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 구곡에 숨겨진 巖刻字(암각자:바위에 새겨진 글자) 이야기*(2/3부)
*華陽 九曲(화양 구곡)*(1)
화양 구곡은 우암 송시열 선생의 사후에, 그의 수제자인 "수암 권상하"가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아홉 골짜기의 기암괴석을 설정하고,
영조 때 노론의 영수로 당파 싸움에서 노론의 선봉장 역할을 했던 "단암 민진원"이
이 아홉 골짜기의 절경의 바위 하나 하나 巖刻字(각자:바위에 글자를 새김)를 하여, 화양 구곡을 완성 하였다
*華陽 九曲(화양 구곡)*(2)
주자의 성리학이 이 땅에 전해진 뒤, 성리학 공부를 하는 수 많은 조선의 선비들은 당연히 주자를 흠모하게 되었는데,
퇴계 이황도 주자를 자신의 생활의 모범으로 삼았을 정도였다
또한 주자가 머물렀던 무이 구곡은 조선의 儒林(유림)들에게는 "聖支(성지)"나 理想鄕(이상향)"과 다름이 없었고, 주자가 무이산에 세웠던 무이정사는 조선 書院(서원)의 모범으로 삼았다.
*華陽 九曲(화양 구곡)*(3)
화양 구곡에는 수암 민지원의 아홉 곳의 巖刻字(암각자)이외에도, 제 1곡인 경천벽에 송시열의 "華陽 洞門(화양 동문)", 제 4곡인 금사담에 송시열의 "蒼梧雲斷 武夷山空(창오운단 무이산공)"과 명나라 태조의 忠孝節義(충효절의),
제 5곡인 첨성대에 명나라 숭정 황제의 어필인 "非禮 不動(비례 부동)", 송시열의 "大明天地 崇禎日月(대명천지 숭정일월)", 선조의 글씨인 "萬折必東(만절필동)", 그리고 숙종의 글씨인 "華陽 書院 (화양서원)"등의 巖刻字(암각자)가 있다
*華陽 九曲(화양 구곡)*(4)
조선 선비들의 메카이자 순레지였던 화양 구곡은 이들이 남긴 문화 유산과 詩文(시문)으로, 인문학의 寶庫(보고)가 되었다.
대표적인 문화 유산으로는 아홉 곳의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화양 구곡"의 巖刻字(암각자)를 비롯하여
"화양 서원", "읍궁암비","만동묘","만동 묘정비"."암서재", "채운사"등이 있다,
*華陽書院 下馬所(화양서원 하마소)*
운영담을 지나 약 200 미터쯤 걸으면, 오른쪽 길옆으로 우암 송시열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화양 서원이 나온다
서원의 입구에는 길가 양옆으로 2기의 돌 기둥으로 되어 있는 하마소가 세워져 있는데,
이 곳에서는 누구든 말에서 내려 걸어 가야 한다
조선 시대의 "종묘"와 "왕궁",그리거 "문묘"등의 앞에는 누구든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해야 하는 "下馬碑(하마비)"를 세웠는데, 이 곳은 하마비 대신에 하마소가 세워져 있다.
하마소도 하마비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구 한말 흥성 대원군이 집권하기 전, 이 곳에 왔다가 말에서 내리지 않아, 말단 문지기 한테 봉변을 당했을 정도로 당시 화양 서원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華陽書院(화양서원:사적 417호)*(1)
화양 서원은 조선 시대 때, "살아 움직이는 서슬이 퍼런 권력 기관"이자,
전국의 유생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든 장소였다.
특히 기라성 같은 많은 노론 선비들의 모임 장소였으며, 노론의 정신적 고향이었다
즉,송시열 선생의 애국 사상과 민족 자존의 정신이 깃든 곳이 화양 서원이라고 할 수 있다
화양 서원에는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존사청"과 제례 때 제관들의 공간인 "風泉齋(풍천재)"등의 건물이 있다
*華陽 書院(화양 서원:사적 417호)*(2)
화양 구곡에서 은거하던 송시열은 결국 당파 싸움의 회오리 속에서 제주도로 귀양을 갔다가,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에 정읍에서 賜死(사사)되어 죽었다.
