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제목의 책자를
원본의 약 5% 정도로 요약한 요약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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慧眼, 시대를 앞서간 선견지명의 거상들,
미래에 대한 통찰력으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라
다른 사람이 눈여겨보지 않는 곳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더 과감하게 행동하는 것은 부와 성공을 꿈꾸는 사람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백선행은 열여섯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후 자수성가해 평양을 대표할 만큼 큰 갑부가 된 입지전적인 여인이다.
백선행이 재산을 모은 과정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 단계에서 그녀는 근검절약하는 생활로 ‘작은 부’를 얻을 수 있었다. 먼저 그녀는 자신의 집 앞뒤 마당에 봉선화를 심어 꽃을 따고 씨를 받아 5일마다 장터에 내다 팔았다. 또한 질동이를 머리에 이고 음식점을 돌아다니면서 음식 찌꺼기를 얻어 와 돼지를 길렀다. 그것도 모자라 뽕나무를 가꾸어 누에를 치고, 목화씨를 발라 기름을 짜고, 물레와 베틀을 마련해 밤새도록 무명과 명주를 짜 시장에 내다 팔았다. 이렇게 해서 한 푼 두 푼 번 돈은 절대로 허투루 쓰지 않고 알뜰살뜰 모았다. 그녀는 “먹기 싫은 음식을 먹고, 입기 싫은 옷을 입고, 하기 싫은 일을 한다”는 말을 생활신조로 삼았다고 한다. 백선행은 이렇게 10여 년 동안 모은 돈으로 평양 주변의 땅을 사들였는데, 특히 흉년이 들거나 먼 곳으로 떠나는 사람들의 토지를 싼값에 매입해 재산을 늘렸다. 그러나 정작 그녀가 다른 사람이 쉽게 이룰 수 없는 큰 부를 거머쥐게 된 이유는 미래를 헤아릴 줄 아는 통찰력으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혜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뛰어난 사업가적 안목과 자질은 만달산을 매입해 일본인 사업가에게 몇십 갑절의 이득을 남기고 판 일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녀가 바위산에 불과한 만달산을 사들인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일본인들이 석회석이 많이 나는 땅을 찾아다닌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경성을 돌아보고 온 다음 현대식 건축물이 들어서기 시작하면 시멘트에 필요한 원료인 석회석이 대량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무지에 불과한 만달산이 그녀에게는 석회석이 풍부한 황금의 산으로 보였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보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보다 더 큰 부를 얻을 수는 없다.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성공을 이루려면, 남이 보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는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시대의 변화를 예측하고 행동하라
이지함은 양반 사대부 출신으로는 최초로 재물의 가치에 눈을 뜨고 직접 장사에 나서 큰 부자가 된 인물이다. 그는 물건을 사고파는 방식으로 이익을 얻는 전통적인 상술에 매달리지 않았다. 그는 생산 활동과 상업 활동을 결합하는 ‘상업적 생산경영’을 통해 재물을 모았다. 즉 자급자족하는 수준에 머무는 생산 활동이 아니라 시장에 내다 팔아 더 큰 부가가치를 얻는 경영 전략을 추구한 것이다.
이지함은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면서 구걸로 목숨을 연명하는 백성들을 모아 당시로서는 아주 독특하고 파격적인 생산 시스템을 통해 생계를 마련하도록 했다. 먼저 그는 큰집을 지어 어려운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사 · 농 · 공 · 상 중에서 일정한 직업을 선택하도록 설득한 다음 직접 가르침을 주었다. 이처럼 이지함은 일종의 공장제 수공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선진 경영 방식을 16세기 조선 사회에 과감하게 도입한 선각자였다.
토정 이지함처럼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예측한 상술로 막대한 부를 쌓은 사례도 있지만, 미래의 변화를 제대로 보지 못해 힘겹게 모은 재물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리는 경우 역시 적지 않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미두왕’으로 이름을 날린 김복천의 몰락이 바로 그와 같은 사례다.
어렸을 때부터 남의 가게에서 점원을 하며 어렵게 돈을 모은 김복천은 오랜 점원생활을 통해 체득한 상술을 밑천 삼아 벌인 곡물 장사로 거부가 되었다. 그가 체득한 상술은 다름 아닌 소비자 수요와 시장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 곡물 거래에서 시세 차익을 남기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김복천의 성공 신화는 1920년대 말 전 세계를 휩쓴 대공황의 소용돌이 속에 무참하게 짓밟히고 만다. 미국에 이어 일본에 불어 닥친 경제 불황으로 쌀값이 폭락하자. 김복천은 더 큰 시세 차익을 남길 목적으로 자신의 전 재산은 물론 빚까지 내어 쌀을 사들였다. 그러나 장기간의 대공황으로 쌀값은 더욱 폭락했고, 이 때문에 김복천은 창고에 쌓아 둔 엄청난 양의 쌀을 헐값에 내다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빚을 갚을 돈조차 제대로 건지지 못한 김복천은 몰락하고 만다.
