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불 때기
늦가을이 되면 하루 농장일을 마치고 군불을 땝니다. 이 시간이 참 행복한 시간입니다. 요즘에는 시골 농가들도 대부분이 기름보일러를 사용하는 가정들이 많아졌습니다. 종종 난방용으로 나무 난로나 연탄난로를 사용하는 가정도 있습니다. 그러나 방에 난방용 온돌을 활용하는 가정은 많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저희 시골집은 기름보일러를 사용하지만 겨울철에 어머니와 제가 잠을 자는 방은 온돌을 놓아서 불을 땝니다. 불을 때면서 불에서 나오는 열기가 참 좋습니다. 나무를 넣고 불을 타는 모습을 바라보는 시간은 행복한 시간입니다. 나무가 불에 타서 없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인생들의 마지막 모습도 생각해봅니다. 결국 우리의 육신이라는 것도 마지막에 재가 되어 없어질 것이라는 종말론적인 생각도 해봅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여서 재로 만드는 불의 모습도 많은 것을 생각나게 만듭니다. 불을 때고 나면 방안에 온기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혼자 계실 때는 불 때는 것이 힘들기에 불을 때지 않으면 방안에는 냉기가 흐릅니다.
온기와 냉기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온기가 있으면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그런데 냉기가 있으면 마음이 차가워집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을 때는 냉기류가 흐른다는 말을 합니다. 집안 전체에 온기가 흐르도록 나는 기름보일러도도 아침과 저녁에 종종 가동합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기름을 절약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굳이 기름보일러를 작동할 필요가 있느냐고 기름소비에 돈이 들어가는 것을 염려합니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구두쇠는 아닙니다. 필요한 곳에 돈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민감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평생 배어있는 절약정신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저는 막내아들이 평생을 정유회사에 다니고 있는데 우리가 기름을 많이 소비해야지 정유회사가 잘 운영된다는 말로 어머니의 섭섭한 마음을 달래줍니다.
과거에는 부엌살림을 하는 여성분들은 식사 세끼를 준비하면서 불을 땠습니다. 불 때는 시간은 추위에 떨고 있는 몸을 녹이는 시간입니다. 그러면서 휴식을 하면서 쉬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결국 모든 물질은 불태워 없어질 것을 생각하면서 집착을 버리는 시간입니다. 늦가을이 시작되면 군불 때는 행복한 시간을 기대합니다.
풀빵과 붕어빵
어린 시절에 오일장은 시골동네에서는 소규모 축제였습니다. 그 때는 지금과 달리 동네마다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동네 분들은 10리 정도 떨어진 화령장을 갔습니다. 여름방학 때나 일요일에 장이 서는 날에는 어머니를 따라 장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옷가게에 들리면 물건 파는 장사와 이야기하면서 물건을 사지는 않습니다. 그 시간이 지겨워서 자꾸 가자고 짜증내며 졸랐지만 어머니는 자신의 시간 스케줄대로 움직였습니다. 돌이켜보면 오일장은 그 때가 어머니가 가졌던 소중한 휴식시간이었습니다. 지금 제 아내가 즐기는 아이쇼핑을 어머니도 즐겼을 것 같습니다. 어릴 때의 추억인지 몰라도 지금도 아내와 함께 쇼핑센터에 가면 사지도 않으면서 여러 상점을 들리는 것을 싫어합니다. 어떻게 보면 존재(being)와 일(doing)사이에서 일에 더 가치를 두고 있는 나의 어리석음입니다.