그가 죽은지 6년 후, 송시열의 수제자이자,계승자인 "수암 권상하"가 송시열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제사의 높인 말)하기 위하여
숙종의 賜額(사액:임금님이 직접 서원의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받아, "華陽 書院(화양 서원)"을 건립 하였던 것이다
"華陽(화양)" 이라 함은 "중국 문화가 헷빛 처럼 빛난다"라는 의미인데,
과연 親明(친명)주의자였던 송시열의 제자다운 발상이었다
그리고 화양 서원은 萬東廟(만동묘)와 함께 유독 북향으로 지었는데, 이는 명나라를 향한 "사대주의 발상"이라 볼 수 있다.
*華陽 書院(화양서원:사적 417호)*(3)
노론의 중심지였던 화양 서원은 전국의 사액 서원중에서도 가장 명성이 있었고, 위세가 당당하여 나라에서도 어찌 할 수 없을 정도로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
화양 서원은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를 지원 받았는데,
서원의 토지가 강원도뿐만 아니라 삼남에 걸쳐 있었다고 하니...... 그 위세를 어느 정도인지 감히 짐작이 된다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화양 서원의 그릇된 세금 징수로 민페가 심각하고,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자, 결국에는 대원군의 사원 철페령으로 헐리게 되는 비운을 맞았다.
헐렸던 화양 서원은 폐허기 되어 버려, 어랫동안 방치된 채 적막감만 감돌면서, 그 동안 빈터만 남아 있었던 것을 2003년에 복원을 하였다.
Tip: 대원군의 사원 철폐령으로 전국의 650개의 서원중 겨우 41개의 사액 서원만 살아 남았다
*華陽 書院(화양서원:사적 417호)*(4)
화양 서원은 祭需錢(제수전: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수용품 구입비)의 명목으로 奉納(봉납)을 강요하는 악명 높은 "華陽 墨牌(화양 묵패)"라는 것 때문에 백성들의 폐해가 커서, 원성이 하늘을 찌렀다
"華陽 墨牌(화양 묵패)"란 서원에 제수전이 필요하니, 아무 날, 아무 시까지 얼마를 봉납하라는 일종의 고지서로, 墨印(묵인)을 찍어 각 郡(군), 縣(현)에 발송을 하였는데,
만일 이에 응하지 않으면 서원에 끌려가 온갖 공갈과 협박을 당하기 때문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다
*華陽 書院(화양서원:사적 417호)의 石物(석물)들*
이 석물들은 서원 철폐 전에 사용되었던 석물들이다
*萬東廟(만동묘)*(1)
화양 서원의 뒷쪽으로 가파른 언덕을 올라 가면, 서원의 제일 윗쪽에 萬東廟(만동묘)가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송시열이 사약을 받고 죽어 가면서도, 제자들에게 임진 왜란 때 구원병을 보내준 명 나라와의 의리를 위해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의 神位(신위)"를 모시는 사당을 지으라는 유언에 따라, 그의 제자인 권성하가 지은
사당이다
*萬東廟(만동묘)*(2)
"萬東(만동)"은 "萬折 必東(만절 필동)"의 준말로, 춘추 전국 시대의 제자 백가의 한 사람인 "筍子(순자)"의 책에서 인용된 말이다
즉,"萬折 必東(만절 필동)"이란
黃河(황하)는 중국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약 4000키로가 넘는 긴 강인데, 흐르는 동안 많은 굴절이 있어, 남쪽으로 향하기도 하고,북쪽으로 향하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흐름으로 보아서는 반드시 북쪽으로 흘러 간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황하강이 유유히 흐르는 도중에 "만 번을 꺽여 흐른다 해도, 결국에는 동쪽으로 흐른다"는 의미로,
"중국 황제를 위한 변함 없는 충절"을 뜻하기도 하고, "곡절은 있으나 마침내 본 뜻대로 간다"는 의미도 있다
*萬東廟(만동묘)*(3)
원래 "萬折 必東(만절 필동)"이란 글은
순조가 임진 왜란 때, 풍전 등화의 위기에서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 도움을 준 명나라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또한 "중국 명 나라에 대한 변함 없는 충절"의 표시로, 가평에 있는 조종암의 암벽에 새겨 놓았던 것을
송시열이 베껴서 "후술하는 화양 구곡의 첨성대 암벽"에 새겨 놓았고, 만동묘의 이름으로 차용을 하게 되었다.
*萬東 廟庭碑(만동 묘정비)*(1)
만동묘 앞에는 네모 반듯한 받침돌 위에 碑身(비신)을 세운 뒤, 지붕을 올린 "萬東 廟庭碑(만동 묘정비)"가 있다.