위기와 기회는 항상 함께 다니기 때문에 부와 성공을 꿈꾸는 사람은 그 경계에 서 있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변화를 잘 예측하고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100% 성공을 보장하는 완전한 기회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경영자는 항상 시대 변화와 시장 흐름 속에서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볼 줄 알아야 한다.
시스템과 매뉴얼로 승부하라
세계화 시대, 다국적 기업의 글로벌 경영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1천 년 동안 세계제국을 유지한 로마식 경영 비결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고 있다. 심지어 한국의 삼성과 포스코, 미국의 GE, 홍콩의 청쿵그룹, 일본의 혼다처럼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다국적 기업들의 경영 시스템과 전략은 모두 로마식 경영법과 유사하다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그럼, 무엇을 로마식 경영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바로 미천한 계급 출신의 인물은 물론 자신의 적까지도 포용하는 개방성, 개인의 능력을 우선시하는 실력주의, 현장체험을 중시하는 인재교육 시스템과 리더십, 잘 갖추어진 시스템과 표준화된 매뉴얼 등이 로마식 경영법을 설명하는 핵심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상인 집단으로는 크게 경강(한양)상인, 개성상인, 의주상인, 평양상인, 동래상인을 들 수 있다. 이들 중 개성상인은 전국을 연결하는 유통 시스템을 갖추고, 조선 팔도의 상권은 물론 대중국 및 대일본 무역을 장악했다. 그런데 개성상인이 어떻게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숱한 도전자들의 경쟁을 물리치고 시장의 지배자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풀어가다 보면, 그들만의 독특한 상인 조직 시스템 및 경영 기법과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로마식 경영법의 장점 중 하나인 잘 갖추어진 시스템과 표준화된 매뉴얼의 특징과 아주 비슷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라
무일푼의 보부상에서 시작해 한창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 유기 공장을 차리고, 유기 공장이 평안도 상계를 거의 독점해 막대한 이익을 거두고 있는 시기에 새롭게 무역업으로 진출한 이승훈의 사례를 보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 끊임없이 주력 사업을 바꾸는 경영 능력이야말로 지속가능한 키워드임을 알 수 있다.
이승훈은 15살 어린 나이에 유기 숟가락 한 봇짐을 짊어지고 황해도 일대를 돌아다니는 보부상이 되었다. 정주 유기그릇의 명성에다 탁월한 장사 수완까지 얹어 이승훈은 적지 않은 재물을 모을 수 있었으나 24세 때 과감하게 보부상 생활을 접어버렸다. 당시 그가 가지고 있던 자금으로는 제대로 된 유기 공장 하나 차리기 힘들었다. 누가 보기에도 정주에서 가장 큰 유기 공장을 세우겠다는 그의 계획은 ‘헛된 꿈’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동안 쌓은 지식과 유통 경험을 활용한다면 정주 제일의 유기 공장과 상점을 운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결국 이승훈은 평안도 철산의 부자 오희순을 찾아가 유기 공장과 상점 설립에 필요한 자본금을 빌려 정주 제일의 유기 공장을 차릴 수 있었다.
24살(1887년)의 젊은 나이에 정주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유기 공장과 상점을 차린 이승훈의 성공 신화는 불과 7년도 지나지 않아 무너지고 만다. 1894년에 일어난 청·일 전쟁의 소용돌이가 그의 유기 공장과 상점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오희순에게 자금을 빌려 사업을 하던 사람들은 모두 줄행랑을 놓았는데 오로지 이승훈만은 오희순을 찾아가 반드시 빚을 갚겠다고 약속했다. 그러한 이승훈의 당당한 태도와 신용에 감동한 오희순은 자신의 자금을 무제한으로 가져다 쓸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이 덕분에 이승훈은 빠른 시간 안에 유기 공장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그런데 평양과 진남포의 유기 상점을 드나들며 국제 무역 현장을 목격한 이승훈은 당시 막 조선에 수입되기 시작한 석유와 의약품이 큰 이익을 남길 미래의 성장 산업이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이승훈은 항상 ‘장사의 흐름을 재빠르게 살핀 다음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남보다 앞서 행동하는 것’을 경영의 원칙으로 삼았다. 그는 곧바로 서울과 인천을 오가며 새로운 사업을 구상했고, 마침내 석유와 의약품을 수입해 판매하는 ‘종합 무역 상사’를 차렸다. 그리고 그가 예측한 대로 국내의 석유 수요는 연료 혁명이라고 불릴 정도로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또한 그는 독일상사 세창양행에서 해열진통제이자 말라리아 치료제인 금계랍을 수입해 판매했는데, 몇 년 동안 말라리아가 전국을 휩쓰는 바람에 큰 이익을 남겼다. 이러한 결과는 모두 미래의 변화를 예측하고 과감하게 주력 사업을 변경한 이승훈의 경영 능력이 낳은 성공 신화였다.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에 대비하라
경영자의 진정한 능력은 위기관리와 위기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미래 전략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경영자의 덕목을 갖춘 조선의 부자를 가려 꼽으라면 가장 먼저 명문 양반가 출신의 빙허각 이씨와 서유구를 들 수 있다. 한양 최고의 갑부 소리를 듣던 달성 서씨 가문은 1806년 집안사람인 서형수가 옥사 사건에 연류되는 바람에 정치적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이 집안의 정치적 몰락은 당연히 경제력 또한 약화시켰고, 자칫 온 집안이 궁벽한 사대부로 몰락할 수도 있는 위기가 닥쳐오자 빙허각 이씨는 손수 차밭을 경영하는 한편 그동안 틈나는 대로 배우고 익혀온 서책의 정보와 지식을 총동원해 가문의 경제력을 복원할 프로젝트를 진행시킨다.
