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깡패질은 독립운동이 아니었다 | |||||||||||||||||||||||||||||||||||||||||||||||||||||||||||||||||||||
[문화유산답사42] '우미관'을 찾아 되새기는 〈야인시대〉 | |||||||||||||||||||||||||||||||||||||||||||||||||||||||||||||||||||||
그런데 이미 드라마 〈허준〉이나 〈왕건> 등 역사 속의 인물이나 사건을 다루는 드라마에서 불거진 문제이긴 하지만, 시청률에 민감한 드라마의 특성상 어떠한 역사 인물이나 사건 등이 '실제'와는 다르게 과장되거나 축소된 채 다루어져, 시청자들로 하여금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이런 문제는 〈야인시대〉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김두한은 깡패가 아니라 협객이었다?
문제는 과연 드라마에서처럼 김두한이 '항일(抗日) 협객'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비단 이 드라마뿐만 아니라 임권택 감독이 지난 1990년부터 1992년까지 총 3회에 걸쳐 만들어 낸 〈장군의 아들〉 시리즈에서도, 김두한은 조선 상인들을 일본 깡패들로부터 보호해 주는 '협객'이었지 '삥'이나 뜯는 깡패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실일까. 대답은 '긍정하기 힘들다'는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일제의 압제가 드리우는 상황에서 느끼는 일종의 대리만족으로서, 종로 조선 상인들이 일본 깡패들을 혼내주는 김두한 패거리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을 것이라 당시를 상상해 본다. 그러나 드라마에서 김두한 일파와 대립관계인 것처럼 비춰지는 하야시패를 순전히 일본 깡패라고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극 중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나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혼마찌(本町), 즉 지금의 충무로 일대를 주름 잡고 있던 하야시라는 인물은 이름에서 풍기는 냄새와는 달리 평안도 출신의 조선사람인 선우영빈이었고, 그의 수하에 있던 이들도 대부분 조선인이었지 일본인은 아니었다. 나아가 하야시패의 중간 보스이자 이후 김두한과 절친한 사이로 발전한 김동회씨가 1999년 MBC의 '깡패와 건달로 본 한국 100년'에 출연해 말한 바에 따르면, '장충단 대혈투' 이후 현 한국은행 네거리에 있는 중앙우체국 앞의 자전거 영업소 관리권을 김두한이 하야시로부터 넘겨받는 조건으로 김두한패가 하야시패에 흡수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김두한 자신이 직접 하야시가 자신에게 용돈으로 쓰라며 매달 천 원씩 보냈다고 말하기도 했고, 1945년 광복 이후 하야시가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김두한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한국 돈 전부와 권총, 일본도(日本刀)를 선물로 주고 갔다고 한다. 이를 보면 두 집단은 대립 관계라기보다는 일종의 공생 관계에 있었다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다만 두 집단간에 차이가 있다면, 먼저 하야시패가 김두한패보다는 조금 더 일본에 가까웠다는 사실이 하나일 테고, 김두한패는 하야시패가 상인들로부터 뜯는 '삥'의 절반만을 뜯었다는 사실이 둘 사이의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하야시패가 상인들로부터 뜯는 자릿세의 절반만을 뜯는 김두한을 보고 '참 인자하기도 하여라'라고 말해야 할까? 김두한, 동네 깡패에서 정치 깡패로 발을 넓히다
한때 아편 밀매 사건으로 미군정에 의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기도 한 김두한은, 초창기에는 잠시 좌익에 몸담기도 하지만, 결국 우익과 결탁해 각종 정치 테러를 자행하는, 해방 정국의 악역을 맡게 된다. 이를테면 이승만 등이 명예회장으로 있는 대한민주청년동맹이라는 단체의 감찰부장, 소위 백색 테러를 일삼는 행동대장이 되어 서북청년단과 함께 노조 지도자나 일반 노동자들에 대해 온갖 테러를 일삼게 된다.
