교함은 바위의 자세를
설명할 수는 있어도 구성할 수는 없다
세대를 아득하게
이어나간들
영원히 그 자세에 도달할 수 없다
7
허구는 거대할수록
실재한다
무너져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 박현수 시집 <위험한 독서>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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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에 대한 치열한 명상
199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박현수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위험한 독서>가 발간되었다.
등단 이후 치열한 자기성찰의 시를 써온 그의 시집은
매우 치밀하다. 날카로운 지성과 함께 인간적인
슬픔을 느끼게 하는 감성이 혼합되어 그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번 시집에서는 시인의 시 언어를 찾아가는 구도의
과정이 확연하게 그려진다. 그는 언어로 인해
오염된 세계를 다시 언어를 통해 구해오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순수하고 본질적인 언어가 필요한데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이 이번 시집의 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우박> <시작법을 위한 기도> <여뀌> 등과
같은 작품을 읽으면 순수한 언어를 찾기 위해 자신을
연마하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근원적인 순수를 지향하는 박현수 시인의 의식은
언어와 관련해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심연에 닿아 있는 정신적인
고독과도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석탄박물관> 등을
통해서는 유년을 보냈던 탄광촌의 기억을 끌어올리기도
하고 <마이웨이> <달팽이> 등의 시에서는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일상을 잡아내기도 하는데 그 속에 인간의
실존적인 고독이 스며 있다.
박현수의 이번 시집은 생에 대한 치열한 자기기투와
연민, 언어를 추적하는 순수한 의식이 담겨 있다고
하겠다. 자기점검이 없이 혼탁하게 변하고 있는 세상에
한 줄기 빛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시인의 모습에서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 自序
‘하오의 미학 강의’라는 제목으로 오랫동안 시를 써왔다.
시에 대한 명상을 계속하면서 이 제목을 내 시의
그림자로 두어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시에 대한 명상이 세계에 대한 명상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안 것은 오래지 않다. 자기 시를 다시 보는 것은
고통이다. 내 언어는 사막에서 온 것이 아닌가.
시집을 엮으면서 완결되지 않은 느낌들과 많이 싸웠다.
이 시들로부터 탈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시집을
엮는다.
- 추천글
아시아 르네상스가 온다.
세계는 크게 변할 것이다.
여기 東夷의 상상력으로부터 문화개벽을 불러일으키는
시행들이 터져나오고 있다. 박현수의 기도다.
숭고의 문이 세워지고 초월로 가는 경전이 완성될 것이다.
그것은 ‘혼돈의 길’이다. 거대한 주제임에도 그 수사학은
참으로 단순하다. 쉬운 형식 안에 신령한 내용!
무너져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거대한 허구!
아시아 르네상스가 온다.
박현수의 시다.
/ 김지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