빙허각 이씨는 무엇보다도 먼저 더 이상 경화사족의 신분적 특권을 누릴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냉철하게 인정했다. 그리고 조선 사회가 사회적 신분과 지위가 아닌 돈이 지배하는 사회로 급속하게 이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다. 조선시대 명문 사대부 출신 부자들은 스스로 생산이나 상업 활동에 종사해 경제력을 쌓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적 혹은 경제적으로 몰락하면 다시 재기하기 힘들었다. 실리보다는 명분에 집착하고, 직접 돈을 벌거나 생계를 꾸리지 않아 경제력이 취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빙허각 이씨와 서유구는 명문 사대부 출신이라는 허물을 벗어던진 채 과감하게 생산 현장에 뛰어드는 한편 저술을 남기는 방식으로 집안의 경제력을 복원할 수 있는 미래 경영 전략을 세웠다.
開拓, 블루오션의 지배자들
개척하지 못할 시장은 없다
최근 몇 년 동안 경영 전략의 최대 화두는 ‘블루오션(blue ocean)’이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블루오션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자신의 경쟁자는 물론 소비자들조차 모르는 전혀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야 하는 관문을 넘어서야 한다. 블루오션은 기존의 시장을 지배하기 위한 전략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자신만의 시장을 창출하는 전략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상인들 가운데에서도 블루오션 전략으로 큰 성공을 일군 사람이 적지 않다. 그중 이 경영 전략을 가장 뛰어나게 기획하고 실행에 옮긴 사람으로는 단연 소현세자빈 강씨가 돋보인다. 상업에 뛰어들 수 없는 신분적 한계와 제약으로 따지자면 더 말할 수 없는 세자빈의 몸으로, 어느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한 17세기 당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제 무역 시장을 새롭게 개척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제16대 임금인 인조의 며느리였던 강빈은 17세에 소현세자의 아내가 되었다. 그 후 10년이 지났을 때, 조선은 청나라와의 전쟁(병자호란)에서 패배해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었고,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를 따라 심양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강빈은 자신의 불행에 결코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철의 여인이었다.
평소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을 오랑캐로 천시해온 풍조와 병자호란의 패배 후유증 탓에 17세기 조선의 양반 사대부나 조정 관료들은 청나라와의 접촉을 의도적으로 회피했다. 이렇듯 명분과 체면에 사로잡혀 있던 탓에 조선은 정작 대제국으로 성장하고 있던 청나라와의 국제 무역으로 얻을 수 있는 막대한 경제적 이득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강빈은 왕족이나 사대부가 금과옥조처럼 떠받드는 대의명분과 체면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녀는 대제국 청나라와의 국제 무역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조선의 실제 이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만 판단하고 행동했다. 그리고 아직 불모지나 다름없는 조선-청나라 간 국제 무역 시장이 무한한 경제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녀는 청나라 현지에서 조선의 선진적인 농사기술 및 영농법을 도입한 곡물 생산 체제를 구축해 청나라 시장에 진출한다면 국제 무역을 능가하는 막대한 재물을 모을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그녀는 유목민족 출신인 탓에 농경에 익숙하지 않은 여진족(청나라)의 상황을 이용하면 많은 수확과 엄청난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행에 옮김으로써 막대한 국부를 창출한 조선사 최초의 여성 CEO였다.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라
누구나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기존의 사실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사고력이 바로 ‘발상의 전환’이다. 조선의 부자들 중 18세기 정조 시대에 제주 출신의 여성으로 거상이 된 김만덕의 경우가 이 ‘발상의 전환’ 개념에 가장 합당한 인물인 듯싶다.
제주도는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지리적 한계 때문에 상업이 크게 발달할 수 없었다. 그러나 김만덕은 제주도에서만 나는 특산품을 육지에 내놓아 판매하고, 제주도에서는 나지 않는 물품을 육지에서 사 들여와 판매한다면 자신이 독점적인 시장 지배자의 지위를 누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김만덕은 제주도의 특산물인 녹용, 귤, 전복 등을 시세 변동에 따라 때맞춰 육지에 내다 팔고 또한 제주도 사람 특히 소비 규모가 큰 양반 사대부와 부유층이 필요로 하는 사치품이나 장신구 등을 육지에서 사들여 오는 방식으로 재산을 불려 나갔다. 막대한 재물을 모은 김만덕이 그 후 제주도에 크게 흉년이 들자 전 재산을 내놓아 육지에서 쌀을 사들여 제주 백성들을 구제했다는 후일담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선행 덕에 그녀는 정조로부터 내의원 의녀반수라는 벼슬을 하사받고, 육지에 나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제주도 여성의 신분임에도 한양을 구경하고 금강산까지 유람하는 영광을 누렸다.