*萬東 廟庭碑(만동 묘정비)*(2)
이 碑(비)는 만동묘를 세우게 된 취지와 제사를 모시고 있는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을 추모하는 뜻을 기록한 碑(비)이다
당시 문필가였던 "尹鳳九(윤봉구)"가 碑文(비문)을 짓고, "安眞卿(안진경)"의 글씨를 集字(집자)하여 세웠다 한다.
일제에 의해 비문을 알아 보기 힘들 정도로 쪼아 땅에 묻어 버렸으나, 다시 찾아 세웠다
*만동묘에서 바라 본 능선*
저 멀리 보이는 마루금의 모습이 마치 아기를 밴 여인이 평화스럽게 누워 있는 듯 보여,
한참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멍히 쳐다 보았다
*제 3곡:泣弓巖(읍궁암)*(1)
화양 서원 앞 물가에는 거북이 모양의 넓은 반석있는데, 이 곳이 제 3곡인 泣弓巖(읍궁암)이다
泣弓巖(읍궁암)은 효종이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깝게 41세의 나이에 승하하자.
우암 송시열이 매일 새벽과 제삿날에 서울을 향하여, 이 바위 위에서 활처럼 엎드려 울며 통곡을 하였다 하여, 활처럼 업드린 바위란 뜻의 "泣弓巖(읍궁암)"이라 이름이 붙여졌다
*제 3곡:泣弓巖(읍궁암)*(2)
읍궁암의 희고 둥글한 넙적한 암반 위에는 흐르는 계곡물이 만들어낸 돌개 구멍(포트홀)이 곳곳에 나 있는데,
이는 부드럽고, 때론 거친 화양천의 물살이 만들어 낸 결괴이다.
그리고 돌개 구멍 사이로 인위적인 石工(석공)의 손길 이 닿았던 흔적이 있는 네모나게 잘 다듬어진 4개의 구멍이 바로 읍긍암비가 세워져 있었던 자리이다.
*泣弓巖 碑(읍궁암 비)*(1)
화양 서원 입구의 맞은편, 즉,읍궁암 안내판이 세워진 바로 옆에는 네 개의 "泣弓巖 碑(읍궁암 비)"가 세워져 있다
원래 시냇가 읍긍암의 네모진 구멍에 세워져 있었는데, 홍수와 빗물에 유실되어, 매몰되어 있었던 것을
찾아내, 이 곳에 세워 놓았다.
읍궁암비가 4개인 이유는 유실될때 마다 다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중 가장 왼쪽의 비석은 2010년 화양 계곡 모래 속에서 발견된 비석으로, 유난히 희고, 제작 시기가 가장 빠르며,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하다고 평가되고 있다.
비문은 수암 권상하가 썼고, 당시 충청도 관찰사였던 윤헌주가 세웠다
*泣弓巖 碑(읍궁암 비)*(2)
이 "읍궁암 碑文(비문)"의 맨 끝에는 우암 송시열의 아름다운 오언 절구가 쓰여져 있다.
이 날이 무슨 날인지 아는가?
외로운 충정만 하늘에 닿았도다!
새벽이 되도록 통곡을 한 연후에
또 다시 엎드려 무릅을 꿇고 탄식 하노라!
*제 4곡 :金沙潭(금사담)*(1)
泣弓巖(읍궁암)에서 또 다시 화양 계곡을 따라 약 200미터 쯤 오르면, 화양 계곡중에서 가장 손 꼽히는 경승지인 제 4곡인 금사담이 나온다.