나의 관심은 빵집의 찐빵에 관심이 많았고 노점상에서 파는 풀빵(국화빵)에 관심이 많았고 과자가게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머니는 비싼 찐빵가게는 잘 들리지 않았고 풀빵을 사셨고 과자 가게 들려서 박하사탕을 샀습니다. 이 메뉴는 여러 해 동안 거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시장에서 먹지 않고 어머니 보따리를 들고서 집에 와서 먹었습니다. 시장터를 오가면서 참외밭이 몇 군데 있었는데 참외밭에 들려서 참외도 먹고 싶은데 들린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학교를 갈 때는 어머니와 함께 시장을 가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엄마들이 시장 간 동네 친구들과 함께 학교를 갔다 와서 오리(2킬로) 정도를 걸어서 시장을 가신 엄마의 장마중을 갑니다. 어머니가 시장에서 돌아오실 때까지 그곳에서 놀면서 기다립니다. 어머니의 장보따리를 들고서 집에서 풀어보면 메뉴는 늘 풀빵과 박하사탕입니다. 풀빵은 지금의 붕어빵과 비슷합니다. 주전자에 담은 밀가루반죽을 풀빵기계에 붓고 익힌 다음에 그곳에 팥 앙꼬를 넣은 다음 다시 밀가루반죽을 넣어서 완성합니다. 요즘 붕어빵도 비슷하게 만듭니다. 차이가 있다면 지금의 붕어빵은 풀빵보다 크기가 2배 이상은 되고 그 당시에는 10원에 5개였는데 지금은 1000원에 2개나 3개 정도입니다. 그 당시에는 숯불로 구웠는데 지금도 가스불로 굽습니다.
요즘 내가 외출해서 돌아오면 꼭 사오는 것이 붕어빵입니다. 화령장에서 붕어빵을 사면 3천원에 10개 정도를 줍니다. 어머니는 붕어빵을 참 좋아하십니다. 오면서 내가 한두 개를 먹기도 합니다. 어머니는 다른 빵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내가 사온 붕어빵을 어머니가 맛있게 드시면 모습을 보면 그렇게 행복합니다. 내가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사갖고 오시는 풀빵을 그렇게 좋아했는데 지금은 어머니가 내가 사온 붕어빵을 그렇게 좋아해서 기다립니다. 많은 세월이 흘렀네요.
내수 진작
농업에 종사하면 농기구를 활용해서 과수원이나 곡식밭에 이랑을 만듭니다. 과거에는 소를 활용해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지금은 소 대신 관리기나 경운기로 이랑을 만듭니다. 관리기나 경운기가 없으면 괭이나 곡갱이로 이랑을 만들어야 하는데 매우 힘이 듭니다.
처음에 귀농해서 관리기를 하나 샀습니다. 중고관리기인 데 40만원 정도에 샀습니다. 새 것은 180만원 정도합니다. 그런데 낡은 관리기는 여러 번 수리를 했는데 조금 사용하다보면 고장이 나서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합니다. 얼마 동안 방치해두었다가 이제는 고철로 팔아버리고 새 것을 구입해서 활용하겠다고 결정했는데 가까이서 귀농한 분이 농기구센터가 윗동네에 생겼다는 말을 듣고서 수리하게 되었습니다. 농기구수리센터 사장은 환경미화원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불미한 사건에 연관되어 실형을 살다가 출옥해서 농기구센터를 운영하면서 생활합니다.
농기구센터를 세웠지만 이용하는 사람들은 많지가 않습니다. 제가 주요고객중의 하나입니다. 중고관리기는 계속해서 비용이 들지만 농기구센터의 운영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 관리기수리비용이 더 이상 아깝지가 않습니다.
때로는 비용이 과다청구가 된다는 생각이 들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농기구센터를 활용합니다. 수리비용을 내수 진작의 일환으로 생각하니 마음이 참 편합니다. 올해에는 청포도농장을 만들었는데 이랑을 파서 흙을 올려서 그곳에 퇴비를 넣고 퍼 올린 흙과 섞어서 유기질 토양을 만듭니다. 최근에 관리기를 2번에 걸친 출장정비를 받아서 관리기를 고쳤는데 지불한 수리비가 17만원입니다. 거듭 생각해보면 비용이 예상보다 많이 들었습니다. 이 참에 새 것으로 교환할까 앞으로 계속 이 관리기를 사용하면 수리비가 얼마나 더 들 것인가 염려가 됩니다. 그렇지만 지금 버리자니 그 동안 들어간 수리비가 아까운 생각도 듭니다. 다시 복잡한 생각을 단순하게 바꿉니다. 내가 고객이 되어 그 농기구센터의 운영에 도움이 된다면 이 또한 귀한 일이 아닌가 하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어봅니다.
돌아보면 대부분의 일들은 혼자서 되는 일은 없습니다. 농사일도 그렇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주인이 주도적인 일을 하지만 과수농장을 운영하는 일에는 단계마다 여러 농기구도 필요하고 여러 사람이 필요합니다. 결국 수익도 함께 참여한 사람들과 나누게 됩니다.