경쟁자보다 먼저 시작하라
해방을 5년 앞둔 1940년, 서울 재산가의 1년 소득 순위를 발표한 기록에서 대망의 1위에 오른 인물은 ‘조선의 황금대왕’이라는 별호를 갖고 있는 최창학이다. 최창학은 금맥을 찾겠다는 한 가지 생각으로 젊은 시절부터 한반도 북부 지역의 산천을 헤매고 다니다가, 30대 중반의 나이에 접어든 1923년 자신의 고향 근처인 평안북도 구성군 조악동에서 마침내 금광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 최창학이 발견한 금광은 전국 최고의 금맥을 자랑하는 광산이었고, 이 때문에 그가 설립한 삼성금광은 운산금광 및 대유동금광과 더불어 조선을 대표하는 3대 금광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황금대왕 최창학의 첫 시작은 금맥을 발견하고 금광을 개발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업 전략은 단순히 금을 캐내어 판매하는 데 머무르지 않았다. 정작 그를 조선 제일의 갑부로 만들어 준 것은 광구 임대 경영 사업과 자신이 발견하거나 인수해 개발한 금광들을 일본 굴지의 재벌에게 큰 이익을 남기고 매도한 인수합병 사업이었다. 최창학의 신화는 금광 사업에 대한 뛰어난 안목과 더불어 다른 경쟁자들보다 앞서 투자해 시장을 선점하는 전략이 있었기 때문에 탄생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영 전략 때문에 그는 자신의 회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자본을 갖춘 일본 재벌과의 협상에서도 끝까지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숨겨진 잠재력을 발굴하라
역사 기록에 따르면 개성 사람들은 신라시대부터 인삼을 팔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인삼은 기후와 토양 그리고 재배 기술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사람의 손으로 인삼을 대량으로 재배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개성상인들은 인삼 시장의 절대 권력자는 아니었고, 개성 인삼 역시 조선 인삼을 대표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당시 개성에 인삼 씨를 들여와 대규모 재배 기술을 개발한 사람은 최문이라는 보부상이었다. 특히 최문은 대규모 인삼 재배와 더불어 인삼을 홍삼으로 가공하는 기술까지 개발해 이른바 ‘개성산 명품 홍삼’을 만들어냈다.
최문이 개발한 홍삼 제조 기술은 조선의 인삼 산업에 연쇄적인 파급 효과를 낳았다. 먼저 오래도록 보관해도 모양이나 약효가 변하지 않는 가공 기술의 발달은 인삼을 대량 재배할 수 있는 물꼬를 텄다. 더욱이 홍삼이 멀리 청나라와 일본에까지 널리 명성을 얻게 되자 개성의 인삼재배와 홍삼 가공 기술은 더욱 발전하고 확산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의 인삼 산업과 시장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더불어 이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엄청난 규모로 늘어났다. 최문과 개성 인삼의 경우는 기술혁신을 통해 숨겨진 시장과 고객의 가치를 발견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人才, 인재활용의 귀재들
뛰어난 인재는 시스템으로 단련된다
기업의 장기 생존과 지속 성장은 모든 경영자들의 지향점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를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하나로 정리되기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되는 요소가 있으니 그것은 사람, 즉 인재다. 인재를 얻느냐 혹은 잃느냐, 인재 시스템을 갖추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기업의 성공과 실패 더 나아가서는 생존과 몰락이 판가름 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개성상인들이 500년 조선시대 동안 단 한 순간도 시장 지배자의 지위를 빼앗기지 않았던 이유 역시 그들 나름의 독특한 인재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성상인은 말단의 사환에서부터 맨 윗자리의 사용인에 이르는 그들만의 독특한 상업 조직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이 조직 시스템의 특성상 말단의 사환으로 시작해서 사용인의 위치에 오르는 과정은 멀고도 험난했다. 그들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부여되는 어떤 특혜나 특권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개성상인은 자신들과 경쟁하는 여러 상인 집단보다 훨씬 우수하고 풍부한 인재들을 갖출 수 있었다. 개성상인의 교육 시스템과 인재 양성 프로그램은 그 장점 때문에 조선 말기에 들어와서는 북부 지역을 기반으로 한 대부분의 상인집단들에까지 자연스럽게 확산되었다.