화양 구곡에서 금사담은 가장 아름답고, 중심이 되는 곳으로 "맑은 물속에 보이는 모래가 마치 금싸라기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오랜 세월이 흘러서 곱고 깨끗한 모래를 찾을 수가 없다
*제 4곡 :金沙潭(금사담)*(2)
금사담에는 잘생긴 바위들이 계곡을 가득 메우고 있다
화양천의 계류가 이 곳에 이르러 沼(소)를 만들어, 시퍼런 물빛을 드러 내다가, 또 다시 바위에 부딪히며 하얀 물방울을 튕기는가 싶더니, 곧 바로 계곡을 흘러 가는 모습이 가히 절경이다
이 곳에는 전체의 "화양 구곡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제 4곡 :金沙潭(금사담)*(3)
*제 4곡 :金沙潭(금사담)*(4)
고풍스러운 자태로 자리 잡고 있는 "巖棲齋(암서재:송시열 선생의 서재와 정자)"를 받치고 있는 암벽의 가운데 쯤에는(사진 1), 세로로 민지원의 전서체의 "금사담"이란 글자가 刻字(각자)되어 있고,
조금 떨어진 암서재 정면쪽 직립 바위에는 세로로 "忠孝 節義(충효 절의)"이란 글자가 암각되어 있는데, 이 글씨는 명나라 태조의 글씨이며,(사진 2), 그 옆으로 희미하게 세로로 두 줄로 새겨진 "蒼梧雲斷 武夷山空(창오운단 무이산공)"이란 각자는 송시열이 쓴 글씨이다(사진 3)
"蒼梧雲斷 武夷山空(창오운단 무이산공)"의 뜻은 "창오산"은 예로부터 임금님을 상징하는 산이며, "무이산"은 주자가 살던 산으로, 도통이 끊어졌음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제 4곡 :金沙潭(금사담)*(5)
*巖棲齋(암서재)*(1)
화양 구곡의 제 4곡인 금사당 위에는 우암 송시열이 말 년에 벼슬을 그만 두고, 이 곳 화양동에 은거하면서 후학들을 가르쳤던 서실인 암서재가 세워져 있는데
충북 유형 문화재 제 17호로 지정 관리 되고 있다
"화양 구곡"이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뜬 것처럼, "암서재"는 주자의 "雲谷亭子(운곡정자)"를 본뜬 것이라 한다
*巖棲齋(암서재)*(2)
암서재 주위에 있는 울창한 노송들은 송시열이 심었다 한다. 아래로는 맑고 깨끗한 금사당의 溪流(계류)가 감돌며 흘러 가고 있고, 주위에는 깍아 지르는 층암 절벽이 즐비하여, 더 할 수 없는 절경을 이루고 있다
암서재를 가기 위해서는 계곡을 어렵사리 건너거나, 제 6곡인 능운대 뒤로 나 있는 산길을 가야 닿을 수 있다(예전에는 계곡에 철제 다리기 있었다 한다)
*巖棲齋(암서재)*(3)
초기에는 "巖齋(암재)"라 불렀던 암서재의 정문은 일각문이며, 암서재 현판은 송시열의 수제자이자, 계승자인 권상하의 글씨이다
송시열은 암서재를 다 짓고 나서, 시 한 수를 지었는데,
시냇가에 바위 벽이 열리어
그 사이 집 한 칸을 지었네
고요히 앉아 성인의 가르침을 받들어, 한 치라도 더위 잡고 올라 보려네
*橋心 詩碑(교심 시비)*
도명산을 이어 주는 구름 다리(화양대교) 난간 옆에는 "橋心(교심)"이란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태고의 신비를 안고
게절 따라 몸 단장 하며
님 기다리는 도명산
나는 그 녀가 뿜어 주는 산 향기 개울 바람 마시며
수정알 같은 냇물에 발 담고 서서
그의 님 기다린다
아! 그러나 내 마음 두렵구나
누가 이 길을 건너 갈까?
저 청순한 여인의 품같은 계곡 속으로
행인아!
고이 다녀 오소!
흰 구름 산 허리 스쳐 가듯
봄 향기 여인의 옷자락 스쳐 가듯
*제 5곡 :瞻星臺(첨성대)*(1)
금사담을 지나, 화양 3교에 서서 "도명산" 쪽을 바라다 보면, 기슭에 첩첩히 쌓아 올린 거대한 바위돌 위에 누군가가 지붕 처마를 올려 놓은 것만 같은 제 5곡인 첨성대가 보인다.
자그만치 그 높이가 약 100 미터에 이르러.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이 거대한 바위 위에서 천체 관측을 하였다 하여 "첨성대"라 이름을 지어졌는데.......설마?
첨성대는 화양 3교를 막 건너는 지점에서 가장 제대로 볼 수 있다
*제 5곡 :瞻星臺(첨성대)*(2)
제 6곡인 능운대의 계곡 건너 편에 위치해 있는 첨성대는 큰 바위가 겹겹히 쌓여 있어, 마치 어린 아이가 불록을 쌓은 놓은 듯, 누군가가 일부러 공을 들여 바위를 쌓아 놓은 형상을 하고 있다.
*제 5곡 :瞻星臺(첨성대)*(3)
첨성대의 현대적 의미는 별을 관측하는 것을 말하지만, 여기에서는 "별을 우러러 본다"는 뜻으로, 별은 "나랏님","황제"를 뜻한다고 한다
*제 5곡 :瞻星臺(첨성대)*(4)
첨성대 바위 근처에는 조선 왕과 중국 황제가 쓴 많은 글자들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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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부,끝*
첫댓글 네 잘읽고 감니다
감사함니다