가까이 포도농사를 짓는 고향 후배는 주변 사람들의 인력을 도움 받으면서 경비지출이 과다하게 되고 인부들을 관리하는 일이 힘들어서 혼자서 포도농사를 짓다가 포도봉지 씌우는 시기를 놓쳐서 포도품질이 좋지 않아서 제대로 된 포도상품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이를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눔은 때로는 손해를 본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조금만 더 생각을 넓히면 나눔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었던 것처럼 아름다운 꽃한송이도 여러 도움이 합력해서 이루어진 종합작품입니다. 어느 것 하나도 혼자서 되는 것은 없습니다.
지난 한 해 농사일을 돌아봅니다. 캠벨농장관리에 청포도농장과 고사리농장조성에 많은 인건비와 비료, 농약, 농자재, 식당비용 들이 들어갔습니다. 사용된 비용들이 서로 연결되어서 경제가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더불어 사는 곳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적이 아니라 친구들입니다. 세상은 상반적이 아니라 상보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좋은 토양 만들기
농부생활 4년차를 마쳤습니다. 여전히 초보농부의 티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농사의 핵심은 토심(땅의 힘)배양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토심배양을 한다는 말은 땅에 힘을 준다는 말입니다. 땅이 힘이 있어야 땅에 심겨진 식물을 잘 자라서 열매를 맺게 합니다. 토심배양은 농토를 유기질이 풍부한 땅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토심이 강하면 외부적인 환경이 조금 어렵더라도 좋은 수확을 얻을 수 있습니다.
토심이 강한 땅에는 곡식이나 과일나무 등 식물이 잘 자랍니다. 식물을 인간에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농사를 잘 지어서 질 좋은 수확물을 얻습니다. 인간을 잘 교육시켜서 훌륭한 인격의 사람을 만듭니다.
좋은 토양을 만드는 일을 인생에 비유해보면 훌륭한 인격을 만드는 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올바른 교육이 훌륭한 인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좋은 토양 만들기에 시간이 필요하듯 올바른 교육에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올바른 교육은 무엇인가요? 똑똑한 인간을 만드는 일일까요? 성공하는 인간을 만드는 일일까요? 변하는 세상에 잘 적응하는 인간을 만드는 일일까요? 물론 이러한 목적은 교육에 필요합니다. 그러나 참된 교육의 목적은 훌륭한 인격의 사람을 만드는 일입니다.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훌륭한 신앙인격을 만드는 입니다.
좋은 토양을 만드는 일에 필수적인 일은 잘 숙성된 퇴비를 듬뿍 주어서 흙과 잘 섞이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토양에는 생명체가 잘 살 수 있습니다. 식물의 뿌리는 그곳에 잘 자라서 풍성하게 번식합니다.
유명인사들이 생명을 마감하는 일들이 종종 발생합니다. 물론 평범한 사람들도 삶이 힘들고 괴로워지고 이 힘든 여정이 오랫동안 계속되면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갑작스럽게 닥친 한 순간의 위기 때문에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다가 갑자기 자신의 초라한 면이 드러나게 되면 그 시간을 견디지를 못합니다. 그렇기에 화려한 외형이 그 사람의 인격을 대변하지 못합니다. 참 교육은 화려한 외형을 만드는 것이 내면이 충실한 인격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참 교육에는 많은 시간과 정성이 요구됩니다.
마찬가지로 좋은 토양을 만드는 일은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좋은 식물영양제나 고급의 화학비료를 주면 일시적으로 식물생산을 증산할 수 있지만 좋은 토양만들기에는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좋은 토양을 만들기 위해 양질의 퇴비를 주는 것이 기본입니다. 이와 더불어 농부는 땅을 깊이 갈고 돌이나 자갈을 주워서 버려야 합니다. 배수로를 깊이 파서 물빠짐을 좋게 해야 합니다. 농부가 부지런히 땅을 밟으면서 땅을 사랑으로 돌봐주어야 합니다. 토심이 좋은 농토를 만들기 위해 오늘도 농부는 부지런히 땅을 밟습니다.