투자할 만한 사람에게는 절대로 아끼지 마라
경영 전략과 리더십에 관한 논의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 중의 하나가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과 능력의 중요성’ 이다. 그러나 정작 현실에서 인재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는 리더를 찾기란 쉽지 않다. 숙종 시대 남산골의 가난한 선비인 허생은 마누라의 등살에 못 이겨 10년 독서할 뜻을 접고 장사를 해볼 요량으로 당시 한양 제일의 부자 변씨(변승업의 조부)를 찾아가 길게 절을 한 후, 앞뒤 설명도 없이 무조건 만 금을 빌려달라고 했다. 당시 그의 행색은 비렁뱅이나 다름없었다. 겉모습만 본다면 만 금이 아니라 엽전 한 닢도 빌려줄 가치가 없는 몰골이었다. 그런데 변씨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만 금을 허생에게 선뜻 건네주었고, 허생은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변승업의 조부에게 만 금의 재물을 빌린 허생은 과일을 매점해 판매하는 도고 활동으로 열 배의 이익을 남겼다. 그리고 제주도에 들어가 망건의 재료인 말총을 모두 사들이는 방법으로 또한 열 배의 이익을 챙겼다. 그 후 변산의 도적 수천 명을 모아 무인도로 들어가 농사를 지어 얻은 쌀 수천 석을 큰 흉년이 든 일본의 속주 장기도에 내다 팔아 은 백만 냥을 거두었다. 그제야 비로소 허생은 무인도를 떠나 온 나라를 돌아다니며 가난하고 하소연할 곳 없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도왔다. 그렇게 하고도 10만 냥이 남자, 허생은 남은 돈을 들고 변씨를 찾아가 전날 빌려간 만 금의 열 배가 되는 10만 냥을 갚았다. 이후 변승업의 조부는 허생에게 받은 10만 냥으로 한양 제일의 부자를 넘어서 나라 안의 최고 부자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국적과 출신을 묻지 말고 인재를 등용하라
글로벌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에도 CEO의 능력보다는 국적과 출신을 따지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더욱이 외국 출신 CEO가 경영권이나 지휘권을 갖는 일을 마치 외국 세력에게 점령당한 사건처럼 굴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경쟁자인 일본인의 장점을 아무런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본인 인재를 적극적으로 발탁한 최남의 사례는 좋은 본보기가 된다.
당시 종로에서 덕원상회를 운영하고 있던 최남은 일본인이 세운 백화점에 맞서는 조선인 최초의 백화점을 갖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최남은 당시 서울에 있던 백화점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미쓰코시 백화점을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상점들을 조사하고 손님들을 관찰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정작 가장 중요한 백화점 운영 시스템과 특유의 서비스 및 유통기법을 배울 길이 없었다. 몇 개월 동안 전전긍긍하며 세월을 보낸 최남은 그동안 공을 들여 사귀어 놓은 일본인 점원 와타나베를 스카우트하기로 결심한다. 와타나베는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7년이나 근무한 경력을 지닌 베테랑 점원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미쓰코시 백화점 점원이라는 좋은 이미지와 함께 수많은 단골 고객을 확보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받는 월급보다 30%를 더 인상해주는 한편 먼저 덕원상회의 지배인으로 고용한다는 조건으로 와타나베를 스카우트하는 데 성공한다.
와타나베는 독특한 서비스와 마케팅 기법으로 덕원상회를 일약 ‘종로 최고의 가게’로 만들어 놓았다. 또한 미쓰코시 백화점 시절 쌓아놓은 좋은 평판과 이미지 덕분에 일본인을 비롯해 수많은 고급 손님들까지 덕원상회를 찾았다. 그는 일본인이라는 장점을 활용해 직접 일본 공장에서 최남이 운영하는 덕원상회로 물품을 납품하는 독자적인 유통망을 개척했다. 와타나베를 기용해 백화점 설립에 필요한 기반을 갖춘 최남은 1931년 마침내 조선인 최초의 백화점인 동아백화점을 세울 수 있었다.
戰略, 마케팅과 전략의 승부사들
기다리지 말고 찾아가라
봇짐장수인 보상과 등짐장수인 부상을 합쳐 부르는 보부상(부보상)은 삼국시대의 기록에도 등장하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상인 계층이다. 발품을 팔아 물건을 파는 장사꾼답게 이들은 무엇보다도 ‘소비자를 기다리지 않고 직접 찾아다니는 상술’을 최고의 가치이자 미덕으로 여겼다. 보부상의 상술이란 다름 아닌 ‘시세 차익’과 ‘사람과 물품이 모여드는 집산지나 교통 요충지’를 찾아 끊임없이 떠돌아다니는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품을 이고 지고 이익을 좇아 이곳저곳 정처 없이 떠도는 특성 때문에 보부상들은 상술 못지않게 상도를 중요시했다. 특히 그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바라고 시장 및 유통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거짓말과 속임수로 물품을 판매하는 일 또는 동료 보부상이나 소비자들을 함부로 대하는 행동을 엄격하게 처벌했다. 보부상은 4대 강령 즉 ‘물망언(함부로 말하지 말라), 물패행(패악무도한 행동을 하지 말라), 물음란(음란한 짓을 하지 말라), 물도적(도적질을 하지 말라)’과 조직 규율에 따라 언제 어느 곳에 있더라도 상업 윤리를 기준 삼아 장사를 했다. 그 상업 윤리란 다름 아닌 상품과 더불어 소비자에게 “자신의 믿음과 인격을 함께 판매하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한 번 장사해 남기는 이익보다는 상품을 팔고 맺은 소비자와의 관계를 더욱 중시하라는 보부상 특유의 상술이 낳은 상업 윤리이기도 했다.
