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2019년 연말에 아버지가 별세하신 뒤 매해 마지막 날은 본가로 가족들이 다같이 모여 식사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정에 새해맞이를 같이 하는게 일종의 루틴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본가가는 김에 실험 중이던 위 조합들을 그대로 들고 가서 가족들에게 아버지 유품 포함해서 다양한 만년필 시필 경험을 제공하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본가 가기 전날(12.30. 토) 어머니가 알려주신 깜짝 소식... 제가 아버지 만년필 복구시켰다고 전화로는 우선 말씀드렸는데 그게 기억에 남으셨는지 이번 4주기 제사를 앞두고 아버지 남은 짐들을 정리하시려고 잡동사니가 섞여 있는 천주머니들을 하나하나 확인하셨는데 한 주머니에서 다른 물건들 속에 있던 만년필 한자루를 추가로 찾았다고 사진을 보내주셨습니다...
으악...외관만 봐도 몽블랑~ 거기에 예전 아버지가 통통한 만년필을 사용하셨던 이미지가 남아 있었는데 지난번 복구한 몽블랑144는 전혀 그렇지 않아 헷갈렸는데 이 사진을 보고서야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아버지가 이 만년필은 크랙 때문에 새는 건지 손에 잉크가 너무 많이 묻어난다고 불편해 하셨다던 어머니 말씀과 서재 서랍에 나름 잘 보관되어 있던 파카51, 몽블랑144와 달리 잡동사니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다는 사실에 혹시 가품이어서 아버지도 딱히 관리하실 생각을 안하셨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23년 마지막 날(12.31. 일), 예정대로 본가 도착해서 가족들과 즐겁게 식사하고 이야기 나누면서 동시에 본격적인 모델 분석 및 복구에 들어갔습니다. 굳어버린 잉크에 뒤덮여 있어 헷갈렸지만 여러번 미온수에 담가 세척하고 굳은 잉크를 조금씩 풀어서 제거하면서 닙 모양을 확인하고 나사선 캡과 적절한 통통함 그리고 처음 접해본 피스톤필러 (기존 만년필들은 모두 컨버터/카트리지) 방식 기반의 몽블랑146 모델임을 확신했습니다.
처음에는 노브를 반시계 방향으로 돌려도 조금 돌다가 걸려서 '아 이게 글로만 보던 피스톤필러 내부에 오랫동안 굳은 잉크로 인한 헤드가 걸린 상황이구나' 싶었습니다. 여기서 강제로 힘주면 헤드가 찢어지거나 피스톤 부품이 부러지는 등 파손 주의사항이 생각나서 미온수에 노브 뒷면도 번갈아 담궈두면서 조금씩 시도했더니 다행히 어느순간 무리하게 힘을 주지 않아도 슥 노브가 돌아가면서 필러 펌핑 동작이 다시 가능해졌고 이후 미온수로 피스톤필러 내부 세척을 반복했습니다.
내부 부품에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 무한의 시간처럼 천천히 반복하다가 어느정도 물이 투명해진 걸 확인하고 말리면서 잠시 휴식... 이후 몽블랑 미드나잇 블루 잉크를 채운 뒤 시필을 반복하면서 몽블랑144와 느낌을 비교했습니다.
통통한 사이즈에서 오는 묵직함과 편한 그립감을 제외하곤 필감에서는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미온수 세척과정과 잉크를 넣어서 방치하면서 몸통 자체 크랙으로 인한 잉크샘이 있는지 살펴봤는데 다행히 없었고 다만 캡 끝부분 플라스틱에 2군데 크랙이 확인되었습니다. 아마도 닙이나 피드 표면에 남아있던 잉크들이 나사선이 꽉 체결되지 않았을 때 크랙 부위 통해 잉크가 새는 것처럼 나타났던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페 가입 후 1개월 정도 만년필 공부에 열을 올려서일까요? 진품이든 가품이든 아버지 유품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다양한 힌트(?)를 토대로 추리하는 만년필 탐정 마음이 커져서인지 하나하나 특징들을 확인하면서 만년필 분석 및 수리과정을 나름 "혹독" 하게 체험했습니다. +_+
소요된 시간을 계산하니 정오 무렵 본가 도착해서 가족들과 이야기하며 가볍게 시작해서 2024 새해맞이 카운트다운 몇십분 전에 마무리했으니 12시간 가까이 붙잡고 있었다는...<@_@>
알리에서 주문한 루빼가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스마트폰 카메라의 광각 최대 배율로 여러장 초점 맞춰 촬영해서 비교했는데 몽블랑144와 달리 클립 뒤 Pix 양각이 안보인다던가 캡 골드링의 브랜드 각인 상태가 뭔가 조악해 보이던 차에 마이스터튁 글자들 중 IST 철자는 표면에 생활 스크래치로 갈린 흔적에 각인 길이도 짧아서 아래 생각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_<
이것은 가품 같은 진품일까? 진품 같은 가품일까? ㅡㅠㅡ
어쨌든 생각지도 못했던 추가 만년필을 분석/수리/복구하는 시간을 경험하고 바로 연이어 2024년을 맞이하니 정말 기분이 묘했습니다. +_+
펜후드 회원님들, 모두 건강하면서 행복하시길 기원드리며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m(_ _)m
감사합니다.
첫댓글 진품으로 보이는 특징이 여럿 보입니다. 소중한 유품이니 잘 관리하시기 바랍니다.
외형부분에 대해서는 연구소에서 수리를 안하신다고 들었기에 캡 크랙 부분 수리는 다른 수리점에 의뢰를 하시던지
직접 하셔야 할 듯 합니다. 손재주가 좀 있으시다면 요령 알려드릴테니 관심 있으시면 쪽지 주세요~
진품 가능성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후 시간이 맞을 때 번개 모임이나 봄/가을 펜쇼에 들고가서 혹독 수련 중이신 회원분들에게 보여드리면서 문의드릴 생각이긴 했습니다^^; 펜 자체는 세척 복구 후에 기본적으로 잉크 충전되고 잘 써지는 걸 확인해서 캡 끝부분 외관 크랙을 메꾸는 건 세월의 흔적으로 생각하고 후순위로 두고 있긴 합니다.
대단하시네요~ 좋은 펜 잘 사용하시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지난 1차 정리 때 기존에 선물받았던 것과 아버지 유품 모두 포함해서 만년필 전용 보관함에 처음으로 담아둔 상황인데요. 확실히 펜들이 제각각 연필꽂이나 사방에 굴러다니던 시절과 달리 보관함에 딱 정리해두니 보관함을 열고 하나 골라 시필하는 과정에서 펜을 대하는 마음가짐부터 달라진 저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
아버님의 추억이 깃든 소중한 펜이라뇨ㅎㅎ
감사합니다. 신기하게 아버지가 사용하시던 펜들을 잡고 무념무상으로 이것저것 시필하고 있으면 아버지가 한창 펜들을 사용하시던 시절(노년에는 잉크 관리가 귀찮으셨는지 그냥 볼펜/연필로 주로 필기하시더라는...)에 제가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억과 남겨두신 노트 내용들이 섞여서 그 장면들이 다시 떠오르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