또한 과거 수표교 아래서 함께 거지 생활을 했던 정진룡이 명동 일대를 장악한 이후 이들과의 다툼 과정에서 그의 일파 여럿을 비롯, 정진룡마저 죽이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 일로 인해 김두한은 1948년 미군정으로부터 사형 선고까지 받게 된다. 그러나 우익 단체들의 도움으로 같은 해 말 풀려나게 된 그는, 일개 동네 깡패보다는 좀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이 일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인 지 막무가내식 테러 행위를 여기서 그만두지 않는다. 이후 1948년 12월 19일 대통령 이승만이 국내에 있던 우익 청년 단체들을 통합해 만든 대한청년단에 들게 되고, 이어 1954년 4월에는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 최고위원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대한노총은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노동자들을 위한 단체라기보다는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노동운동을 분쇄하기 위한 단체였는데, 위원장이 '노동'과는 상관이 없는 대통령 이승만이었다는 데서 이미 이 단체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종로의 주먹왕, 국회에 입성하다
우리가 〈야인시대〉 1회 방송을 통해 알게 된 국회 오물 투척 사건도 이때쯤 일어나게 된다. 1966년 9월 15일, 당시 국내 최대 재벌이던 삼성그룹의 계열사 한국비료공업이 일본에서 사카린 원료를 밀수한 사실이 언론에 공개됨으로써 우리 사회는 큰 파문에 휩싸이게 된다. 한국비료공업이 사카린의 원료로 쓰이는 1403 포대, 시가 약 1800 만원 상당의 OTSA를 밀수해 시중에 유포시킨 사건이 바로 그것으로, 당시 국회는 본회의를 열어 '특정재벌 밀수 사건에 관한 질문' 안건을 상정·통과시키고 관계 장관들을 소환, 이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과 책임 소재 등을 추궁했다. 여야는 연일 대정부 질의를 통해 정부의 재벌 밀수 비호를 비난하고, 차관으로 들여온 자금이 어떻게 밀수품 결재에 사용될 수 있었는지 등을 따지는 한편, 삼성그룹의 관련 여부를 추궁하고 관련자 전원의 즉각 구속 및 내각 총사퇴 등을 요구했다. 대정부 질의 두 번째 날인 1966년 9월 22일 오전, 김대중 의원에 이어 마지막 질의자로 단상에 오른 한독당 소속의 김두한은, "똥이나 처먹어, 이 개새끼들아!"라고 소리치며 정일권 국무총리와 장기영 부총리 등이 앉아 있는 국무위원석을 향해 비닐 봉지에 담아 미리 준비해 온 인분을 던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 날 회의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고, 밀수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도 더 이상 진행하기 힘들게 되었다. 김두한은 의장(議場) 모독과 공무집행방해죄 등의 죄목으로 구속·기소되었고, 국무위원들은 총리공관에서 열린 임시 국무회의 후 내각 총사퇴를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이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을 두고 평가는 크게 둘로 나뉘는 듯 하다. 아무리 일을 못하고 부패로 얼룩진 사람들로 구성된 국회라고 하지만 논의 과정을 존중해야 마땅했을 국회의원이 국무위원들에게 인분 등을 뒤집어씌우는 일은 적절치 못했다는 지적과, 오히려 그 행위 자체야 올바르지 못하지만 박정희 정권의 권력 남용과 재벌 비호에 답답해하던 일반 국민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었다는 의견이 그것. 평가야 어떻든 '통 큰' 김두한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자위해야 할까. 종로 깡패 생활에 이어 파란만장한 국회의원 생활을 했던 김두한. 결국 1966년 의원직을 사퇴한 후 사업을 하기도 하고 폭력법·반공법 위반 혐의로 두어 차례 더 감옥을 드나든 후 1972년 11월 21일 향년 56세의 나이에 뇌출혈로 사망한다. 공인중개사의 도움으로 결국 '우미관' 자리를 확인하다
원래 이 건물이 들어서기 이전에도 '황금연예관'이라는 극장이 있었다고 하니 극장 자리에 다시 극장이 들어선 셈이다. 우미관은 보통 변사가 활동사진을 해설해주는 단편무성영화들을 상영했고, 이후 1928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소위 '소리나는 활동사진'인 발성영화를 상영했다. 1000명 규모의 극장이 항상 2천여 명을 넘게 수용했다고 하니 그 인기가 정말 대단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당시에는 서울 다녀왔다고 하면서 우미관 구경을 하지 못했다면 사람들이 믿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1920-1930년대를 지나며 단성사나 조선극장과의 경쟁에서 밀린 우미관은 결국 삼류 극장으로 몰락, 건물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기에 이른다. 주인이 일본인이라는 것은 알려지지 않은 반면 우미관 점원 김두한 때문에 더 유명해진 우미관, 오늘은 그 우미관을 찾아가려 한다. 우미관을 찾아가는 일은 쉬우면서도 또 쉽지 않다. 김두한에 대한 사람들의 사랑이 비정상적으로 높고 요즈음 드라마 〈야인시대〉의 주요 배경이 우미관이기도 하니 일단 종로에만 가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만 현실을 그렇지 않았다.
만약 김두한이 만주로 갔다면…. 그런데 정작 우미관 자리에 도착해 가장 먼저 드는 느낌은 김두한이라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었다. 만약 김두한이 "총을 들고 싸우는 것도 독립 운동이지만 종로의 상권을 지키는 것도 독립 운동"이라며 "우리도 거리의 독립군이 될 수 있다"고 권유하던 '쌍칼'을 물리치고 만주로만 갔더라면, 그도 시장통에서 소위 '삥'이나 뜯는 깡패가 아니라 독립군으로서 당당히 활약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다만 주먹을 매개로 한 상명하복과 '힘'이라는 절대권력에 대한 맹종, 폼생폼사라는 헛된 망상이 판치는 〈야인시대〉를 보고 있노라면, 자칫 이 드라마를 시청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부지불식간에 '저런 삶도 멋있구나' 혹은 '김두한도 독립운동을 했구나' 하는 그릇된 생각을 심어줄 지도 모를까봐 불안하기만 하다. 오늘도 아버지 이름에 똥칠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는 텔레비전 속의 김두한은 짐짓 엄숙한 걸음으로 우미관을 나선다. 일본 깡패 혼내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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