突破, 위기를 극복한 돌파의 거상들
실패와 역경을 두려워하지 말라
조선의 부자 중 이용익과 최봉준의 성공 사례를 보면 “크게 실패한 경험이 없다면 결코 크게 성공할 수 없다”는 격언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등짐장수로 시작해 훗날 고종 황제로부터 충숙공이라는 시호까지 하사받은 이용익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함으로 거부가 된 사람이다. 그는 17살 때부터 무거운 소금 짐을 등에 지고 두만강을 건너 연변까지 가서 장사를 했다. 나중에는 멀리 러시아까지 드나들며 성냥을 사 와 북청과 회령 일대에 파는 등 온갖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조선은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는 개항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데 당시 러시아 상인들이 무엇보다도 눈독을 들인 물건은 금이었다. 이 때문에 함경도 사람이라면 너나없이 몰래 금을 캐 러시아 사람들에게 팔아넘기는 이른바 ‘잠채’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용익 또한 소금장수로 번 돈이 조금 모이면 금을 찾아 나서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그러나 손에 쥔 소득은 없이 금을 찾아 헤매 다니던 이용익은 어느 날 단천 고불티 고개에 있는 폐금광에 관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이 폐금광은 금맥이 풍부한 곳인데, 어찌된 일인지 이곳에서 금을 캔 사람들은 모두 횡액을 당했다는 소문 때문에 내팽겨쳐 있는 상태였으나 그는 오히려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야 말겠다는 굳은 마음을 품고, 홀로 망치와 정을 든 채 고불티의 폐금광에 들어선 이용익은 열심히 금맥을 찾아 다녔다. 그러나 달이 지나고 해를 넘겨도 금맥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용익은 연속되는 실패와 시련 앞에 굴복하지 않고, 오로지 망치 하나와 정 하나에 의지한 채 생활을 이어나갔다. 4년 동안의 폐금광 생활은 그에게 온갖 실패의 아픔과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고 자신이 실패한 이유를 분석하고 다듬는 방식으로 점점 더 금맥에 다가갔다. 마침내 이용익은 24살이 되는 1877년에 고불티 폐금광에서 2관6돈중의 금을 캐낼 수 있었다.
2관6돈중의 금을 캔 이용익은 보통 사람들처럼 러시아 상인을 찾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금을 들고 한양으로 향했다. 그리고 당시 명성황후의 조카로 권세를 떨치고 있던 민영익의 집을 찾아가 자신이 캔 금은 임금님의 땅에서 나는 임금님의 재물이니 모두 나라에 바치겠다고 말했다. 이용익의 사람됨을 눈여겨본 민영익은 그를 중용했고, 이후 전국 팔도의 보부상들을 지휘하는 중책을 맡겼다. 이로써 이용익은 백달원 이후 정치적으로 가장 출세한 보부상이 되었다. 만약 실패가 두려워 금 채굴을 중단했거나 어렵게 얻은 성공에 만족해 러시아 상인들에게 금을 팔아 안락한 생활을 누리려고 했다면, 이용익은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오늘날까지 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불확실할수록 공격적으로 투자하라
가난에서 벗어나 부자가 되는 최상의 방법은 무엇일까? 사마천은 “농업이 공업만 못하고, 공업이 상업만 못하다”면서 비단에 수를 놓는 일보다는 저잣거리에서 장사하는 것이 더 낫다고 했다. 그는 사람들이 최하류의 생업이라고 하는 상업이 가난한 사람들이 부를 얻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했다.
국제 무역으로 거대한 재물을 쌓은 조선 상인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임상옥은 청나라와의 인삼 무역권을 독점해 부의 규모 면에서 어느 누구도 오르지 못한 독보적인 위치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임상옥이 태어난 의주는 만상의 본거지로 조선-청나라 간 국제 무역의 거점도시였다. 임상옥이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 북경에 드나들며 본격적인 대청 무역에 나선 나이는 18살이었다. 그러나 임상옥이 만상을 따라 연경을 드나든 첫 10년간은 뼈아픈 실패와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는 쓰라린 경험들을 통해 국제 무역에서는 무엇보다 신용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는 상도와 더불어 국제 무역 시장이 움직이는 원리 곧 상리를 깨달았다.
그는 43세 때인 1821년, 대규모 인삼 거래를 성사시킬 목적으로 청나라로 가는 사신 길에 동행했다. 그런데 임상옥 일행이 북경에 도착해보니 북경의 상인들이 조선 인삼을 싼 값에 매입하기 위해 일제히 ‘불매 동맹’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임상옥은 자신의 인삼은 물론 팔리지 않는 다른 상인들의 인삼까지 사들인 후, 청나라 상인들에게 “인삼을 모두 불태워 버리겠다”고 포고했다. 청나라 상인들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임상옥이 인삼을 불태운다는 현장에 나타났다. 그런데 그는 실제로 그 많은 인삼을 쌓아두고 불태우기 시작했다. 이에 놀란 청나라 상인들은 그를 적극 만류하고 나섰고, 임상옥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종전 가격보다 더 비싼 가격으로 인삼을 모두 처분했다. 그것은 손해를 보더라도 한번 내뱉은 말에 대한 신용은 반드시 지킨다는 상도와 인삼을 살 수밖에 없는 청나라 상인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한 뛰어난 장사수완 곧 상리에다가 “상황이 불리하고 불확실할수록 공격적으로 투자함으로써 큰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전략이 빚어낸 승리였다.