바이오스톡스텍회사 방문기
교제하는 친구들 중에는 신일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많습니다. 고교 3년은 짧은 시간이지만 친구들과 폭넓게 교제했던 시절이었고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결단했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동창들은 학교생활에서 소중한 은사님들과 친구들을 만났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합니다. 여러 목사님들과 선생님들에게 감화를 받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수업시간도 예배시간도 체육시간도, 수양회시간도, 방과 후에 도서관에서 보냈던 시간도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학교본관에서 좀 떨어진 보일러실 위층에 독서실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방과 후에 공부를 했는데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독서실에서 친숙해졌던 몇몇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 당시 신일고등학교는 소위 명문대학 진학률을 높이기 위해 우열반편성을 해서 운영했습니다. 우수반에 편성된 친구들은 조금 자부심이 있었고 보통반에 편성된 친구들은 조금은 서운함을 가졌던 시기였습니다. 문과 우수반에 속했던 나는 보통반 출신으로 기억에 남는 두 친구가 이재형동기와 강종구동기입니다. 이재형동기는 공주대학교 교수로 강종구동기는 충북대 수의학과교수로 교수활동을 해왔습니다. 보통반에 속했던 두 친구가 대학교수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모교인 신일고등학교의 저력을 새삼 인정했습니다.
두 친구 모두가 저희 바르실래농장의 우수고객(?)입니다. 이재형교수는 주변에 포도와 포도즙에 대한 좋은 소문을 내면서 상품판매에 일조를 했습니다. 강종구교수는 본인이 경영하는 회사에 필요한 포도를 상당히 구매했습니다.
강종구교수가 경영하는 바이오톡스텍회사는 청주시 오창과학산업단지에 소재하고 있는데 오창 근처인 청주시 오송의 한 교회에서 모임을 가진 후에 가까운 곳에 있는 친구 회사를 방문했습니다. 이 회사는 강종구교수가 충북대 수의학교수로 있으면서 6평짜리 콘테이너 건물에서 벤처회사를 시작했습니다. 이 회사는 시작은 미약했지만 20년이 지난 지금은 종업원이 300명 이상 되고 연간 1500건 이상의 제약회사의 제품과 건강식품, 백신, 치료제 등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검증하는 국내굴지의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강교수는 올 해 충북대교수직은 정년퇴직하지만 회사는 계속 경영합니다. 이 회사의 역량이 해외에서도 알려져 일본 등 국외에서도 여러 제품의 검증의뢰가 많이 들어오는 자랑스러운 기업이 되었습니다. 물론 회사를 경영하면서 어려움도 많이 있었지만 강종구 친구는 잘 극복했습니다.
푸짐한 저녁식사를 대접받으면서 인간승리의 귀한 현장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요즘에는 일자리창출이 애국하는 일인데 귀한 고급일자리를 많이 창출한 애국자라고 격려해주었습니다. 창조적인 생각과 도전정신이 귀한 일을 만들어냈습니다.
강종구교수의 바이오스톡스텍회사가 조국과 지구촌의 건강증진을 위해서 아름답게 사용되도록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추억의 둘레길
주일에 시골 금산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교회에서 식사한 후에 가까이에 있는 고향근처에 둘레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 지역에 농촌 둘레길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가벼운 차림으로 떠났습니다. 바쁜 농사철에는 분주하게 지냈지만 겨울철이 되니까 조금은 한가하고 마음에 여유가 생겼습니다.
4시간 정도 걷기로 작정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가까운 곳에 있는 포도농장에 둘러서 어떻게 농사를 지었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가까이서 귀농한 가정도 멀리서 지켜보았습니다. 한 건축업자가 귀촌을 해서 집을 잘 지었습니다. 불편한 부인을 간호하기 위해서 딸이 와서 함께 살았는데 함께 돌보던 노인 남편은 먼저 세상을 떠나고 딸이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조금 지나서 어린 시절에 우리 밭이었던 곳을 들렸습니다. 그곳에는 큰 감나무가 두 그루가 있었고 큰 호두나무와 작은 감나무도 있었고 대추나무와 큰 밤나무도 있었습니다. 그곳은 어린 나에게는 보물단지 같은 곳이었는데 오래 전에 아버님이 자녀들의 학비를 위해서 60만원에 팔았습니다. 그 땅을 팔면서 아쉬워했던 아버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장자불가는 길은 한가했습니다. 어린 시절에 이 도로를 따라 종종 형제들과 함께 장자불 동네에 살던 아버님의 양누님(고모님)댁을 방문했습니다. 이 길을 한창 걸어올라가면 중간에 성황당 소나무가 있었습니다. 이곳은 약간은 성스럽게 보이는 곳이었습니다. 종종 마을 분들은 이 소나무밑에서 마을제사를 드리곤 했습니다. 그 당시는 비포장 신작로길은 이제 확장되어 포장도로가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그곳을 지날 때 돌을 던지면서 마음속의 소원을 빌기도 했습니다.