강력한 적을 상대하려면 전략적으로 제휴하라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법칙은 국가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기업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세계 시장을 둘러싸고 한때 적대적 경쟁자였던 기업들이 상호 이익을 위해 전략적으로 제휴하는 일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조선시대 말기 조선인 기업가들에게 가장 큰 위협은 물밀듯이 밀려드는 일본 제품의 시장 잠식이었다. 근대적인 대량 제조 시스템을 갖춘 일본의 공장에서 쏟아져 나온 값싸고 품질 좋은 물건들은 조선인의 소비 및 생활 방식을 뒤흔들어 놓았다. 특히 조선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애용해온 생활필수품 중 놋그릇은 일본제 사기그릇의 공세 앞에 맥을 못 추고 있었다. 놋그릇을 생산, 판매한 유기 공장과 상점을 운영해 한때 큰 부를 일군 이승훈은 일본제 사기그릇의 시장 잠식으로 조선의 그릇 상인들이 몰락하고 있는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조선제 사기그릇을 생산해 일본제 사기그릇이 잠식한 그릇 시장을 되찾아온다는 사업 구상을 세웠다. 그러나 혼자의 힘만으로는 막강한 자본력을 갖춘 일본 사기회사와 시장에서 경쟁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이승훈은 한때 자신의 경쟁자이기도 했던 서북 지역 그릇 제조업자들과 손을 맞잡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이승훈이 조선제 사기그릇을 대량 생산할 ‘평양 자기회사’를 개인 소유가 아닌 주식회사로 설립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승훈은 근대적인 주식회사 시스템을 적극 활용해 연합 및 제휴 상대를 확대해나가면서, 일본제 사기그릇이 잠식한 그릇 시장을 하나하나 되찾아 왔다. 이승훈의 경영 전략 덕분에, 1908년 자기 생산을 개시한 평양 자기회사는 일본이 조선을 강제합방하기 전 2년 동안 급속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商道, 이치와 도리를 알고 행한 시대의 리더들
번 만큼 베풀어라
부는 이루기도 어렵지만 지키기는 더욱 어렵다. 그것은 사회와 더불어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이다. 재물로는 재물을 지킬 수 없지만, 민심으로는 재물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부자 중 민심으로 재물을 지킨 대표적인 경우로는 단연 경주의 최 부잣집과 구례 운조루의 류 부잣집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각각 영남과 호남을 대표하는 만석꾼 부자였다.
조선 시대의 부자들 중 오늘날까지 부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사람이나 집안은 거의 없다. 부의 흐름이나 경제적 변동을 잘못 헤아려 재물을 잃은 사람도 많지만 19세기를 뒤흔든 농민항쟁과 민란의 소용돌이 혹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혼란을 겪는 과정에서 경제외적인 이유로 재물을 잃은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류 부잣집은 구례 일대의 대지주였던 만큼 재물과 대저택은 물론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는 위기를 숱하게 치러야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류 부잣집은 빨치산에 가담하고 있던 집안의 머슴이나 소작인들이 적극 나서 방어해주었기 때문에 재앙을 피할 수 있었고, 대저택 운조루 역시 멀쩡하게 본모습을 지킬 수 있었다. 대지주에 대한 머슴이나 소작인들의 분노와 저항이 어느 때보다 격렬했던 시기에 호남 최고의 부자라는 소리를 들은 류 부잣집이 화를 모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이 집안이 대를 이어 주변 사람들에게 적선을 많이 해 인심을 얻은 덕가(德家)였기 때문이다.
부와 권력을 함께 얻으려고 하지 말라
경주 최 부잣집의 가훈인 육훈의 첫 번째 가르침은 “과거를 보되 절대로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이다. 가훈의 첫 머리를 장식할 만큼 경주 최 부잣집은 부와 권력의 유착을 경계했다. 부와 권력을 함께 가지려고 했다가 자칫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면, 경제적 부를 잃는 것은 물론 가문의 몰락을 재촉할 수 있다고 여겼다. 단, 그들은 명문 사대부가에서 며느리를 얻는 방법으로 자기 가문의 체통과 명성을 유지하는 한편 권력과 너무 멀리하다 보면 뜻하지 않게 발생하는 피해를 최대한 예방했다. 이처럼 부와 권력을 함께 가지려고 하지 않으면서, 권력과 지나치게 가깝지도 또 멀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경주 최 부잣집이 수백 년 동안 부와 명성을 누릴 수 있었다.
이익은 독점해서는 안 된다
사회 양극화와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단순히 사회 갈등이나 빈곤 문제만 낳지 않는다. 그것은 기업과 사회 그리고 국가의 지속가능한 성장과 발전을 근본적으로 가로 막는 장애물이다. 조선시대 선조 때 사람으로, 놋그릇을 생산한 장인이었던 한순계는 기술 우위와 시장 지배력을 갖춘 대기업이 그렇지 못한 중소기업과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암시해준다.
한순계는 양반 가문 출신이었지만 가난했다. 그래서 그는 나이 든 어머님을 봉양할 목적으로 유기 제조 기술을 배웠다. 특히 그는 독서로 쌓은 자신의 지식과 유기 제조 기술을 접목시켜 다른 유기 장인이 생산해낼 수 없는 우수한 품질과 모양새의 방짜 유기를 만들어냈다. 더욱이 한순계는 유기 가격이 터무니없이 높아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싶어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을 감안해 당시 시장 가격보다 훨씬 낮게 유기를 판매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진행되자, 한순계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손님을 빼앗긴 한양의 다른 유기 장인과 상인들이 크게 손해를 입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방짜 유기의 신기술을 다른 유기 장인들에게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유기 공방을 찾아온 상인이나 구매자들이 그들을 찾아가 거래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다. 그렇게 하고서도 자신의 방짜 유기 가게의 판매 수익금 중 필요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친척이나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이것은 모두 “이익은 독차지해서는 안 된다”는 한순계의 철학이 낳은 결과였다.
기업의 리더보다는 나라의 리더가 되라
작은 부자는 자신의 노력으로 재물을 쌓을 수도 있고 또 지킬 수도 있으나 큰 부자는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결코 재물을 쌓을 수도 지킬 수도 없다. 큰 부자의 운명은 민심의 향방, 정세나 경제 상황 혹은 나라의 운명과 얽혀 있기 때문이다. 나라의 경제 발전과 정치·사회적 안정 그리고 문화와 소비의 발달은 부와 기업의 성장에 큰 기회이자 에너지를 제공한다. 반대로 혼란을 겪고 있거나 가난과 빈곤의 늪에 빠져 침체를 벗어나지 못한 나라의 기업과 상인은 근본적으로 성장 장애를 겪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큰 부자가 되려면 마땅히 나라의 이익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과 시장 침탈에 맞서 싸운 보부상 출신의 이용익과 조선-청나라 간 정치·경제 외교의 최전선에서 활동한 역관 출신의 김지남, 김경문은 어느 누구보다도 이러한 사실을 일찍 깨달았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일찍부터 국적이 다른 사람들과 시장 및 외교무대에서 경쟁한 경험과 노하우가 그들에게 “나라가 강해야 외국 상인과의 거래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을 수 있고, 또 세계무대를 아우르는 큰 부자와 거상 또한 출현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하겠다. 이렇듯 오늘날에도 국가와 기업의 이익과 운명은 씨줄과 날줄처럼 상호 간에 얽혀 있다. 따라서 단언하건대 국가와 국민의 이익과 운명을 무시하고서는 절대로 큰 부자가 될 수도 없고, 지킬 수도 없다.
믿음과 감동으로 경영하라
경주 최 부잣집이 수백 년 동안 부를 유지한 비결이 집안을 다스리는 가훈인 ‘육훈’과 스스로를 다스리는 처세법인 ‘육연’에 있었다는 사실 외에 또 다른 비결이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더불어 일하고 일한 만큼 나누어 갖는다”는 원칙이다.
최동량의 집안은 경주 시골 마을의 작은 부자에 불과했다. 더욱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이 집안의 삶의 터전인 경주 이조리 마을은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그는 이런 폐허 속에서 자신의 마을과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먼저 집안의 노비들에게 농사기술을 적극 보급하는 한편 개천에 둑을 쌓아 보를 만들고 새롭게 논밭을 개간하기 시작했다.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 놓고 농사기술과 수리기술을 개선해 기존의 수확량을 증대시키는 한편 농사를 짓지 않는 땅이나 버려진 황무지를 개간했다. 이때 동원된 모든 사람들에게 한 가지 약속을 했는데 그것은 자신이 소유하거나 새롭게 개간한 토지에서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수확량을 지주와 소작농이 절반씩 나누어 가지는 제도인 병작제를 실시하겠다는 것이었다. 열심히 일해 곡식 수확량이 늘어나는 만큼 더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소작농들은 너나없이 부지런히 일했고, 최 부잣집의 재물 역시 나날이 불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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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 축구 애기라면 ....ㅋㅋ
헉! 지금은 앤 만나러 나가야해서 도저히 읽을 시간이 없어요..이따가 앤 만나고 들어와서 차근차근 다시 읽을것을 약속해요..손가락 걸고..ㅋ
아마도,,,계속 이어질 겁니다.
은제 다 읽어여........자야 하는뎅...난 왜 글만 많으면 졸리지. ㅎㅎㅎ
대충 제목만 보셔도,,,ㅋㅋ
힘들엇것어요! 직접 쓰신건 아니것지요 설마.. 저같은 독수리는 상상도 못할일^^^^
그럼요...독서통신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옮겨온것이야요
어머나...이 일을 어쩐다죠? ㅎㅎㅎ
왜여?
언젠가 티비드라마 <상도>가 왜 생각나지??ㅎㅎㅎ
가슴에 새기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