그곳을 조금 지나 배나무지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는 큰 배나무가 있습니다. 돌배나무인데 배는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곳은 삼거리길이어서 오른쪽으로 가면 장자불동네로 가고 왼쪽으로 가면 갈골 동네를 지나 충청북도 보은군 외속리면으로 갑니다. 그곳을 계속 지나면 법주사가 있는 속리산입구까지 가게 됩니다.
장자불 동네까지 갔습니다. 이곳은 어린 시절에 소풍을 오기도 했습니다. 소풍갔을 때 고모님이 물 길러 와서 만나기도 했습니다. 내가 초등학교 졸업할 무렵에 고모님은 마을에 있는 남성과 눈이 맞아서 타지역으로 살림을 차려서 갔습니다. 이 고모님은 아들 하나를 두고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서 젊은 과부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고우셨던 고모님은 친조카처럼 저희 형제들을 대해주셨습니다.
고모님은 아들을 일찍 장가보내고 아들 내외와 살다가 늦은 나이에 새 남편을 만나 동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렇게 늙은 사람도 혼자 살다가 뒤늦게 새살림을 차리기도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그 당시 고모님 나이가 40대 초반 나이였으니까 젊은 나이였습니다. 한창 여성으로 왕성한 시기였는데 나는 한창 철지난 노인정도로 생각했으니 어린시절 나의 생각이 철부지였지요.
30호 이상 살던 동네가 40여 년 전에 화전민을 소개할 시기에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고서 이곳에 살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났습니다. 그 때는 거의 산꼭대기까지 밭을 만들어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주로 감자와 보리, 고추, 수수, 콩, 팥 등의 농사를 지었습니다. 부지런한 농부들은 오일장이 되면 그 동안 수확한 곡식을 머리에 이거나 지게에 지고 시장터에 팔고 생필품을 사서 돌아오곤 했습니다. 지금은 산꼭대기까지 늘려있던 화전민 밭은 울창한 산림으로 바뀌어서 들어가지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 동네에는 초등학교 친구 둘이 살았습니다. 김원석 하고 안종희 친구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에 고모님 댁에 놀러 와서 늦은 밤까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달빛을 바라보면서 제법 인생 이야기를 나누었던 추억이 새롭습니다. 원석친구는 초등학교 졸업 후에 이곳을 떠나 중고등학교를 마친 후에는 대구에서 서점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종희친구는 형은 상주시에 있는 중학교를 갔지만 본인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시골에서 부모님을 도와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습니다. 종종 농사를 짓다가 오일장에 가는 친구의 모습을 멀찌감치 보곤 했습니다. 후에 울산에 현대조선에 노동자를 취업을 했고 후에 현대자동차 공장이 세워질 때 현대자동차로 옮겨서 60세에 정년퇴직할 때까지 안정되게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돌아보면 초등학교친구들 중에서 가방끈이 제일 긴 나의 삶과 가장 끈이 비교적 짧은 종희 친구를 비교해보면 종희 친구는 나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성공한 친구입니다. 자기 일에 매우 충실했던 친구였습니다. 초등학교시절에 두뇌가 우수했고 가정형편도 낳은 편에 속했던 나는 부모님의 후원 덕분에 꾸준하게 공부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고대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간 후에 초등학교 친구들은 내가 세상적으로 성공할 줄 알았는데 목사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서 꽤나 서운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울산에 있는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어서 울산을 방문해서 종희 친구와 만나서 회집에서 식사대접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직장에 은퇴해서 안정된 노후를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입니다.
장자불에서 평온초등학교 까지는 거의 5킬로가 되는 먼 걸입니다. 이 먼 길을 이 동내 아이들은 고무신을 신고서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걸어 다녔습니다. 나는 1킬로 정도 떨어진 초등학교까지도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던 시절에는 멀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친구의 어머니는 이 동네에서 혼자서 노후를 보내고 있습니다. 두 집만 남았던 이곳에도 최근에는 귀촌한 여러 가정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산길로 3킬로 정도 가면 동가남이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이 동네는 장자불과 함께 행정구역으로는 동관2리에 속합니다. 한 때는 100호 가까이 많은 사람들이 살던 곳입니다. 그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호젓한 산길입니다. 멧돼지가 나올 것 같은 스산한 느낌도 듭니다. 중간에 듣는 스마트폰에 나오는 성경말씀이 나오지 않아서 스마트 폰이 고장이 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산속이라 가까이 기지국이 없어서 전파가 끊어진 것입니다. 옆에는 작은 시내가 있습니다. 이쪽 지역은 백두대간을 사이에 놓고 동쪽으로 흘러가면 낙동강으로 가고 서쪽으로 흘러가면 금강으로 갑니다. 이곳은 금강으로 가는 작은 냇가의 발원지라도 볼 수도 있습니다. 울창한 나무숲사이를 지나갑니다. 과거에는 오솔길이었지만 이제는 제법 시멘트포장도로가 되어서 웬만한 자동차도 지나갈 수 있는 길이 되었습니다.
계속 걸어서 고개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정상 정복의 작은 뿌듯함이 생겨났습니다. 이제는 내리막길을 내려갑니다. 조금 지나니까 사람들이 살던 집들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살던 집터에 잘 지어진 전원주택 형태의 집들이 여러 곳에 들어서 있었습니다. 개를 데리고 산보하는 젊은 부인의 모습에서 여유로움과 평화를 보았습니다,
금산교회 크리스마스 추리
제가 수요예배를 드리는 금산교회가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어머니도 이 교회권사님이십니다. 성탄절기에 큰 길에서 교회까지 이르는 시골 마을 담벼락에 설치된 성탄추리의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교회마당에도 교회종탑을 중심으로 예쁜 추리가 조용한 시골 동네 밤하늘에 펼쳐진 별들과 함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조용한 시골 교회의 성탄절을 준비하는 정성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이 있습니다. 제가 이런 시절에 다니던 평온교회에서 성탄절 행사를 마치고 이 금산교회 성탄절 행사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도 예배당은 지금과 똑 같은 작은 규모였는데 아이들과 어른들은 교회당을 꽉 채웠습니다. 그 당시는 동네마다 사람들이 많았기에 교회를 출석하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어느 해 성탄절 저녁에 이 교회에서 <열처녀 비유> 성극을 했습니다.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와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비유 성극을 너무나 실감나게 연기를 해서 천국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가 너무나 불쌍해 보였습니다. 어린 마음에 나는 기름을 잘 준비하는 다섯 처녀처럼 되겠다는 결심했습니다. 이 교회를 다녔던 교우들은 지금도 타지에 살면서 금산선교회를 조직해서 이 교회를 후원합니다. 아름다운 섬김을 감당하는 이 분들은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의 반열에 속합니다.
수요일 저녁에 예배에 참석하면서 밝게 빛나는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추리를 보면서 코로나19 역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이 땅의 모든 백성들에게 주님의 은총과 긍휼하심이 임하기를 기도했습니다.
크리스마스와 우리 집 - 김현승
동청가지에 까마귀 열매가 달리는
빈 초겨울 저녁이 오면 호롱불을 켜는 우리 집.
들에 계시던 거친 손의 아버지
그림자와 함께 돌아오는 마을 밖의 우리 집.
은접시와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없어도
웃는 우리집, 모여 웃는 우리 집.
소와 말과 그처럼 착하고 둔한 이웃들과 함께 사는 우리 집
우리 집과 같은 베들레헴 어느 곳에서,
우리 집과 같이 가난한 마음과 마음의 따스한 꼴 위에서,
예수님은 나셨다.
예수님은 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